두 마리의 놀이 롱 보우를 들고 폐허를 달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재빠르게 움직이며 인간의 냄새를 맡았다. 두 놀은 검은 털의 놀과 동행하고 있었다.
  검은 털의 놀은 폐허가 만들어 내는 그림자 속에서 소리 없이 걷고 있었다.
  폐허 쪽에 있어서 가장 뛰어난 기동력과 민첩함으로 정찰에 있어서는 정평이 나 있는 이 검은 털의 놀은 폐허에 혹시나 있을지 모르는 인간을 찾아 두 명의 놀을 데리고 왔다.
  폐허를 정찰하던 도중 검은 털의 놀은 인간의 냄새를 맡았다. 아니, 그것은 인간의 냄새라고 치부하기에는 어폐가 있었다. 그것은…… 검은 털의 놀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두 번째로 맡아보는 ‘향기’였다. 그의 후각은 같은 놀 종족과 비교해도 상당히 뛰어난 편이었고 가깝게 지내는 인간들의 냄새를 놓칠 리가 없었다. 그가 맡은 건 향기였고 그렇기 때문에 그는 무녀가 이 폐허에는 무슨 일로 왔는지 궁금해졌다. 
  ‘또 그 커스티란 여자와 함께 온 건가. 평소라면 필두(筆頭)께서도 환영하셨겠지만 지금은 상황이 좋지 않으니…….’
  인간들을 적으로 생각하고 있지는 않으나 지금 준비 중인 계획에 차질이 생기면 안 된다. 검은 털의 놀은 그녀들을 찾아 쫓아내거나 기절시켜 폐허 밖으로 데려다 놓아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들의 계획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차질이 생겨서는 안 된다. 오랜 고심 끝에 내놓은 결정을 허무하게 말아먹을 수는 없다.
  “브로큰, 애시드. 너희 둘은 폐허 위로 올라가라. 인간들을 찾으면 바로 쫓아내도록 해라. 길을 잘못 든다면 본대의 집결지에 도달할 가능성이 있다. ‘향기’를 따라가라. 그리고 가급적 폭력은 사용하지 마라.”
  브로큰과 애시드라 불린 두 놀은 고개를 작게 끄덕인 뒤 폐허 속으로 사라졌다. 검은 털의 놀은 그들이 사라지는 모습을 향해 한 번 눈길을 준 뒤 등을 돌렸다. 그리곤 그늘이 진 장소를 찾아 걸어갔다. 
  검은 털의 놀이 그늘과 맞닿자 그의 몸은 설탕이 물에 녹듯 스르르 사라졌다.
  연갈색 털의 놀이 향기를 맡았다. 향기는 진했다. 
  ‘평소에 맡던 것과 다른데…….’
  그의 시선은 옆에 서 있던 은빛 털의 놀을 향했고, 은빛 털의 놀 또한 그를 바라보기위해 눈동자를 굴렸다. 눈길이 서로 교차한 순간 그들은 서로가 무슨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깨달았다. 섬뜩한 느낌에 등골이 서늘하게 변했을 즈음 코를 통해 들어오는 향기가 더욱 짙어졌다. 연갈색 털의 놀이 낮게 으르렁거리며 말했다.
  “크르르…… 보고해라. 내가 추적하지.”
  은빛 털의 놀은 고개를 끄덕인 뒤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연갈색 털의 놀은 후각에 신경을 모았다. 향기의 방향이 변했다.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 코를 벌름거렸다. 
  “응?”
  향기는 5분 전에 지나왔던 길을 다시 거닐고 있었다. 향기가 다시금 지나왔던 길을 거닐었을 때 연갈색 털의 놀은 확신했다. 그는 납득했다는 얼굴과 함께 손뼉을 부딪치곤 발걸음을 옮겼다. 향기가 맡아지는 곳으로부터 약 2분 정도 발걸음을 옮겼을 때 연갈색 털을 가진 놀의 눈동자에 한 여자의 모습이 비춰졌다. 그리고 그는 다시 고개를 의아하다는 듯이 살짝 틀었다. 무녀가 아니었다. 향기가 평소보다 짙다고 느꼈을 때 짐작은 했었지만 설마 정말로 다른 이일 줄은 몰랐다. 한 가지 의문이 납득이 가자 이번엔 두 번째 의문이 생겨났다. 두 번째가 생기면 자연스럽게 세 번째도 생기는 법. 연갈색 털의 놀은 후두부의 털을 만지작거리며 비무장인 채 추위를 막을 수 있는 간단한 옷차림의 여자를 주시했다. 그녀가 갑자기 발을 동동 구르기 시작했다. 입술이 달싹거리는 것을 확인한 연갈색 털의 놀은 청각에 집중했다. 멀리 떨어져있는 거리였지만 연갈색 털의 놀은 그녀가 무엇을 말하는지 알아듣는 게 가능했다.
  “여기가 어디지?”
  아까의 이상한 행보도 그렇고 방금 전의 말도 그렇고, 그녀는 길을 잃은 것이 확실했다. 연갈색 털의 놀은 저 여자에게 조용히 폐허에서 나가는 길을 알려준다면 인간과의 갈등 없이 넘어갈 수 있을 것 같다고 판단했다. 그는 활을 조용히 폐허 바닥에 내려놓은 다음 발소리를 내지 않고 그녀에게 다가갔다.
  연갈색 털의 놀은 그녀의 뒤에서 20미터 정도 떨어진 위치에서 멈춰 섰다. 그는 그녀의 시선이 자신을 향하길 기대하며 팔짱을 꼈다. 잠시 후 그녀의 시선이 그의 눈과 마주쳤다. 그는 가볍게 목례를 했다. 그녀는 그의 모습에 살짝 놀란 듯했지만 이내 밝게 미소 지었다. 연갈색 털의 놀은 그녀의 미소가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녀의 얼굴을 마주본 순간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태어나서 두 번째로 느끼는 해괴한 감각에 그는 보일 듯 말듯 미간을 찌푸렸다. 
  피오나는 소리 없이 나타난 신장 2미터에 달하는 연갈색 털의 놀을 미소 지으며 바라보았다. 그 놀에겐 적의가 없었다. 종탑에서 만났던 회색 털의 놀과 검은 털의 놀과 생김새는 확실히 비슷했다. 솔직한 감상을 말하자면 그 놀들과 현재 눈앞에 서 있는 연갈색 털의 놀은 털색을 제외하면 완전히 똑같이 생겼다. 피오나는 그렇게 느꼈다. 
  “길을 잃으셨습니까?” 
  연갈색 털의 놀은 정중하게 물었다. 그러나 그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은 놀어였고, 놀어를 알지 못하는 피오나는 여전히 미소를 띤 채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연갈색 털의 놀은 그녀가 놀어를 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자신도 인간어를 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이런, 잘 좀 배워둘 걸 그랬나.’
  이럴 때 브로큰이 있었다면……. 
  연갈색 털의 놀은 후두부의 털을 만지작거리다가 피오나의 앞으로 걸어 나가며 손짓했다. 
  “이쪽으로.”
  그녀는 그의 손짓이 의미하는 바를 정확하게 알아챘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지금 저 놀은 그녀에게 나가는 길을 알려줄 테니 빨리 이 폐허에서 나가라고 말하고 있었다. 적의를 보이지 않는 자에게, 처음 만난 자가 폐허를 벗어나는 길을 알려준 다는 것에 그녀는 의심을 품지 않았다. 그러기에는 그녀의 눈이 보는 연갈색 털을 가진 놀의 모습이 너무나 다급해보였다. 
  피오나는 연갈색 털의 놀을 따라 걸었다. 채 20분도 지나지 않아 저 멀리 출구가 보였다. 그녀는 자신을 바래다 준 놀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하려고 몸을 돌렸다. 그러나 연갈색 털의 놀은 이미 저만치 멀리서 그녀에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피오나는 싱긋 웃었다. 멀리서 그 웃음을 본 놀은 헛기침을 한 뒤 사라졌다. 
  “후…….” 
  한시름 놓았다고 생각되자 연갈색 털의 놀, 애시드스노우는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이제 조용히 계획을 진행시킬 수 있게 되었다. 돌아가면 쉐도우팽 정찰대장에게 일 깨끗하게 처리했으니 늘 숨겨놓고 혼자만 홀짝이던 에플 브랜디를 할당량으로 내 놓으라고 윽박지를 생각에 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그러했기 때문일까 눈앞에 거대한 그림자가 생겨날 때 까지 그는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좋은 향기가 나는군.”
  애시드는 무슨 소린가 생각하며 뒤로 시선을 옮겼다. 그리곤 자신의 부주의함에 욕지거리를 퍼부었다. 그들이 계획에 대해 알지 못했다고 추정한 것이 잘못이었다. 그들의 필두는, 성역의 필두는 폐허의 필두와 오랜 지기(知己)였다.
  최소 4미터가 넘는 신장. 관리관이다. 그리고 그 거대한 신장에 버금가는 망치 자루와 폭 2미터의 거대한 얼음 망치, 거기다 머리 위의 털들이 뿔처럼 솟아있는 놀 관리관은 폐허엔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성역에는 존재한다. 애시드는 혀를 찼다. 징그러운 놈과 또 만났군. 
  4미터의 거대한 놀이 망치를 들어 올리며 기괴하게 입을 틀었다. 
  “그 징그러운 놈과 또 만났군, 같은 얼굴 하지 마. 어차피 이게 네 마지막일 테니 잘 봐두라고. 세균 덩어리.”
  온 몸의 털이 곤두섰다. 그리고 한 명의 놀 지휘관과 놀 관리관이 포효를 내질렀다. 
  거대한 얼음 망치가 무자비하게 내려쳐졌고 그와 동시에 애시드의 온 몸에서 녹색 빛이 뿜어져 나와 폐허를 덮었다. 
  얼음과 녹색 빛이 교차했다. 다음 순간, 신장 4미터의 관리관, 아이스혼과 신장2미터의 지휘관 애시드스노우는 서로의 얼굴을 노려보며 포효를 내질렀다. 










  *










  거대한 폭발음과 포효 소리에 피오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피어오르는 녹색 먼지 구름과 새하얀 얼음 기둥을 제외하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기에 커다란 바위라도 떨어진 것인가 하고 가볍게 여기려던 찰나 그녀의 눈앞으로 열두 개의 화살이 날아들었다. 그녀는 날아오는 화살을 눈으로 확인함과 동시에 말했다.
  “아르겐.”
  ─귀찮네. 
  수십 발의 화살이 그녀와 충돌했다. 화살들은 어째서인지 그녀와 부딪치는 순간 강력한 폭발을 일으켰다. 모든 화살이 폭발을 일으켰을 때 그 소음은 뒤에서 들린 거대한 폭발음에 버금갔다. 
  그렇지 않아도 정신이 사나운 폐허였건만 폭발로 인해 폐허를 이루고 있던 돌과 바위들이 부서지고 깨져 사방에 비산하자 이젠 더 이상 눈뜨고는 봐주기 어려울 정도가 되어있었다.
  화살을 쏘아 보냈던 열두 마리의 놀들은 낮게 으르렁거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들의 눈은 하나같이 두려움과 존경심을 담고 있었다. 그들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화려한 깃털로 장식된 활을 손질하고 있는 놀 한 마리가 나뭇등걸 위에 앉아있었다. 그 놀의 신장은 2미터를 간신히 넘는 크기였다. 열두 마리의 놀들과 별로 다를 바가 없는 모습임에도 열두 마리의 놀은 나뭇등걸에 앉아있는 놀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앉아있던 놀은 시선이 자신을 향하자 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적당히 날리지들 그랬나. 이놈들을 인간과 이간질시키기 위해서는 놀의 공격을 받았다는 메시지를 전달할 자가 필요하다고 했을 텐데.”
  그의 눈동자는 섬뜩한 녹색 안광을 뿜어내고 있었고 그 녹색 안광은 그의 얼굴을 보는 열두 마리의 놀로 하여금 오금이 지리도록 만들었다. 녹색 안광을 뿜어내고 있는 놀이 말을 이었다.
  “생물은 나약한 존재다. 세 발만 쐈어도 되었을 것을……. 할 수 없지. 복장을 보아하니 무녀가 있는 마을에 주둔하는 용병이다. 병사가 돌아오지 않는 다는 것을 알게 되면 곧바로 정찰병을 파견하겠지. 인간 최고의 명사수인 실드하이건을 포함해 수많은 강자들이 현재 자리를 비우고 있다. 인간들이 얼마나 폐허를 들쑤셔 놓을 지 알 수는 없다. 도살자와 섬광참이 때마침 자리를 떴기 때문에 이들이 입을 피해는 좀 더 적겠지. 하지만 진군 시기를 늦추는 것만으로도 이 특공은 의미가 있다. 보고에 의하면 현재 가장 가까운 자는 섬광참과 도살자, 허나 이들은 현재 마차를 타고 이동 중. 배제해도 상관은 없다. 7중대의 정보력이 여간 귀찮은 것이 아닐 수 없지만 현재 그들의 대장은 마을엔 없는 상태. 폐허에 일침을 가할 수 있는 자는 기껏해야 전차(戰車)와 인형사(刃形絲), 석피(石皮), 진운(塵雲)과 사신(紗神) 그리고 신검(迅劍) 뿐이다. 여섯 개 중대니 총 인원 1800명. 전혀 적지 않은 인원이다. 하지만 지금 폐허에 집결된 병력은 그 다섯 배에 달한다. 아직까진 주어진 시간의 여유가 있으니 지금은 실수를 용납하겠다.”
  ‘지금은 실수를 용납하겠다.’ 곧 다음은 없다는 뜻에 열두 마리의 놀은 침을 삼켰다. 그의 말에는 열두 마리의 놀을 꼼짝 못하게 억누르는 강렬한 압박감이 있었다. 녹색 안광의 놀이 그들에게 쉬라는 듯이 손짓한 뒤에야 열두 놀은 식은땀을 흘리며 바닥에 주저앉을 수 있었다. 녹색 안광의 놀이 철수하자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들은 모두 자신의 장비를 챙겨들고 후들거리는 다리를 붙잡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때 먼지 구름을 보고 있던 놀 한 마리가 말했다.
  “먼지가 움직입니다. ……향기?”
  녹색 안광이 작게 흔들렸다.
  ‘향기?’
  그 놀이 다급하게 외쳤다.
  “아직 살아 있습……”
  놀은 말을 있지 못했다. 투명한 얼음 화살이 그의 머리와 목, 심장을 동시에 꿰뚫었기 때문이다. 녹색 안광의 놀은 눈을 가늘게 좁히고 차분히 말했다.
  “응사해라. 저 인간은 거미를 죽였다던 종탑의 인간인 듯하구나. 보고로는 필과 벨이 단칼에 베였다고 되어 있던데, 시체를 찾을 수 없었던 것과 별다른 강함이 느껴지지 않는 걸 보아하니 놈들이 장난친 게 분명하겠지. 약하지만, 그 거미를 쓰러뜨린 건 확실하다고 봐도 된다. 거미가 강한 것도 아니었지만, 방심은 하지 마라.”
  열한 마리의 놀들이 빠르게 화살을 장전했다. 그러나 그들이 시위를 당기려 했을 때 갑자기 그들 앞에 나타난, 순백에 가까운 은발을 가진 붉은 눈의 여자가 날 폭 10센티에 달하고 길이가 2미터가 족히 넘는 투명한 대검을 휘둘렀다. 열한 마리의 놀들은 순식간에 몸이 두 동강이 되는 세상에서 단 한 번뿐이 없을 진귀한 경험을 맛보았다. 
  대검은 처음에 휘둘러진 기세를 열한 마리의 놀을 베어 넘겼음에도 간직하고 있었고 그 간직하고 있던 기세로 녹색 안광의 놀을 겨냥했다. 대검의 날이 녹색 안광의 놀의 목젖과 30센티미터 남짓한 거리를 남겨두었을 때 대검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역시 심장을 꿰뚫기 위한 일격을 준비하고 있는 모양이군. 하지만…… 이 힘은 의외인데. 몸에 흐르는 마나는 침체되어 있다. 인위의 1단계조차, 아니 마나가 뭔지도 모르고 있는 자가 아닌가? 그런데…… 무척이나 단단한 얼음이군.”
  그는 놀어로 말했다. 대검을 움켜쥔 그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대검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부서졌다. 녹색 안광의 놀이 손을 움직였다. 그는 주먹을 쥐고 눈앞의 인간 여자를 향해 휘둘렀다. 그리고 갑자기 나타난 투명한 얼음 방패에 낮게 으르렁거렸다. 그 얼음 방패 뒤에서 길이 120센티미터 길이의 칼이 튀어나왔을 때엔 신기하다고 느꼈지만, 대검을 부수었던 왼쪽 손과 다리가 얼어붙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는 녹색 안광을 뿜어내는 놀에게는 황당함으로 다가왔다. 
  ‘이건…… 평범한 얼음이 아니군.’ 
  칼날이 코앞까지 다가왔다. 칼날이 자신의 몸을 두 쪽으로 가르기 전에 녹색 안광을 뿜어대던 놀은 잇소리를 냈다.
  ‘주인을 정했나?’
  투명한 얼음의 칼은 녹색 안광의 놀을 갈랐다.










  *









 
  모래바람이 불었다.
  안파솔 평원의 높은 언덕 위에서 한 마리의 놀이 눈을 떴다. 그는 녹색 안광을 뿜어내고 있었고 그의 주위로는 방대한 양의 기류가 끌어 오르고 있었다. 열기를 수반한 채 부글부글 끓어오르던 기류는 그가 시선을 옮기자 삽시간에 사그라졌다. 그의 눈동자가 저 멀리, 아직은 너무나도 먼 곳에 존재하는 로체스트의 성벽을 향했다. 그의 눈은 로체스트 성벽 위에 걸터앉아 있는 붉은 머리의 사내를 바라보았다. 붉은 머리의 사내가 녹색 안광의 놀을 마주보며 씩 웃었다. 그는 붉은 머리의 사내와 마주칠 일이 없기 때문에 그의 미소를 침묵으로 받아주었다. 녹색 안광이 춤을 추었다.
  그의 시선은 안파솔 평원의 저 수평선 너머로 고정되었다. 그의 눈은 저 멀리 보이는 폐허를 향하고 있었다. 수평선 너머, 놀의 걸음으로도 아직 한 달은 더 걸어야 하는 거리임에도 그의 눈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폐허의 정황을 꿰뚫어 보았다. 
  “…….” 
  향기의 여인이 마음에 걸렸다. 하지만 이쪽도 계획에 차질을 빚을 수는 없는 법. 
  “벌써 주인을 정했나. 아르겐.”
  녹색 안광의 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다리는 평원의 흙을 짓밟으며 굳건하게 자리 잡았다. 화려한 깃털로 장식되어진 그의 황금색 활은 길이가 6미터를 넘었다. 녹색 안광의 놀의 활은 이미 ‘활’ 이라 부를 정도의 경지를 넘어섰다. 그가 쥐고 있는 거대한 것은 화살을 시위에 먹이고 단 한 발만 쏘아 보내도 생물의 기술로 쌓아올려진 성벽 따위는 우습게 가루로 만들어버릴 정도의 위력을 가지고 있는, 이 세상에 내려진 재앙 중 하나였다. 그가 낮게 으르렁 거렸다.
  그의 신장은 7미터가 넘었다. 너무나도 거대한 그 크기와 그가 내뿜는 강렬한 힘에 압도되어 안파솔 평원의 모든 것들은 두려움을 표시했다. 평원의 바닥에서 거대한 놀의 다리를 지탱하고 있는 모래와 흙들은 부르르 떨며 다가온 바람에 몸을 실었고, 그들을 실은 바람은 거센 기세로 그에게서 멀어졌다. 날아드는 먼지들도 그의 위압감에 자리를 비켜섰고 하늘에 장엄한 자세로 떠있던 태양도 움찔하며 뒤로 물러섰다. 놀의 안광이 다시 춤을 췄다. 그의 입이 열렸다.
  “딤의 병력은 이동 중인가?”
  그의 말에 곁에 서 있던 상대적으로 작은 체구의 놀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예. 성역에 도착하시려면 족히 두 달 이상은 걸릴 것으로 추정됩니다.”
  녹색 안광의 놀이 거대한 재앙을 생성하는 물건을 땅바닥에 꽂아 넣었다. 그는 팔짱을 끼고 잠시 동안 생각에 잠겼다. 그리곤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멍청이가 아직도 헉센 초원에서 노닥거리는 건가……. 여흥은 끝났다. 성역으로 집결한다. 정찰을 나간 병사들을 모두 불러 모아라. 스파이크”
  스파이크라 불린 신장 4미터의 검붉은 털의 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그을린 듯한 검은색 철판으로 몸을 두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등에는 자루가 3미터에 달하고 폭 60센티미터의 거대한 철퇴가 달려있었다. 철퇴는 길이가 족히 40센티미터는 될 듯한 우악스러운 철 가시를 달고 있었는데, 이 철퇴에 살짝이라도 스치면 그 순간 살갗이 찢어지고 근육이 발라지며, 뼈가 으스러지는 것은 일도 아닌 것처럼 보였다. 스파이크는 태양빛에 반사 되 검게 빛나는 검은색 철퇴의 자루를 만지작거린 뒤 등을 돌려 병사들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녹색 안광의 놀이 데리고 온 병력은 총 1만 6천 명. 그의 지역에서 극히 일부의 정예만을 데리고 왔다. 괜히 그가 맡은 부분 전체를 끌고 이 평원에 모습을 드러냈다면, 인간과 마족은 오금을 지렸을 것이다. 놀 수장이 직접 통솔하여 움직이는 10만에 달하는 호전적인 전투의 전문가들이 전장의 한복판에 나타나 적이라 인식한 모든 자들을 쓸어버린다면, 그것은 가히 공포가 아닐 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가장 호전적인 자들을 소집하고 데려왔다. 괜히 강한 녀석들을 데리고 왔다가 그들이 지닌 강력한 힘에 의해 어느 누구든지 알아챌 수 있는 일이 되게 만들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물론 지금 이 녹색 안광의 놀 자체만으로도 아주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힘은 너무나 강대해서 같은 경지에 올라 서 있는 자들이 아니라면, 일부러 그가 지니고 있는 힘의 강대함을 찌그러뜨려 그들과 힘을 맞춰주지 않는 이상은 알아챌 수 없을 정도의 강대함이었기 때문에 같은 자들의 시선만 넘어가면 되는 일이었다. 그가 새하얀 송곳니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무패(無敗)의 놀 딤그레이(DimGray)가 이끄는 2만 1천 명이 그의 진지에서 성역을 향하고 있었고 이질(異質)의 놀이 이끄는 병력이 1만 4천 6백 명, 충격(衝擊)의 놀이 이끄는 자들이 총 2만 6천 7백 명, 광란(狂亂)이 이끄는 3만 1천 2백 명과 녹색 안광의 놀 그 자신의 부대, 즉 과녁(貫革)의 놀이 이끄는 1만 6천 명. 이로써 총 10만에 달하는 대규모 부대가 다섯 수장과 함께 성역으로 집결하고 있었다. 중압(重壓)의 놀과 섬광(閃光)의 놀이 데리고 오기로 했었던 합 6만에 달하는 대규모 부대는 안타깝지만 무산되었다. 이 일은 이미 예상 범위 내였다. 그들은 이 전쟁을 원하지 않았다. 
  ‘세상을 향해 검을 치켜드는 꼴은, 규율자로 지정 된 우리에게 있어서는,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다! 지켜보는 것이 우리의 일이 아니었던가! 성역이여! 우리들은 폐허와 치고받는 것으로 모든 것을 소진해서는 안 된다! 평원이 왜 그리 허무하게 자멸했던가? 다음 세대를 기다리면서 평원이 어째서, 저리도 숨 막힐 정도로 자신들을 죽이고! 자신의 존재를 숨기고 있는 지 벌써 잊어버린 것이냐! 이 우매한 자들이여! 우리는! 적어도 나라는 존재만은! 절대 이 혼돈을 반대한다. 그렇지 않다면 나, 이 중압의 놀, 블랙벨(BlackBell)은! 성역의 한 축을 담당하는 놀의 수장으로서 너희 모두에게 칼을 들이대겠다. 나의 과오로 쌓은 모든 것이 무너진다 하면, 그 모든 죄는 내가 이고 떠나겠다. 잘 들어라 성역의 축들이여! 이 전쟁은 중압의 분노를 사는 것을 절대 피하지 못할 것이다!’
  녹색 안광이 거칠게 바람을 탔다. 
  “…….”
  가장 호전적이고 무패의 놀과 대등한 힘의 소유자인 그 중압의 놀이, 설마 이 전쟁을 반대할 지는 상상도 못한 일이었다. 그를 따라 섬광의 놀 또한 전쟁을 반대했다는 사실이 믿기지가 않았다. 아마도 종탑에서의 그 일은 성역의 심장을 꿰뚫어 활동을 정지시키기 위해 벌여 놓은 한 가지의 눈속임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성역의 필두의 목을 노릴 것이 자명하고 그의 곁을 지키는 자는 아무도 없으니, 잘못하다간 같은 성역의 한 축들에 의해서 그들 또한 자멸할 거란 사실이 확연했다. 녹색 안광이 꿈틀거렸다. 
  너무도 슬펐다.
  결국 이 전쟁은 아무것도 남기지 못할 것이다. 오히려 그나마 있던 모든 것을 앗아갈 터이다. 절로 눈물이 흘렀다. 안광이 가루처럼 흩뿌려졌고 그는 눈꺼풀을 닫았다.
  “수장. 폐허 쪽의 움직임이 포착되었습니다.”
  녹색 안광이 다시 굳건하게 자신의 자리를 잡았다.
  “말해라.”
  “크르르…….”
 그의 으르렁거림은 두려움을 내포하고 있었고, 그의 수장인 녹색 안광의 놀은 내포된 두려움을 놓치지 않았다.
  “왜 그러나. 말해라.”
  “크르……. 최장(最長)의 놀이 이끄는 1만 7천에 달하는 병력과 최경(最硬)의 놀이 이끄는 부대가 2만 4백 명, 빙결(氷結)의 놀이 지휘하는 3만 3천 명, 뇌전(雷電)의 놀 휘하의 2만 9천 4백 명의 움직임이 포착되었습니다. 그리고……”
  “또 있더냐? 불멸(不滅)인가 파멸(破滅)인가?”
  “그게…….”
  “어서 말해라. 어느 쪽에서 얼마만큼의 수를 데리고 오고 있나?”
  “…….”
  그는 말하기를 꺼려했다. 마치 인정하고 싶지 않은 사실을 마주한 자의 모습이었다. 녹색 안광의 놀은 그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굳이 캐묻지는 않았다. 
  말하기 싫으면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려던 찰나 그의 입이 부들부들 떨리며 그 속에서 간신히 억누른 비명과 함께 말소리가 튀어나왔다.
 “폭염(爆炎)께서 병력을 이끌고 나오셨습니다.”
  녹색 안광의 놀은 하마터면 쓰러질 뻔했다. 너무도 충격적인 말에 머리가 띵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정말 되는 일이 없군. 벨에 이어 이번엔 폭염께서 친히 납시신 건가.’
  머리가 띵한 상태에서도 ‘폭염’이라는 단어를 상기할 때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전 평원의 필두가 모습을 드러냈다. 최강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최강의 자리에 앉아 있던 세 명의 최강과 어깨를 나란히 했던 폭풍의 놀과 함께 유일무이한 이질적인 필두. 그 사내가 무슨 목적인지 병사를 일으켰다.
  하지만 아마도 그 작자의 목적은 간단할 것이다. 










  *










  “인간의 짓은 아니군. 성역 쪽의 별동대인가.”
  검은 털의 놀은 머리 없는 애시드의 몸을 바라보고 있었다. 주변에 비산해있는 얼음 조각과 산성 때문에 녹아내린 바위들을 보아하니 격렬하게 싸웠단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저 멀리 거대한 흰 털로 뒤덮여있는 팔이 떨어져있는 것으로 봐선 애시드를 습격했던 자도 몸 성히 돌아가진 못했을 것이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입이 말라 침으로 입을 적셨을 때 옆에 서 있던 은색 털의 놀이 말했다.
  “인간들이 오해할 지도 모르겠군요.”
  검은 털의 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인간이라면 현명한 판단을 내리겠지. 우리는 마족이 아니니 그 남자의 분노를 살 이유가 없다. 다만……”
  “다만?”
  “기사단이 변수다. 놈들이 무슨 말을 하던지 우리에게 이득이 되지 않을 것이란 것은 분명하다. 할 수 없지. 일단은 보고한다. 먼저 돌아가 스노우스킨과 윈터클로에게 준비를 해 두라고 일러 둬라. 아, 그리고 화이트팽에게 잠 그만 퍼 자고 폐허 전체를 순찰 돌라고 명령해라. 물론 나도 참가한다.”
  은색 털의 놀은 고개를 끄덕인 뒤 폐허 속을 바람 같은 속도로 달려갔다. 검은 털의 놀은 팔짱을 끼고 인간들의 마을이 있을 곳을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이번에는 좋지 않은 기분이 드는군.”
  그의 몸은 그림자가 되어 폐허와 하나가 되었다.

 








  *










  용병단의 문을 밀었다. 문을 밀고 들어간 내부는 의외로 조용했다. 주위를 둘러보자 마렉과 케아라가 눈에 들어왔다. 그들 이외의 대원들은 어딜 간 것인지 보이지 않았다. 
  피오나가 문을 열자 가장 먼저 마렉이 그녀를 알아보았다.
  “아, 오셨, 와, 왔구나. 폐허가 어땠는지 궁금하지만…… 보고는 잠깐 있다 듣도록 할게. 대장님이 깨어나셨다는 전갈을 받았거든. 금방 다녀올게. 둘이서 담소라도 나누고 있어.”
  마렉은 곧바로 용병단의 문을 재차 열며 밖으로 나섰다. 그의 모습을 보던 케아라는 뒤늦게 마렉을 향하여 외쳤다.
  “앗, 잘 다녀와!”
  케아라는 하하 웃으며 제자리로 돌아가 턱을 괴고 생각에 잠겼다. 그녀는 마렉과 두고 있던 체스 판을 흘끗 돌아보고선 흰색 체스 말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대장님이 깨어나셨다니, 정말 다행이야. 많이 걱정했거든 다들.”
  케아라는 흰색 체스 말을 손에 쥐고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녀가 쥐고 있는 말은 말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피오나는 그것이 ‘나이트’란 것을 알고 있었다. 흥미가 없어서 그리 많은 시간을 투자해 보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맞닥뜨린 모든 자들을 거꾸러뜨렸다. 그들에겐 공포가 되었을 한 마디였으나 그녀는 아무런 감흥도 없는 한 마디를, 정확하게 17명의 체스 고수들과의 승리 후에 내뱉었다.
  “쉽군요. 별로 재미도 없어요.”
  몇몇은 목을 매고 자살을 기도했다던 자들도 있다는 소문이 돌았으나, 어디까지나 그것은 소문일 뿐이다. 정확하게 알려진 바로는 그들 중 대부분이 우울증과 살아온 생에 동안 대체 무슨 짓을 하고 살아왔던 것인지에 대한 회의감이 들었다고 한다. 이것은 사실이다.
  피오나는 체스 말을 만지작거리는 케아라에게 다가갔다. 케아라의 말은 흰색. 당연하게도 그녀와 체스를 하고 있던 마렉의 말은 검정색이 된다. 그 누가 보아도 확연하게 알 수 있을 정도로 케아라는 지고 있었다. 마렉의 거의 일방적이고 압도적인 무력 앞에 케아라의 진영은 손을 쓰기 어려울 정도로 붕괴해 있었다. 애써 고민해 보았지만 어떻게 해쳐나가야 할 지 답이 나오질 않았기에 케아라는 쥐고 있던 백의 나이트를 내려놓았다. 
  “자, 이제 마렉만 기다리면 돼…….”
  갑작스레 찾아온 침묵에 케아라는 할 말을 잃고 멍하니 피오나를 바라보았다. 피오나의 붉은 눈동자는 체스 판을 쓱 훑어보고 있었다. 그녀의 눈꺼풀은 반쯤 감겨있었는데, 그 상태에서 눈동자를 좌우로 가볍게 움직이는 그녀의 얼굴은 같은 여자인 그녀가 보아도 아름답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 뿐, 아름답게 느껴지고, 보아지고 해도 그 이상의 감정은 느껴지지 않는다. 마치, 누군가가 일부러 그 이상을 느끼게 하는 것을 넓은 범위에 걸쳐 방해하고만 있는 듯한, 그러한 느낌이었다. 
  ‘무슨 소설도 아니고…….’
  케아라는 피식 웃었다. 
  “다녀왔…… 뭐해?”
  마렉은 피오나가 자신이 앉아 있어야 할 자리에 앉아 있다는 사실 보다도 그들이 무언가 심각한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다는 것을 먼저 깨달았다. 그녀들은 그가 들어온 뒤에도 한참을 체스 판 앞에 머리를 모은 채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사실 이야기를 주고받았다는 것 보다는 피오나의 일방적인 설명과 케아라는 그것에 그녀 자신도 모르게 납득하고 있었다와 같은 상황이었고 마렉은 그 상황을 한참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래서 그가 말을 꺼냈을 때는 들어온 지 시간이 꽤 지난 뒤였다.
  “앗, 마렉! 왜 이렇게 빨리 왔어? 대장님은 좀 어떠셔?”
  마렉은 왜 이렇게 빨리 왔냐는 케아라의 말에 어폐가 있는 것 같다고 느꼈지만, 깊게 고민하면 귀찮아지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으니까 깊게 고민하지 않는다는 13중대 중대장 아세일 첸트의 방식을 따르기로 했다. 그는 머릿속에서 쌓인 잡념을 모두 다 치워버리곤 케아라와 피오나를 향해 말했다. 피오나는 그 즈음이 돼서야 마렉에게 시선을 맞추고 있었다.
  “어. 내가 갔을 땐 주무시고 계셔서 그냥 왔어. 조금만 더 쉬시면 괜찮아지실 거라고 하더라고. 옷 몇 벌이랑 이것저것 좀 챙겨서 다시 갈 거야.”
  그의 말에 케아라는 짧게 숨을 내쉬었다.
  “다행이다.”
  “어, 정말 다행이야. 대장님이 돌아오시면 용병단도 다시 제대로 돌아가겠지. 어쨌거나 한숨 돌렸군. 피오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다. 이제 보고를 해줘. 북쪽 폐허는 어땠나?”










  *










  “……놀과 싸웠다고? ……염병. 가면 갈수록 산이군.”
  마렉은 레이먼트 헬멧을 손가락으로 툭툭 건들었다. 빈 깡통을 치는 소리가 용병단 내부에 울려 퍼졌다. 마렉이 말을 이었다.
  “우리 훈련장이 북쪽 폐허에 있는 걸 보면 알겠지만, 놀 종족과 우리의 사이는 나쁘지 않아.”
  그는 잠시 뜸을 들였다. 잠시 후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아니, 정확히는 서로 신경 쓰지 않는 다는 것이 맞지. 그런데 정찰을 나간 용병과 싸움을 벌였다. ……아, 난감하군. 아무리 용병단장 대리라곤 해도 이런 종류의 일은 내가 결정할 수 있는 게 아니야. 자칫 잘못하면 놀 종족과의 전면전으로 이어질 수도 있는 일이니……. 일단은 대장님이 깨어나실 때까지 잠시 기다려보도록 하자. 아무래도 내가 결정할 일은 아닌 것 같으니. 응? 아, 셀피드 형과 이딜 형은 갑자기 살 거 있으니까 돈 벌러 간다고 하더라고. 지금은 없어. 그건 그렇고, 자. 이건 선물. 첫 임무를 성공한 기념으로 주는 거야.”
  마렉의 손에는 작은 선물 상자가 들려있었다. 언제 꾸민 것인지 상자는 상당히 반듯하게 포장되어 있었다. 피오나는 상자를 향해 한 번 눈길을 준 후에 고개를 들어 마렉을 바라보았다. 마렉은 빨리 받으란 듯이 팔을 들썩였고, 그의 그런 모습에 피오나는 밝은 미소를 지어주었다. 그녀의 미소는 같은 여자라 한들 얼굴에 작은 홍조를 띄우지 않고서는 편히 넘어가긴 힘든 매력이 있었다. 마렉은 헛기침을 몇 번 한 뒤에야 케아라에게 일을 떠넘겼다. 나중에야 널리 알려질 이야기지만, 그녀가 미소 지을 때는 눈웃음이 아름답다고 주장하는 자들과 우윳빛 피부와 조화를 이루는 혈색이 옅은 입술과 함께하는 미소가 더 아름답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대립하게 된다. 그리고 그들은 50대 50으로 박빙의 승부를 하게 되는데, 마지막까지 그들에 끼지 않은 자는 단 한 명이었다. 그리고 끼지 않은 그 한 명은 이렇게 말하며 모든 상황을 종결지었다. 
  “……그냥 둘 다 아름답다고 하면 간단한 것 아니냐 바보들아. 입술과 미소가 아름답다는 거나 눈웃음이 아름답다는 거나 일단은 둘 다 부수적인 거잖나? 현실을 직시해라. 너희는 그녀의 ‘아름다운 환상과 현실’ 그 자체에 매료된 것이지 부수적인 것에 매료된 것이 아니잖나? 눈 좀 떠라. 늘 그렇게 감고 다니니 좁은 세상뿐이 바라보지 못하는 게다.”
  아마도 그때 그 날이 그의 역사상 가장 많은 말을 내뱉은 날일 것이다. 그는 10중대 중대장, 멜피스 아달함이었다.
  “자, 이제 뭘 시키지? 케아라, 좋은 생각 있어?”
  케아라는 멍하니 앉아 있다가 마렉의 말에 화들짝 놀란 모습을 취해주었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녀는 화들짝 놀랐다.
  ‘이 인간이 왜 나한테 떠넘겨?’  
  ‘좀 받아 줘 이것아!’
  “응? 에, 글쎄. 아, 맞다. 나 부탁할게 있었어. 이거, 커스티한테 좀 전해줄래?”
  케아라는 피오나에게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먼지 쌓인 오래된 옷본을 불쑥 내밀었다. 피오나는 약간 당황해 하다가 결국 그것을 받아들었다. 옷본은 아무리 봐도 10년은 족히 넘은 듯 보였다. 원래 색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퇴색되어 있는 그 옷본은, 먼지도 장난 아니게 쌓여있어서 그것을 피오나가 받아들었을 때 정말 폭풍 같은 기세로 먼지가 용병단 사무실 내부를 휩쓸었다. 그 덕에 두 여자와 한 남자는 기침의 하모니를 이루게 되었다. 마렉은 기침을 하며 케아라를 쏘아보았다.
  ‘이 멍청아! 사전에 좀 닦아 놓든가. 왜 먼지 덩어리를 꺼내서 난리야?’
  케아라는 마렉의 눈빛을 보더니 코웃음 쳤다.
  ‘뭐? 떠넘긴 게 누군데 이제 와서 누구한테 따져?’
  “콜록, 흠흠. 창고를 뒤지다가 나온 건데, 커스티가 오래된 옷본을 발견하면 좀 가져다 달라고 전부터 얘기 했었거든.”
  케아라는 하하 웃었고 마렉은 헬름에 묻은 먼지를 걷어내며 말했다.
  “……케아라. 네 심부름을 시키면 어떻게 하냐.”
  케아라는 씩 웃어 보이며 시선을 마렉에게 고정한 채 말했다.
  “아앗? 그러고 보니 그렇네? 하지만 커스티한테 인사도 해두고, 좋잖아. 응?”
  마렉은 사납게 노려보고 있는 케아라의 시선을 마주보며 뒷걸음질 쳐 뒤로 도망가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지만 그럴 수 없는 현실을 저주했다. 많이 기분이 좋지 않았다.
  “아, 알았다. 알았어. 그럼 다녀와, 피오나. 나, 난 한동안 자리를 비울지도 모르니 케아라랑 용병단 사무실을 잘 부탁해.”
  피오나가 무슨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마렉은 번개 같이 밖으로 뛰쳐나갔다. 케아라는 혈관이 불거진 얼굴로 마렉이 나가버린 문을 노려보았다. 그 기세가 너무 매서웠기에 피오나도 식은땀을 흘려야 했다. 그녀는 마렉이 처한 상황을 대강이나마 알 수 있었다. 그는 솔직한 남자였다. 그 자신은 모를지라도 그의 곁에 있는 자들은 그것을 쉽게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적어도 피오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녀의 주변에는 애초부터 그런 자들이 존재하지 않았다. 대표적인 예로 로페르담이 그러하다. 그는 솔직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실상은 전혀 그러하지 않았다. 그는 철저하게 공과 사를 구분했다. 그리고 그에 맞춰 자신의 인격을 둘로 나누었다. 평범한 사람이 가능한 일일까? 공에 맞춰 자신을 구축하고 사에 맞춰 자신을 창조한다는 것이 가능키나 한 이야기인 것인가? 하늘거리던 그의 은빛 머리칼이 눈가에 비춰진다. 
  ‘일어나셨습니까.’
  ‘안 일어났어요. 그리고 더 자고 싶어요. 로페르담.’
  ‘그러십니까? 그렇다면 더 주무시라고 말씀드리고 싶지만, 그렇겐 아니 되겠습니다. 당장 일어나시지 않으시면 소중하게 여기시는 곰돌이의 머리에 잉크로 낙서를 해버릴 테니 알아서 하십시오.’
  ‘우아악! 뭐예요 그게! 이 악마! 저질! 변태! 낙서광!’
  ‘빨간색으로 쓸 겁니다.’
  ‘와! 저질! 악마! 내 테디 괴롭히지 마 멍청아!’ 
  ‘그럼 일어나십시오.’










  *










  “……이러면 곤란하오, 커스티. 꽤 실력 있는 사냥꾼이라고 믿고 있었는데…… 웃돈까지 얹어서 믿고 계약을 했었는데 이제 와서 어렵다고 하면 내 입장은 뭐가 되오? ……”
  모험가 상점에 다다르자 웬 중년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소리가 낮은 것이 위엄 있어 보이려고 하는 나름의 방법인 듯했다. 피오나는 알기 쉬운 남자라고 생각하며 가게의 문고리를 쥐었다. 문고리는 가벼웠다. 철재가 아닌 잘 다듬어진 목재였기에 쇠 냄새가 나지도, 서늘한 느낌이 들지도 않았다. 날이 눈이 와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추운 계절이라는 것을 제외하면 그러했다는 뜻이다.
  감촉이 좋은 문고리를 뒤로 잡아당기려 했을 때, 그녀는 인기척에 뒤를 돌아보았다. 뒤에서 키가 190센티미터를 넘는 사내가 뒷집에서 어슬렁어슬렁 기어 나오고 있었다. 그는 기지개를 펴고 크게 심호흡했다. 간만에 마시는 바깥공기가 여간 반가웠던 모양인지 그는 기지개를 펴고 나서야 피오나와 눈이 마주쳤다. 그가 고개를 꾸벅였다. 피오나는 문고리에서 손을 떼고 그를 돌아보며 말했다. 
  “자택이신가요?”
  사내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아닙니다.”
  “흐응?”
  사내는 그녀의 따가운 시선에(왜 자신이 그런 시선을 받고 있는지는 도저히 이해하지 못했다) 부수적인 설명을 덧붙여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새겨졌다.
  “상당히 깐깐한 성격의 아는 친구의 집입니다. 괜히 들어갔다가 잔소리만 Adallantare 만큼 먹고 나왔군요.”
  “Adallantare?”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그는 다시금 따가운 시선이 다가올 것이란 느낌에 부수적인 설명을 덧붙이려 했다. 하지만 그는 그러지 못했다.
  “서부 대륙 출신이신 모양이네요, 리시타. 집 주인은 여자 분이신가요?”
  리시타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다 문득, 그녀가 남부 사람이란 것을 깨닫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녀의 물음에 답했다.
  “아뇨. 남자입니다.”
  그녀는 남자가 잔소리를 역사속에 나오는 서부 대륙의 영웅 아달란타레 만큼 할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그녀는 조용히 위험한 상상 속에 빠져보았는데 리시타가 말을 건넸기 때문에 상상은 곧 중단되었다.
  “안 들어가십니까?” 그녀는 차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리시타를 향해 고개를 꾸벅인 뒤 가게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문은 별다른 소음 없이 매끄럽게 열렸다. 그리고 그 뒤에 놀라는 피오나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 커스티가 너였어?” 
  커스티도 휘둥그레진 눈으로 피오나를 쳐다보았다. 
  리시타는 묵묵히 가게 안으로 들어가는 피오나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뒷모습이 그녀가 가게 안으로 들어간 후에도 머릿속에 긴 시간 동안 각인되었다. 그는 작게 미소 지은 채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말했다.
  “이런 곳에 있어도 되는 것인가? 네베레스.”
  네베레스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리시타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왕국 기사단은 선착장에서 자신들이 할 일을 찾아내고 있었고 마을에 있는 용병장의 수는 한 명. 마렉뿐이었다.
  ‘큰 문제는 없겠군.’
  리시타는 고개를 돌렸다. 네베레스의 눈과 리시타의 눈이 서로를 향했다. 리시타가 말했다.
  “무슨 일이지?”
  “성역과 폐허의 수장들이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집결지는 각각의 필두가 존재하는 장소다. 그들이 서로 격돌한다면 이런 작은 마을은 순식간에 잿더미가 될 거다. 무녀를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켜야 하니, 손을 빌리고 싶어 왔다.”
  리시타는 턱밑을 긁적였다. 그는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네베레스의 눈은 그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하늘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그는 허공에 손짓하고 있는 리시타를 의아하게 쳐다보았다. 리시타는 피식 웃었다. 그제야 네베레스는 그의 행동에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렇게 번거로운 짓은 필요 없다. 일단은 지켜보도록 하지.”
  네베레스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안이한 생각은 위험으로 직결된다는 것을 모르는 게 아니잖나.”
  “네베레스.”
  네베레스는 갑자기 찾아든 침묵에 재치 있게 대항했다.
  “뭐지?”
  “나는 ‘침묵의 기사’가 아니다.”
  네베레스의 얼굴이 삽시간에 구겨졌다. 이전에 이 남자를 ‘침묵의 기사’가 되도록 권유한 적이 있었다. 그 때 이 남자는 이미 절망에 찌든 나의 길이기에 나의 색은 칠흑의 어둠보다 짙다 말하며 권유를 거절했다. 이 남자를 침묵의 기사단에 넣는 것은 불가능했지만 가까운 친구로서 지내는 것은 가능했다. 그는 흔쾌히 그 관계를 승낙했다. 이 사내에게 셀 수 없을 만큼의 도움을 받았다. 그리고 이 자의 이름을 귀로 들었을 때 네베레스란 이름의 남자는 무릎을 꿇었다. 권위가 있어야 할 때만 권위 있게. 이 리시타란 사내의 신조다. 지금은 그를 ‘동급’으로 다루고 있으나 그가 원한다면 절대 복종의 의미로 무릎을 꿇어야 한다. 이 남자는……
  모험가 상점의 문이 열렸다. 네베레스는 문을 여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어딘가로 사라지고 없었다. 그가 서 있던 자리에는 검붉은 불꽃이 피어올랐다. 가게 문을 열고 나온 자는 다름 아닌 로체스트의 상인 슈렌더였다. 그는 나오자마자 욕설을 중얼거렸다. 문득 그는 리시타와 시선을 마주쳤고, 천한 것을 보는 눈으로 리시타를 훑어본 뒤 길을 걷기 시작했다. 리시타는 그 시선에 가벼운 미소를 머금었다. 
  저 남자는 반년의 활동시기를 가지고 마을에 머물고 있을 때에도 모험가 상점을 들락날락거렸다. 모험가 상점을 지날 때마다 황금색 놀 가죽이 어쩌고 하는 소리를 자주 들었었다. 몇 년이 지난 지금도 이 마을에 들리며 커스티를 닦달하는 것을 보아하니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한 모양이었다.
  황금색 놀 가죽은 한 장 있긴 하다. 꽤 오래전 아는 친구의 선물이었다. 이제와 다시 생각해 보니 5년, 6년이 된 이야기이니 그렇게 오래전은 아니다. 이 가죽은 지금 자신의 배낭 어딘가에서 할 일 없이 잠을 자고 있을 것이다. 황금색 가죽으로 외투를 만들어 볼까 시도는 해보았으나 리사타의 조잡한 재봉 실력으로는 안 봐도 무리였다. 괜히 아까운 황금색 가죽을 버리느니 조용히 구석에 처박아 두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지금은 조금 특별한 배낭에 그 가죽을 넣고 다닌다. 얼마나 특별한 배낭이냐 하면, 그 배낭 속에서 잠을 잘 수 있을 정도로 특별했다. 배낭은 절대 크지 않았다.
  리시타는 심호흡을 한 번 했다. 놀의 집합지는 각자의 고향이다. 성역이 이곳에서부터 꽤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그들이 한판 붙게 된다면 콜헨과는 동떨어진 장소에서 전투가 벌어질 것이 자명했다. 하지만 싸우는 주체들이 놀이란 종족이기 때문에 ‘콜헨과 동떨어진 장소에서 벌어지는 전투’ 같은 안일한 거리로는 완전한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 놀의 전쟁은 거리란 감각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런 작은 마을은 그들이 전쟁을 시작하면 그저 놀 수장들의 칼부림만으로 송두리째 뽑혀나갈 것이다. 걸어서 사나흘 거리에 있는 로체스트 또한 무사하지는 못할 것이 자명했고, 그 곳에 주둔해 있는 제1왕국 기사단도 피해를 입을 것이다. 당연하지만 포벨로 평원에 자리 잡고 있는 마족 공격부대 또한 피해를 입을 것이다. 
  ‘수장’이라 불리는 놀들의 힘은 상상을 초월한다. 단 혼자서 왕국 기사단의 한 부대를 이 세상에서 지우는 것이 가능할 정도의 실력자들이다. 부기사단장은 물론 기사단장 또한 놀의 수장 급을 상대하려면 목숨을 버릴 각오로 달려드는 것이 상책이지만, 그들과는 다르게 놀 수장들은 목숨까지 걸지 않는다. 그들은 그저 다가오는 적수를 재주껏 그리고 요령껏 받아줄 뿐이다. 마족의 제8공격부대의 총지휘자인 ‘그 남자’가 놀 종족을 웬만해선 전쟁으로 끌어들이고 싶어 하지 않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온건파라 불리는 폐허의 놀은, 전쟁에 참가하라는 제의가 온다면 근질거리는 몸을 붙잡으며 거절할 것이다. 그들이 밖에 나서면 어떤 참사가 벌어질 지 잘 알고 있기에 가능한 행동이었다. 그런다고 그들과 반대되는 성역의 놀이 벌어질 참사를 모르고 있는 것은 또 아니다. 그들은 일어날 일을 너무 잘 알고 있지만, 그러한 것보다도 본능에 따르는 것이 성역의 특징이다. 폐허와 성역이 마족 제8공격부대의 머리인 그가 보낸 전쟁의 참가 여부에 따라 갈등을 일으키면 어느 한 쪽은 분명히 몰락할 것이다. 그리고 남은 한쪽은 그들에게 가담하든가 혹은 그들을 짓밟기 위해 모습을 드러낼 터였다. 그가 걱정한 일은 후자였다. 성역이 승리한다면, 마족에겐 현 지상 최강의 종족을 등에 업는다. 그러나 그 반대가 된다면? 그들은 현 지상 최강의 종족에게 제대로 한바탕 터질 준비를 해야 한다. 샤칼로서는 도박이나 다름 없는 선택이었다. 허나 그들 없이 마족 제8공격부대를 막아서고 있는 3개 대국의 힘을 격파하기란 쉽지 않았다. 그나마 평원이 없다는 사실이 희소식이다. 성역과 폐허가 서로 치고받으면서 약해진 틈을 타 성역과 폐허를 몰락시키고 세상에 나가 위세를 떨칠 제3세력인 평원의 놀이, 같은 평원의 부분들에 의해 자멸한지 시간이 꽤 지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의 최강은 아직 살아 있다. 
  “기다려주신 건가요?”
   리시타는 고개를 돌렸다. 채 10분도 지나지 않은 것 같은데 두 여자가 나란히 마주앉아 수다를 떨기 시작하고 끝날 시간으로는 일렀다. 그래서 의아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리시타를 피오나는 어리둥절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리시타가 말했다.
  “……예. 일단은 그런 것 같군요.”
  그의 말에 피오나는 의문을 가진 채 고개를 기울였다. 하지만 그 의문을 입 밖으로 꺼낸다는 선택지에 발을 들여놓지는 않기로 했다. 그녀가 말했다.
  “여행은 어디로 다니시나요?”
  갑작스러운 엉뚱한 질문에 리시타는 잠시 그녀의 말에 무슨 뜻이 있는지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몇 분의 시간동안 생각해보아도 답이 나오지 않자 그는 있는 그대로 답해주기로 결정하곤 입을 열었다.
  “보이는 곳으로 갑니다.”
  “보이는 곳?”
  “예. 이 세상은 모든 곳이 보이는 곳이지요. 뭐 그렇지 않은 곳도 있긴 합니다만 일반적으로 그렇단 뜻입니다.”
  “그렇담 보이는 곳으로 간다는 말은…….”
  “예. 아무 곳이나 간다는 말입니다. 세상은 오래 돌아다녀도 즐길 것이 많으니까요.”
  피오나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긍정의 의미로 받아들였기에 리시타는 헛기침을 몇 번 한 뒤에 그녀에게 오른손을 내밀며 말했다.
  “잡화점은 이쪽입니다.”
  그의 말에 그녀는 놀랐다는 듯이 눈을 크게 떴다. 그녀의 붉은 눈이 리시타의 붉은 눈과 마주쳤다. 피오나는 알 수 없는 그리움에 두 눈을 닫았다. 그가 말했다.
  “감입니다.”
  피오나는 눈을 뜨고 그가 내민 손을 붙잡았다. 리시타는 살포시 그녀의 손을 끌어당겼다. 그녀의 몸은 가벼웠다. 두 팔로 안아든다면 가볍게 안아들고 어디로든 걸어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










  “앗, 다녀왔어?”
  케아라는 밝게 미소 지었다. 그러곤 피오나의 뒤에서 강아지처럼 쫄래쫄래 걸어 나오는 앨리스를 보며 말을 이었다.
  “어머, 앨리랑 같이 왔네?” 
  “안녕하십니까. 그리고 앨리스입니다.”   
  앨리스는 케아라를 한 번 쏘아보았다. 그러자 그녀는 웃으며 “앨리는 애칭이라구.” 라고 말했다. 앨리스는 한숨을 내쉬고는 머뭇거리며 말했다.
  “아……그, 마렉님은 안 계십니까?”
  마렉이 현재 용병단 사무실에 없는 것은 확실했기에 케아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대장님을 뵈러 갔어. 급한 일이야? 가서 불러와 줄까?”
  “아니오! 괜찮습니다. 그, 저 혹시…… 창을 좀 살 수 있을까요?”
  고개를 숙이고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는 앨리스의 모습에 케아라는 속으로 그의 모습이 귀엽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앨리스의 뒤에 서 있던 피오나도 마찬가지였다. 두 여성이 손으로 입을 가리며 이유를 알 수 없는 미소를 짓자 앨리스는 어리둥절해 하며 두 여성을 번갈아 바라보는 것으로 왜 그러는 지 알려줄 수 없냐는 질의를 던졌으나 그녀들은 그것을 받아주지 않았다. 한참을 웃던 케아라가 목청을 가다듬고 앨리스의 물음에 답했다.
  “흠흠. 창? 음, 원래는 마렉이 팔고 있긴 한데……. 잠깐 기다려봐 가서 찾아올게. 피오나, 앨리스랑 사무실을 잠깐 보고 있어 줘. 알았지? 그럼 갔다 올게.”
  피오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앨리스는 케아라를 향해 손을 흔들며 말했다.
  “케아라님은 참 친절한 것 같아요.”
  한동안 말없이 딱딱한 자세로 서 있던 앨리스는 고개를 들어 천장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옛 생각에 미소를 지었다. 그는 피오나가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그녀의 얼굴에는 지금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궁금하다는 의사가 담겨 있었다. 앨리스는 피식 웃으며 자신이 떠올리고 있던 기억을 입 밖으로 내뱉었다. 
  “블라윈이 생각납니다. 제 사관학교 동기인 친구인데, 그녀석도 여자입니다. 사관 생도장을 정할 때 제 가장 큰 경쟁자이기도 했습니다. 사관학교 역사상 가장 뛰어난 여성 생도로 불리고 있는 모양입니다. 아, 드윈님도 계셨지만, 글쎄요. 어째선지 드윈님은 여자로 취급되지 않으시는 듯합니다. ……후후, 검술 실력에서는 제가 더 뛰어났지만요. 이래봬도 전 왕국 검술 대회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간 적 있거든요. 근데 블라윈은 예선에서 탈락했죠. 하하!”
  기분 좋게 웃고 있는 앨리스를 턱을 괸 채 바라보고 있던 피오나는 씩 웃고는 말했다. 
  “흐응. 앨리. 당신 그거 자랑이죠?”
  “네?”
  앨리스는 빨개지는 얼굴을 감추기 위해 멋쩍게 미소를 지으며 헛기침을 했다. 그는 피오나가 자신의 애칭(강제적인 애칭이지만)을 불러줬다는 사실이 기뻤다. 앨리스의 모습을 의자에 앉아 지켜보던 피오나는 밝게 웃었다.
  앨리스와 피오나가 웃고 있을 때 구석진 창가 쪽에 앉아 있던 자가 고개를 돌렸다. 그는 익숙한 얼굴의 사관생도장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뭐라고 말을 꺼내려던 차에 그의 눈이 앨리스의 옆에 있는 여자의 얼굴에 고정되었다. 어떻게 된 게 자신을 절제할 줄 아는 그가 봐도 마음을 흔드는 미모를 가진 여성이었다. 그는 그녀에게 말을 걸기로 했다.
  피오나는 들리는 목소리에 주의를 기울였다. 여자의 목소리였고 앨리스가 목소리가 들려온 창가 쪽을 돌아보았을 때 피오나의 시선도 그쪽을 향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알아볼 수 있었다.
  “거기 병사. 이리 좀 와보도록.”










  *










  “내 병사 모두를 데리고 폐허의 외각 지역에 정찰을 나가라고?”
  흰털의 놀은 엉덩이를 벅벅 긁기 시작했다. 절대 정찰을 가라는 데에 거부감을 느끼는 것은 아니었다. 괜스레 엉덩이가 간지러웠다.
  “네.”
  벼룩이 있는 것인지 가려움은 슬슬 긁으면서도 참기가 어려워졌다. 
  “흠……. 아, 짜증나! 간지러워 미치겠네!”
  흰 털의 놀은 엉덩이를 긁다가 결국 포기했다. 긁어도, 긁어도 시원하지 않은 것이 벼룩은 아닌 것 같았다. 흰 털의 놀은 은빛 털의 놀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의 눈동자는 얼음 같이 투명했다.
  “아우……, 더러운 똥개가. 알았어. 상황이 상황인 만큼 교전은 가급적 피하지 않겠다고 전해둬.”
  은빛 털의 놀은 고개를 끄덕이고 폐허 속을 가로질렀다. 흰 털의 놀은 바위에 놓여 있던 짧은 활을 집어 들었다. 그의 신장은 2미터 78센티미터. 활의 길이는 1미터를 채 넘지 못했다. 그는 화살 통을 왼쪽 허리춤에 단단히 동여매고 허리를 폈다. 그는 짧게 숨을 밖으로 뱉었다. 그런 뒤 그는 다시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준비 끝났으면 빠르게 따라와라. 얘들아.”
  그는 활을 등에 매고 폐허를 네 발로 뛰어올라갔다. 그를 따라 370명의 놀들이 뒤를 따랐다. 
  이 흰 털의 놀의 이름은 스노우스킨. 윈터클로와 함께 태어날 때부터 새하얀 심장을, 전사의 용기라 불리는 새하얀 심장을 가지고 태어난 자들이다. 그런 사내가 370명의 부하들과 함께 폐허를 순찰하기 시작했다. 










  *










  “스노우스킨의 움직임이 포착되었습니다. 자신의 부대를 모두 이끌고 폐허 외곽으로 진군 중입니다. 어찌하시겠습니까?” 
  갈색 털의 놀은 황금빛 미늘 조각으로 만들어진 갑주를 몸에 두르고 있는 놀에게 말을 건넸다. 황금빛 미늘 갑주의 놀은 조용히 고개를 떨어뜨리고 생각에 잠겼다. 그러자 그 옆에서 메이스를 만지작거리던 검은 미늘 갑주의 놀이 말을 대신했다.
  “스노우스킨을 따라갈 여유는 없다. 유격전의 달인인 그 놈과 맞붙는다면 안 그래도 적은 병력, 반 토막은 고사하고 백 명도 남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지금은 대기한다. 우리의 목적은 인간 기사들의 몰살에 있음을 잊지 마라. 쓸데없는 전투는 피한다.”
  검은 미늘 갑주의 놀은 말을 끝마친 뒤, 손질하던 자신의 메이스를 내려놓았다. 덤으로 들고 있던 방패 또한 폐허 바닥에 놓았다. 황금빛 미늘 갑주의 놀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가 중얼거렸다.
  “과녁의 수장께서 이끈 특공대가 일을 성공했다면, 스노우스킨은 많든 적든 인간들과 전투를 벌일 거다. 우리가 손 델 필요도 없지. 울프테일의 말대로 우린 우리의 목적을 위해 이곳에서 대기한다.”










  *










  비정상적으로 놀은 강하다. 그녀는 그것을 뼈저리게 느끼며 눈물 모양의 얼음 방패 뒤로 몸을 숨겼다. 방패는 화살을 막을 때마다 점점 울퉁불퉁 깎여나가기 시작했다. 아르겐이 깨어 있을 때 만들어낸 방패여서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진즉에 방패와 함께 몸뚱이가 벌집처럼 구멍이 숭숭 뚫렸을 것이다. 
  약 서른 개의 화살을 막아내었을 때 방패의 두께가 무척 얇아졌다. 유리창에 끼우는 유리의 두께와 비슷할 정도로 얇아진 방패는 제대로 된 방어력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피오나는 이러다가 방패가 부서지며 자신의 몸도 벌집이 될 것이란 걸 깨달았다. 다급해진 그녀는 심호흡을 한 번 하고나서 외쳤다. 
  “아르겐!”
  화살이 재차 날아들기도 전에 갑자기 집채만 한 거대한 얼음 상자 생겨나 그녀의 모습을 감춰 버렸다. 화살은 쏘던 놀들은 어이없어하며 사격을 중지했다. 갑자기 나타난 비정상적인 크기의 얼음 상자를 보고 있는 것만으로 그들은 황당해하고 있었기에 스노우스킨은 멋대로 공격을 멈춘 병사들을 나무라진 않았다. 일단 자기 자신도 놀라고 있는데 누구에게 뭐라고 한단 말인가? 
  상당히 뛰어난 얼음 조형 능력을 가진 인위의 마나 사용자라고 생각한 병사들은 스노우스킨을 돌아보았다. 이제 어떻게 할 거냐고 묻는 그들의 얼굴을 무시한 채 스노우스킨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가 직접 활을 들었다. 
  화살이 시위를 떠나 얼음 상자를 강타했다. 370명이 날리던 화살 전부를 합한 것과 거의 똑같은 위력이 담긴 화살이었지만 얼음 상자를 부수진 못했다. 그저 긁힌 자국을 만든 것이 다였다. 스노우스킨을 포함한 371명의 놀 병사가 눈살을 찌푸렸다. 한참 상자를 내려다보고 있던 스노우스킨이 말했다.
  “미친. 마나도 못 쓰는 인간이 만든 얼음 주제에, 뭐 저따위로 단단해?”
  단단하다고는 해도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저 얼음 상자를 깨부숴버리고 안에 들어 있는 자의 머리통을 날려버릴 수 있다. 하지만 그러려면 꽤 많은 마나를 사용해야 한다. 쉐도우팽이 물어온 정보가 정확하다는 가정을 한다면, 지금 폐허에는 성역의 특수부대가 잠입해 있을 것이다. 이들과 전면전을 벌인다면 반드시 힘이 온전한 상태여야 한다. 스노우스킨은 한쪽 눈썹을 찌푸린 채 얼음 상자를 노려보았다. 
  날씨도 추운데 저런 얼음 덩어리를 보고 있자니 왠지 추웠다.  
  “왜 저렇게들 강한건가요?”
  피오나는 숨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그녀는 많이 피곤해보였다. 아르겐의 힘을 많이 사용해서도 그렇지만 놀들이 퍼붓는 형언키 어려운 힘의 공격들이 그녀를 더욱 힘들게 만들었다.
  ─몰라. 알아도 지금 알려주는 건 시기상조야 꼬마 여왕님.
  “……아르겐.”
  ─흠흠, 알았어. 알려줄게.
  피오나는 뚱한 얼굴로 얼음 의자에 앉았다. 얼음으로 만들어진 의자였으나 전혀 차갑지 않았다. 오히려 따뜻했다. 그녀는 조용히 그가 할 말을 기다렸다.
  ─저들이 강한 이유는 날 때부터 괴물이기 때문이지. 응, 그래. 이야하, 좋다.
  “…….”
  ─……알았어. 화내지 말라고. 제대로 설명해 줄게. 쟤들은 원래부터 강해. 괜히 현 지상 최강의 종족이라 일컬어지는 게 아니야. 날 때부터 비정상적인 신체 능력을 소유하고 그 타고난 신체 능력을 가장 발휘하기 쉬운 형태로 구현화 하기 위해 본능이란 본질로 발현하지. 이런 것만 해도 이들이 가진 능력은 생후 10년에서 15년이면 오거를 뛰어넘어. 뭐 개인적인 차이가 있긴 하지만 일반적으로 그러하단 소리지. 거기다 일개 놀 한 마리가 수명이 인간과 비슷한 정도이니, 그들의 성장을 따라잡기란 솔직히 일반적인 자들에겐 무리야. 아무리 애를 써도 인간은 지상 최강의 종족은 아니거든. 결국 그들이 강한 첫 번째 이유는 선천적인 신체 능력과 말도 안 되는 전투본능 이라고 할 수 있지. 그리고 두 번째는…….
  “적 지휘관으로 보이는 자가 나타났습니다. 지금 앉아계신 곳을 기준으로 두 시 방향입니다.” 
  “흥미로울 때 끊는 재주는 당신도 한 가닥 하는군요.”
  “예?”
  ─니 주인이 그냥 꽁해 있는 거여. 무시해. 
  “……흥.”
  그녀는 평소에 보여주지 않던 표정들을 보여주며 두 시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신장 2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흰 놀이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놀은 꽤 높은 바위 덩어리 위에 앉아 있었다. 놀의 시선은 그녀를 향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를 볼 수는 없었다. 집채만 한 거대한 얼음 덩어리가 시야를 막아섰기 때문이었다. 그 흰 놀은 뒷머리 털을 긁적거리더니 곁에 서있던 은회색 털의 놀에게 무어라 중얼거렸다. 은회색 털의 놀은 그의 말이 끝나자 고개를 끄덕이곤 그들 뒤에 나란히 정렬해있는 놀들을 향해 뭔가를 외쳤다. 그들과 그녀의 거리는 적어도 백여 미터는 거뜬히 넘었기 때문에, 거기다 얼음 덩어리가 그들 사이를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에 뭐라 외쳤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놀들이 철수하기 시작하는 것을 보았을 때 흰 털의 놀은 은회색 털의 놀을 통해 철수 명령을 내린 것이 분명해 보였다.
  “페디, 저들을 놓치지 마세요.”
  그녀는 조용히 고개를 들어올렸다. 그녀가 말을 이었다.
  “아르겐, 얘기는 다음에 듣도록 할게요.”
  얼음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집은 서서히 피오나의 발밑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잠시 후 얼음의 집은 완전히 사라졌고 대신 얼음의 활이 피오나의 손에 들려 있었다. 그녀는 그 활을 폐허 위를 향해 정확하게 던진 후 숙련된 암벽등반가 못지않은 솜씨로 무너진 돌덩어리를 발판 삼아 폐허를 올라갔다. 
 폐허의 위는 의외로 한산하고 경치가 좋았다. 그녀는 의외의 경관에 놀라워하며 사방을 한 번 훑어보았다. 경치가 좋은 건 좋은 거고, 적은 적이다. 
  “페디, 그들의 위치를 말해줘요.”
  그녀의 말에 허공은 즉시 답을 해왔다. 
  “전방, 한 시. 거리 70. 42도 각 아래로 한 명 있습니다.”
  “고마워요.”
  그녀는 허공이 답해준 대로 활의 각을 내리고 한 시 방향으로 활대를 돌렸다. 그녀는 얼음 화살을 꽉 물고 놓지 않을 것 같던 활의 시위를 놓았다. 활의 시위는 얼음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런데 어떻게 얼음이 탄성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의아해할만 했지만 그녀는 그러지 않았다. 
  얼음 화살은 시위를 떠난 순간 일반 화살의 배는 되는 속도로 날아가 묵묵히 폐허를 걷던 놀 한 마리의 심장을 꿰뚫었다. 갑자기 벌어진 일이라 심장을 꿰뚫린 놀은 순간적으로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받아들이지 못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의 본능은 화살이 날아올 것이란 걸 알려주었다. 미처 반응하지 못했을 뿐이다. 심장을 꿰뚫린 놀은 아쉽다는 듯 손바닥으로 무릎을 탁 친 뒤 몸을 굴러 두 번째로 날아온 화살을 피했다. 화살은 돌바닥에 꽂혔다. 
  앞서가던 두 마리의 놀은 심장을 뒤에서부터 꿰뚫은 화살을 확인하고 재빠르게 몸을 숨길 수 있는 바위를 찾아 그곳에 숨었다. 그러자 곧 심장에 화살을 꽂은 채 달려오는 동료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들은 피식 웃더니 심장에 화살을 꽂고 있는 놀을 보며 야유를 날렸다. 
  “뭐냐 그건? 패션?”
  “끝내주는군? 잘 봐 뚫고 나왔어. 킥킥킥킥.”
  화살이 심장을 뚫고 나와 있던 놀은 가래 끓는 소리를 내더니 키득키득 소리를 내며 웃고 있는 두 놀 병사를 향해 가운데 손가락을 내밀며 말했다.
  “이 자식들아. 나 한 1분 남았는데, 니들 진짜 이럴래?”
  수명이 1분 남짓 줄어든 회색 털을 가진 친구를 보며 은회색 털의 놀과 파란 털의 놀은 뭐가 그렇게 웃긴지 배꼽을 잡고 웃기 시작했다. 웃고 있는 친구 놈들을 무시한 채 심장에 꽂혀 있는 얼음 화살을 뽑을까 말까 고민하던 회색 털의 놀은 결국 뽑지 않기로 했다. 그리고 은회색 털의 놀을 보며 한마디 했다.
  “너 이 개새끼. 나 죽고 나한테 빌린 돈 노잣돈으로 안 주면 콱 죽여버린다?”
  킬킬 소리를 내며 웃고 있던 은회색 털의 놀은 “어떻게 죽일 거냐?”라는 말을 던짐으로써 회색 털의 놀을 어안이 벙벙하게 만들었다. 그 모습을 재밌다는 듯이 바라보고 있던 파란 털의 놀은 바람이 진로를 바꿨다는 걸 깨달았다. 그와 동시에 세 명의 놀은 머리 위에서 쏟아지는 얼음 화살을 보지도 않고 피하기 시작했다. 
  피오나는 어이가 없다는 투로 혀를 찼다. 분명히 사각을 노리고 쏜 화살이건만 놀은 보지도 않고 피해버렸다. 거기다 더 어이가 없는 건 심장에 화살을 꽂은 회색 털의 놀이었다. 죽어도 시원치 않을 판에 심장에 화살을 꽂고 활발하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녀는 어이가 없어졌고, 한마디 했다.
  “쟤들 대체 왜 저래요?”
  ─넋 놓고 있어도 되냐? 반격 올 걸.
  그의 말대로 피오나가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공격이 뜸해진 틈을 타 회색 털의 놀과 은회색 털의 놀이 역공을 가했다. 그들은 활대를 부러뜨릴 기세로 움켜쥔 뒤 화살을 시위에 걺과 동시에 시위를 놓았다. 당기는 속도가 얼마나 빨랐던지 그들의 활시위는 잔상을 남겼다. 
  피오나는 반응하지 못했다. 하지만 아르겐은 반응했다. 바로 앞에서 얼음벽이 돋아나 날아온 화살을 두 개나 막아내자 피오나는 깜짝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아르겐이 웃었다.
  ─으이구. 조심 좀 하시게? 나 자고 있을 때는 어쩌려고 이러냐?
  얼음벽이 사라지자 뚱한 얼굴을 하고 있는 피오나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녀는 계속해서 말을 걸어오는 아르겐을 무시한 채 시위를 당겼다. 
  회색 털의 놀은 파란 털의 놀에게 손짓했다. 손짓을 받은 파란 털의 놀은 고개를 작게 끄덕인 뒤 폐허 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은회색 털의 놀은 숨을 거칠게 몰아쉬고 있는 회색 털의 놀을 바라보며 물었다. 
  “몇 초?”
  입가에 고인 피를 침과 함께 내뱉은 회색 털의 놀이 답했다.
  “앞으로 30초.”
  “진짜 질기네.”
  “뭐 인마? 딱 봐도 난 수명이 짧은 거 안 같냐? 하이드 그 자식은 목 잘리고 3분이나 움직였는데, 난 심장 한 방 맞았다고 1분. 아, 불공평해.”
  눈살을 찌푸리며 활과 화살을 정돈하고 있는 회색 털의 놀을 보며 은회색 털의 놀은 킬킬 웃는 것으로 자신의 심정을 드러냈다. 회색 털의 놀은 낮게 으르렁거린 뒤 고개를 들어 푸른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는 바람이 앞에서 불어오고 있다는 것을 피부로 느낀 뒤 시위에 화살을 걸고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으로 쐈다. 그와 동시에 은회색 털의 놀에게 눈짓했다. 은회색 털의 놀은 자리에서 일어나 벽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 피오나의 위치를 정확하게 겨냥하며 말했다. 
  “인마, 윈드. 노잣돈은 걱정하지 마라. 형이 누구냐, 빌리면 갚는 사내로 유명하잖냐.”
  그러자 회색 털의 놀이 웃으며 말했다.
  “개소리 까시죠, 차지님?”
  “킥킥.”
  피오나는 갑자기 바람을 타고 정면에서 날아오는 화살을 피하기 위해 몸을 굴러야 했다. 그리고 일어나는 순간 아르겐이 경고해주지 않았다면 파란 털을 가진 놀이 쏜 화살에 머리에 구멍이 날 뻔했다. 얼음 방패로 정면을 방어하며 몸을 일으키려고 할 때 아르겐이 다급하게 외쳤다. 
  ─이런, 발 밑!
  그리고 그 순간, 몇 초간 시위에 화살은 건 채 피오나를 조준하고 있던 은회색 털의 놀이 시위를 놓았다. 
  아르겐의 예고대로 화살은 그녀의 발밑에서 튀어 나왔다. 피오나는 미처 반응도 하지 못했지만 아르겐은 그녀의 발밑에 얼음 장판을 미리 깔아두었고, 그래서 은회색 털이 제자리에 서서 마나를 한바가지 담아 날린 화살을 비껴나가게 만들 수 있었다. 피오나는 자신을 죽일 수도 있었던 화살이 빗나가는 걸 보며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그녀는 곧바로 활에 얼음 화살을 세 개를 먹였다. 
  은회색 털의 놀은 욕지거리를 퍼부었다. 그건 숨을 몰아쉬고 있는 회색 털의 놀도, 폐허 위로 재빠르게 올라가 회색 털을 가진 놀이 쏜 화살이 날아가는 틈을 노려 피오나를 기습한 파란 털의 놀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의 본능은 여자를 죽이는 걸 예상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이런 일은 흔히 일어나는 게 아니다. 놀의 본능이 빗나가는 일은 흔치 않다. 그것도 똑같은 것을 예견한 세 명의 본능이 모조리 빗나가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은회색 털의 놀과 회색 털의 놀이 욕지거리를 퍼부으며 2차 공격을 감행하고 있을 즈음 파란 털의 놀만은 은회색 털을 가진 놀이 날린 화살을 빗겨낸 얼음 장판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에 욕지거리를 내뱉지 않았다. 그 얼음 장판은 여자의 의지가 아니었다. 그는 눈살을 찌푸렸다. 재수 없으면 다 죽게 생겼군. 그가 선공을 가했다. 은회색 털의 놀과 회색 털의 놀이 쏜 화살이 뒤를 이었다. 
  ‘앞으로 20초 정도 남았나.’
  파란 털의 놀은 올라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폐허 아래로 소리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잠시 후 그의 몸은 두 명의 놀이 몸을 숨기고 있는 곳에 나타났다. 
  “젠장맞을. 야, 펀. 저거 어떻게 된 거냐? 화살이 계속 빗나간다.”
  펀이라 불린 파란 털의 놀은 피를 토하며 묻는 회색 털의 놀에게 자신이 봤던 것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그러자 두 놀은 진절머리 치기는커녕 씩 웃었다. 회색 털의 놀이 말했다.
  “좋아, 좋아. 한 13초 남았는데, 이대로 돌진해서 한 방 먹일 테니까 나머진 니들 알아서 해라. 아, 너 돈 내놔라 새끼야.”
  “거, 자식. 수전노 티 내냐? 죽을 땐 걍 곱게 뒤지시죠.”
  “이 개새……”
  “인마. 너 시간 없다. 10초 남았네. 바로 돌진해!”
  “개자식들.”
  회색 털의 놀은 폐허 바닥에 질겅이는 피와 함께 침을 퉤 뱉은 뒤 죽기 직전의 생물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민첩하게 폐허 위를 뛰어 올라갔다. 화살이 회색 털의 놀의 몸에 구멍 내기 시작했을 때 두 명의 놀 또한 행동을 개시했다. 
  피오나는 튀어 오른 회색 털의 놀에게 집중적으로 화살을 날렸다. 그리고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입술을 깨물었다. 저 놀은 심장에 화살을 맞은 죽기 직전의 놀이다. 자의인지 타의인지는 몰라도 시선을 끌기 위해 먼저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녀는 곧바로 활을 틀어 다른 곳을 겨냥했다. 하지만 어디에서도 놀의 모습을 찾아볼 수는 없었다. 그녀가 당황해하고 있는 사이 엄청난 속도로 뛰어온 얼음 화살에 구멍이 송송 뚫린 회색 털의 놀이 그녀를 뒤에서 붙잡았다. 입에 가득 고인 핏물 때문에 말하기도 힘들었지만, 그는 큰 소리로 웃으며 말했다.
  “크하하하! 이거, 뭐야! 왜 이렇게 예쁜 거야? 반하겠는데?”
  동시에 피오나의 몸에서 돋아난 투명한 얼음의 가시들이 그를 벌집으로 만들었다. 회색 털의 놀은 온 몸이 얼음 가시에 난자되어 나가떨어지는 도중에도 포효를 내질렀다. 
  질려버렸다. 단 세 차례, 종탑에서 한 번, 폐허에서 두 번. 단 세 번밖에 놀과 전투를 치르지 않았지만, 그녀는 그들에게 질려버렸다. 그들이 가진 질긴 생명력에 질렸다. 그들이 가진 막강한 전투능력에 질렸다. 그들이 가진……, 광기에 질렸다. 
  등 뒤에서 은회색 놀이 튀어나왔다. 그와 동시에 정면에서 파란 털의 놀이 활에 화살을 건 채 그녀를 쳐다보며 씩 웃었다. 
  피오나는 화살이 날아 올 것을 대비해 얼음 방패를 조형하고 돌바닥에 찍어 고정시켰다. 하지만 고대하던 화살은 날아오지 않았다. 대신 뒤쪽에서 조용히 다가온 은회색 털이 휘두른 강력한 회전이 수반 된 발차기에 맞고 몇 미터는 날아갔다. 뼛속까지 깨부숴버리는 듯한 강력한 충격에 피오나는 신음조차 흘리지 못했다. 
  은회색 털의 놀은 회심의 발차기가 먹히지 않자 혀를 찼다. 분명히 ‘무력화’ 상태로 발차기를 날린 것이다. 마나로 자신을 지킬 줄 모르는 인간은 맞는 순간 둘로 갈려나가야 정상이다. 그런데 저 인간 여자는 날아가기만 했다. ‘빌어먹을! 또 그 얼음이군!’ 그는 계속해서 본능을 방해하는 얼음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손에 들고 있던 활을 뒤로 집어던지며 파란 털의 놀에게 손짓했다. 그들은 무기를 놓은 채 육탄돌격하기 시작했다. 
  무력화를 오래 유지하는 건 두 놀에겐 불가능했다. 끽해야 하루에 30초가량을 사용할 수 있을 뿐이었기에 속전속결로 결판을 내야했다. 그리고 회색 털의 놀, 윈드락이 만들어준 절호의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바닥에 쓰러진 채 꿈틀거리고 있던 피오나에게 눈으로 쫓기 힘들 속도로(거의 날아오다시피) 다가온 두 마리의 놀은 인위 최강의 방패이자, 창으로 무장한 주먹과 다리를 휘둘렀다. 
  내리꽂힌 주먹은 피오나의 육체를 폐허와 함께 깊숙한 땅속으로 처박았다. 이어서 파란 털의 놀이 휘두른 다리가 폐허와 함께 육체를 산산조각 낼 심산으로 폐허를 강타했다. 
  폐허에 새로 생긴 구덩이를 바라보던 두 명의 놀은 서로에게 시선을 옮겼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서로를 쳐다본 그들은 씩 웃었다. 하지만 곧 미소를 거뒀다. 그들의 본능이이렇게 외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싸워라, 싸워라, 싸워라, 싸워라, 싸워라, 싸워라, 싸워라, 싸워라, 싸워라, 싸워라, 싸워라, 싸워라, 싸워라, 싸워라!’
  검은 로브를 입고 있던 사내는 덤비는 두 명의 놀 병사를 가볍게 맨손으로 찢어 죽였다. 
  놀은 가볍게 죽지 않는다. 심장이 정지하거나, 머리가 날아가도 짧은 시간(개인차가 존재한다) 생존한다. 물론 멀쩡할 때와 크게 다르지 않게 행동한다. 하지만 죽음이 가까워질수록 행동에 지장이 생기긴 한다. 목을 잘라 머리를 떨어뜨린 경우 시야가 뒤바뀌기 때문에 주춤할 거란 생각은 버리는 게 좋다. 그들은 ‘본능’이라는 육감으로 모든 걸 무시한 채 상대방을 향한다. 그러니까 원래는 하나였을 몸이 상체와 하체로 분리된다고 해도 바로 죽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랬기 때문에 그들은 자신들의 몸뚱이가 가루가 될 때까지 박살나는 고통을 느낄 수 있었다. 
  놀 병사는 자신의 죽음에 회의적이 되지 않는다. 그들은 전투 중 상대방에게 죽는 것을, 특히 뛰어난 강자에게 죽는 것을 이상적인 죽음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반대급부로 적을 죽이는 것도 이상적인 행동이라 여긴다. 강자도, 약자도 상관없다. 약자에게 관심이 덜한 편이지만, 그들을 죽이는 것이 이상적인 행동이라는 것에 부정적이진 않다. 그들은 죽을 때까지, 죽으면서도 그렇게 산다. 그렇기에 자신의 몸뚱이가 부서져나가는 고통 속에서 그들은 웃었다. 자신들이 어떻게 손 써볼 수도 없을 만큼 강인한 자에게 죽으며 흡족해했다. 하지만 아쉬움이 남지 않는 건 아니다. 만약 살아남았다면, 더 강해져서 도전했을 텐데. 
  즐거워하는 놀과 달리 사내의 칙칙한 붉은 눈은 분노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










 

  눈을 뜨기 전부터 왠지 몸이 따뜻하다는 것을 느꼈다. 한 시간이 넘도록 몸은 따뜻했다. 마치 살을 에는 추위가 한창일 겨울날 방안을 뜨뜻하게 데워놓고 이불을 뒤집어 쓴 채 푹 자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일어나기 싫었다. 이대로 계속 잠을 자고 싶었다. 그녀는 노골적으로 일어나기 싫다는 몸부림을 쳤다. 그러나 갑자기 덜컹이는 바람에 그녀는 어쩔 수 없이 눈을 뜰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때 그녀는 누군가의 등에 자신이 업혀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몸을 움직이고 싶었으나 의도치 않게 신음소리가 나왔다. 그녀가 깨어났다는 것을 알아차렸는지 그녀를 등에 업고 있던 누군가는 발걸음에 좀 더 신경 쓰기로 했다.
  ‘등…….’
  찌뿌듯한 느낌에 그녀는 다시 눈을 감았다. 그러자 이번엔 웬 부드러운 인형 같은 것이 얼굴을 타고 내려왔다. 그것은 인형이 아니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녀는 그것이 머리카락이란 것을 어렴풋이 확인할 수 있었다. 머리카락은 붉었다. 그리고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머리카락이었다.
  손가락을 움직여보았다. 별로 움직이지도 않았는데 따뜻한 살갗 만져졌다. 피부는 부드러웠다. 남자의 피부보다는 여자 쪽에 더 가까운 느낌이었다. 손에서 힘이 빠졌다. 손목은 자연스럽게 손을 아래로 향하게 만들었다. 아래로 향한 손은 울퉁불퉁한 것을 만질 수 있었다. 무엇일지 생각해 보려했다. 그러자 손이 턱 같은 것을 만졌었고 조금 까칠한 감촉을 느낄 수 있었다는 것을 상기해낼 수 있었다. 그녀는 자신을 업고 있는 자가 남자라는 것을 대강 알 수 있었다. 갑자기 세상이 덜컹거렸다. 돌부리라도 잘못해서 밟은 모양이다. 정신을 차렸을 때 그녀는 자신이 문신 같은 것을 만지고 있다고 느꼈다. 어떻게 알았냐 하면 만지고 있는 부위가 울퉁불퉁 했다는 것이 이유였다. 현재 평형감각을 느낄 수 없기 때문에 그녀는 자신의 손이 어디에 위치해 있는지는 알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 만지고 있는 문신이 세 자루의 검이 서로 교차하고 있는 형태라는 건 느낄 수 있었다. 그만큼 문신의 느낌이 뚜렷했다. 
  느낌이 좋아서 계속 만지던 도중에야 깨달았다. 세 자루의 칼이 포인트를 아래쪽으로 향한 채 교차하고 있는 형태의 문신은, 사실 문신이 아니라 흉터 같은 것이란 것을 말이다. 마치 영원히 잊지 않기 위해 몸에 새긴 각인(刻印) 같았다. 
  ‘검…….’
  세 개의 검이 무엇일까 생각하던 차에 머리카락이 손가락을 간질였다. 머리카락은 그녀의 손을 밀어내려고 하고 있었다. 마치 만지면 안 되는 것을 만졌다는 듯이 그녀의 손을 각인에서 멀어지게 만들려 하고 있었다. 그녀는 황급히 왼손을 뺐다. 다시 손을 처음의 위치였을 법한 곳으로 옮겨 놓았다. 기분이 좋았다. 손가락을 간질이던 머리카락은 향기로운 냄새가 났다. 그녀는 흘러내린 머리카락에 얼굴을 파묻었다.
  뭔가가 들렸다. 그러나 다시 들리지는 않았기 때문에 그녀는 들렸다는 사실을 간단하게 무시할 수 있었다. 머리카락에 얼굴을 파묻고 있을 때 ‘그’가 말했다.
  ‘일어났나. 꼬마 아가씨.’
  “일어나셨습니까.” 
  ‘그’는 경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모든 것이, 어떠한 것이던지 ‘그’의 발아래에 있었기 때문에 ‘그’는 그 어떠한 것에도 경어를 붙이지 않았다. 그런다고 모든 것을 하대하지도 않았다. 그는 자신을 제외한 모든 것을 동급으로 보았고, 그는 거기에 걸맞고 어울리는 대우를 해주었다. 자세히 보니 머리카락은 붉은색이 아니었다. 칠흑같이 검은 머리카락이었다. 부드러움은 그대로였다. 그가 최대한 고개를 돌려 피오나의 얼굴을 보려했다. 
  ‘붉은 눈…….’
  ‘그’도 붉은 눈이었다. 하지만 눈가에 아물지 않은 상처 같은 것은 없었다. 검은 머리의 사내는 왼쪽 얼굴에 날붙이로 베여 아물지 않은 상처가 있었다. 이마부터 눈, 그리고 턱을 수직으로 내리긋고 있는, 아물지 않은, 마치 방금 생긴 것만 같은 상처. 
  얼굴에 상처를 낸 자가 얼마나 고수였는지 1센티 이상 파고든 상처임에도 불구하고 눈동자는 전혀 상하지 않았다. 그가 말했다.
  “다 왔습니다. 폐허 깊숙이 들어가 있으셔서 찾는데 애를 먹었습니다.”
  말을 하는 자가 누구인지, 왜 자신을 찾으러 왔는지, 어떻게 알고 온 건지 묻지도 못한 채 그녀는 조용히 업혀있기만 했다. 그의 등은 절대 굽어지지 않았고 어깨는 대륙을 통일한 패왕과도 같이 단단하고 넓었다. 당당하게 걸었으며, 오랜 여행으로 얻어진 규칙적인 발걸음을 가지고 있었다. 
  바람은 부는데 춥지 않았다. 그녀가 입고 있는 검은 로브 덕택이었다. 반대로 사내는 쌀쌀한 바람을 긴 면바지와 반팔로 막아내려고 용을 쓰고 있었다. 그는 방금 자신을 강타하고 지나간 악의가 가득한 바람을 향해 한마디 던졌다.
  “쯧. 그리도 내가 마음에 안 드나?” 










  *










  “떨어져라 검은 의지.”










  *










  “스노우스킨, 인간과 교전했나?”
  “어.”
  “죽였나?”
  “아니.”
  “왜지?”
  “죽일 수 없었다는 게 맞겠지.”
  “무슨 말이지?”
  “아, 씨. 너 말투 진짜 짜증나네. 네가 내 상관이냐?”
  “뭐라고?”
  스노우스킨은 황금빛 털을 가진 놀의 목털을 움켜쥐었다. 황금빛 털의 놀도 곧바로 스노우스킨의 흰색 목털을 움켜쥐고 으르렁거렸다. 
  쉐도우팽이 자신의 신장과 맞먹는 거대한 메이스를 땅바닥에 꽂아 넣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 옆에 화이트팽이라 불리는 흰털의 놀은 스노우스킨과 엠버메인의 다툼에는 한 톨의 신경도 주지 않으며 두 자루의 칼을 손질하고 있었다. 소드브로큰이라는 검은색 털을 가진 놀은 신장이 3미터를 넘었다. 그리고 그에 걸맞게 4미터에 달하는 대검을 베고 잠을 자고 있었다. 그의 옆에서 레드스톤은 그와 비슷한 신장에 붉은 털을 가지고 있었고 5미터가 넘는 양날창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명상을 하고 있었다. 윈터클로는 저 멀리서 방패와 망치를 휘두르고 있었다. 스톤스킨은 윈터클로보다 더 멀리서 땅과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다. 아마도 며칠 전에 땅을 파다 우연히 발견한 별미를 찾는 듯했다.
  스노우스킨은 엠버메인을 쳐다보며 두 눈을 부라렸다. 엠버메인 또한 스노우스킨을 보며 이를 갈았다. 그들의 관계는 원래부터 저러했기 때문에 나머지 지휘관 급의 놀들은 조용히 자신이 할 것을 했다. 스킨과 메인이 서로 주먹다짐을 할 즈음 쉐도우팽이 입을 열었다.
  “죽일 수 없었다는 건 무슨 말이야? 유격전 왕인 네가 놓치는 작자도 다 있네. 누구야? 용병? 멜리아?”
  스노우스킨은 바닥에 거꾸러뜨린 엠버메인의 주둥이를 내려찍으려던 주먹을 들고 있는 상태로 말했다.
  “엉? 아니, 아니야. 멜리아처럼 흰색 가득이긴 했지만 첨보는 여자였어. 거기다가 좋은 향기가 났는데…….”
  쉐도우팽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과 메인의 주먹이 스킨의 아래턱을 강타한 것은 동시에 벌어진 일이었다. 엠버메인은 그대로 스노우스킨의 다리를 걷어차며 팔꿈치로 그의 미간을 내려찍었다. 스노우스킨은 미간을 향한 공격을 다리로 엠버메인의 상체를 차내는 것으로 회피했다.
  “혼자만 납득하지 말고 좀 알려주지?”
  붉은 털의 놀, 레드스톤이 말했다. 쉐도우팽은 고개를 들어 달이 떠있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달은 그렇게 밝지는 않았다. 쉐도우팽이 말했다.
  “나도 만났다. 무녀들과 같은 향기의 여자였다. 아니, 좀 더 진한 향기였지.”
  레드스톤은 눈을 떴다. 그와 동시에 자고 있는 줄 알았던 소드브로큰이 벌떡 일어났다. 화이트팽은 손질을 멈추고 쉐도우팽을 바라보았고, 저 멀리서 땅과 대화하던 스톤스킨, 망치와 방패를 휘두르던 윈터클로 마저도 하던 짓을 멈추고 쉐도우팽을 쳐다봤다.
  “진짜냐……?”
  화이트팽이 말했다.
  “확실하다.”
  쉐도우팽이 답했다. 레드스톤이 말했다.
  “……일 났군.”
  레드스톤은 이마를 톡톡 건들었다. 검은 털의 놀, 소드브로큰은 깊은 한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진군은 내일 아침이다. 윈터, 네가 남아서 성역이 해코지하기 전에 신병을 맡고 있는 게 어때?”
  윈터클로는 천천히 걸어오며 답했다.
  “물론. ‘향기’는 선대들부터 지켜오던 것이다. 그리고 우리도 그것을 지킨다. 나는 내 부대의 2백을 동원한다. 나머지는 너희가 데리고 가.”
  “돌격대장인 네가 빠지면 나가는 것 자체가 힘들어진다. 화이트팽의 정보에 의하면 앞으로 2개월 안에 성역의 수장들이 대부분 성역에 집결한다. 샤프투스와 울프테일이 빠져있긴 하나 성역의 필두의 수족은 아직 넷이나 건재하다.”
  “잠깐, 성역의 두 수장은 벌써 성역에 있다고 하던데?”
  “중압의 놀과 섬광의 놀 말인가?”
  “어.”
  “그들의 행방은 아직 찾을 수 없다. 분명히 십 년도 더 전에 성역을 떠난 뒤론 찾아볼 수가 없다.”
  “다른 작전이 있는 게 아닐까? 섬광의 놀과 과녁의 놀은 전술의 귀재잖아.”
  “…….”
  “왜 그래?”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잠시…… 생각을 좀 하고 있었다.”
  레드스톤은 이마를 긁었다. 윈터클로는 주저앉아 있었고, 스톤스킨은 말없이 땅바닥에 머리를 처박고 있었다. 쉐도우팽은 사라졌고 회이트팽은 드러누웠으며 소드브로큰은 다시 칼을 베고 누웠다. 엠버메인과 스노우스킨은 달이 떨어지고 해가 떠오를 때 까지 주먹을 휘둘렀다.
  조용히 하늘에 뜬 달을 바라보고 있던 윈터클로가 말문을 열었다. 
  “한번 터지기 시작한 용암의 진로를 틀 수 있는 방법은 없지. 내가 신병을 인도한다. 너희는 계획대로 한다. 둠스피릿, 본케이지, 나인핑거, 칠링터치는 이쪽의 머리수가 많다는 걸 이용한다. 후에 각자 판단에 맡긴다. 필두께서도 그리 결정을 내리시겠지. 결전은 내일이다. 전 병력은 폐허를 빠져, ……성역을 친다.”
  윈터클로는 망치를 들어올렸다. 그는 재빠르게 몸을 돌려 달빛의 반대 방향으로 사라졌다. 그가 떠난 뒤에 각각의 놀들 또한 고수하던 자리를 떴다. 유일하게 떠나지 않은 놀들은 엠버메인과 스노우스킨뿐이었다.










  *










  “본대는 해가 뜨는 순간 출발하마. 먼저 가서 자리를 선점하고 있어라.”
  “필두.”
  “레드스톤인가. 말해봐라.”
  “…….”
  “……알겠다. 윈터클로의 돌격 부대의 인원은 모두 본대에 규합한다. 너는 화이트팽과 스노우스킨과 함께 병력을 데리고 움직여라. 지휘권은 너에게 주마.”
  “예.”
  레드스톤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뜨거운 태양을 오른쪽 눈에 박아 넣은 듯이 그의 눈은 불타오르고 있었다. 그는 허리를 곧게 폈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한쪽 눈을 감았다. 바람이 차가웠다.
  “그녀는…… 그래, 그렇구나.”
  그는 바람을 잡기 위해 손을 들었다.
  “내 친구. 예언의 무녀라 불리는 자가 모두 둘이나 나타났다. 어느 쪽이 거짓일지 내기해 보지 않겠나. 먼저 죽는 쪽이 검정 머리의 무녀에게 투표하는 걸로…… 어떤가?”










  *










  “전진 배치를 말입니까?”
  “그래.”
  “하지만…….”
  흰 털의 놀과 검고 초록색 털이 섞인 놀은 고개를 숙이고 지도를 바라보았다. 그런 후에 그들의 수장에게 눈을 돌렸다. 그가 말했다.
  “녀석이라면 반드시 오늘 자리를 선점하기 위한 부대가 움직이겠지. 분명 이곳에 멈춘다.”
  그의 손가락은 두 곳을 가리켰다. 그 중 한 곳은 성역의 외곽 지역이었고 다른 한 곳은 성역의 꽤 깊숙한 곳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 두 곳은 모두 샤프투스가 폐허로 떠나기 전 병력을 강화하고 떠난 장소다. 웬만해서는 뚫리지 않을 병력과 칠링터치, 나인핑거를 배치해 둔 장소였다. 흰 털의 놀이 의아해하며 말했다.
  “이곳들은 샤프투스가 미리 강화해 둔 곳입니다. 다시 증원을 보내기에는…….”
  녹색 안광이 주위를 밝혔다. 안광은 불길처럼 뿜어져 나왔다. 그가 말을 이었다.
  “칠링과 나인핑거를 바꾼다. 밤눈이 좋은 녀석이 외곽으로 나간다. 저쪽의 스노우스킨은 열을 쫓는다. 화이트팽과 윈터클로, 레드스톤이 올 것이다. 병력 규모는 3천 가량이겠지. 어차피 인간들은 그 놈에겐 대항조차 할 수 없다. 기껏해야 진군 시간을 지체하게 만드는 것이 한계겠지. 그 이상은 바라지 않는다. 개개인의 전투에서는 우리에게 승기가 있다. 저쪽은 전쟁만을 위한 정예가 아니기 때문이다. 겁먹을 필요 없다. 우린 지형의 이점을 이용한다. 이곳에 칠링에게 매복하라 전해라. 핑거에겐 스스로의 판단에 맡긴다고 전해라. 3백의 궁병이면 충분하다. 나머지는 성역의 중앙에서 언제든 지원을 갈 수 있도록 대기한다. 얼마나 오랫동안 전투를 치를지 모르는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선 가장 가까이 있는 싱글샷의 도착을 아무런 생각 없이 기다릴 수는 없다. 울프와 샤프가 얼마나 내부를 흔들어 줄 수 있을지는 상관없다. 녀석들이 살아만 돌아온다면 우리에겐 패배의 이유가 하나 사라지는 것이다. 준비해라. 전진한다.”
  말이 끝남과 동시에 녹색 안광은 사라졌다. 주변을 짓누르던 암흑과 무거운 기백이 사라지자 두 마리의 놀은 깊게 정체된 숨을 몰아쉬었다. 그들은 그의 지시대로 움직였다.
  녹색 안광은 달빛을 받아 수려하게 반짝였다. 달빛은 황금색 미늘을 비췄다. 안광이 사라졌다.
  “다시…….”
  그는 가면에 손을 가져갔다. 녹아버린 얼굴 가죽이 철판에 붙어버려 떼어낼 수도 없는, 이제는 그 녀석과의 추억으로만 남겨두려 했던 증거. 가면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간다. 그 때의 흥분이 다시 되살아나는 듯한 감각. 호적수를 찾았을 때의 그……, 그 이루 말할 수 없는 쾌감. 그는 다시 한 번, 그리고 마지막으로 느낄 희열에 주먹을 쥐었다.
  “그래.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놈이 두 여자 중에 금발의 여자에게 걸도록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