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스가 눈을 뜬지는 딱봐도 한참의 시간이 지난 뒤였다. 본적없는 천장에 누워있는 자신을 확인하고 주위를 둘러보니, 곧장 자신을 말없이 바라보고있는 리신이 있었다. 앞이 보이지않는데도 확실히 그의 고개는 바라보고있다고 여길만큼 정확했다.

"엘리스."
"정신이 드시오."

 안부는 마오카이에게 자신의 몫까지 맡긴채 리신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엘리스는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자, 그렇게 몸을 던지면서까지 왜 여기에 왔는지에대한 이유는 들었소. 이제는 내가 당신께 묻거나 요구할 말은 없소. 소인에게 할말있소?"

 드디어 그녀에게도 자유롭게말할 권리와 시간이 주어졌다. 그녀의 마음이 차분해짐과 동시에 이쯤되면 자신이 무슨 말부터 꺼내야할지 생각해야만했다.

'그래. 그것부터 말하자.'

 그녀가 말할 첫마디는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청문회 이후에 난..."

 

 자신이 무슨 일을 겪었는지에 대해 말을 하는데 그녀는 총력을 기울였고 리신과 마오카이는 끝까지 들었다. 엘리스가 정신을 차린시각은 이미 한밤중. 그러기에 같은 공간에 있는 세 생명체는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러갔는지, 얼마나 더 시간이 요구되는지 개의치 않았다. 어느덧 엘리스의 말이 끝나고 리신이 물었다.

"뭔가가 숨겨진듯하오. 엘리스. 자료실에 운좋게 들어가서 여러정보를 얻었다쳐도 그대가 들어간곳은 지구상에서 가장 삼엄하게 보안이 이루어지고있는 곳. 어떻게 멀쩡히 그곳에서 나올 수 있었소?"
"나도 궁금하군 엘리스. 나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할때도 그 부분이 마음에 걸렸다. 어떻게 아무런 페널티없이 이득을 볼 수 있는거지?"
 마오카이에게도 말하길 꺼려했던 진실을 리신앞에서 꺼내야만하는상황. 그녀는 입술을 지긋이 깨물다가 말했다.

"도박이었어."
"도박?"
"확실히 소환사에게 쫓기듯이 최상위 자료실까지 진입했기에 붙잡히는건 시간문제였어. 하지만 소환사가 간과한 결정적인 요소는 클래스 S 자료실에 검색전용의 컴퓨터가 놓여있지 않은거야. 그 말은 검색만 할 수 있는 컴퓨터가아닌 검색을 주로 사용하는 컴퓨터란 거였지. 우선 나는 내가 받을 처벌을 예측했어. 가장 간단하고 보편적인 처벌은 벌금이거나, 그들의 능력으로 '자료실에 머물러있는시간동안의 기억을 상실'시키는것이 주였지. 하지만 전자는 재산이많은 나에게는 효과를보긴 어려우니 후책을 이용할거라고 생각했고, '기억을 잃고 전쟁 학회에서 쫓겨나면 나는 어디로 갈까'를 예측했지."
"그 예측이 필트오버였다는 뜻이오?"
"응. 다음 나는 필트오버에서 널리 쓰이는 검색포털을 찾아서 계정을 만들었고, 수신인을 자신으로 설정한채 메일을 작성했어. 물론 거기에서 알게된 정보들을 적어서말이야."
"흠... 네가 한정적인 기억상실을 겪게 된 이후에 필트오버에 가느냐 그렇지 않느냐가 도박이었다는 뜻인가."
"맞아."
 리신은 엘리스의 말을 듣고 자신의 턱을 문지르면서 자그마한 감탄사를 말했다.

"그나저나 내가 얼마동안 이렇게 누워있었지?"
"하루요.그대가 7월 18일 밤에, 7월 19일 오전에 두번에 걸쳐서 소인을 찾아왔고 지금은 7월 20일의 밤이오. 전날에 받은 충격이 엄청났을텐데 빨리도 정신을 차렸군."
"아 그게..."

 엘리스는 그동안 꾸준히 바라보았던 리신의 얼굴을 잠시 피한채 망설이다가 조그맣게 말했다.

"배가 고파서 잘 수도 없더라고. 그래서 생존본능에의해 의식이 빨리 돌아온걸지도..."
 순간 두 챔피언은 그녀의 원초적인 식욕에 감탄한채 조용히 얼어붙었다.

"'정신 기생'이라... 소환사께서 엉뚱한 결과를 내놓았을리는 없지만 그렇기에 더욱 그대가 따랐던 신은 흥미롭다고 생각하오, 감정이라..."

 엘리스에게서 '정신 기생'에 대한 얘기를 듣자 리신은 흥미롭다는듯한 반응을 보였다.

"아마도 썩은 아귀는 당신을 통해서 뭔가를 얻으려했던게 아닐까 싶다만... 그것이 지금 그대가 신경쓰는 부분은 아닐테고... 감정에 대한 수련은 소인에겐 힘들지 않을까싶소."

"왜?"
"소인뿐만 아니라 아이오니아의 수련법자체가 감정을 조절, 절제하면서 진행하는 방식인데 그대같은 경우엔 오히려 감정을 되찾기위해 무언가를 한다는것자체가 이곳과는 정반대로 행동하는것이오. 하다못해..."
 리신의 말끝이 흐려졌지만 주어를 잃은 문장의 정체를 파악한 마오카이가 바로 그의 말을 받아서 얘기했다.

"나 역시 감정에 대해서 자세한 도움을 줄 수 없다. 무감정이기때문이 아니라, 나는 인간이 아닌 존재이기때문에, 내 방식이 그녀가 원하는대로 작용하기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이지. 결국, 엘리스 네가 스스로 해야할 과제인것 같다."

'그자에게서 감정을 익히기는 나보다 더욱 힘들고...'

 감정에 관해서 도움을 요청한적은 없지만 엘리스 입장에선 아쉽기 그지없는 대답이었다.

"엘리스."
 리신이 말했다.

"그대는 자신의 몸이 온전치 않은 상태에서도, 소인에게 거짓없는 답변을 내놓았소. 그것이야말로 가식없는 그대만의 자신감이자 용기요. 그대의 행적이 아무리 좋지않았어도, 그 태도는 소인의 마음에 들었소. 그렇기에 그대의 목적을 이루게 도와주겠소."
"정말?"
"그렇소. 그대의 목적이 전과 같은 삶으로 되돌아가기위한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소인이 결코 용인할 수 없는 '속죄'와는 거리가 다르오. 악인의 '교화'보다 '사람됨'을 추구한 이상, 소인은 사적인 감정을 배제한 채 그대의 요청을 받아들일 수 있소."

'여전히 날 마음에 들어하진 않는구나.'

 당연한 사실이지만 엘리스는 가슴 한구석으로 매우 아쉬워했다. 그래도 원하는 답은 얻었다. 그렇기에 좋았다. 슬슬 마음이 들떠오르는듯한 감각이 점점 강해져갔다.

"일단 그대를 내 개인제자로 여기고 수련을 진행하겠소. 하지만 그대의 몸에 심각한 부상을 입힌거에 대한 보상을 우선시해야겠지... 좋소. 소인이 알고있는 사람의 손을 빌려서 그대의 완치를 하루빨리 앞당기겠소."

 엘리스에게 의외의 희소식이 더해졌다. 그녀는 최근에 자신에게 호의를 베풀어준 사람들에게 했던 말을 리신에게도 반복했다.

"고마워. 리신."
"...그런 말도 할줄 아는군요. 여왕이시여."

"나에게 손을 내밀어준다는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알고있거든."
 엘리스의 대답은 리신을 향했지만 그녀의 시선은 리신의 반대편에 앉아있는 마오카이에게 돌아갔다.

'그래. 여기까지오는데 많은 고생을 했지만 드디어 날 받아주는 사람이 생겼고, 날 인정해주는 존재가 늘어났어. 혹시 이런 관계가 내가 원했던 관계일지도... 잠깐, 가슴이 뛰는게 느껴진다. 왜이러지?'

 그동안 느껴보지못한 좋은 느낌이 그녀를 감쌌다. '그것'이란 이름의 감정도 거미 여왕의 마음속을 강하게 자극했지만 지금 부풀어오르듯이 넘쳐나는 감각, 아니 어쩌면 감정이라 할법한 이것은 그녀에게 생동감을 부여하는듯했다.

'지금껏 느껴보지못한 또다른 감정을 느끼는건가.'

 달빛에 은은히 비춰지는 그녀의 얼굴을 보고 넌지시 예상한 마오카이의 관찰력.

 그런 시간을 보낸다음 엘리스는 깊은 잠에 빠졌고, 마오카이는 지금 그녀가 있는 방을 나와서 하늘을 바라보고있다. 께끗하게 어두운 밤하늘에 박혀진 별빛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 없었다.

"마오카이."
 그런 감상을 즐기고있는 마오카이의 옆에 서있는 리신이 하는 말은 감성으로 가득찬 주변의 분위기를 가라앉혔다.

"당신도 그녀를 통해서 뭔가 꾸미고 있군..."

<계속>

<글쓴이의 말>

'드디어 해냈구나 엘리스!'라는 말이 절로 나오는군요. 그녀의 작중행적이 얼마나 개연성있고 공감을 받을련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제 머리속에서 재해석된 그녀가 또 한번의 발전을 이뤄낸것이 기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