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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식 설정에 작가의 상상력을 더한 겐지의 프리퀄 스토리입니다.

유년기의 겐지부터 청년기의 겐지, 한조와 대립한 후 사이보그가 된 겐지, 그리고 현재 시점까지를 다루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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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이여, 나의 힘이 되어라!"


 하나무라 성의 한적한 곳에 자리잡고 있는 정원. 한조가 능숙한 솜씨로 날이 선 칼을 휘두르자 푸른 용 한 마리가 위용을 뿜으며 천공을 갈랐다. 일족의 수장이 될 한조의 검술 솜씨는 그 누구와도 견줄 수 없을 만큼 훌륭했다. 한조의 아버지 시마다 류헤이(島田 龍平)는 그 광경을 지켜보고는 만족스러운 듯이 한조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한조는 예를 갖추어 아버지에게 인사를 올렸다. 류헤이가 입을 열었다.


 "시마다 가문의 차기 수장으로서 흠잡을 데 없이 훌륭한 솜씨였다."


 "과찬이십니다, 아버님."


 "용은 시마다 가문의 상징이자 오직 우리 일족만이 용을 다룰 수 있다. 용은 우리의 화신이요 조상이며 전부와도 같다. 용의 영혼을 자유롭게 소환할 수 있는 자만이 수장의 자리에 오를 수 있는 법이지. 너는 일족의 미래를 이끌기에 충분한 재목이다. 언젠가 계승식이 열리면 너의 이름을 모두의 앞에서 자랑스럽게 외칠 수 있겠구나."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겐지는 가볍게 휘파람을 불었다. 그런 가벼운 태도가 못마땅했는지 경망스럽다는 듯 한조가 눈짓을 보내자 겐지는 웃음을 터뜨렸다. 스물 한 살이 된 겐지는 여전히 장난기 많고 유쾌했으며 늘 자신만만한 모습이었다. 세상 두려울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듯한 거침없는 태도와 때로는 조금 오만해 보이기도 하는 그 눈빛까지, 혈기왕성한 청년으로 성장한 겐지는 인생의 가장 빛나는 순간을 만끽하고 있었다. 못마땅한 표정의 한조와는 다르게 류헤이는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손짓으로 겐지를 불렀다.


 "겐지, 이리 와 보려무나. 요즘 수련은 게을리 하지 않고 있느냐?"


 "물론이죠, 아버지."


 겐지가 씩 웃자 류헤이는 겐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류헤이는 겐지가 아주 어린 아이였을 때부터 유독 애정을 많이 쏟아 주었다. 어머니를 일찍 여의었기에 겐지에게 그만큼의 사랑을 더 쏟아주고 싶었던 이유도 있겠지만, 가끔씩 한조는 겐지가 어머니의 얼굴을 꼭 닮았기 때문에 아버지가 겐지를 더 아끼시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눈부시게 의학이 발전한 시대였음에도 불구하고, 원인조차 밝혀내지 못한 희귀병에 걸려 시름시름 앓다 세상을 떠났던 가여운 어머니. 류헤이는 아내 사유리를 세상 그 누구보다도 사랑했다. 류헤이가 가업을 이어받아 날이 갈 수록 강성하게 만들었던 범죄의 제국을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던 사유리. 겐지는 너무 어렸기에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한조는 흐릿하게나마 어머니의 기억이 남아 있었다. "세상의 선을 위해 행동해야 한다"고 어린 한조에게 늘 말씀하셨던, 너무나도 다정했고 너무나도 여렸으며 너무나도... 나약했던 어머니.

 아들 겐지를 바라보는 류헤이의 눈에는 애정이 담겨 있었지만 때로는 안타까움과 연민, 회한도 담겨 있었다. 지금 이 순간, 장성한 겐지를 바라보는 류헤이의 눈에는 오래 전 죽어버린 아내의 웃는 얼굴이 언뜻 비치는 듯 했다. 아버지의 표정에 순간 슬픔이 한 방울 떨어져 퍼져나가는 것을 눈치챘는지, 겐지의 얼굴에 당황스러움이 스쳤다.


 "아버지? 괜찮으세요?"


 "아무것도 아니다. 방금 네 형이 우리 일족의 미래를 보장할 수 있음을 보여줌으로서 나를 안심시켜 주었으니, 이제 네가 나를 즐겁게 해 주렴. 네 피리 소리가 듣고 싶구나."


 아버지의 부탁에 겐지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시마다 가문의 상징이기도 한, 오직 그들만이 다룰 수 있는 용을 소환하지 못해 쩔쩔매던 어린 소년이었던 겐지. 형인 한조를 따라 몇 번씩 정신을 잃기도 하면서까지 수련을 거듭했지만, 겐지는 여전히 자신만의 용을 불러내지 못했다. 시마다 일족의 명예에 흠이 된다며 수없이 낙담하고 집을 나가기도 했지만, 아버지와 형의 지속적인 사랑과 격려 덕분이었을까? 겐지는 완전히 달라졌다. 여전히 자유분방하고 제멋대로인 성격이기는 했지만, 수련에 임하는 시간만큼은 보다 진지한 모습을 보이게 되었고 함부로 수련 시간을 빼먹는 일도 없었다. 비록 지금까지도 용을 단 한 번도 제대로 소환한 적이 없었으나, 그것만 제외하면 겐지의 무술 실력은 거의 무신(武神)에 가까울 정도로 탁월했다.

 '용도 제대로 소환하지 못하는 시마다 일족의 천덕꾸러기' 라는 칭호로 원로들의 손가락질을 피해갈 수는 없었지만, 그는 무술 실력을 비롯해서 여러가지 다른 재능으로 아버지와 형을 기쁘게 할 줄 아는 착한 아들이었다. 음악적 재능 역시 뛰어났던 겐지는 피리 연주와 노래 실력이 출중한 편이었고, 그림을 그리거나 글을 쓰는 것에도 재능을 보였다. 한번은 겐지가 서예에 푹 빠져서 커다란 족자에 자신이 직접 가훈을 써서 아버지에게 선물한 적이 있었는데, 류헤이는 그 선물을 크게 마음에 들어하며 그 족자를 성 안에 걸어두었다. 어쩌면 겐지는 시마다 가문의 대업을 잇는다기 보다는 자기가 원하는 삶을 살 팔자인지도 모른다고 한조는 생각했다. 하지만 선대부터 아버지 대까지 이어져 온 이 거대한 제국을 한조가 유지해 나가기 위해서는 겐지의 도움이 필요했다. 설령 겐지가 원하지 않는다고 해도 한조가, 원로들이, 그리고 이 제국이 그를 필요로 했다.

 한조는 겐지의 피리 연주에 심취한 아버지에게 눈으로 말했다. 아버님, 겐지에게도 후계자의 책임감을 알게 해 주셔야 합니다.

 류헤이 역시 눈빛으로 답했다. 아들아, 그 애를 그냥 두려무나. 그 애가 자신만의 길을 가게 두렴.


 *


 한조가 새로운 수장으로서 입지를 공고히 할 계승식까지 정확히 일 년이란 시간이 남았다. 일 년이 지난 오늘이면 한조는 시마다 일족의 새로운 지도자가 되어 그의 아버지의 제국을 물려받을 것이다. 그리고 계승식까지 일 년이 남았다는 것은, 겐지가 해야 할 일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이 늘어났다는 뜻이기도 하다.

 원래대로라면, 그러니까 겐지도 시마다 가문의 일원답게 용을 다룰 수 있었다면 두 사람은 공동의 수장으로서 군림하게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원로들은 용을 소환하지 못하는 겐지를 수장으로서 인정할 수 없다고 일갈했고, 어차피 시마다 가문의 범죄사업에 관심이 없던 겐지는 딱히 그 사실에 대해 아쉬워하지는 않았지만 대신 다른 임무가 그에게 내려졌다. 한조가 아버지의 사업을 배우는 겸 하여 부자지간이 하나무라를 떠나 있는 동안 겐지가 이 성의 주인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두 사람은 예정대로라면 다음 주에 하나무라를 떠나 계승식 한 달 전에 돌아올 것이다.


 "그 말인 즉... 하나무라에 무슨 일이 생기지 않도록 그동안 네가 이곳을 철저히 돌봐야 한다는 뜻이다."


 여행 채비를 하며 한조가 말했다. 단호한 형의 어조에, 겐지가 형의 등 뒤에서 귀찮다는 듯 투덜거렸다.


 "아니, 시마다 일족 무서운 줄 모르고 누가 하나무라를 건드리겠어? 어차피 이 지역 경찰도 다 우리 쪽 사람들이잖아."


 "내가 말하는 건 말이다, 겐지..."


 한조가 짐을 꾸리던 손을 멈추고 자뭇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외부의 세력들만이 적이 아니란다."


 "무슨 뜻이야, 형?"


 "원로들 말이다, 겐지."


 겐지가 멈칫했다.


 "그 양반들은 또 왜?"


 "아버지나 내가 없는 동안, 그들이 자칫 시마다 가문의 이름을 등에 업고 여우가 호랑이 행세를 하며 날뛸 수도 있다는 뜻이다. 결국 그 불똥은 다 우리 집안으로 돌아올 것이고, 최악의 경우엔 돌이킬 수 없는 사태까지 발생할 수도 있어."


 "망할 양반들. 늙어서 노망이 나도 제대로 났지."


 "그리고... 너도 알다시피 그들은 네가 어렸을 때부터 너를 못마땅해했어. 하지만 아버지나 내가 눈에 불을 켜고 너를 감싸주었기 때문에 그들이 너에게 함부로 할 수 없었지. 아버지의 권력이 막강하지 않았다면 넌 진작에 쫓겨났을지도 모른다. 그 위선자들 때문에..."


 한조가 한 마디 한 마디를 할 때마다 겐지의 표정이 점점 굳어졌다. 자유분방한 겐지는 어렸을 때부터 원로들에게 지탄의 대상이었다. 하나무라의 성에서 닌자 훈련을 받게 할 것이 아니라, 성 밖의 보통 아이들이 다니는 기숙학교로 보내야 한다는 의견이 겐지가 십대였을 적에 거의 매 년간 나왔을 정도이니 말이다. 용을 다루지도 못하니 정통성에조차 의심이 간다는 것이 그들의 의견이었다. 그러나 원로들이 겐지를 그토록 비난하는 이유는 겐지가 가문의 사업에 일절 관심이 없었던 탓이 가장 컸다. 시마다 가문이 강성해지는데 도움은 되지 않으면서, 시마다 류헤이의 차남으로서의 특권과 막대한 재산은 모두 누릴 수 있었으니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류헤이가 한조가 이토록 오랜 시간 하나무라를 비운다면, 성 안에서의 겐지의 입지가 다소 위험해질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내가 비록 용을 다루지는 못 해도, 내 안에 흐르는 피는 시마다 일족의 피. 함부로 나를 건드렸다가는 삼족이 멸할지도 모른다는 것을 그 노친네들도 잘 알텐데?"


 "방심은 금물이야. 단지 너의 생명을 위협하는 것 뿐만 아니라, 그들이 잘못을 저질러놓고 너에게 뒤집어 씌울수도 있는 일이다. 항상 경계하고 또 경계해야 해."


 "내 걱정 할 시간에 당장 내일 떠날 짐 꾸리는거나 더 걱정해. 머리는 치렁치렁 길어가지고 다니면서 불편할텐데 싹 밀고 가지 그래?"


 겐지는 일부러 무관심하다는 듯 말을 남기고 한조의 방을 나섰다. 형의 말을 그냥 가볍게 넘길 수만은 없었다는 것을 그 누구보다도 자기 자신이 더 잘 알고 있었기에 겐지는 더더욱 짜증이 났다.

 내가 용을 다룰 수 있었더라면! 겐지는 홀로 탄식했다. 겐지가 한조처럼 용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었다면, 망할 원로들이 뒤에서 겐지를 욕했을지언정 아버지 앞에서까지 정통성을 걸고 넘어지며 그것을 빌미로 비난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겐지는 슬슬 걱정이 되었다. 아버지와 형이 하나무라에서 떠나 있는 동안, 겐지가 아주 조그만 문제라도 일으킨다면 그들은 그 문제를 크게 포장하여 아버지에게 일러바치고도 남을 사람이었다. 그 정도에서 끝나면 천만 다행일 것이다. 한조가 말한것처럼 원로들이 시마다 일족의 이름을 등에 업고 다른 조직을 고의적으로 건드리거나 문제를 일으킨 후에 겐지에게 뒤집어 씌울 위험도 있었다. 최악의 경우는 겐지의 신변이 위험해질 수도 있었다. 아버지와 형 없이, 자신에게 적대적인 이 사람들 사이에서 홀로 거의 일 년에 가까운 시간동안 문제 없이 잘 지낼 수 있을까?

 술이라도 한 잔 해야 이 지긋지긋한 걱정을 머리에서 떨쳐낼 수 있을 것 같아, 겐지는 성을 나섰다.


 *


 하나무라의 성에서 멀지 않은 도시 외곽에는 작은 칵테일 바가 있다. 인간과 옴닉 바텐더가 함께 운영하는 이 칵테일 바는 검정색 바탕에 마티니 잔 하나가 그려진 간판이 세련된 곳으로, 겐지가 가끔 혼자 생각을 하고 싶을 때 찾는 곳이다. 오늘처럼 머리가 복잡한 날에는 이 곳에 가는 게 제격일 것이다.

 바 안은 어두웠지만 따스한 금빛 조명이 여기저기서 예쁘게 빛나고 있었다. 자정이 가까워지는 늦은 시간이어서 그런지 손님도 거의 없었다. 인간 바텐더는 오늘 출근하지 않은건지, 옴닉 바텐더 하나만 앞에 앉은 여자 손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워낙 작고 외진 곳에 있는 가게라 단골들만 주로 찾는 곳이기에 손님들의 얼굴은 겐지의 눈에 모두 익숙하지만, 이 여자 손님은 다르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얼굴이다. 겐지는 호기심을 갖고 가까이 다가간다.

 차분한 갈색 생머리에 몸에 딱 붙는 검정색 원피스 차림이 잘 어울린다. 곧게 쭉 뻗은 콧날이 도드라지는 옆선이 아름답다. 여자가 주문한 건 키스 오브 파이어로 보인다. 어째서인지 이 여자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다.

 여자가 고개를 돌려 겐지를 바라본다. 나른한 듯 깊은 다갈색 눈동자가 겐지의 눈과 마주쳤다. 겐지는 숨이, 이 시간이 멈추는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