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가 이후에 해온 활동들은 나름대로 자기만의 목적에 부합했다. 경제특구에서 장보기, 도서관에서 독서하기, 숲에서 명상하기 등... 감정을 느끼기위해서 별일을 다 겪어보았지만, 그 수많은 사건들중에서 한 획을 그은 날은 이렇게 무난하게 수련을 마친 날이 아니다. 전에없는 강도 수련때문에 온몸에 과부화가 걸렸음에도 수련을 강행했던 8월 1일도, 전장에서 등록된 자신의 스킬을 약화된 위력임에도 불구하고 성공적으로 쓸 수 있게된 8월 15일도 아니다. 필요이상으로 일찍부터 활동하고 바짓가랑이를 잡으면서 질질 끌던 태양의 영향력이 줄어들고, 더이상 그녀가 입고있는 챔피언복장과 수련복이 땀으로 젹셔지는빈도수가 적어질 무렵의 일이다. 24절기로 따지면, 이미 가을로 접어들고 있는 시기였다.


 

 엘리스에게 있어서 그토록 기다리던 시간이 왔다. 일방적으로 훈계를 듣고 아무말도 못한채 쭈뼛거렸던 날부터 강하게 솟아오른 욕구, 그것은 수련동안 눈곱만큼만 자신의 주변에 맴돌고있던 카사딘과의 대면시간이.

"명심하시오. 어디까지나 대련시간에 둘에게 시간이 주어졌으니 가장 중요한것은 대결이오."

 마오카이가 엘리스를 도와주기위해서 불러온 또다른 용병 혹은 조력자같은 존재였으나 그가 수련에 지대한 영향을 주지도 않았고 실제로도 리신과 마오카이조차도 그의 활동이나 일상을 모를정도로 카사딘의 일과는 은닉적이었다. 그런 그에게 주어진 임무가 바로 이것.


 오후에있는 대련시간을 이날만큼은 한밤중에 하는걸로 변경했고, 혹시모른 스파링 시스템도 작동해놓은 상태. 잔디밭에 우뚝 서있는 카사딘의 정면에 어떻게든 힘싸움을 최소화하면서 할말을 생각하는듯한 자세를 취한 엘리스.

"뭐하는거냐. 지금 너와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대련시간인데!"

 그렇게 말한뒤 카사딘은 엘리스에게 덤벼들었다. 미끄러지듯이 치마를 흩날리면서 달려오지않고, 순간이동을 함으로써,

''균열 이동!''

 리그가 펼쳐진 이후로, 전장에서 언제나 고평가받는 최상급 이동기스킬이 자신을 공격하기위해 시전되었다. 카사딘의 오른손등위에 장착된 검이 그것을 피하려는 엘리스의 오른팔에 적중했다.

'체력이 27%나 깎여나갔어! 어느 정도의 힘인거지?!'

 통증을 느끼지 못하게 설정된 대신 힘의 제약이 없는 스파링 시스템의 특성을 고려할 때, 가시돋친듯 파동하고있는 카사딘의 평범한 찌르기 공격은 엘리스의 체력을 4분의 1이나 앗아갈 위력이었다.

'검이, 붉게 물들어간다!'
 말붙이는것자체가 과욕으로 치부되는 지금의 상황에서 겨우 자신의 팔을 검에서 빼낸 그녀의 눈에 인식된 또다른 변화다. 카사딘의 평타강화스킬인 '황천의 검'. 두배, 혹은 몇 배 이상의 위력을 다음 타격에 추가하는 이 기술에 맞으면 그녀의 체력은 순식간에 0%로 수렴한다. 엘리스가 자신의 어깨와 허리에 온 힘을 기울여 몸을 비틀어돌리는 회피로 그의 공격을 피했다. 그녀가 아니었어도 이미 공간을 찌르는듯한 강렬한 잔상이 그녀의 옆에 남아있었다.

"카사딘, 너가 나를 싫어하는 이유는 그거야! 으...! 전에 네가 나에게 말했던 그거!"
 말을 거느라 차마 그의 칼을 피하지 못해 또 체력이 닳았다. 다행히도 스치느 수준의 공격이었지만, 불행히도 9%의 체력이 손실되었다.

"너를 싫어할 이유는 많다. 심지어 너나름대로 열의를 담은채 하고있는 이 수련도 싫어할 이유는 많지."
"뭐라고?!"
"최근 3년동안의 기억은 가지고있다고 들었다. 네 기억으로 너자신을 되돌아봤을 때 네가 이런 도움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나?"
"과거의 나자신이야! 더이상 그렇게 되돌아가지않아!"
 그녀의 말을 들은 카사딘은 어디론가 이동해버리더니, 그녀의 머리위에서 치마를 펄럭거리면서 덮쳤다.왼손으로 그녀의 정수리를 가격하면서 바닥으로 몸을 밀어눕혀버릴정도의 힘을 과시한채 카사딘은 그녀의 몸 위에 자리잡아 앉았다. 아직 휘두르지않은 검 하나가 그의 말이 끝나고 내려치기를 기다리는듯 기다리고있었다.

"아니! 넌 그럴 자격이 없다! 타인의 도움없이 스스로 회개의 길을 가는게 진짜 회개를 하라는 의미가 아니라고? 그걸 이제야 알았나? 이 세상이 네게 바라는건 회개가 아니라, 네가 사회에서 외면당하는걸 모르고 있나보군. 몇 명, 몇십명을 죽여버린 연쇄살인범에게 회개를 요구하면서 징역형을 내리는게 아니라, 그 시간동안 사회에서 격리당해서 사람들에게 불안거리가 되지 않게하는거랑 같은 원리다. 종신형? 120년형? 넌 그에 준하는 수위를 단 6개월밖에 받지않았는데, 그런 너를 어떻게 인식해야하지?"
'-27%, -9%, -30%, 초당 -1%...'

 이미 엘리스의 체력은 절반도 채 남지않았다. 이길리 없다. 차라리 그녀에게있어서 이런 때가 상대에게 반박하면서라도 말할 수 있다.

"네가 무슨말을 하는지 알아. 리신도 나를 좋게 여겨서 수련을 해주는게 아니야! 나는 지금보다 더 강한 자신이 되길 원해. 신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어떤 수를 써서라도 감정을 되찾은 '인간'이 되어서, 다른 사람들에게 새겨진 내 인식을 고쳐나가겠어!"
 

 그렇게 말을 걸려는 엘리스의 노력을 모두 허사로만든건, 다음에 들려오는 카사딘의 감정없는 비아냥이었다.

"넌, 그럴 필요없다. 네가 강해봤자 말자하를, 나를 능가할순 없어. 감정을 되찾아서 감성팔이나 하려는 악녀는 필요없다구. 네 얘기를 들어줄법한 빈민가를 알려줄테니 거기가서 실컷 자기만족이라도 느끼던가."

 말로써 그와 경쟁을 펼치려는 그녀의 머리가 활동을 멈췄다. 엘리스 온몸에 제동이 걸렸다. 무언가에 대해 필사적으로 호소하려는듯한 그녀의 얼굴이 천천히 굳어지더니,

'체력 1% 감소라... 발버둥을 치는군.'

 가슴에만 압박을 쥔 채 그녀의 몸 위에 앉아있는 그의 마스크에 주먹 하나가 날아왔다. 신통치 않은 타격감을 낸뒤 냅다 들이박은듯한 주먹은 잠시후 부르르 떨었다.

 잠시후 그녀의 주먹이 거둬진 다음에 입안에서 독 한바가지가 카사딘의 얼굴에 뿌려졌다.

"...그래야지. 그런 표정으로 날 대해야 내가 마음껏 너를 싫어해할 수 있으니까."
 카사딘의 왼손이 엘리스의 목덜미를 잡은뒤 그녀의 몸을 공중으로 던졌다. 그리고 공중에 붕 떠오른 그녀를 검으로 가리켰다.

"무의 구체."

 카사딘의 상체크기만한 보라색 구체가 그의 오른검에서 발사되었다. 엘리스의 몸은 구체에 떠밀려 공중으로 한없이 솟아오르다가 어느 순간이 지난 뒤에 바닥으로 떨어졌다.

ㄴ엘리스의 체력이 0%에 도달했기때문에 대결이 종료됩니다. 카사딘의 잔존체력은 96%입니다.ㄱ

"이럴줄 알고 대련하기 싫다는 말을 했는데도 몰아붙이는 이유는 뭔가 마오카이."
"... 그래야 네 목적을 조금이라도 달성하지 않을까해서 그랬다."
"..."
 그녀가 쓰러진자리는 보지도않고 어딘가로 향하는 카사딘, 뭔가 숨기는게 있는듯한 마오카이, 그리고 그걸 묵묵히 듣고있는 리신. 그 셋에게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졌다.

"이건 대체 뭐요. 왜 예전의 그녀에서나 나올법한 분위기가 풍겨지는것이오?"

 엘리스가 오랫만에 그림자 군도의 기운을 온몸에 가득풍긴채 일어났다.


 

"으으으..."

'설마 소인이 느꼈던 원인모를 이질감은 이것이었소?'

'뭐냐 엘리스. 앞서 필트오버에서도 그랬지만,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지는거지?'
"그렇게 앞뒤안보이는 상태로 덤벼들면 뭔가 이길것같다는 착각을 품었나?"

 방금전 무력하게 쓰러져있는 엘리스와는 다른 모습을 직시하고있는 카사딘이었지만 그녀에게 하는 말은 여전히 곱진 않았다. 부동자세를 곧장 풀어버린 마오카이와 그녀의 반전요소에 잠시 주춤한 리신보다 훨씬 침착한 태도였다.

"그래...!"
 그동안 알려진 거미 여왕보다도 훨씬 더 날카롭고 울려펴지는 목소리로 엘리스는 소리쳤다. 그리고 양팔을 휘두르면서 입속의 독을 뿜어냈다.

'이성적으로 생각하자. 빠르게 날아오는 신경독부터 피해주고...'

 평소완 달리 한꺼번에 3개의 스킬을 동시에 시전하는 엘리스의 위엄에도 그는 주늑듬없이 온힘을 기울여 그녀의 독을 피했다.

'다음엔 피하는것보다 시야를 가리는 이 고치를...'

 이어서 균열 이동을 앞방향으로 시전해서 고치를 앞으로 움직여서 피해낸다음,

'남은 거미폭탄은...'

 새끼거미를 가로로 베어버리려는듯 검을 가로로 휘둘렀다. 그러나 새끼거미가 카사딘의 유효공격범위에 들어오기전에 휘두른 공격이었기에 거미를 베어내진 못했다.

 하지만 이를 모르는 카사딘도 아니었고, 그 장면을 바라보는 마오카이도 카사딘의 의도를 알아차리고있었다.

'저 동작이라면 그것밖에 없지. '힘의 파동'으로 거미폭탄마저 받아쳐버리는... 잠깐!'

 카사딘의 검이남긴 하나의 가로획으로 이루어진 잔상에서부터 보라색 파동이 뿜어져나왔다. 카사딘을 기준으로 상당한 범위를 내뿜은 파동은 마치 폭풍을 동반한것처럼 그 공간의 모든것을 밀쳐내려는듯한 힘을 지녔고, 그 파동속에 새끼거미의 폭발은 묻혀버렸다.

 엘리스는 수도원 가장자리에 세워진 벽을 뚫고 날아갈만큼 멀리 튕겨져나갔고, 리신의 수도원 내에 있는 야외수련장 절반이 파괴되었다.

<계속>

<글쓴이의 말>

 

오랫만에 길게 써봤습니다. 엘리스의 전투력이 절정에 치달았다고해도 카사딘을 이길순 없죠. 하지만 전투씬이 너무 간단히 묘사된감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