롭스군 - https://bbs.ruliweb.com/family/4526/board/109995/read/9807825?



바드 배경 이야기 업데이트

https://universe.leagueoflegends.com/ko_KR/story/champion/bard/

 

천상의 주민 대다수는 자신들이 사는 곳을 경이롭고도 선명한 별빛이 수 놓인 융단으로 본다고 한다. 사실 이 경이로운 세계가 담고 있는 영원한 아름다움은 육안으로는 볼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영겁의 존재이자 수수께끼의 음유시인 바드는 이곳 천상의 아름다움을 신비롭고 신성한 소리로 느낄 수 있다.


태초에 바드는 그 어떤 목적 없이 적막한 우주를 표류하는 존재였으나, 그와 동시에 무언가 기적과도 같은 일이 일어날 것임을 고대하고 있었다. 운명은 바드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최초의 별들이 탄생하는 순간, 우주의 침묵이 깨지고 창조를 알리는 기쁨의 음표가 바드의 귀를 향해 울려 퍼졌다.


별들의 탄생에서 비롯된 영감과 생각의 줄기와 함께, 바드는 별들의 화음 속을 여행했다. 바드의 목소리가 우주에 닿을 때마다 반음정의 불완전한 정령의 소리가 바드에게 다가갔고, 이들의 완벽한 화음은 끝없이 울려 퍼졌다.


흠잡을 데 없는 걸작은 아니었지만, 바드는 환희에 넘쳤다.


그런데 이 무한한 음정 뒤에 불협화음이 따라붙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아주 작은 소리였기 때문에 바드는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소중한 정령의 소리가 바드에게 이곳저곳에서 나타나는 조화롭지 못한 음의 변화와 예상치 못한 당김음을 알려주었고, 소리가 있던 곳엔 점점 침묵이 커지기 시작했다.


바드는 이 변화의 근원지를 찾기 위해 천상을 샅샅이 탐색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느꼈던 세계의 소리 중 가장 특이했다.


미지의 마법에 의해 룬테라에서 발생한 정체불명의 음악 소리는 그곳에 사는 필멸의 존재들처럼 원시적이고 가다듬어지지 않은 혼란스러운 상태였다. 그럼에도 그 소리에는 폭풍 속에서 울리는 천둥처럼, 나무로 된 풍경종이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처럼, 어떤 내재된 아름다움이 존재했다. 바드는 그것 자체로 감사함을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그 특이한 소리는 점차 천상의 소리와 견줄 수 없는 무언가가 됐고, 파괴적인 존재로 변하기 시작했다. 누군가 나서야 했다.


바드와 그를 따르는 작은 정령들은 아이오니아 최초의 땅으로 내려와 물질 세계로 향했다. 그러자 갑자기 바드의 귀가 눈으로 변했다.바드는 목관악기 연주자가 타고 다닐 듯한 유랑 마차에 달린 천과 장신구로 자신의 모습을 단순한 형상으로 빚었고 구멍 세 개가 뚫린, 묘한 분위기를 풍기는 둥근 가면을 썼다.


바드가 오랜 세월 물질 세계를 여행하는 동안, 바드와 만났던 이들은 혼란에 빠지기도 했고 기쁨에 차오르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바드는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복잡한 현상을 목도하게 됐다. 예측할 수 없는 원시의 힘을 가진 수많은 존재들이 잘못된 방법으로 룬테라로 가는 길을 만드는 것 같았고, 우주의 질서까지 어지럽히고 있었다. 천상으로 시선을 돌린 바드는 천상의 어떠한 힘이 이곳 지상에 작용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생각했지만, 이 현상의 목적이 무엇인지는 알 길이 없었다.


그럼에도 바드는 수호자의 역할을 도맡아, 어질러진 모든 것들을 찾아 더 이상 다른 존재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제자리에 되돌려 놓기 시작했다. 조화로운 세상을 위한 첫 발걸음에 불과했지만, 어쩌면 이것이 훗날 찾아올 무언가로부터 세상을 구원할 유일한 방법일지도 모른다.


바드는 미래를 볼 수 있는 존재이기에 훗날 거대한 물리적 충돌이 도래할 것을 알고 있다. 이는 단 하나의 세계가 아닌, 모든 세계에서 일어날 충돌이며, 그때가 오면 결국 바드는 어느 쪽에 서야 할지 선택해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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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릭 배경 이야기 업데이트

https://universe.leagueoflegends.com/ko_KR/story/champion/taric/

 

데마시아의 신성한 수호자라면 국왕과 국가를 위해 늘 이타적인 헌신을 기울여야 한다. 타릭은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병역의 이행을 유지하고자 단 한 번도 국가에 대한 책임감을 소홀히 한 적은 없었지만, 누구를, 무엇을 지켜야 할지 정의하거나 제한을 두지 않았다.


젊은 전사 타릭은 고된 훈련 끝에 출중한 무예 실력을 갖췄고, 얼마 주어지지 않은 여가 시간마저 할애하여 전투가 아닌 다른 방식으로 고국에 헌신했다. 타릭은 환자들을 간호하거나 홍수로 피해를 입은 집을 복구하는 데에 힘쓰는 빛의 사자 수도회에 자원했다. 고귀한 신념을 갖고 날개 수호자라는 건축물을 지은 석공들과 기술공들에게, 변변치는 않지만 자신만의 창의적 재능을 기부했다.


예술 작품들과 낯선 이들의 삶, 바로 이러한 것들이 타릭이 데마시아를 위해 싸우는 이유였다. 타릭은 이 모든 것들을 아름답고 연약하며 반드시 지켜야 하는 것으로 여겼다.


다행히 타릭은 상냥한 태도와 따뜻한 성격 덕에 동료 병사와 지휘관의 쓴소리도 가볍게 털어낼 수 있었다. 후에 타릭은 겸손한 마음으로 진급해 나갔고, 젊은 가렌 크라운가드와 함께 전투에 참여하기도 했다.


역설적이게도 타릭은 꾸준히 출세가도를 달렸지만 훗날 데마시아 내에서 최종적인 파국을 맞이하게 된다.


불굴의 선봉대원으로 진급한 타릭은 갑작스레 훨씬 더 높은 수준의 행동 수칙을 강요받게 됐다. 더 이상 숲을 배회하며 희귀한 동물을 찾아볼 수도 없었고, 선술집에 앉아 음유시인의 노래를 들으며 전투 훈련을 빼먹거나 부대 점검을 빠지는 일도, 은빛으로 빛나는 밤하늘을 지켜보는 일도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타릭은 자신과 이 생활이 맞지 않는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고, 이윽고 병영 수칙을 따르지 않는 인물로 주목받게 됐다.


타릭이 발로란의 위대한 전사가 될 자질을 가졌다고 생각한 가렌은 타릭에게 병사로서의 의무를 이행하도록 충고했다. 그럼에도 타릭은 자신의 국가뿐만 아니라 운명까지 외면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강등을 막기 위해 타릭은 선봉대의 검대장을 돕도록 파견됐다. 그 어느 쪽도 만족스럽지 않은 처사였다. 그러던 어느 날 전장에서 검대장과 그의 부하들은 모두 전사하게 됐다. 당시 타릭이 오래전 폐허가 된 근처 사원을 감상하고 있었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고, 결국 전시에 직무를 유기한 것으로 밝혀졌다.


그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수십의 병사가 전사했고, 타릭은 단두대에 올라섰다.


그때 그의 전우이자 검대장의 후계자인 가렌이 자비를 구했다. 가렌은 직접 타릭에게 '바위산의 왕관'이라고 불리는 데마시아의 전통적인 형벌을 선고했다. 이는 타곤 산을 등반해야 하는 형벌로, 살아서 돌아올 수 있는 자는 거의 없는 형벌이었다.


사실 바위산의 왕관은 불명예스러운 자를 데마시아에서 추방하여 유배자로서 살아가도록 하기 위한 방편이었으나, 타릭은 실수에 대한 죗값을 치르기 위해 남쪽으로 향하는 배에 몸을 실었다.


산을 오르는 동안 몇 번이나 목숨을 잃거나 정신이 나갈 뻔한 적이 있었지만, 타릭은 모든 고통을 견뎌냈고, 전사한 전우들의 망령도 이겨냈으며, 이 거대한 산이 내린 다른 시련들도 극복해냈다. 정상에 다다르자, 타릭에게 죽음과 파괴의 환영이 펼쳐졌다.


알라바스터 대도서관이 연기와 불길에 휩싸인 광경을 보고 지옥 같은 화염 속으로 뛰어 들어가 퉁의 시집을 꺼내왔지만, 어느 서리방패 부족민들이 마지막 한 마리 남은 꿈사슴을 칼바람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모습에 비통함이 가득한 고함을 지르며 까마득한 절벽 아래로 몸을 던져 사슴을 구하려 하기도 했다. 급기야 불멸의 요새 입구의 교수대에 매달려있는 가렌의 처참한 모습을 보고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무너져 버린 타릭은 방패를 치켜들고 녹서스군을 향해 돌진했다.


환영이 사라지자 타릭은 산 정상에 서 있었으며, 혼자가 아니었다. 그의 앞에 인간 형체를 빌린 무언가가 도드라져 있었다. 별빛으로 이글거리는 수정과 같은 형태였으나, 그 목소리는 몇천 명이 속삭이는 듯했으며, 칼날처럼 타릭의 몸을 뚫고 지나갔다.


그 존재는 사실을 말해주었다. 사실 타릭은 평생 이 순간을 위해 살아온 것이고, 살면서 내린 모든 결정이 이곳 타곤 산까지 그를 인도한 것이라고 말이다.


훗날 대전쟁에 참전하게 될 발로란의 방패가 탄생한 순간이었다.


 

필멸의 존재가 상상할 수 없는 천부적인 힘과 함께, 수호자의 성위로 다시 태어난 타릭은 온 세계의 굳건한 수호자로 살아갈 운명의 부름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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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이 배경 이야기 업데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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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곤의 성위답게, 조이는 전통적인 방식으로 천상의 이목을 끌지 않았다. 가능성이 희박한 상황에서 승리하거나 고귀한 사상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거나 타곤 산을 오르는 존재론적 시련을 극복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조이는 평범한 소녀였고 라코어 부족에 의해 무작위로 선택된 것 같았다.


조이의 선생들은 조이가 상상력이 풍부한 아이지만 고집이 세고 게으르며 산만한 말썽꾸러기라고 평했다. 조이가 성스러운 마법 공부를 거르고 '좀 덜 지루한' 무언가를 찾아 달려가던 어느 날, 여명의 성위가 그녀를 주목했다.


성위는 소녀가 마을에서 자신을 쫓아 오던 학구적인 사제들의 성난 외침을 장난스럽게 따라 하는 것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한 시간의 추격 끝에 조이는 절벽에 다다르게 됐다. 조이의 선생들이 조이를 잡기 전에 성위는 금화 주머니, 칼, 완성된 노트, 예배 덮개, 비단 밧줄, 장난감 공, 이렇게 여섯 개의 물건을 소환했다. 이 중 다섯 개를 이용하면 그녀는 도망가거나 상황을 모면할 수 있었다.


조이는 여섯 번째 물건을 골랐다.


도망치거나 용서를 구할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던 조이가 장난감 공을 집어 옆집 벽 쪽으로 차버리고서는 노래를 불렀고, 그 소리는 유머 감각이라고는 없는 사제들 사이에 경쾌하게 울려 퍼졌다.


훗날 다르킨 전쟁의 종식을 예고할 이 성위는 위기 속에서 이토록 유쾌한 무례함을 발휘한 인물을 본 적이 없었다. 근심 걱정 없어 보이는 조이의 활력에 감탄한 성위는 타곤 산 정상으로 이어지는 빛나는 문을 하나 열어 조이에게 우주를 볼 기회를 주었다. 입구 속으로 거꾸로 다이빙하던 조이는 성위와 순식간에 합쳐졌고, 문밖으로 사라지면서 아연실색한 선생들에게 혀를 내밀었다.


사실 조이가 보여준 초월적인 능력은 모든 신화와 타곤의 전설에서도 전례 없는 일이었다. 성위를 다스리는 규칙이 조이 때문에 바뀌었지만, 조이는 전혀 규칙에 구애받지 않았다. 오히려 필멸자의 세계를 이해하고자 조이는 여러 현실 차원을 여행했고, 이제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전례 없을 초월적 능력을 선보였다.


거의 일 년이란 시간이 지났을 무렵, 조이가 고향으로 돌아왔을 땐 이미 룬테라의 세계에선 수 세기가 지난 후였다. 호기심에 가득 찬 십 대 소녀 조이는 자신이 여행을 하는 도중 과연 놓친 것들이 무엇이 있을까 궁금해했다. 다행히 조이는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시간의 흐름을 횡단할 수 있었다. 일련의 사건 가운데 조이가 목도한 것은 '덩치 큰 못된 갑옷' 모데카이저의 죽음과 부활 '으스스한 유령 파티'로 인한 축복의 빛 군도의 파괴 '반짝거리는 돌덩이들의 전쟁'인 대격변 '너무 지루한 숲' 근처에서 발생한 별 볼 일 없는 국가의 건국 등이었다.


한 가지는 확실했다. 조이는 혼자가 아니었다. 더 많은 성위들이 필멸 세계에 존재하고 있었다. 조이에게 더 많은 친구가 생긴 것이다! 하지만 다른 성위들은 조이를 무시하며, 무언가 각 세계에서 행하고 있는 업무에 집착하고 있었다. 호기심을 느낀 조이는 별들을 여행했고, 그러던 도중 우주의 용 아우렐리온 솔을 발견하게 됐다.


아우렐리온 솔은 조이와 같은 성위들을 경멸하기에, 마찬가지로 조이에게도 경멸의 눈길을 보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조이는 그의 옆으로 다가가 무엇이 그를 화나게 했는지 알아내려고 애썼다. 과장 섞인 오만한 비판을 듣고 보니, 동료 성위들이 그에게 치욕스러운 일을 저질렀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바로 그의 힘을 뺏기 위해 저주받은 유물을 씌워놓은 것이다.


조이는 이 불쌍한 '우주 강아지'에게 측은함을 느꼈고 그를 지키기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해주리라 약속했다. 아우렐리온 솔은 오랫동안 품고 있던 복수의 한을 풀려고 했으나, 조이를 해칠 수 있는 위협적인 행동은 멈추게 되었다.


이렇게 맺은 조이와 별의 창조자 아우렐리온 솔과의 인연은 흥미로운 부분이다. 이 둘의 사이가 변덕이나 소유욕 때문인지, 아니면 조이가 우주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맺어진 것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타곤 산의 신비주의자와 학자들의 입장에선 사실 성위가 나타났다는 것은 경사스러운 일이지만, 예측할 수 없는 조이의 행보를 보면 잠시 생각을 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조이의 존재가 어떤 현상을 초래하게 될지 알 수도 없기 때문이다. 현재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룬테라에 막대한 변화가 일어날 것이고, 아마 그 변화의 대가는 혼돈과 파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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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븐 배경 이야기 업데이트

https://universe.leagueoflegends.com/ko_KR/story/champion/riven/

 

무수한 전쟁의 토대 위에 세워진 녹서스에서는 전쟁고아가 사라질 날이 없었다.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어느 전투에서 아버지를 잃은 리븐은 어머니마저 그녀를 낳다가 사망한 후 트레베일의 바위투성이 산비탈에 위치한 국영 농장에서 자랐다.


농장의 아이들은 육체의 힘과 필사적인 의지로 삶을 이어나가며 고철을 주웠지만, 리븐은 단순히 주린 배를 채우는 것 이상의 무언가에 목말라 있었다. 그녀는 지역 군부대의 징집관들이 매년 농장을 방문하는 것을 보고 그들에게서 자신이 꿈꾸는 삶을 개척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했다. 마침내 제국에 자신의 힘을 바치기로 서약한 날, 리븐은 녹서스가 자신을 그토록 되고 싶었던 제국의 딸로 받아주리라는 것을 알았다.


리븐은 역시 타고난 군인이었다. 비록 어리지만 수년간의 고된 노동으로 단련된 그녀는 자신의 키보다 긴 장검의 무게를 이내 감당할 수 있게 되었다. 전투의 열기 속에서 리븐은 새로운 가족을 얻었고, 전우애로 맺어진 형제자매들과의 유대는 깨지지 않을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제국에 대한 리븐의 헌신이 너무나 독보적이었기에 보람 다크윌은 그녀에게 검은 금속을 벼려낸 룬 검을 친히 하사했는데, 이 검에는 그의 궁정 소속원인 창백한 여마법사의 마법이 걸려 있었다. 무게는 카이트 실드보다 무겁고 너비는 비슷했다. 리븐의 취향에 딱 맞는 검이었다.


오래 지나지 않아 녹서스군은 오랫동안 계획해 온 침공의 일환으로 아이오니아를 향해 닻을 올렸다.


새로 시작한 전쟁은 예상보다 길어졌고, 아이오니아가 무릎을 꿇지 않으리라는 것이 명백해졌다. 리븐의 부대가 맡은 임무는 포위 공격 중인 나보리 지역으로 진격하는 다른 부대를 호위하는 것이었다. 그 부대의 대장 에미스탄은 자운 출신의 연금술사를 고용했는데, 새 무기를 시험해보고 싶어서 안달이 난 사람이었다. 리븐은 녹서스를 위해 기꺼이 생명을 바칠 각오로 수없이 많은 전투를 치렀지만, 지금 이 부대원들에게서는 비뚤어진 무엇인가가 있었다. 그리고 그 무언가가 리븐의 심기를 매우 불편하게 했다. 이들이 무기와 함께 운반하고 있는 항아리들은 리븐의 눈에는 그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짐으로 보일 뿐이었다.


두 부대의 격전은 점점 더 격렬해져만 갔고, 심지어 부근의 땅조차도 그들을 탐탁히 여기지 않는 기운이 감돌았다. 거센 비바람이 치는 와중에 언덕에서 진흙이 쏟아져 내려와 리븐과 전사들은 치명적인 그들의 짐과 함께 오도 가도 못하게 되었다. 바로 이때 아이오니아의 전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위험을 목도한 리븐은 에미스탄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리븐이 받은 답은 능선에서 날아온 한 발의 불화살이 전부였다. 리븐은 이 전쟁이 더 이상 녹서스의 국경을 넓히기 위한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어떤 대가를 치르든 상관없이 적을 완전히 말살시키려는 참극에 불과한 것이었다.


화살은 수레에 명중했다. 리븐은 본능적으로 검을 빼 들었으나 자신을 제외한 다른 이들을 보호하기엔 이미 늦었다는 걸 깨달았다. 금이 간 항아리에서 화학 물질의 불기둥이 치솟고, 비명소리가 밤을 메웠다. 아이오니아군과 녹서스군 모두가 고통스럽고 소름 끼치는 죽음을 맞았다. 검의 마법 덕분에 모든 것을 태워버릴 듯한 독성 안개로부터 몸을 보호할 수 있었던 리븐은 뜻하지 않게도 그녀를 영원히 괴롭힐 공포와 배신의 산증인이 되어 버린 것이다.


리븐에게 이후의 기억은 파편과 악몽으로만 존재한다. 상처를 싸매고 죽은 자들을 애도한 어렴풋한 기억처럼. 그러나 무엇보다도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검을 증오하게 되었다. 검에 새겨진 글귀는 리븐이 잃어버린 모든 것을 환기시키며 그녀를 조롱하고 있었다. 그녀는 녹서스와 자신을 이어주는 마지막 끈을 끊어버리기 위해 동이 트기 전 검을 부러뜨리려 했다.


그러나 검이 마침내 산산조각이 났음에도 그녀는 평화를 찾을 수 없었다.


일생을 지탱하고 있었던 믿음과 확신이 한순간에 사라져 버린 리븐은 스스로를 추방한 채 전쟁이 무참히 할퀴고 지나간 아이오니아를 방랑했다. 긴 방랑 끝에 리븐은 자신의 검을 산산조각 냈던 마을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녀 내면의 파괴성이 그 마을에서 가장 존경받던 원로의 목숨을 빼앗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나, 그럼에도 아이오니아는 용서와 함께 리븐을 품었다.


허나 녹서스는 결코 자비롭지 않았다. 오래전 최초의 땅에서 물러나긴 했지만, 녹서스는 리븐과 그녀의 룬 검을 잊지 않았다. 리븐은 더 이상 자신으로 인해 아이오니아 인들이 희생되지 않길 원했기에, 그녀에게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온 자들과 맹렬히 싸운 후 탈영이라는 죄목의 심판을 받기 위해 녹서스로 돌아가 자수했다.


녹서스로 돌아와 족쇄를 찬 리븐의 모습엔 근심이 가득하다. 더 이상 다크윌은 존재하지 않고 제국이 재건되었다는 것도 소문임을 알게 됐지만, 그녀 자신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 이 모든 것을 반복할 운명인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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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네 단편소설: 단절

by 마이클 이차오

https://universe.leagueoflegends.com/ko_KR/story/yone-color-story/

 

한 소년이 겁에 질려 전력으로 질주하고 있었다.


점차 희미해지는 은색의 달빛 아래, 어둠이 소년의 주변을 삼키기 시작했고 아주 희미한 별빛만이 흐릿한 밤을 비추고 있었다. 나무들의 실루엣이 모습을 드러냈다. 소년이 손에 쥐고 있는 깜빡거리는 등불은 자칫하다간 불이 꺼질 것만 같았다. 허나 소년이 두려워한 것은 어둠이 아니었다.


바로 어둠 속에서 소년을 쫓고 있는 '무언가' 때문이었다.


심장을 움켜쥘 것만 같은 두려움, 여름 공기에서 느껴진 기이한 한기, 이것이 소년이 처음 느꼈던 것이다. 늦은 시각 깊어진 밤이라면 더욱 떨쳐버리고 싶었던 꺼림칙한 느낌이었으리라. 소년은 제멋대로 부정적인 상상력을 발휘한 탓에 스스로 자책했을지도 모른다. 소년의 나이는 열세 살. 사실 흔들리는 그림자와 해를 끼치지 않는 영혼을 보고 겁에 질리기엔 너무 많은 나이였다.


하지만 이 영혼은 반짝이는 푸른 눈을 뜬 채 소년의 영혼을 바라보았다. 이윽고 그림자는 소년의 '이름'을 속삭였다.


소년은 아직도 그것이 따라오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용기를 내어 눈을 돌렸고, 무언가에 부딪치고 말았다. 소년은 거친 숨을 내쉬며 한 걸음 물러섰다. 손에 쥔 등불은 달그락 소리를 내고 있었으며 등불은 희미한 빛과 함께 몹시 떨리고 있었다. 이때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무언가를 보자 소년의 당황스러움과 고통스러움이 급격히 공포라는 감정으로 전환되었다.


상체를 헐벗은 호리호리한 남자가 서 있었다. 유달리 추운 밤이었음에도 남자는 내색조차 하지 않았다. 하반신 쪽을 보니 헐거워진 예복이 바람에 부풀려 있었다. 허리에 매인 밧줄에 기이한 가면들이 묶여 있었고, 석고 안에는 무시무시한 얼굴들이 갇혀 있었다. 양팔에는 붕대가 감겨 있었는데, 양손에 검을 한 자루씩 쥐고 있었다. 달빛에 반짝이는 강철검과 불길한 기운을 뿜어내는 붉은색 검이었다.


무엇보다 남자의 얼굴이 소년을 얼어붙게 했다.


남자의 붉은 검처럼 가면에서 붉은빛이 나왔고 그 가면을 통해 차가운 두 파란 눈이 소년을 바라보고 있었다. 남자의 얼굴을 움켜쥔 듯한 가면은 그의 찡그린 얼굴을 거의 집어삼킨 듯했다.


"오, 오지 마!" 소년은 간신히 말했다.


"네가 두려워해야 할 건 내가 아니다." 나지막이 그의 목소리가 울렸고, 남자는 소년 뒤에 무언가를 빤히 바라보았다.


남자의 눈길이 향한 곳을 본 소년은 혼란스러움에 이맛살을 찌푸렸다. 무언가가 발밑에서 재빨리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다.


안개 속에서 흐릿한 형상이 맴돌고 있었다. 낯선 남자가 알려주지 않았다면 소년은 알지 못했을 것이다. 안개는 비틀려 커다란 눈과 가느다란 눈동자가 되었고 느릿하게 움직이는 몸통이 드러났다. 소년은 눈을 가늘게 뜨고 보았다. 안개 속에서 이빨로 보이는 무언가가 반짝거렸다.


한 번도 본 적이 없지만 왠지 낯이 익은 느낌이었다. 마치 소년은 이것을 알고 있는 듯했다. 무언가 소년을 이끌었고 소년은 머뭇거리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때 무언가 차가운 것이 소년의 가슴에 꽂혔다.


붉은빛을 내는 검날의 끝을 본 소년은 충격에 휩싸였다. 고통과 피를 상상하자 극심한 공포를 느끼듯 소년의 숨은 거칠어졌고 정신은 온데간데없었다. 온몸이 마비되기 시작했다. 소년의 뒤에선 남자가 중얼거렸고 그들 앞에서 기이한 인장이 공중에 나타났다. 마치 보이지 않는 붓으로 그려낸 것 같았다. 어떤 단어 또는 이름이었다. 소년은 무슨 의미인지 알지 못했다.


"이게 뭐, 뭐—"


남자는 소년을 무시한 채 말했다. "내 검이 네 정체를 드러낼 것이다, 아자카나."


소년은 자신의 몸을 통해서 그 검이 나온 것처럼 느꼈고 털썩 무릎을 꿇고는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 하지만 손으로 가슴을 대보니 구멍이 난 흔적이나 상처 등은 없었다. 더 이상한 것은 마치 짐을 내려놓은 듯 몸이 더 가벼워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위를 바라보니 빼곡한 이빨이 보였다.


그때 괴물이 달려들었다.


철이 맞부딪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가면을 쓴 낯선 남자는 소년 앞에 서 있었고 괴물의 거대한 송곳니를 두 검으로 막고 있었다. 아니, 남자가 아니라 흐릿한 영혼의 모습이었다. 뒤를 돌아보니 남자는 눈을 감은 채 마치 명상을 하는 것처럼 서 있었다. 싸늘한 공기가 소년의 뼈에 스며들 듯 흐르는 전율이 등골을 오싹하게 했다. 소년은 자신의 영혼이 요동치고 있음을 느꼈고, 그들의 존재가 피부로 느껴질 정도였다. 소년은 두려움과 경외심을 갖고 바라보았다.


'누구지?'


흐릿한 형상의 검사는 괴물을 뒤로 밀어냈고 덩굴 모양의 연기로 소용돌이치더니 소년을 스쳐 다시 남자의 육신으로 되돌아갔다. 끔찍한 괴물이 앞에서 울부짖고 있었다. 소년이 눈을 가늘게 뜨자 안개 속에서 괴물의 엉겨 붙은 털, 발톱, 거대한 몸통이 보이기 시작했다. 소년이 눈을 크게 뜨고 괴물의 모습을 제대로 보려 하니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감히 내 뜻을 거역해? 이 세계의 것이 아닌 듯한 거친 목소리가 소년의 마음속으로 들려왔다. 이 녀석은 내 거야.


소년의 가슴이 철렁했다. '말을 할 수 있나?'


남자가 초연하게 말했다. "이 세계에선 그 무엇도 네 것이 될 수 없다. 꿇어라, 탄 코우!"


소년에겐 아무 의미 없는 말이었지만, 그 자체만으로도 소년의 피부에 소름이 돋았다. 하지만 그 말을 들은 괴물은 귀청이 터질 듯한 비명을 내질렀다. 괴물의 뒤틀린 듯한 구불구불한 근육이 창백한 이빨과 발톱을 감쌌다. 괴물은 끔찍한 얼굴로 새빨갛게 빛나는 네 개의 눈을 찌푸렸고, 느릿하게 움직이는 회색 털의 반짝이는 몸통을 노려보았다.


"이름이 밝혀졌으니 네 정체는 드러났다."


저항의 울부짖음이 대지를 흔들었다. 남자는 두 검을 쥔 채 자세를 낮췄다.


"소멸해라."


괴물이 덤벼들자 남자도 순식간에 돌진했다. 너무 빨랐던 탓에 소년의 눈은 남자의 움직임을 따라갈 수 없었다. 두 검이 달빛을 가로지르자 하나는 은색 빛을 반짝였고, 다른 하나는 공중에 붉은 흔적을 남겼다. 괴물이 고꾸라지자 땅이 붉게 물들었다.


"잠들어라, 아자카나. 넌 해방되었다." 남자는 성큼성큼 걸어가 괴물을 향해 두 검을 내리꽂았다. 괴물의 포효는 점차 조용한 숨소리로 바뀌었다.


소년은 괴물의 형체와 흉측한 얼굴이 소용돌이치는 안개 속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빤히 바라보았다. 이윽고 형체가 줄어들더니 인간과 비슷한 모습으로 석회화됐고 결국 가면으로 변했다. 소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가면은 뒤틀리고 과장된 네 개의 눈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어딘가 애절하고 이상하게 자신을 닮은 듯한 느낌이었다.


가면은 스스로 떨리더니 공중으로 떠올라 남자의 손으로 날아갔다. 검을 거둔 남자는 가면을 허리춤에 매달린 다른 가면들과 함께 엮은 후 떠나려 몸을 돌렸다.


"누구신가요?" 소년이 물었다.


"한 때는 나도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알았다..." 남자는 말을 멈춘 채 소년을 빤히 바라보았다.


질문이 소년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그 괴물... 저 때문인가요?"


"네 슬픔을 잡아먹고 사는 악몽일 뿐. 더 이상 그 괴물에게 네 모습이 드러날 일은 없을 거다."


소년은 입술을 깨물었다. "제 잘못이에요. 제가 나약해서, 항상 무엇하나 제대로 하지 못해서요. 아버지 말씀이 맞아요."


남자가 소년에게 다가가려는 듯 아무 말 없이 돌아서자 소년은 습관적으로 흠칫 놀랐다. 낯선 남자의 표정은 전보다 훨씬 부드러웠다.


"사랑하는 이들의 말에 가장 큰 상처를 받지." 남자는 허리춤에서 가면을 꺼내 살펴봤다. "절망은 우리의 목소리를 집어삼키고, 정신이라는 탈을 쓴 채 결국 진정한 자신의 뒤틀린 모습만 보여줄 뿐이다."


남자는 소년이 볼 수 있도록 가면을 높이 들어 보였다. 겉보기엔 작고 연약하고 더 이상 이빨 따윈 없는 가면을...


"거짓을 꿰뚫어 진실을 찾아라." 남자는 아주 옅은 미소를 띠었다. "넌 잘할 수 있을 거야, 안두."


낯선 남자는 어두운 숲에 소년을 남긴 채 발길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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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장의 자매들 3편: 돌이킬 수 없는 상처

by 이안 세인트 마틴

https://universe.leagueoflegends.com/ko_KR/story/sisterhood-of-war-iii/

 

 

빛이 꺼져 간다.


태양이 수평선 너머로 모습을 감추자 하늘은 서서히 검게 물들기 시작했고 붉은 잔물결이 얼룩을 남기며 퍼져 나갔다. 태양이 하루의 끝을 알리며 따스하게 메아리쳤다. 내 갑옷과 검에도 붉은 자국이 남아 있다. 오늘 앗아간 이들의 목숨이 외치는 마지막 울림이겠지. 처음 며칠 동안은 후유증 탓에 죄책감을 씻어 내려고 붉은 자국을 닦거나 죽음을 잊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죄책감이란 건 쉽게 없어지지 않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죄책감을 덜어내는 일은 포기하게 됐다.


진홍색 망토를 두른 누군가가 휙 소리를 내며 내 옆 보루에 털썩 주저앉았다. 곁눈질로 계급을 확인할 수 있었다.


"대위님." 내가 일어나며 말했다.


"괜찮아." 그녀가 손을 젓는다. 이제 나도 병사를 이끌고 있으니 그녀와 동등한 지위임을 깜빡했다. 하지만 실감이 안 났다. 그녀는 귀족 출신이고, 나는 고아 출신의 검사니까.


그녀는 우리가 구릉지까지 호위 중인 기병대의 장교이다. 우린 함께 젖먹던 힘까지 내가며 교착 상태를 돌파해 왔다. 그녀는 제국의 관심을 받을 정도로 자부심이 뛰어났고 노련했으며 용맹했다. 그녀는 잠시 나를 바라보더니 말했다. "좀 쉬는 게 좋겠는데."


나는 힐끗 바라봤다. "놈들은 아이들의 비명을 내는 폭탄으로 우리를 급습하거나 밤중에 찾아와 쥐도 새도 모르게 공격할 거예요."


그녀의 눈동자가 생각에 잠긴 듯했다. "제9부대 장교가 그러는데, 놈들은 꿈에 들어와서 목숨을 빼앗을 수도 있다는군."


"꿈이요?" 내가 물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난 숨을 내쉬며 물었다. "그럼 꿈에서 목숨을 빼앗긴다면 어떻게 하실 건가요?"


그녀는 어깨를 으쓱하며 지친 기색의 미소를 보였다. "꿈을 잊어야겠지."


늘 그녀 곁을 지켜 주는 군마가 하나 있는데, 왠지 근처에 말 소리가 들리지 않아 물었다. "말은 어디에 있나요?"


그녀의 얼굴빛이 어두워졌다. "지난주 우리가 점령했던 땅, 그곳의 마녀 때문이야..."


난 그날의 기억이 떠오르지 않도록 두 눈을 감고는 마른 침을 삼켰다.


그녀는 말을 이어 갔다. "마녀가 죽기 전 내 말에게 무언가를 속삭이더군. 시간이 지날수록 몸이 만신창이가 되는 저주를 건 거야. 오늘 아침, 결국 녀석은 일어나지 못했지."


"유감입니다."


"고통스러웠을 거야. 그래서 고통을 덜어 줬지." 그녀가 날 바라보곤 물었다. "자네도 고통스럽나?"


그녀와 시선이 마주치자 싱긋 부드러운 미소를 보였다.


"안심해. 지금 제국엔 네가 필요해. '그게' 말이야."


그녀는 땅에 박혀있는 육중한 검을 향해 턱을 기울였다. 아직도 내 검에는 붉은 자국이 남아 있었다.


"그 검은 하늘의 선물이야." 그녀가 신중히 단어를 고르며 말했다. "네가 이 검을 익숙하게 휘두르는 걸 본 적이 있지.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 하늘의 선물이 무거운 짐이 될 수도 있거든. 넌 여태 굳건하게 잘 버텨 온 거야. 네가 짊어지고 있는 짐이 너무 부담되면 내가 대신 들어 줄게."


"아닙니다." 반사적으로 손이 검으로 향했다. 어마어마한 무게에 안도감을 느꼈다. "제가 짊어진 짐은 제 몫이죠. 설령 제가 부서지는 한이 있어도 다른 사람이 짊어지게 할 순 없어요."


그녀는 침묵 속에서 잠시 나를 차가운 눈빛으로 살펴보다 미소를 지었다. "내 말은 부담 가질 필요 없다 이거야. 아까 말한 것처럼, 우린 지금 네가 필요해. 이미 전장에서 피를 나눈 사이니, 자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이른 밤 아이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그 소리는 기이할 정도로 긴 소리를 내며 공중을 맴돌았다. 잠을 잔다는 건 이곳에서 불가능하게 느껴졌다.


"정말 끔찍한 곳이지만, 우리가 함께라면 이겨낼 수 있을 거야."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가슴에 주먹을 댔다. "다크윌을 위하여."


"다크윌을 위하여. 감사합니다, 대위님."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그냥 마리트라고 불러."


리븐은 식은땀을 흘리며 눈을 떴다. 상처 때문에 기억에서 벗어났다 다시 평야의 고요 속으로 돌아갔다. 모든 감각이 '현재'에 맞춰졌다. 대지와 추수 때를 기다리는 농작물에서 나는 풍요로운 냄새, 상쾌한 공기, 진홍색으로 물들어가는 나뭇잎, 햇빛의 열기가 리븐의 피부에 닿았다.


리븐은 황금빛 태양이 널따란 잎과 줄기 사이로 내리쬐는 논밭 사이를 걸었다. 그 순간 리븐은 밭을 일구던 어린 시절로 돌아갔다. 그녀가 키운 보리는 그녀보다 높이 자라거나 최초의 땅 구석구석까지 퍼진 마법 문양으로 빛나지는 못했다. 몇 걸음 갈 때마다 빈 곳이 나왔다. 햇빛이 추수가 끝나 황량한 밭을 비추었다. 엄청난 양의 수확물은 이미 장에 내놓았다. 리븐은 빈 곳을 지날 때마다 멈춰 태양 아래 서서 속이 뒤틀리는 기분을 느끼며 햇볕을 쬈다.


해는 중천에 떠 있었다. 하루 중 가장 더울 때였다. 리븐은 이마 쪽으로 팔뚝을 올리고는 바짝 마른 목을 가다듬었다. 목이 말랐다.


줄기 사이를 벗어나니 아사가 보였다. 아사는 두 손에 물이 든 가죽 주머니를 들고 리븐을 기다리고 있었다. 사실 이전에 리븐은 장에 다녀온 날 이후 양아버지와 멀리 떨어져 지냈다. 생각할 시간을 드리고 싶었던 것이다.


자신의 부인을 묻어 줘야 했으니까.


"곧 수프 준비되니까 앉으렴." 아사는 내려다보며 말했다. "이번에도 너무 많이 만들었군. 내 정신 좀 보게."


리븐은 샤바 콘테를 위해 지은 묘지를 바라봤다. 샤바는 리븐에게 있어 어머니라고 할 수 있는 존재 중 가장 가까운 사람이었다. "용서해 주세요, 파이르."


"무슨 용서?" 아사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다.


"장을 보러 갔던 그 날, 저 혼자 가야 했어요." 리븐은 말을 이어 나갔다. "그때 계셨더라면—"


"온 세상의 짐을 네가 떠맡을 필요는 없다." 아사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별들이 하늘에서 움직이는 길도, 장막 너머에 일어나고 있는 움직임도 네가 알 필요는 없지. 세상의 조화는 위대하단다. 우리의 힘이 닿지 않는 영역이야."


"그래도 여전히 죄책감이 들어요."


"책임은 자신이 선택한 행동에 달려 있지." 아사는 리븐에게 물을 건네줬다. "난 네 마음을 느낄 수 있단다, 디에다. 그 순수한 마음을."


"꼭 그렇지는 않아요." 리븐은 물이 든 가죽 주머니를 받고선 묘지를 바라보았다. "샤바가 그리워요, 파이르."


아사는 리븐 곁에 서서 말했다. "나도 그립단다. 하지만 샤바를 위해 슬퍼하지는 않을 거다. 우리에게서 사라진 게 아니니 말이다. 그녀를 발견했을 때 고통 없이 영원한 안식을 취하는 것처럼 평안해 보이더구나. 다음 해 꽃이 피어날 무렵 다시 만날 수 있을 거야."


리븐은 뺨에 눈물이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영혼의 꽃이 피어날까요?"


"샤바 말이냐?" 아사는 활짝 웃었다. "글쎄, 한 송이로는 그녀를 담을 수 없을 것 같구나. 과수원 정도는 되어야지."


리븐은 아사를 올려다보며 미소 지었다. 하지만 그의 얼굴에서는 기쁨을 찾을 수 없었다. 리븐이 돌아보자 아사는 얼어붙은 채 멀리서 나타난 무리의 인영을 바라보고 있었다.


리븐의 피가 차게 식었다. 리븐은 자신 안에 있는 확실함, 더 이상 도망칠 수 없는 필연성을 느끼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모닥불 냄새가 그녀의 코에 피어올랐다. 길에서 만났던 치료사의 말이 머릿속에 메아리쳤다.


"파이르, 숨어요." 리븐이 주먹을 쥐며 말했다.


"농사라니, 정말." 마리트는 한숨을 내쉬었다.


에라스는 자매들을 따라 움직였다. 그들은 앞에 펼쳐진 대륙을 바라보았다. 오래전 죽은 신의 부러진 갈빗대를 연상하게 하는 장대한 바위기둥들이 동쪽으로 줄지어 있었다. 서쪽엔 진홍빛으로 물든 숲이 펼쳐져 있었고 그 사이로 변변찮은 농가도 있었다.


"전쟁이 리븐을 정말 망가뜨린 건지도 몰라." 티팔렌지가 말했다. 화학 공격으로 폐허가 된 장소를 떠나 이동하자 희미한 소리를 내던 그녀의 검은 크게 울려 퍼지는 소리를 내었다. 들리기보다는 느껴지는 그 감각은 몸서리치게 하고 이를 꽉 물게 했다. "리븐은 뭐든 기르고 만들려는 거야. 자신의 과거를 달래려는 거지."


마리트가 코웃음 쳤다. "밭에 심고 길러 추수한 작물을 장에 파는 건가. 시인이나 할 만한 일을 하고 있군."


"일단 리븐이 살아 있어야 한다는 걸 잊지 마." 아렐이 첫째의 머리를 만지며 말했다.


"살아 있다라. 여러 해석이 가능한 말이네. 팔다리 중 몇 개를 남기면 살아 있다고 할 수 있을까?"


"마리트..." 테네프가 경고하듯 말했다.


마리트가 레이디 헨리에타 위에서 내려다보며 말했다. "우릴 배신한 녀석이야. 군대도, 녹서스도 아닌 우리를 배신했다고. 탈영병과 배신자에게 베풀어 줄 자비 따윈 없어. 다들 잊어버린 거야?"


테네프가 마리트와 시선을 마주했다. "잊지 않았어. 하지만 냉철하게 생각해. 우린 반드시 리븐에게 족쇄를 채운 채 제국으로 돌아가야 해. 무슨 말인지 알겠어?"


에라스는 그들의 말을 들으며 탈츠에게 다가가 탈츠의 옆구리를 쓰다듬었다. 대화에 끼지 않았지만 에라스는 어느 정도 공감했다. 특히 마리트가 탈영병에 대해 신랄하게 이야기하는 부분이 그랬다. 여태 일어난 일을 돌이켜 보니 에라스는 마리트에게 화가 나기보다는 그녀의 말에 동의하게 되었다. 아버지의 배신은 비수처럼 여전히 에라스의 가슴속에 박혀 있었다.


에라스가 따라잡을 수 있도록 테네프는 몇 발자국 뒤로 갔다.


"그렇지만 순순히 나올지 의심이 되는데. 분명 일이 쉽게 끝나진 않을 거야." 테네프가 족쇄를 팔뚝에 감으며 말했다.


"그런 상황을 기대하고 계신 것 같은데요." 에라스가 답했다.


테네프가 비꼬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 "만반의 준비를 해 둬. 전에 했던 것처럼 하면 돼. 저번 전투에서 잘했잖아."


에라스가 비웃듯 말했다. "그럼 제가 무서워서 눈물이나 질질 짤까 봐요? 무슨 데마시아 여자애도 아니고."


자매들은 하나같이 뒤돌아 에라스를 쳐다봤다.


"왜요?" 에라스는 자매들을 한 명씩 쳐다봤다. "그러니까 '데마시아' 여자애 말이에요." 자매들은 다시 등을 돌렸다.


아렐은 계속해서 소리를 내는 티팔렌지의 검 때문에 얼굴을 찌푸리며 티팔렌지를 바라보았다. "아직도 그렇게 소리 내야 해?"


"아니." 티팔렌지가 웃었다. 티팔렌지가 룬이 세공된 검을 쓰다듬자 소리가 멈췄다. "냄새는 필요 없어. 이제 사냥감이 눈앞에 있으니 직접 느낄 수 있지."


무리는 농장을 향해 걸어갔다. 에라스는 자매들이 걸어가며 조용히 전략을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어디에 설지, 각도와 지형, 전투가 벌어지면 누가 나설 건지에 대해 따분하고도 무서우리만큼 침착하게 토론했다. 그러면서도 그들의 손은 모두 무기를 꽉 쥐고 있었다.


자매들은 마치 요새를 포위하거나 전장에서 전군을 맞닥뜨리기라도 한 것처럼 대화했다. 그들은 리븐의 힘을 알고 있듯 조심스러웠다. 에라스는 마법의 검을 휘두르며 자신이 벤 적들의 피를 뒤집어쓴 잔혹한 전쟁 여왕의 모습을 떠올렸다.


에라스는 그 모습과 외딴 농가가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곳은 고요했다. 에라스가 아이오니아를 여행하던 내내 마주했던 장엄함과 혼란이 거짓이었던 듯 잔잔했다. 그는 잠시 동안 다사다난했던 여정이 목적지에 다다른 것이 현실인지 고민했다. 불멸의 요새를 올려다봤던 게 오래전 일처럼 느껴졌다.


에라스가 과거에 어떤 인물이었든, 지금 이곳에 있는 에라스는 제국의 임무를 수행하고 반역자에게 정의를 보여 줄 준비가 되어 있었다.


탈츠가 우르릉거리며 목이 막힌 듯한 소리를 냈다. 에라스가 인상을 찌푸린 채 탈츠의 입에 팔을 넣어 침에 젖은 닭 뼈를 꺼냈다.


"닭고기는 언제 먹은 거야?" 에라스가 중얼거렸다.


탈츠가 앓는 소리를 냈다. 에라스는 탈츠를 잠시 바라보다 말했다. "이리 와." 에라스는 탈츠의 고삐를 잡은 후 뼈를 내던졌다.


험한 흙길이 농장으로 이어졌다. 농장으로 향하며 에라스는 그곳을 관찰했다. 아이오니아 특유의 조직적으로 겹겹이 짜인 집이 있었고 소를 한두 마리는 키울 수 있을 정도로 큰 헛간과 이미 부분부분 추수가 끝난 작은 밭이 있었다. 에라스도 훈련을 통해 배운 대로 자매들과 같이 생각을 하게 되었다. '매복이 어디에 숨어 있을까? 싸우기에 가장 적합한 공터는 어디 있지? 상황이 안 좋아지면 어디로 후퇴해야 할까?'


에라스는 어떤 매복도, 자신의 땅을 지키기 위해 무장한 농부 무리도 발견하지 못했다. 길 끝에 흙투성이의 옷을 입은 여자만 홀로 서 있었을 뿐이었다.


자매들은 멀지 않은 곳에서 그 여자를 주시하며 멈춰 섰다.


"누구죠?" 에라스가 물었다.


테네프가 느리게 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리븐이야."


에라스는 눈을 깜박였다. "저 여자가요?"


"그래." 아렐이 대답했다.


에라스가 리븐을 바라보며 말했다. "생각했던 모습과 다른데요."


"겉보기가 전부는 아니지, 종자야. 너만 해도 멍청해 보이니까." 마리트는 잠시 자신의 말을 곱씹었다. "별로 좋은 예가 아니군."


"'그건' 어디 있지?"


모두가 티팔렌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뭐가?" 테네프가 물었다.


"검 말이야." 티팔렌지가 이를 악물고 말했다. "한 곳이 아닌 여러 곳에서 검이 느껴져. 뭔가 잘못됐어."


"검을 쓰는 것 같지는 않군. 놀라운데. 부러뜨려서 쟁기로라도 쓰나 보지." 마리트가 말했다.


티팔렌지가 마리트를 쳐다봤다. 마리트는 소리를 내지 않고 빙긋 웃었다.


"그래, 그러지 않길 바라야지."


잠시 동안 아무도 말을 꺼내지 않았다. 리븐은 농가 문 앞에 서 있었고 자매들은 그녀 앞에 모여 섰다. 에라스는 탈츠와 함께 뒤에 물러서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지켜보았다.


정적이 흐르다 불안정해졌다. 마침내 누군가 말을 꺼냈다.


"리븐." 테네프였다.


"테네프." 리븐의 목소리는 낮고 부드러웠지만 약간은 슬픔이 묻어났다. 에라스는 리븐의 목소리에서 어떠한 분노도, 공포도 느끼지 못했다. 오직 고통만이 느껴졌을 뿐이었다. 옛 전우를 부르는 목소리에는 괴로움이 덮여 있었다. 리븐의 시선은 나머지 자매들을 빠르게 훑어보다 아렐과 그녀의 용 사냥개들에게 머물렀다. "아렐. 녀석들도 많이 자랐네."


아렐이 고개를 까딱였다.


"자신이 버린 삶을 기억하는군." 마리트는 다른 자매들을 바라보다 다시 리븐을 보며 소리쳤다. "자신이 배신한 사람들도 말이지."


가면을 쓴 여자의 목소리를 듣자 리븐의 얼굴에 놀라움이 번졌다. "마리트?"


"흉터가 생겨서." 마리트는 냉소적으로 말했다. 레이디 헨리에타가 쇳소리를 냈다. "이런 날이 올 줄 너도 분명 알았겠지."


리븐이 숨을 내쉬었다. "시간문제였지."


테네프가 앞으로 한 걸음 내디뎠다. "그래서 이제 때가 온 거지. 혼자 있어?"


"혼자야." 리븐이 대답했다.


아렐이 눈을 가늘게 떴다. "널 믿어야 할까?"


"한 명이 더 있었어." 리븐이 농가 문 옆에 있는 묘지를 가리키며 말했다. 에라스는 새로 지은 묘지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이제 나 혼자야." 리븐이 눈을 부릅떴다. "원하는 게 뭐지?"


"너, 리븐." 안장에 앉은 마리트가 아래로 몸을 기울이며 말했다. "널 찾으러 왔어."


에라스는 리븐이 눈에 띄게 경직한 걸 보았다. 그녀의 팔 근육은 꿈틀거렸고 손가락은 들고 있지도 않은 검의 손잡이를 쥐는 듯했다. 에라스는 칼집에 들어 있는 자신의 언월도 위에 손을 얹었다.


"우리와 한바탕할 생각이야, 리븐?" 테네프가 가시 돋친 사슬 고리를 느슨하게 풀자 무거운 철 고리가 둔탁한 소리를 내며 바닥을 쳤다. "네가 누군지 잊은 건가?"


리븐이 조용히 말했다. "난 더 이상 그런 사람이 아니야. 이제 모두 지난 일이지."


"얼마나 지났다고." 아렐이 말했다.


심장 박동 소리와 함께 긴장이 맴돌며 침묵이 계속됐다. 에라스는 자매들과 리븐을 보며 누가 먼저 움직일지, 리븐의 검이 마력을 드러내고 격렬한 전투가 시작될지 생각했다.


"좋아." 마리트가 레이디 헨리에타의 등에서 내려오자 에라스는 움찔했다. 그녀는 에라스에게 고삐를 내주었다. "안으로 들어가는 게 어때? 할 이야기가 많잖아."


리븐은 잠시 가만히 있더니 열려 있는 문 뒤로 물러서 안쪽으로 손짓했다. "들어와."


자매들은 문지방을 넘어 농가로 들어갔다. 모두 문 옆에 무기를 내려놓았다. "거기 있어." 아렐이 용 사냥개들에게 명령했다. 용 사냥개들은 끙끙대더니 문 양옆에 앉았다. 에라스는 그들을 따라 들어가려 했지만 티팔렌지의 손이 그의 팔을 붙들었다.


"넌 안 돼." 티팔렌지가 말했다. 그녀의 손가락이 에라스의 살을 꾹 눌렀다. 그녀는 눈썹을 찡그리더니 눈동자를 빠르게 굴렸다. 에라스는 그녀가 가까이서 나는 소리를 들으려는 것처럼 고개를 살짝 기울이는 걸 눈치챘다. "넌 날 따라와."


리븐은 자매들이 탁자에 앉는 걸 지켜봤다. 세 자매는 모두 한쪽에 앉았다. 감정의 물결을 타고 불안과 공포가 몰려와 그녀를 덮쳤다. 한편으로는 안도감이 들기도 했다.


리븐이 옆에서 함께 싸웠던, 불과 피로 맺은 자매들이었다. 그들의 본질은 분명했지만 모두 변했고 예전에는 보지 못했던 상처로 덮여 있었다. 리븐은 자신도 변했다는 걸 알고 있었다. 탁자 길이만큼의 균열이 그들을 갈라놓았다. 자매들은 한때 알던 전우의 가면을 쓴 낯선 이들 같았다.


마리트는 실제로 가면을 쓰고 있었다. 그녀는 리븐이 가면을 쳐다보는 걸 알아챘다.


"아, 이거?" 마리트는 머리 뒤로 손을 뻗어 매듭을 풀었다. 마리트가 가면을 벗은 모습을 보자 리븐의 심장이 가라앉았다.


"왜 그래, 리븐?" 마리트가 몸을 앞으로 숙였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기억 안 나? 그 불과 비명 말이야. 너도 거기 있었잖아."


리븐의 눈가가 욱신거렸다. "무슨 일이 있던 거야, 마리트?"


"난 살아남았어." 마리트의 흉측한 얼굴이 입술 없는 잔혹한 미소를 지었다. "흠. 네가 거기 있었다면 너도 알았을 텐데 말이지."


리븐이 시선을 거뒀다. "모두 죽은 줄 알았어." 오늘이 오기까지 리븐은 진심으로 그렇게 믿고 있었다. 지금은 그 말로 설득하려는 게 자매들인지, 자신인지 알 수 없었다.


"죽지 않았지." 아렐이 고통스럽게 목을 가다듬으며 거친 목소리로 말했다. "얼마나 참혹했지?"


리븐이 기억에 잠긴 채 말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야. 에미스탄 대장이 우리를 공격했을 때—”


"그 이름은 꺼내지도 마." 테네프가 으르렁거렸다. 마리트는 테네프를 흘낏 봤다. 테네프가 일어서더니 말했다. "그리고 우리를 탓할 생각도 하지 마. 넌 도망쳤어."


"그날에 대해 기억나는 게 뭐야?" 아렐이 젖은 기침 소리를 내며 물었다.


리븐은 눈을 감았다. 조각난 기억들이 머릿속에 지나가며 그녀의 귓가에 총성과 비명이 들렸다. 살이 타는 냄새와 맹독 냄새가 가득했다. 고통, 압박감, 군화를 할퀴는 손가락, 살려 달라고 울부짖는 소리. 그러나 리븐은 그들을 살릴 수 없었다.


리븐이 마침내 대답했다. "부분부분 조금씩 기억나. 내가 어떻게 살아남았는지는 모르겠지만 내 검의 무언가 때문인 것 같아."


"넌 멀쩡해 보이는데." 마리트가 말했다.


"그렇지 않아. 나도 흉터가 있어." 리븐이 단호하게 말했다.


"우리 모두 흉터가 있지." 테네프가 말했다. 그녀는 위압적인 시선으로 리븐을 바라봤다. "왜 도망친 거지?"


에라스는 티팔렌지 뒤에 바짝 붙어 정신없이 그녀를 따라갔다. 눈을 감은 채 걷는 티팔렌지의 얼굴을 타고 땀방울이 흘렀다. 검에 있는 룬이 희미하게 빛나며 고동치자 검 끝이 허공에서 잽싸게 움직였다. 에라스는 농가를 돌아보며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을지 궁금해하다 헛간 밖에 멈춰 선 티팔렌지와 부딪힐 뻔했다.


"이곳에 뭔가 있어." 티팔렌지가 중얼거렸다.


에라스의 궁금증이 최고조에 달했다. 티팔렌지의 검에 깃든 룬 마법을 따라 반역자를 잡는 데 성공했으니 이곳 어딘가에 뭔가 숨겨져 있을 터였다. 티팔렌지의 힘을 보고 나니 에라스는 그런 강력한 유물을 직접 보고 싶었다.


작은 헛간 안의 외양간에서는 마른 소가 짚을 먹고 있었다. 에라스는 밖에 매어 둔 탈츠와 레이디 헨리에타를 이곳에 두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탈츠는 너무 커서 이곳이 무너질 터였고, 레이디 헨리에타는 소를 잡아먹을지도 모르니 면갑을 닦아내려면 엄청나게 힘들 게 분명했다.


티팔렌지의 검 끝이 짚더미 위에서 갑자기 멈췄다. "거기." 그녀가 허리를 굽히며 숨을 내쉬었다. "빌어먹을. 그런 검을 이따위 장소에 두다니."


티팔렌지는 짚과 마른 풀 더미를 헤집었다. 이윽고 그녀가 자신의 검을 그 위로 가져가 날카로운 음절을 내뱉어 여물을 태워 버리자 에라스의 주먹 크기만 한 납작한 쇳조각이 나타났다. 에라스는 어두운 물질에 새겨진 룬의 일부를 알아보았다. 온전했던 모습에서 산산이 조각나 버린 것으로 보이는 파편 모서리였다.


"안 돼." 티팔렌지는 그 조각을 만지는 순간 숨이 콱 막히는 것 같았다. "안 돼, 안 돼..."


에라스는 티팔렌지의 분노가 뜨거운 안개처럼 피어오르는 것을 느끼며 한 걸음 물러섰다. "그게 검 조각인가요? 그렇게 강력한 것이 어떻게 부러진 거죠?"


"부러뜨린 거야." 티팔렌지가 손가락으로 파편을 쓰다듬자 그녀의 얼굴에 눈물이 흘렀다. "리븐이 부러뜨린 거라고."


에라스는 농가를 뒤돌아보며 자매들과 함께 있는 리븐을 떠올렸다. 그 여자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걸까?


벌떡 일어난 티팔렌지는 휙 돌아 에라스를 바라봤다. 그녀의 눈은 분노로 들끓었다. "이런 조각이 더 있어." 그녀가 쇳소리를 내며 말했다. "조각들이 느껴져. 너와 내가 찾을 거야. 마지막 한 조각까지 모두."


리븐은 수프를 그릇에 담아 자매들 앞에 놓고는 자신의 몫을 담았다.


"양이 많은데." 마리트가 불 위에서 끓고 있는 커다란 솥을 보며 말했다. "배가 엄청 고픈가 봐, 리븐?"


리븐이 수프를 한 숟가락 떠먹고는 말했다. "먹고 남은 건 일주일 정도 끓여 먹을 거야."


마리트는 그릇에 담긴 수프를 휘저었다. "대단하시네."


"내 말에 아직도 답을 안 했어." 테네프가 음식에 손도 대지 않은 채 말했다. "왜 네가 목숨을 걸고 맹세했던 모든 걸 버리고 떠났는지 말해. 우리에게 그 정도는 말해 줘야지."


리븐은 식사를 멈추고 숟가락을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나는 고아였어. 아버지는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싸우다 죽었는데 어디인지 들은 바는 없어. 어머니는 날 낳다가 죽었고. 녹서스의 부름을 받았을 때 나는 서둘러 그 기회를 잡았지. 모험이나 피를 보겠다는 욕망 때문이 아니었어." 리븐은 자매들을 쳐다보았다. "가족을 위해서였지. 어딘가에 소속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고 싶었어. 하지만 나보리에서 우리가 아군이라 부르던 이들이 쏜 불화살이 떨어졌을 때 모든 게 바뀌었지."


리븐은 숨을 들이마시며 기억을 다시 떠올리지 않으려 애썼다. "우리는 그들에게 아무것도 아니었던 거야. 우리는 아무 의미 없는 존재였던 거라고."


테네프가 말했다. "녹서스는 네가 버린 제국과는 달라. 녹서스는 발전하고 변화했어. 다크윌은 죽고 귀족들은 무너졌지."


리븐은 마리트의 눈이 가늘어지며 그녀의 가면 속 흉터 조직이 자기도 모르게 꿈틀거리는 것을 알아챘다.


테네프가 계속해서 말을 이어 갔다. "이제 제국은 힘이 있는 자가 출세할 수 있는 곳이야. 우리 모두 하나가 되어 태양이 닿는 모든 곳에 우리의 자유와 뜻을 전하지."


리븐은 그녀의 말을 곱씹었다. "녹서스가 달라졌다면 왜 아직도 날 신경 쓰는 거지?"


"네가 신경 쓰이니까." 아렐이 말했다.


"우린 모두 네가 죽은 줄 알았어." 마리트가 덧붙였다. "영웅이 죽은 줄 알았다고. 그런데 네가 살아 있다는 것뿐만 아니라 널 위해 죽을 수도 있었던 이들을 배반했다는 사실까지 알게 됐지."


리븐이 말했다. "여기서 치료사를 만났어. 망가진 것들, 깨진 도자기나 석조를 고치는 사람이었지. 노래를 부르고 주문을 걸면 조각들이 서로 이어 붙어 다시 하나가 되지. 그 사람이 말했어. 모든 것에는 정령이 있다고. 그리고 모든 정령은 온전해지길 원한다고. 나도 내가 그 말을 믿는지는 모르겠어. 하지만 가끔은 깨진 것을 다시 이어 붙일 수 없다는 건 믿어. 되돌아갈 수 없는 거야. 고칠 수 없고 그 상태로 남아 있어야 하지. 그 상태 그대로."


티팔렌지가 농장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파편을 찾아 혼잣말을 중얼거릴 때 에라스는 티팔렌지의 지시에 따라 지하 저장고의 문을 향해 다가갔다. 에라스는 세워진 지 얼마 안 된 묘지 옆에 서서 작은 구조물의 우아한 건축 양식을 관찰했다.


잠시 동안 에라스는 파편을 찾아 묘지를 뒤질까 생각했지만 감히 묘지를 훼손하고 싶지는 않았다. 티팔렌지는 파편을 찾을 때마다 친한 친구의 시체를 찾은 것처럼 신음했다. 묘지 안에서 파편을 감지했다면 티팔렌지는 주저하지 않고 에라스에게 그곳을 뒤지라고 했을 것이다.


에라스는 농가에서 아무런 소리도 듣지 못했다. 고함이나 싸움이 일어나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에라스는 자매들이 리븐을 찾으러 아이오니아를 가로질러 이곳까지 오게 만든 해답을 찾고 있을 집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몹시도 궁금했다. 하지만 그는 집 안으로 들어가지 못할 거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 벽 안에서 일어나는 일은 네 자매 사이의 일이었으며 누구도 개입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에라스는 저 상태가 얼마나 계속될지 궁금했다.


에라스는 쭈그리고 앉아 지하 저장고 문을 잡아 열었다. 차갑고 습한 공기가 퍼지며 암흑으로 이어지는 거친 돌계단이 드러났다. 어둠 속을 응시하며 에라스는 단지 길을 밝히기 위해 룬 검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대신에 그는 고전적인 방법으로 탈츠에게 다가갔다. 탈츠와 레이디 헨리에타가 고삐를 풀고 에라스를 더욱 곤란하게 만들지 않도록 두 짐승의 고삐를 확인한 후 에라스는 탈츠 등에 매둔 도구를 사용해 작은 횃불을 만들었다.


시야를 확보한 에라스는 저장고 계단을 따라 내려갔다. 횃불을 앞쪽으로 들자 일렁이는 불빛 아래 있는 것만 분명히 보였다. 부대용 삼베 더미, 점토와 돌로 만든 밀봉된 항아리, 농기구가 희미하게 보였다.


어둠 속에서 소리가 들렸다. 짧고 날카롭게 스치는 소리였다.


에라스는 재빠르게 칼을 꺼내 손에 쥐었다. 칼을 휘두르기에는 공간이 너무 비좁았다. 에라스는 얼어붙은 채 소리에 집중하며 횃불을 천천히 움직였다.


에라스가 횃불을 갖다 대는 곳마다 빛이 물체의 모양과 질감을 드러냈다. 숨을 낮고 고르게 쉬며 칼을 손에 쥔 채 소리가 나는 곳에 집중하던 에라스는 무언가를 보고는 그 자리에서 멈춰 섰다. 겁에 질려 크게 뜬 무언가의 눈에 불빛이 반짝였다.


그것은 룬 검의 파편이 아니었다. 사람이었다.


"우리가 그 말을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해?" 마리트는 여전히 음식에 손도 대지 않은 채였다. 음식을 먹을 생각 따윈 전혀 들지 않았다. "널 찾기 위해 우리가 무얼 견뎠는데? 얼마나 피를 흘렸는데? 우리가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그냥 널 놔두고 돌아갈 줄 알았어?"


"많은 일이 일어났어." 리븐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너무 많은 일이. 돌아가서 내가 죽었다고 해. 틀린 말도 아니지. 너희들이 알던 리븐은 죽었으니. 나는 이제 다른 사람이야. 아직 이 땅에 속죄할 것이 남아 있는 산산이 조각난 사람이라고."


"거짓말이야." 아렐이 거친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속죄해야 할 대상은 우리라고."


"이곳에서의 네 삶이 거짓이야, 리븐." 테네프가 말했다. "넌 더 이상 도망칠 수 없어. 우리가 알던 녹서스인으로 돌아와, 리븐. 우리와 함께 제국으로 돌아가서 당당히 심판을 받아들여. 정말 네가 산산이 조각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면 고향이야말로 네 마지막 조각을 찾을 곳이야."


마리트는 비뚤어진 웃음을 지었다. "어쩌면 처형당하지 않을지도 모르지."


이어서 아렐이 말했다. "많은 것이 변했어. 하지만 녹서스의 정신은 그대로지. 우리와 함께 돌아가서 죗값을 받아. 우리에게 맞서면 여기에서 죽는 거야."


테네프는 화난 얼굴로 자매들을 쳐다보더니 리븐을 바라봤다. "새로운 녹서스를 받아들여. 제국에 헌신을 맹세한다면 제국도 네 가치를 인정할 거야. 너도 아직 마음이 있다는 거 알아, 리븐. 늦지 않았어."


리븐이 시선을 거두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들의 말속에 진심이 느껴져 망설였다. 정말 녹서스가 다르다면? 이 모든 일이 일어난 후에도 그곳에서 그녀가 살아갈 수 있을까? 제국이 그녀를 찾았으니 이제 멈추게 되는 것일까?


리븐은 엄숙히 임무에 임하는 자매들을 하나하나 바라보았다. 그들을 막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들이 임무에 실패하면 제국에서는 더 많은 추적자를 보낼 것이다. 이곳에서 그녀를 떼어 낼 때까지 얼마나 많은 무고한 생명이 희생될 것인가?


굴복의 무게가 그녀의 마음을 짓눌렀다. 마음속 목소리가 그들과 함께 가라고 말했다. 너 때문에 더 이상 아이오니아 사람들을 다치게 하지 말라고, 네 영혼을 위해 때가 되지도 않은 이들이 죽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파이르, 아사 같은 사람도.


"리븐! 당장 나와!"


집 밖에서 들린 목소리에 네 자매는 깜짝 놀랐다. 리븐이 일어서자 나머지 자매들도 따라 섰다. 그들의 자세는 뻣뻣해졌다.


"뭐지?" 리븐이 물었다.


테네프가 아렐과 마리트를 쳐다보다 다시 리븐을 보았다. "나가 보자."


리븐이 집 안에서 나오고 자매들은 리븐의 양옆에 섰다. 그들이 햇빛이 있는 곳으로 나오자 에라스와 티팔렌지가 무기를 꺼낸 채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에라스가 찾아낸 아이오니아 남자가 그 둘 사이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디에다." 아사가 숨을 들이켰다.


"파이르!" 그에게 가려던 리븐은 티팔렌지가 룬 검을 남자의 목에 갖다 대자 멈춰 섰다. "풀어 줘." 리븐이 명령조로 말했다. "그분은 아무 관계 없어!"


"네 거짓말로 이자도 관계가 있게 됐지." 티팔렌지의 얼굴은 굳어 있었고 눈빛은 차가웠다. "이제 눈물의 재회는 끝내고 본론으로 들어가 보지."


에라스는 티팔렌지를 쳐다봤다. 리븐의 눈이 가늘어졌다. "본론?"


"네가 원하는 자는 내 손에 있다." 티팔렌지가 아사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리고 넌 내가 원하는 걸 가지고 있지." 티팔렌지는 다른 손에 들고 있던 조각난 파편을 리븐에게 보였다. "그걸 내게 가져와."


리븐은 티팔렌지와 아사를 번갈아 쳐다보며 망설였다.


"슬슬 지겨워지네." 티팔렌지가 으르렁거리며 말했다. 그녀가 검을 세게 누르자 아사의 목에서 붉은 방울이 흐르는 것이 에라스 눈에도 보였다. "난 부탁하는 게 아니야. 너도 내가 말하는 게 뭔지 알 거야. 그걸 지금 가져와. 아니면 묘지를 하나 더 세우게 될 테니."


리븐은 잠시 아사를 바라봤다. 에라스는 침묵을 유지하며 리븐을 뜯어보았다. 리븐이 이 사이로 숨을 내쉬더니 천천히 농가로 들어갔다.


"도망치지 못하도록 지켜봐." 티팔렌지가 명령했다. 아렐이 첫째에게 신호를 보내자 첫째는 농가 뒤로 뛰어갔고 나머지 둘은 집 앞 귀퉁이를 지켰다.


"무슨 상황이지, 티팔렌지?" 테네프가 묻더니 에라스를 쳐다봤다. "이 남자는 누구고?"


"제가 저장고에서 찾았—”


"조용." 티팔렌지가 에라스의 말을 끊었다. "이 일은 내 소관이야."


리븐이 천으로 감싼 무언가를 가지고 집 앞터로 나왔다. 모두 그 물건을 쳐다봤고, 특히나 티팔렌지는 시선을 떼지 못했다.


"보여줘. 지금 당장." 티팔렌지가 명령했다.


리븐이 얼굴을 굳힌 채 천천히 천을 풀자 거대한 검의 자루와 날이 드러났다. 검의 들쭉날쭉한 부분이 깨진 이처럼 자루에 붙어 있었고, 에라스가 모은 파편에서 본 것과 같은 룬 문자가 새겨져 있었다.


티팔렌지는 검을 보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젠장." 티팔렌지의 손가락은 검의 파편을 꽉 쥐고 있었다. "네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알기는 해?"


"이 검은 내가 맡은 거야." 리븐이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가죽이 둘러진 검자루를 느릿하게 쥐며 말했다. "이건 내가 책임져. 이제 놓아줘."


"그 검이 너에게 가면 안 됐어." 티팔렌지가 낮게 말했다. "실수를 바로잡지 않은 채로 너무 많은 시간이 흘렀어. 하지만 이제 더는 안 돼. 검을 내놔."


검을 쥔 리븐은 산산이 조각났을지언정 강인해 보였다. 에라스는 리븐의 마음에 저항심이 커지고 있음을 알아챘다.


"넌 이 검을 가질 수 없어. 이 검은 그들에게 절대 돌아가지 않을 거야. 내가 그런 일이 일어나도록 내버려 두지도 않을 거야."


"그럼 이자는 죽어." 티팔렌지가 단호히 말했다. "그리고 너 또한 말이지. 검은 훼손되어도 그 자체로 중요해. 넌 망가지고 가치 없는 존재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검의 후광을 입은 기생충이나 다름없어."


"내가 목적이 아니었군." 리븐이 자매들을 책망하는 듯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런 거지?"


에라스는 티팔렌지를 쳐다보았다. '여기까지 온 게 정말 단순히 검 때문일까?'


"네가 그분들로부터 도망친 순간부터 네 삶은 끝이었다. 검은 그분들의 목적대로 사용되지 않았지." 티팔렌지가 화가 들끓는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배신한 순간 넌 죽은 거다, 리븐. 난 그저 우리의 검을 되찾으러 왔을 뿐이다."


"리븐을 죽이겠다는 거야?" 테네프가 고리 사슬을 덜거덕거리며 한 발짝 앞으로 나왔다. "그건 우리가 동의한 일이 아닌데?"


아렐이 손짓을 하자 용 사냥개들이 그녀에게로 달려와 으르렁거렸다.


"날 거역하겠다는 건가?" 티팔렌지가 코웃음 쳤다. "제군들, 너흰 탈영병이다. 내 엄호 없이 녹서스에 돌아가면 너희는 처형되겠지. 내 말대로 하면 목숨은 건질 수 있을 거야. 다른 선택지는 없어."


"티팔렌지 말이 맞아."


테네프와 아렐이 돌아서서 마리트를 쳐다봤다. 마리트는 농가 문 쪽으로 걸어가 자신의 창을 쥐었다. 리븐은 자신을 지나쳐 티팔렌지의 곁으로 가는 마리트를 바라보았다.


"룬 세공사. 모든 게 끝나면 내게 검을 주겠다고 약속했지. 그런데 내가 참을성이 없어서 말이야. 그냥 리븐의 검을 대신 가질게."


"그럼 네 자격을 증명해 봐. 리븐을 쓰러뜨리고 검을 뺏어 오면 네게 검을 주지."


"마리트, 내 말 들어 봐." 테네프가 애원했다. "이럴 순 없어. 모두 동의했잖아. 리븐은 녹서스로 돌아가서 심판을 받아야 해."


"내가 심판하지!" 마리트가 되받아치며 리븐을 향해 창을 겨눴다. "그 검은 내 검이었어야 해. 넌 그 검으로 해야 할 일을 할 만한 힘이 없었어. 내가 그 검을 고쳐 다시 일어설 거야. 내 명성도, 내 혈통도 어둠 속에 잊히지 않게 되겠지. 내가 빼앗긴 것을 그 검으로 되찾겠다!"


에라스가 두 여자를 살펴보자 마리트의 창날 너머로 햇볕이 내리쬈다.


마리트는 리븐 앞쪽으로 침을 뱉으며 말했다. "껍데기만 남은 네게 부러진 검이라. 지금 검을 들 수 있기는 해?"


그 순간 티팔렌지가 비명을 질렀다. 티팔렌지의 손에서 파편이 휙 빠져나가며 손이 붉게 물들었다. 파편은 에메랄드빛을 내뿜으며 공기를 가르고 리븐을 향해 날아갔다. 리븐의 머리 위에서 파편들이 자리를 잡으며 맞춰지더니 균열이 생긴 하나의 검이 되어 강력한 룬의 힘을 내뿜었다.


"검을 들 수 있냐고?" 리븐이 거대한 검을 한 번 휘두르자 먼지와 자갈이 공중으로 튀어 올랐다. "그래, 마리트. 아직 들 수 있지."


마리트는 흉측한 얼굴에 비틀린 미소를 지으며 전투태세를 취했다. "난 내 삶 전부를 빼앗겼고, 넌 네 삶을 내다 버렸지. 그럼, 붙어 보자고! 우리가 널 찾으려 흘린 피를 생각하면 넌 죽어 마땅해, 리븐!"


테네프는 아렐과 함께 티팔렌지에게로 갔다. "끼어들지 마." 티팔렌지는 낮게 내뱉으며 검을 들어 올렸다. 그녀는 에라스를 쳐다보더니 늙은 남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잡아 둬."


에라스는 남자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다른 손으로는 언월도를 잡았다. 남자가 도망가지 못하도록 하면서도 테네프와 아렐, 티팔렌지 사이에 피어오르는 분열에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었다.


'편을 들어야 한다면 어떻게 하지?'


에라스의 생각이 빠르게 그쪽으로 흘렀다.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배신에 몸서리치는 마리트의 편에 서야 할까? 의무를 중시하는 테네프의 편에 서야 할까? 속을 알 수 없지만 티팔렌지의 권위에 기대는 게 안전할까?


'내가 선택하지 않은 사람은 날 죽이려고 들까? 난 저들을 죽일 수 있을까?'


그 와중에 금방이라도 전투가 벌어질 것 같았고, 에라스는 리븐의 룬 검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마리트, 이러지 마. 널 죽이고 싶지 않아." 리븐이 이를 악물며 말했다.


마리트가 창을 휘둘렀다. "걱정하지 마, 리븐. 그럴 일은 없을 테니까."


두 사람은 원을 그리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에라스는 그들의 자세에 주목했다. 마리트는 유려하고 공격적이었으며 리븐은 절제되고 생각을 알 수 없는 방식으로 움직였다. 그들의 무기가 둘 사이의 공간을 메웠다. 무기가 휙 움직이며 작은 원을 만들어 냈지만 서로 닿지는 않았다.


이윽고 마리트가 움직였다.


틈을 발견한 마리트는 앞으로 튀어 올라 창을 휘둘러 리븐을 몰아붙였다. 리븐이 뒷걸음치며 길고 넓은 검날을 이용해 소용돌이치는 공격을 막아 내자 불꽃과 에메랄드빛 룬 에너지가 번쩍였다. 마리트는 공격을 피하며 창자루로 리븐의 검을 쳐내고는 리븐의 목을 향해 돌진했다.


리븐이 소리치며 검으로 원호를 그리자 엄청난 바람이 몰아쳐 마리트를 날려 버렸다. 마리트는 미끄러지며 창을 들지 않은 손으로 땅을 짚어 바람을 버텨 냈다.


"귀엽네." 마리트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녀는 일어서더니 다시 공격했다.


그들의 싸움이 계속되는 와중에 에라스는 방어를 일관하던 리븐의 움직임이 변하고 있음을 눈치챘다. 그녀 안에서 그녀를 최강의 녹서스 전사로 만들었던 전사의 정신이 깨어나고 있었다. 베고 피하고 공격하며 그녀는 더 이상 물러나지 않았다. 침착함이 아닌 다른 무언가가 그녀를 압도했음을 알 수 있었다.


에라스는 리븐의 분노를 보았다.


리븐이 공격을 시작했다. 그녀의 룬 검이 마리트의 방어를 무너뜨리며 들끓는 소리를 냈다. 흉터로 뒤덮인 마리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마리트는 자신이 가진 최고의 기술을 모두 사용해 리븐의 공격을 피하려 했다. 하지만 모든 반격은 빗나갔고 리븐의 방어를 파고들려는 시도는 저지되었다.


처음으로 에라스는 마리트가 질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피처럼 붉게 물든 나뭇잎이 달린 거대한 나무 그림자 아래에서 리븐은 이기고 있었다.


두 사람은 모두 땀범벅이 되었다. 마리트의 움직임은 탈진과 절망으로 품위를 잃었다. 마리트의 기세가 약해진 반면 리븐은 점점 힘을 얻었다. 강력한 공격을 퍼붓는 리븐의 눈은 번득였다. 리븐은 마리트를 나무로 날려 버린 후 검을 들어 올려 내리쳤다. 마리트가 들어 올린 창자루는 리븐의 검에 의해 반으로 부러졌다.


"널 망가뜨린 것으로부터 절대 도망칠 수 없을 거다, 리븐." 마리트가 차갑게 웃으며 두 동강이 난 창자루를 내던졌다. "네가 어딜 가든 그게 항상 널 따라다닐 거라고."


마리트가 부러진 창날을 들고 달려들었다. 리븐은 고함을 치며 검을 앞으로 찔렀다. 마리트를 나무로 밀어붙이자 검 주위로 붉은 파열이 일어났다.


순식간에 리븐의 눈이 커졌다. 리븐이 검을 뽑아내자 마리트는 천천히 바닥으로 미끄러졌다. 마리트가 가슴을 움켜쥐었지만 손가락을 타고 흐르는 선혈을 멈추지 못했다.


마리트를 바라보는 리븐의 얼굴에서 분노가 사라졌다. 검을 잡고 있던 손아귀의 힘도 풀어졌다. "날 용서해, 마리트."


마리트는 리븐을 쳐다봤다. 힘이 꺼져 가고 있는 마리트는 마지막 남은 힘으로 리븐의 옷깃을 붙들었다. 그녀는 리븐을 가까이 끌어당기며 리븐의 눈을 바라보았다.


"싫어." 마리트가 쇳소리를 내며 말했다. 경멸을 끝으로 그녀는 바닥에 고꾸라지며 숨을 거뒀다.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곳에 있던 모든 이들에게 충격이 맴돌았다. 특히나 에라스는 매우 충격을 받았다. 에라스에게 있어 끔찍한 흉터를 남긴 화학 공격에서도 살아남고 자신과 함께 한 여정에서 치른 모든 전투에서 승리했던 마리트는 절대 무너지지 않는 존재였다. 그런 마리트가 무너졌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에라스는 생각했다. '대체 무엇 때문에. 우린 여기서 뭘 하는 거지?'


"유감이군. 하지만 예상 못 한 일은 아니야." 티팔렌지가 말했다.


지친 리븐의 손아귀에서 검이 빠져나가자 리븐은 움찔했다. 몸을 돌리자 양손에 룬 검을 들고 있는 티팔렌지가 보였다.


"이곳까지 오는 데 그 많은 일을 겪으면서 그 검을 되찾은 뒤에도 너를 살려 두어야 할지 고민했지." 티팔렌지는 리븐의 검을 꽉 쥐며 말을 이어 나갔다. "그런데 네가 저지른 불경스러운 일을 보니, 네 심장이 뛰는 한 이곳을 그냥 떠날 수 없겠군."


"그만해!" 테네프가 소리 질렀다. 테네프와 아렐은 티팔렌지에게 다가갔다. 아사는 그 광경을 보고 끙끙대며 에라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했다.


티팔렌지가 검을 교차해 휘두르자 에너지 폭풍이 몰아쳐 자매들을 공중으로 띄워 올렸다. 아렐의 용 사냥개들은 으르렁거리며 주인을 보호할 태세를 갖췄다. 티팔렌지가 주문을 외우자 세 사냥개는 공중에 멈춘 채 룬 에너지 막 안에 갇혔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에라스는 심장이 목구멍에서 뛰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언월도를 쥐고 있던 손아귀의 힘이 빠져나갔다.


"너희가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나?" 티팔렌지가 으르렁거렸다. "아무것도 막을 수 없다! 나는 너희를 모두 죽이고 평화롭게 잠들 거야. 내가 정의고 너희는 모두—"


순간 티팔렌지가 거친 숨을 내쉬었다. 일순간 티팔렌지의 몸이 뻣뻣해지더니 곧 쓰러졌다. 두 자루의 룬 검이 생명을 잃은 손가락에서 굴러떨어졌다. 티팔렌지의 몸에서 붉게 물든 언월도가 빠져나왔다. 에라스가 뒤에서 그녀를 찌른 것이다.


용 사냥개들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어리둥절해 보였지만 무사했다. 힘겹게 일어난 아렐과 테네프는 놀란 듯 에라스를 쳐다보았다. 마치 그를 처음 본 것처럼.


에라스가 속삭였다. "더 이상은 배신도, 비밀도 안 돼요. 모든 일이 의문투성이였지만 항상 변하지 않는 것은 명예예요. 녹서스에 맹세한 우리의 임무 말이죠."


테네프가 앞으로 걸어 나왔다. 리븐은 허리를 굽히고 룬 검을 줍는 테네프를 지켜봤다. 리븐의 검은 다시 산산이 조각나 땅에 흩어졌다. 아렐은 파편들을 줍고 테네프와 함께 리븐 곁에 섰다.


"에라스의 말이 맞아." 테네프가 말했다. 그녀는 복수심이나 증오가 아닌 슬픈 표정으로 리븐을 바라보았다. "우리가 가진 것은 명예뿐이지. 나는 녹서스에 네가 심판을 받게 하겠다는 맹세를 했어. 그리고 그렇게 할 거고."


"우리를 그냥 놔두시오." 아사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데려가지 않아도 되지 않소."


에라스는 자매들과 리븐을 보았다. '더 큰 일이 벌어지게 될까?'


"갈게."


"디에다, 안 돼..." 아사는 리븐의 말에 충격을 받은 듯 애원했다.


리븐은 떨리는 숨을 뱉으며 말했다. "이제 안 돼요, 파이르. 저 때문에 고통받는 사람이 더 있어서는 안 돼요. 책임은 자신이 선택한 행동에 달려 있죠." 리븐은 아사를 쳐다봤다. "이게 제 선택이에요."


아사는 입을 열었다 다시 닫았다. 그는 몸을 떨며 숨을 내뱉고는 마음을 다잡았다. "네가 어디 가서 무얼 하든 넌 언제나 내 디에다일 것이다. 언제나."


"파이르는 항상 여기 계실 거예요." 리븐은 자신의 가슴에 손을 대었다. 리븐은 테네프를 올려다봤다. "너희와 갈 테니 이분은 놓아줘."


테네프는 잠시 가만히 있다가 고개를 숙였다. "맹세하지." 테네프가 에라스에게 고갯짓을 하자 에라스는 곧바로 아사를 풀어 주었다.


휘청거리며 일어선 아사는 리븐의 모습에 고개를 떨군 채 비틀거리며 집으로 향했다. 테네프가 리븐에게 사슬을 채우는 것을 보던 아사는 문가에 무너져 내려 흐느꼈다.


에라스는 순간 탈츠와 레이디 헨리에타를 떠올리며 몸을 돌렸다. 다행히 탈츠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른 채 밧줄에 묶여 풀을 뜯어 먹고 있었다.


그런데 레이디 헨리에타의 고삐가 풀려 있었다.


레이디 헨리에타가 사라지지 않았다는 걸 확인하기 전까지 에라스의 심장이 요동쳤다. 에라스는 레이디 헨리에타가 나무 그늘 아래 있는 마리트를 주둥이로 부드럽게 누르며 깨우려 하는 것을 발견했다. 에라스는 천천히 조심스럽게 그들에게 다가갔다.


에라스가 다가가자 헨리에타는 송곳니를 드러내 씩씩거리며 에라스가 마리트에게 다가가지 못하도록 막아섰다.


"그래, 그래." 에라스가 헨리에타의 목을 부드럽게 쓸며 속삭였다.


헨리에타의 씩씩거리는 소리가 부드러워졌다. 에라스는 헨리에타의 고삐를 쥐었지만 헨리에타는 움직이지 않았다.


아렐이 마침내 모두의 머릿속에 맴돌던 질문을 꺼냈다. "이제 어떻게 되는 거지? 룬 세공사가 죽었으니 임무는 이제 아무 의미 없어."


테네프가 티팔렌지 시체를 보며 말했다. "티팔렌지는 제국의 임무를 수행하다 죽은 거야. 티팔렌지의 이름으로 시작한 일이니 우리가 이어받아 탈영병을 심판받게 해야 해."


"그렇게 말할 거야?" 아렐이 물었다.


테네프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게 사실이니까."


"그래. 그럼 너와 에라스는 정리된 것 같아 보이네." 아렐이 말했다.


에라스는 아렐을 쳐다보다 깨달았다. "우리와 같이 갈 생각이 아니군요."


"이건 중요한 임무였지." 아렐은 고개를 저으며 리븐의 검 파편을 테네프에게 넘겼다. "하지만 일이 끝났으니 나는 내 방식대로 녹서스에 충성하겠어."


테네프는 천천히 손을 뻗었다. "그럼 다시 만나지, 아렐."


아렐은 잠시 손을 바라보다 팔목을 붙들었다. "다시 만나." 아렐이 손짓하자 용 사냥개들이 그녀 곁으로 걸어왔다. 그들은 흙길을 따라 농가에서 멀어졌다.


"이제 우리 둘뿐이군요." 에라스가 아렐이 사라지는 것을 보며 말했다.


"너도 우리와 함께 가지 않을 거야."


에라스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테네프와 리븐을 바라보았다.


"이제 이 임무는 나 혼자 감당할 거야. 내 일은 끝났지만 넌 아니지." 테네프는 레이디 헨리에타에게 고갯짓을 했다. "이제 가서 네 배신자를 찾아와."


순간 에라스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리븐의 힘을 보니 테네프를 리븐과 홀로 두고 싶지 않았지만 마음속으로는 그게 맞는 선택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테네프의 말이 맞았다. 이곳에는 에라스가 해야 할 일이 남아 있다.


에라스는 자세를 바로잡고 주먹으로 그의 가슴을 자랑스럽게 내리쳤다. "녹서스를 위하여."


테네프가 경례에 답했다. "녹서스를 위하여."


에라스는 테네프가 마리트의 가문 깃발로 마리트의 시체를 덮어 탈츠 위에 태우는 것을 도왔다. 에라스는 자신의 짐을 챙기고 탈츠의 옆구리를 토닥이며 말했다. "크고 강하게 자라라, 탈츠. 테네프 마님을 잘 지켜 드리고."


탈츠는 장난스럽게 자신의 머리를 휘저어 에라스를 넘어뜨리려 했다. 에라스는 웃었지만 눈이 따가워지는 것 같았다. 그는 고개를 돌려 엄지로 눈물을 닦아 내고는 레이디 헨리에타에게로 갔다.


레이디 헨리에타에게 다가가며 에라스는 그녀가 죽인 사람들을 한 명 한 명 떠올렸다. 레이디 헨리에타가 분노의 포효를 내지르면 사냥감의 목에서는 목이 졸린 비명이 터져 나왔다. 매번 그녀의 면갑을 닦아 주던 것 또한 생각났다. 에라스는 부드럽게 콧노래를 부르며 다가가 비늘로 뒤덮인 가죽을 쓰다듬었다. 레이디 헨리에타는 뒤척였으나 그에게서 몸을 움츠리지는 않았다. 용기가 생긴 에라스는 고삐를 쥐고 레이디 헨리에타의 등 위에 올라탔다.


레이디 헨리에타가 에라스를 받아들였다.


리븐과 테네프는 에라스가 멀어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사슬에서 소리가 나자 리븐은 농장에서 사슬을 차고 끌려가는 게 두 번째라는 것이 생각났다. 그녀는 그때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 떠올렸다. 당시의 분노와 공포는 점차 사라져 갔다. 이번에는 그때와 같지 않을 것이다. 이번에는 상황이 달랐다. 하지만 리븐 또한 마찬가지였다.


테네프가 리븐에게 돌아서며 말했다. "넌 내 포로지만, 내 자매이기도 하지. 네게 맞는 대우를 해줄게."


리븐은 숨을 내쉬며 다시는 보지 못할 아사와 집을 마지막으로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래."


"좋아." 테네프는 리븐이 탈츠 위에 타도록 도와주며 앞으로 이어질 긴 여정을 떠올렸다. "녹서스로 가자."


에라스는 밤새 길을 달렸다. 리븐을 찾으러 가는 길은 걸어야 해서 힘들었지만 레이디 헨리에타를 타고 이동하니 신이 날 정도였다. 맡은 일만 아니었다면 짐승을 타고 달리는 기쁨을 만끽했겠지만 목적지에 가까워질수록 그는 가슴속에 돌이 내려앉은 것처럼 마음이 무거웠다.


울타리는 열리지 않았다. 에라스는 언월도를 들어 갑옷에 부딪혀서 소리를 냈다.


에라스가 고함쳤다. "나는 조빈의 아들이다! 조빈은 모습을 드러내라. 아니면 내가 조빈을 만날 수 있게 물러서라."


잠시 침묵이 흐르고 에라스가 들어갈 수 있도록 울타리가 열렸다. 그는 아이오니아 사람들과 변절한 녹서스인들의 겁에 질린 시선을 느끼며 재빨리 마을 안으로 들어갔다.


"아버지! 나오세요!"


"진정하게!" 무리에서 장로가 나타났다. 에라스는 그자가 화학 공격이 일어났던 장소에서 지켜보던 남자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진정하게, 젊은이. 내가 그에게 데려다주겠네."


에라스는 숨을 내쉬며 언월도를 칼집에 집어넣고 레이디 헨리에타 위에서 내려왔다. 장로와 에라스는 조빈의 오두막으로 들어갔다. 아이오니아인들은 헨리에타에게서 거리를 두고 모여들어 차분한 선율을 노래했다. 헨리에타는 그들에게 침을 뱉었다.


오두막은 어두웠다. 장로는 촛불 몇 개를 켜서 에라스가 방 중앙에 천으로 덮여 있는 형체를 알아볼 수 있도록 불을 밝혔다.


"자네 아버질세." 장로가 말했다.


에라스는 숨을 내쉬었다. 에라스가 무릎을 꿇고 손이 떨리지 않도록 애쓰며 천을 내리자 창백한 얼굴이 드러났다. 빛을 잃은 아버지의 얼굴은 흉터와 멍이 가득했다.


"무슨 일로 돌아왔는가?" 장로가 물었다.


에라스의 목소리가 떨렸다. "왜 나와 동료를 배신했는지, 왜 나보리 형제단에게 정보를 넘겼는지 물어보러 왔어요."


"배신? 젊은이, 조빈은 배신하지 않았네." 장로의 얼굴에 슬픔이 내려앉았다.


에라스는 흉터를 내려다보며 멍과 찢긴 상처를 눈에 담았다.


"자네가 떠나고 얼마 안 되어 형제단이 찾아와 자네들의 행적을 밝히라고 하더군. 조빈은 그들에게 저항했고 그 때문에 고문을 당했네. 조빈은 결국 목숨을 잃었지."


에라스는 그 말을 제대로 듣지도 못했다. 숨이 목구멍에 걸린 것 같았다. 감정이 그 안에서 충돌했다. 아버지의 여정. 자신의 부족을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다른 곳에서 거처를 찾는 역경을 견뎌 낸 아버지. 가족의 상처를 알게 된 아버지. 가족이 갈라졌다 다시 하나가 된 모습을 본 아버지.


에라스는 아버지의 얼굴을 매만졌다. 눈물방울이 조빈의 볼 위로 떨어졌다. 에라스의 가슴을 누르던 중압감이 사라졌다. 가슴속 응어리가 따스함에 녹아내렸다.


장로가 조심스레 말했다. "이곳에 머물러도 좋네. 조빈의 아들이라면 우리도 환영일세. 이곳의 꽃 축제를 기다려 보세."


에라스는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아버지의 영혼은 저와 함께 평안히 있어요."


장로는 수긍의 뜻으로 고개를 숙이며 물러났다.


"아버지를 모실 수 있게 도와주세요." 에라스가 천을 잡으며 말했다. "제가 모시고 가겠습니다."


"어디로 모시려고 하는가?"


에라스는 장로를 보고 웃으며 말했다. "고향으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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