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움'에 관해서.


*
1. 케일모르가나


-아얏.

섬섬옥수 새하얀 손가락 끝에서 피가 비어져 나오자 그녀는 그 손가락 끝을 입에 물고 핏방울을 살짝 빤다. 혀 끝에서 퍼지는 피 맛이 문득 찝찔하다.
무엇이 제 손을 다치게 했는지, 다른 쪽 손으로 떨어진 물체를 주워 든다. 떨어지느라 표면 유리가 깨어져 버린 액자다. 고운 미간이 약간 찌푸려진 채로 액자를 주워 살피던 그녀의 표정은 그만 일순간 어두워진다.

-...

오랜 세월이 흘렀으나 어느 화가의 작품이었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는 그 그림은 여지껏 태와 빛깔이 흐릿하게나마 남아 있었다.

지금과 같지 않은 그 화사한 봄빛 머리가 단번에 시선을 잡아끎에 케일의 비취 빛 눈동자에 도드라진 씁쓸함은 한층 더 짙어진다. 이 때는 참 밝았다. 저 환해 보이는 두 눈에 자신을 향한 원망의 빛이 깃든 것은 도대체 언제부터였을까. 이미 그 때부터 나 스스로조차 모르게 우리 둘은 갈라져 가고 있었을까. 설마 이 사진을 찍던 바로 그 순간부터? 그 때부터 이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은 시작된 거였을까. 수천 년 동안 가슴에 수없는 멍울이 지게 만든...

눈을 가만히 감고 만다. 이미 사라지고 만 과거를 그리워해 봤자 지금의 자신을 갉아먹을 뿐이라는 걸 슬프게도 오래 전에 자신은 너무나도 분명히 알아 버렸다.

제 가슴 속마냥 깨어진 유리를 쓸어 담아 휴지통에 버리고, 액자 속 그림을 빼어 그 무수한 유리조각들 위로 툭, 떨어뜨린다. 이 버거운 세월이 그녀에게 부여해 버린 냉정함은 그 슬픈 일을 거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그녀의 가벼운 손짓 한 번에 수천 년을 먼지 쌓인 서가에서 외톨이처럼 보내어 온 그 그림은 순식간에 뜨거운 불길에 휩싸였다가 이내 한 줌의 재로 맥없이 바스라지고 만다.

-안녕.


*
2. 루시안세나


밤은 어느덧 소리도 자욱도 없이 이 음울하기 짝이 없는 땅에 내려앉았다. 그럼에도 볼 수 있었다. 껍질 뿐인 육신에 갇혀 헤어나오지 못한 채 안에서부터 점점 썩어나고 있는 그들이 풍기는 음험한 영기를. 섬은 그 덕으로 시종일관 이 저주와도 같은 것의 끔찍한 색채로 넘쳐났다. 그들이 우는 소리. 부패하고 만 더러운 굴레에 구속되어 벗어나지 못하는 자들이 울부짖는 소리.

그러나 구원받지 못한 자들아. 오늘만큼은 너희를 정화의 불꽃으로 태워 섬멸하러 이 섬에 발걸음한 것이 아니다.

그런 만큼 언제나 쥐고 있던 한 쌍의 쌍권총 중, 사랑하던 이가 쓰던 쪽은 내 손이 아닌 허리춤에 고요히 안착하고 있었다. 총을 들지 않은 이 손에 무엇을 대신 들었느냐고 묻는다면, 그 악몽과 같던 날 나의 불찰 탓에 돌이킬 수 없는 길로 떠나보내고 만, 지금 이 순간도 끔찍이 사랑하는 그 이를 가장 닮았다고 생각하는 백합이다. 음침한, 공기조차 을씨년스러움으로 꽉 찬 이 땅과는 꽃이 지닌 순백의 눈부신 빛깔은 도통 어울리지 않았으나, 그러나 그 우울한 색채에 굴복하여 들어가기보다는 마치 어둠 속에 단 하나 남은 불빛인 것마냥 하얗게 빛이 났다.

다 온 것 같다.
그녀를 잃은 그 장소.

어찌나 커다란 충격이, 그리고 그보다도 더욱 처절하고 농밀한 슬픔이 나를 사로잡았었던지 세월이 흐르고 흐른 후에도 나의 눈 속에 이 끔찍한 풍경은 마치 그 날 그 때를 재현하기라도 한 것마냥 선연하게 박혀 있었다. 정확히 몇 걸음을 더 걸어야 그 날 사랑하던 그 이가 떨어지는 하얀 꽃잎처럼 나의 눈 안에 영원히 씻을 수 없을 잔상을 남기며 내 발치에 스러지던 바로 그 곳에 설 수 있는지도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러하여 지금, 나는 바로 그 곳에 선다. 손에 쥔 백합꽃을 그녀가 쓰러지던 자리에 가지런히 놓았다. 그리고 그 앞에 한 쪽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자세로 고요히 앉는다.

내 목소리가 들리오?

어리석은 물음임을 알면서도 이 음울한 공기에, 허공에 대고 그렇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편안하게 보낸 것이었더라면. 차라리 그 아름답던 이가 평안히 이 곳을 떠난 것뿐이었더라면 그녀를 잃은 지 꼭 1년이 된 지금에서조차 이토록 가슴이 미어지지는 않았으리라. 아마 이 자리에, 자신을 부르는 나의 목소리를 듣고 와 주었을 수도. 보이지는 않았겠지만 늘 그러하였듯이 그 따뜻한 팔로 내 어깨를 감싸 주었을 수도 있었을 터다. 분명 이 순간, 세상의 그 어느 것보다도 더욱 따스하게 내 곁에 실존했으리라.

그러나 내 사랑하는 이는 영혼마저도 이 더러운 땅에 구속되었다. 그것을 풀어 주는 것이 나의 몫인데,
이 저주받은 황폐한 땅에서 그녀를 구해 내어 하늘에서 영원토록 평온히 안식을 취하도록 돕는 게 그녀를 잃은 이 죄인이 할 수 있는 마지막 일인데,

문득 입술이 고통스러운 직선이 되어 맞물린다.

아직도 나는 그 소명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 날이 올 때까지 나는 쉬지 못하리라.
스산한 바람이 문득 죽은 그이의 손길이라도 되는 것마냥 얼굴을 스쳐 옴에, 스르륵 감은 눈꺼풀 속으로마저 꽃 같은 그녀의 모습이 스며 아른대는 듯하였다. 그만 눈시울이 붉어짐을 느낀다.

그립다.

세나.
일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대를 구해 주지 못했소. 미안하오. 미안하오...


*
3. 아리 (-연인을 기리며)


오늘은 빗방울이 차요. 그대, 화폭이 눅눅해진다며 비 오는 걸 싫어하셨던가요? 부슬비가 슬프게도 내리네요. 덕분에 내 꼬리가 한없이 무거워져 버렸어요. 따뜻한 겻불이라도 쬐며 한기를 애써 쫓아내다가 밀려오는 노곤함에 그대로 쓰러져 잠이 들고 싶어지는 날이예요.

내 그대, 내 사랑. 인정하긴 싫지만 난 세상에서 외로움이 가장 싫어요.

나는 왜 이리도 심약한지 꼭 밤에 반짝이는 별들을 올려다보면 괜시리 가슴 한 켠이 저미고요, 꽃 지는 걸 보고 있으면 눈물이 다 나네요. 우스운 일이죠? 나는 남의 것을 빼앗아 사는 괴물이지만, 괴물은 이런 데 쉽게 무너지지 않아요. 난 그대가 일전에 날더러 말한 대로, 꽃이기에, 인간이기 때문에 무너지나요? 떨어지는 꽃잎을 잡아내려다 나무에 기대어서 울다 지친 새끼 짐승이라도 된 것마냥 아릿함에 겨워 어쩔 줄을 모르는데, 흐릿해진 시야 속에서 다시 눈앞을 찾으려 애쓰다 보면 계절은 바뀌어 있어요. 그대가 별이 되어 버린 후로는 시간이 이리 무정하게도 빠른데, 지옥에서의 하루 같은 이 나날들보다도 빠른 별의 시간을 살고 있을 그대의 기억 속에서도 내가 흐려지고 있는 거 아닌지 모르겠어요. 그래서는... 그래서는 안 되는데.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위해 온 마음을 불태웠다가 지금은 이 크나큰 빈 자리를 어떻게든 잊어 보려고 계절에, 내가 몸담은 이 숲의 정경에 취해 살고, 마치 봐서는 안 될 금단의 장소에 낀 도둑처럼 몰래 사람들의 온기에 취해 살아요. 그래도 종국에 생각나는 건 당신이네요. 참 이상하죠. 그대야 내가 행복하기를 바랐던가요. 나는..., 나는 잘 모르겠어요. 마치 영영 깨어날 수 없는 악몽에 빠져 영겁 회귀를 반복하는 것만 같은 이런 구렁텅이에 내몰린 삶을 행복이라고 부를 수가 없어요. 내가 그나마 악착같은 발버둥으로 취하는 안식마저 구원이라고 이를 수가 없어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목매어 몇 번이고 낭떠러지를 고공 낙하하는 삶은 이미 삶이 아니예요.

비가 슬프게도 내리네요. 아니 어쩌면 슬픈 건 나뿐인지도 모르겠어요. 그대는 내 마음 속 하나뿐인 꽃이고 별이었으니까 이 괴로움을 싸안고 살아가는 것도 내 여생을 필요로 하는 몫일까요. 매일 대답 없는 그대에게 똑같은 질문을 하고 그만 지쳐 그저 쓰러지고 싶을 때까지 답을 찾아 깊게도 헤매는데 난 여즉 이 모든 것을 깨끗하게 마무리지을 결론이란 걸 못 내렸어요. 그대라면 뭐라고 했을까요. 내 마음이 그 비극의 날과 같이 지독하게 시리도록 끝까지 내가 행복해질 길을 찾으라고 했을까. 그렇다면 나는..., 길을 잃었어요. 아니 내겐 애초에 길이 없어요. 아무렇지 않아지기 위해 차마 그대를 잊을 수가 없어요. 그대는 내 생애 가장 따뜻한 불빛이었으니까요. 독을 삼킨 것처럼 쓰라린 회한 속에서 그대만 그리고 있는데, 이 굴레도 내가 그대 곁의 별이 되어야만 끝날까요?

...미안해요. 결국엔 사람도 아닌 주제에, 당신 앞에선 이렇게도 투정을 부리네요. 그대가 슬프지 않도록 나도 푸념하는 버릇을 고쳐야 할 것만 같네요. 결국 또 마음 뿐이었고, 언젠가 다시 이렇게 비가 눈물처럼 후드득 쏟아지는 날이 오면 또 그대 앞에서 밤이 다 지나도록 칭얼거릴까요.

...
...

아아, 이 이상은 안 되겠어요. 더 생각했다간 내 머리가 터져 버릴 지도 모르겠는걸요. 정말로 그만 해야겠네요.
내 이야길 오늘도 다 들어 주어서 고마워요. 사랑해요, 하늘 아래 오직 한 송이였던 내 꽃. 암만 생각해도 혼잣말은 내게 너무 해로워요. 이만 눈 좀 붙여야겠어요. 오늘도 그 드높은 창공에서 날 굽어보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