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프롤로그.

비가 오던 날이었다. 나는 수많은 사람에게 둘러싸여서 차례대로 구타를 당하고 있었다. 피 때문에 붉어진 시야와 내리는 빗물이 눈 앞을 가려서 제대로 된 반응도 방어도 할 수 없었다. 발길질이 내 머리를 강타하여 몸이 뒤로 넘어 가면 누군가가 내 몸을 일으켜 세웠다. 이윽고 내 명치 부근에 강력한 스트레이트가 꽂히는 것이 느껴졌다.
컥. 하고 숨이 막히며 나는 앞으로 꼬꾸라졌다. 하도 맞았더니 잠시라도 바닥에만 누워있는 게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다.
내리는 빗방울들이 바닥에서 한번 튀고 내 얼굴 위로 떨어졌다. 행복한 시간도 잠시 다시 한번 누군가가 내 팔을 뒤에서 끌어안고 일으켜 세웠다. 나는 앞을 바라보았다. 흐릿한 시야에 붉은색 머리띠를 멘 사내가 보였다. 그 사내의 손에는 은색으로 빛나는 날붙이가 들려있었다. 하지만 내 눈길은 그런 것 따위에 가지 않았다.
“....왜 돌아온 거야.”
나는 힘겹게 중얼거렸다. 물론 그녀에게는 들리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폭력에 짓이겨진 눈두덩이로 사내의 너머를 바라보았다.
순백의 흰색. 천사의 빛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티끌 하나, 먼지 하나 묻지 않은 것처럼 빛나는 그녀가 순은처럼 빛나는 '리베롤'을 견착하고 있었다.
흔들림 없이,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안정적인 자세로 흩어지는 빗물 사이를 겨냥했다. 빗물은 풍성하고 뒤죽박죽으로 자라있던 그녀의 흰 머리카락을 차분하게 바꾸어주었다.
그녀가 소리쳤다.
“멈춰!!!”
그녀의 바람과는 다르게 내 앞에 있던 사내는 나에게 달려들었다.

탕!

망설임도 없이 한 발의 총성이 내리는 빗물들을 공명시켰다.
내 앞에 있던 사내가 천천히 쓰러지며 머리에 있던 빨간 머리띠가 흘러내렸다. 시간이 멈춰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세상이 느리게 움직이며 그 머리띠에 쓰여 있던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평화 인권'이라 쓰여 있는 머리띠의 움직임이 점점 0에 수렴했다.
내 앞에 서있던 사내가 천천히 쓰러지며 그 뒤로 보이는 총을 쏜 반동으로 넘어지는 그녀의 모습이 내 수정체를 통과했다.
'털썩'
다시 시간이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우왕좌왕 하며 일사불란하게 사내를 데리고 사라졌다. 나를 들고 있던 사람도 같이 떠났기에 나는 다시 빗물 속으로 빠져버렸다.
그녀가 천천히 내 곁으로 다가왔다. 바닥에 엎어져 있던 나를 뒤집어서 하늘을 볼 수 있게 해주었다. 먹구름이 가득한 하늘 옆에는 흰색으로 빛나는 그녀가 보였다. 그녀가 내 머리를 감싸 안으며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녀의 얼굴에 흐르는 물을 닦아 주고 싶었지만, 몸이 전혀 움직이지 않는 나는 그대로 가만히 있었다.
몸이 점점 더 차가워져 간다. 온몸이 으슬으슬 떨리며 시야도 조금씩 흐려졌다. 아아... 이대로 죽는 걸....
나는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눈을 떴을 때는 나는 편의점 안 창고에 누워있었다. 바닥에는 담요가 깔려있었다. 창고 밖으로 나오자 모든 게 평소와 똑같았다. 마치 아무것도 일어난 적이 없었다는 것처럼. 내 얼굴에 나 있던 상처들이 아니었다면 꿈이라고 착각할 뻔했다.
그리고 또 하나가 없었기에 나는 이것이 꿈이 아니라고 확신했다. 내 꿈이라면 분명히 있어야 할 것. 내 옆에 있으면 가장 안심이 되는 인물. 아무것도 없는 우리 편의점에 들어와 준 나에게 있어서 유일한 가족.

그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1.


우리 세대는 인류의 역사상에서 가장 축복받은 세대이다.
인류의 2000년이 넘는 기나긴 역사 중에서도 손꼽히는 매우 큰 사건들, 수많은 끔찍하고 잔혹한 사건 중 우리나라 아니, 전 세계적으로 지구 종말 급의 피해를 입힌 '그 사건'이 일어난 세대이다.
그 유명한 북란도 사건.
사상자는 수억 단위에 육박하고, 부상자의 수는 한국, 일본, 중국에 존재하는 모든 병원에 환자를 꽉꽉 채워 넣는다 해도 자리가 부족한 그 최악의 사건 말이다.
'그 사건' 때 유출된 붕괴액은 10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에게 고통을 안겨주고 있다.
어제 아침 까지만 해도 웃으며 놀이터에서 놀고 있던 아이들이 잠깐 강물에 닿아서 온몸이 괴사하고, 평범하게 일어나서 양치 하던 직장인이 형체를 알아볼 수도 없게 녹아내려 사망하고, 평범하게 걸어가던 사람이 갑자기 픽 쓰러지며 사망하고, 경기 중에 음료를 마신 운동선수가 사망하는 등, 끊임없이 누군가가 죽어 나가는 세상이다.
물론 그중에는 이상한 형태로 변한 사람들도 존재한다.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을 편하게 좀비, 혹은 변이체라고 부른다. 물론 진짜 좀비처럼 물리면 감염된다거나 하는 건 아니지만 하는 행동은 진짜 좀비 같다.
수는 몇 억에 육박하고 고통을 느끼지도 못하는지 사지가 잘려도 기어온다고 한다. 그들로 인해 본 손해만 돈으로 책정하면 조단위정도 된다고 들었다.
때문에 인류는 더 이상의 손해를 막기 위해 많은 연구를 진행했다. 거기서 등장한 것이 전술 인형이다.

희망이 가득해서 금방이라도 목이 메고 싶어지는, 이런 현실에 살아가는 나는 바로 ‘축복받은 세대’라고 불리는 세대다.
아, 물론 이 이름은 내가 그냥 재미로 붙인 것이다. 이렇게 부르는 것이 뭔가 더 멋있어 보일 거라고 생각해서다. 농담이고,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안아줬으면 해서다. 아무리 암울한 시대라고 해도 나는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가는 중이니까. 동정의 눈길 따위는 필요 없다.
그 사건 이후 세계는 변화했다. 효과적인 작업을 위해 100년은 있어야 나올 법 했던, 인간과 100% 일치한다 해도 무방한 인형들이 등장했을 정도니, 뭐 이미 말다했다.
덕분에 그런 인형들에게 들어가는 식량, 자원들이 아깝다고 주장하는 악질적인 평화 인권단체들이 등장해버리기는 했지만.

이런 복잡한 현실 속에서 나는 무얼 하고 있냐고? 듣고 웃지나 마라. 편의점을 운영하고 있다. 무려 사장이다. 물론 사장님이 나에게 떠넘기고 도망가 버린 것이긴 하지만 나이 22에 사장이니 꽤 출세했다고 생각한다. 이익은 흑자를 좀 보는 정도다.
주변의 가게들은 하나둘씩 문을 닫고 마을을 떠나고, 남아 있던 거주자들도 하나 둘씩 떠나가는 이런 판국에 나는 꿋꿋이 남아서 이 가게를 운영하고 있다. 어차피 누군가는 운영해야 하고 누군가는 편의점이 필요할 것이기 때문이다. 나의 이런 생각이 옳다는 건 흑자를 보고 있는 내 가계부가 증명해준다.
뭐 그렇다고 해서 내가 지독한 봉사자 마인드로 여기에 남아있는 게 아니다. 새로운 법이 제정되었다. 전국 모든 가게에 인건비를 지급해도 되지 않는 민간인형을 보내주고 오히려 지원금을 주는 정책이다. 오죽하면 국가에서 이런 법까지 만들겠냐만은 뭐 나에게는 아주 감사한 일이다. 말동무를 보내주는 동시에 지원금까지 주니 일거양득이다.
그리고 오늘은 그 인형이 면접을 오는 날이다. 뭐 어차피 무조건 여기에서 일해야 해서 불필요한 일이지만 형식적인 것으로 생각하자. 좋은 예로 결혼도 사실 혼인신고서만 있어도 부부지만 불필요하게 결혼식을 올리지 않는가? 그런 것이다.


2.

나는 카운터에 책상에 엎드리고 앉아서 진열된 과자 봉투의 모든 글자 수를 세며 무의미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사람이 가득해야 할 낮 12시. 나는 인기척은 물론 움직임 하나 없는 썰렁한 편의점을 지키고 있었다.
“하아...지루해.”
이제는 입에 붙어버린 말과 함께 나른해진 온몸을 더욱 축 늘이면서 '나는 지금 엄청 지루한 상태입니다,'라는 걸 어필했다. 안타깝게도 내 어필을 봐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분명 장사가 안되는 집을 파리 날리는 집이라고 하는데 여기는 파리도 날리지 않았다. 정말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았다. 창밖의 풍경도, 편의점 내부도, 지진이 일어나도 꿈쩍도 하지 않을 것처럼 느껴졌다.
그나마 가끔 와서 물건을 대량으로 구입해가는 손님들 덕분에 적자는 면하지만, 그 '가끔'이 문제다.
이곳 편의점 생활은 너무도 지루하다. 자동차도 지나다니지 않고 사람도 거의 지나가지 않는다. 하루는 심심한 나머지 지나가는 차량과 사람을 세어봤는데 세상에, 차량 1대에 사람은 6명이 지나갔다. 12시간 동안 말이다. 그 시간 동안 창밖을 집중하며 바라본 나도 대단하다. 이대로라면 지루함에 못 견뎌서 녹아내릴 것 같다. 그나마 다행이도 오늘만큼은 지루함을 겨우 떠받쳐주는 면접이 나를 겨우 견디게 했다.

'그 사건'이 일어나기 전, 이 시간대에 초등학생이었던 내가 북적북적한 이 편의점에서 겨우 물건을 사던 시절도 있었다.
그랬던 내가 이제는 아무도 없고 추억만 가득 담겨 있는 편의점에 앉아있다. 그런 생각을 하자 묘한 기분이 들었다.
옆집에 살면서 늘 같이 여기 편의점에서 끼니를 때웠던 죽은 서우가 생각났다. 어떻게 죽었더라...? 아, 맞아. 하필 그때 중국으로 여행을 갔었지. '그 사건'이 일어났던 '그날'에.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서 크게 기지개를 켠 후 음료수 코너에서 콜라 한 캔을 마셨다. 여기서 누릴 수 있는 내 유일한 특권이다. 특권이라 해봤자 경제학적으로 보았을 때 내 돈 내고 먹는 것이기는 하지만 이상하게도 기분은 좋았다. 나는 아무도 오지 않는 창밖을 바라보며 콜라를 음미했다. 그때였다.
'딸랑 딸랑'
이질적인 소리가 편의점내부와 내 귓속을 울렸다. 나는 너무 깜짝 놀라 콜라캔을 놓칠 뻔했지만 다시 고쳐 잡고 카운터로 돌아가며 말했다.
“어서 오세요.”
나의 발걸음이 카운터 옆에서 멈춰졌다.
“아..어... 안녕하세요!”
문 앞에 서 있던 건 하얀 사람이었다. 순백의 가운을 걸친 것 같은 작은 소녀가 힘없이 조금 풀려있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내 가슴 높이 정도의 키. 창백한 피부. 그 뒤로 땅에 끌릴 것 같이 늘어져 있는 풍성한 흰 머리카락. 다리에는 붉은색 수혈팩이 붙어있고, 머리에는 이상한 선들이 이어져 있어 흡사 '엑셀러레이터'처럼 보였다.
작은 소녀는 나를 바라보다 안절부절 못하며 눈을 아래로 내렸다.
그녀의 숙인 머리 아래로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여기서 오늘 면접을 보기로 한...리베롤이라고 합니다...”
“어..? 아, 그래 일단 들어와서 여기에 앉아.”
국가에서 보낸 인형이 이 아이인가.
소녀는 고개를 푹 숙인 채로 조심조심 손님용 의자에 앉았다. 나는 노트와 볼펜을 챙겨서 그녀의 반대 방향에 앉았다.
“이름이 뭐라고 했지?”
그녀는 갑작스럽게 고개를 벌떡 들며 대답했다.
“리, 리베롤입니다!”
그리고는 갑자기 상체를 휘청거리면서 테이블에 쓰러졌다.
“괘, 괜찮아?”
“괘..괜찮아요. 단순한 빈혈이에요,”
인형이 빈혈이라니, 뭔가 잘못된 것 같다고도 생각했지만 일단은 면접을 진행하기로 했다.
“어...리베롤? 일단은 이 서류 좀 작성해볼래?”
나는 그녀에게 아무것도 적혀있지 않은 수제 이력서를 내밀었다.
리베롤이라는 소녀는 서류를 받아들고 한참이나 읽기만 했다. 이윽고 무언가를 적기 시작했다.
그녀의 이력서 작성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이름 Ribeyrolles1918. 성별 여성. 주소지 없음. 가족 관계없음. 최종학력 없음. 혈액형 없음. 나이 모름. 전화번호 없음. 생년월일 기억 안 남. E-mail 없음.

그중에서 빼곡하게 적힌 기타 칸이 내 눈을 사로잡았다.
가진 병명 공황장애, 악성빈혈, 만성두통, 간질,............ 등등. 뭐야 이게. 거기다가 그녀는 민간 인형이 아닌 전술 인형이었다. 어떻게 된 거야 이거.
나는 일단 그런 문제는 무시하고 다시 이력서를 읽어보았다.
가진 것이라고는 이름과 병뿐이었다. 넓은 아량으로 두 번 양보해서 병은 그렇다 쳤지만, 주소지도 없다는 것은 집도 없다는 것이다.
“너 집은 있어?”
“........”
그녀의 표정이 어두워지며 눈을 내리깔았다.
역시. 그녀는 집이 없는 듯하다. 아무리 인형이라고 해도 이건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도 없이 이런 여린 소녀를, 그것도 이렇게 많은 병을 가진 소녀를 외딴 외지에 보내버리다니, 나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보내버린 뒤에는 자기들 알 바 아니라는 거야? 뭐야 진짜, 너무하잖아.
내가 심각한 표정으로 고민을 하자 그녀의 안색이 더더욱 어두워졌다.
그녀가 조심히 입을 열었다.
“저....”
목소리의 미세한 떨림에 나는 생각을 멈추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가에는 눈물이 점점 고이고 있었다.
“저...저는 떨어진 건가요..?”
그녀는 고개를 더욱 푹 숙였다. 숙인 얼굴에서 물방울이 뚝뚝 떨어져 테이블을 적셨다.
나는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턱을 괴고 냉정하게 생각했다. 아무리 그래도 우리 가게 일이니 손해를 감수하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국가에서 배정한 것이라 나에게는 거부권 따위는 없다. 그래서 그녀를 바라보며 우리 가게의 미래를 그려보았다.
생각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음료수하나를 꺼내 그녀의 테이블 앞에 놓았다. 자리에서 일어난 내가 다시 돌아와서 음료수를 주자 눈물이 그렁그렁한 그녀의 얼굴에서 당혹함이 묻어나왔다.
“마셔. 오늘부터 일하려면”
그녀는 멍한 얼굴로 나를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나는 음료수에 손을 뻗으며 말했다.
“일하기 싫어?”
그러자 그녀가 빠르게 병을 낚아채 품에 안았다.
“아, 아닙니다!”
“그래. 그럼, 그거 마시고 카운터에 앉아있어.”
그녀는 소매로 눈물을 훔치고 아까 전까지는 그녀가 할 수 있다고는 상상도 못 했던 표정으로 웃으며 말했다.
“네!”
원래라면 이렇게 병약한 소녀를 일을 시킨다는 점에서 나는 악덕한 사장일 테지만 법은 법이니 어쩔 수가 없다. 나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정오의 날카로운 태양 빛이 내 몸을 불태우는 것 같았다.
“저....이제는 어떻게 불러야 하는 건가요...? 음....주...주인님...?”
대체 무슨 교육을 어떻게 받고 온 걸까.
“사장이라 불러”

이렇게 나와 리베롤의 평화로운 편의점 생활이 시작되었다.



3.


며칠이 흘렀다.
집이 없는 그녀는 우리 편의점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그녀를 편의점에서 혼자 둘 수 없어 나도 편의점에서 지내게 되었다.
그럴 바에 그냥 내 집에서 재워도 된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편의점의 기본방침은 24시간이다. 이전에는 나 혼자였기에 어쩔 수가 없었지만, 이제는 리베롤이 들어와서 지킬 수 있게 되었다. 물론 본사도 이제는 다 포기해서 안 지켜도 상관은 없지만 나는 이런 규율에 민감한 사람이기에 지키기로 했다.

거처도 없이 인형을 보내는 국가에 메일을 보내서 항의도 해보았지만 답변은 매크로 같은 같잖은 문장뿐이었다. 결국, 나는 포기하고 그녀와 편의점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그녀는 낮에 일하고 그동안 나는 옆에서 잠을 자고 밤이 되면 내가 일을 하고 그녀가 옆에서 잠을 자는 방식이다.
창고에서 잠을 자도 되지만 리베롤이 꼭 옆에서 있어줘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하는 바람에 이렇게 되어버렸다. 덕분에 피로가 엄청나져버렸지만.

늦은 밤. 내가 평소처럼 카운터에 앉아서 과자봉지에 쓰여 있는 글자 수를 세고 있을 때였다. 카운터 구석에서 엎드려 자고 있던 그녀가 부스스 일어났다.
“왜 그래? 잠이 안와?”
그녀는 말없이 의자에 다리를 올리고 쭈그려 앉아 팔로 다리를 끌어안았다. 그녀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팔 사이에 얼굴을 처박고 한동안 움직이지를 않았다. 이상한 낌새에 그녀에게 손을 뻗어 보았다. 내 손이 그녀에게 닿자 그녀는 깜짝 놀라며 의자에서 튀어 오르듯이 반응했다. 그 반동으로 그녀의 의자가 옆으로 넘어져 버렸다.
쾅!
고요한 편의점 안에 커다란 충격음이 울렸다. 그녀는 의자와 분리되어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그제야 정신이 들은 리베롤이 머리를 손으로 감싸며 나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얼굴에는 고통이 가득해 보였다.
“괜찮아?”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앞에 쭈그리고 앉았다. 리베롤은 땅에 부딪힌 부분을 살살 문지르며 조금씩 울먹였다. 나는 손으로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고 그녀를 안아서 창고로 들어갔다. 거기서 나는 예전에 사용했던 담요를 바닥에 깔고 그녀를 그 위에 눕혔다.
“여기서 쉬고 있어.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피곤해서 그런 걸 거야.”
나는 그 말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그러자 그녀가 내 팔 옷깃을 붙잡았다. 두 눈은 공포에 질린 것처럼 불안해 보였다.
나는 의도를 알 수 없어서 그녀를 멍하니 바라만 보았다. 잠시 정적이 흐르고 이내 그녀가 입을 열었다.
“가...가지... 말아주세요..”
나는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어디안가. 계속 편의점에 있을 거야.”
내가 다시 몸을 일으키려하자 그녀가 상체를 일으켜 더욱 세게 잡아당기며 중얼거렸다. 그녀의 말은 마약에 취한사람처럼 느껴졌다.
“저, 절...버...버리지...마세요... 제...제발...저를.. 저를... 버리지... 말아주세요....제..발..”
그녀의 눈에 다시 눈물이 맺혔다.
그 말을 듣고 순간 내 몸에 소름이 돋았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내가 그 생각에 해답을 내리기도 전에 그녀의 손이 스르륵 풀리며 땅으로 떨어졌다. 동시에 그녀의 상체도 버드나무가 바람에 쓰러지듯이 바닥으로 향했다.
그제야 나는 그녀의 이력서에 적혀있던 병명 하나를 떠올려냈다.
'공황장애'
하지만 무언가가 달랐다.
한참의 고민 끝에 내가 내린 결론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였다. 흔히 트라우마라고 하는 그 증상이다. 어렸을 때 관련 서적을 많이 읽어둔 덕분에 그 증상에 대해서는 꽤 상세하게 알고 있다. 그녀가 보인 증상은 책에서 본 것과 전부 일치했다.
나는 담요 옆에 앉아 그녀를 바라보았다.
한 가지 의문을 품자 꼬리에 꼬리를 밟고 의문이 쏟아져 나왔다.
이 정도 증상이라면 도대체 무슨 일을 당했었던 거야. 예전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애초에 전술인형으로 설계되었으면서 왜 이곳으로 발령을 받은 거야. 왜 전장이 아니라 이런 편의점으로 오게 된 거야. 어째서지?
당장이라도 그녀를 깨워서 묻고 싶은 것이 한두가지가 아니었지만 이제야 겨우 잠이든 그녀를 깨우고 싶지는 않았다.
편의점 일을 해야 하기는 하지만 갑자기 그녀가 깨어났을 때 옆에 아무도 없다면 상황이 악화될 것 같아 그녀의 옆에 있기로 했다. 어차피 사람도 오지 않을 테니 상관없을 것이다.
나는 그녀 옆에 있는 벽에 기대어 잠을 청했다. 피로가 심했던 탓인지 금방 잠이 들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문득 눈을 떴다. 처음으로 내 시야에 들어온 담요 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깜짝 놀라서 내가 움직이려는 순간 오른팔에 무언가가 걸려서 잘 움직이지를 않았다. 그곳을 바라보자 리베롤이 내 팔을 품에 꼭 안고서 어깨에 기대서 잠을 자는 모습이 보였다.
만난 지 일주일도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이러다니.
나는 낯을 꽤 가리는 타입이라서 이런 상황이 매우 어색했다.
마음 같아서는 팔을 빼고 다시 그녀를 눕히고 싶었지만, 그냥 가만히 있었다. 규칙적으로 들려오는 그녀의 숨소리가 나름 귀엽다고 생각해서다.
어두운 창고라서 현재 시각이 몇 시인지는 알 수 없지만 꽤나 오랜 시간이 흐른 것처럼 느껴졌다. 요 며칠 사이 교대로 일을 하느라 잠을 제대로 못 잔 탓에 아직도 피로가 몰려왔다.
오랜 시간 동안 같은 자세로 있어서 쥐가 난 다리를 조금씩 움직여서 근육을 깨웠다. 시간이 지나서 발 저림이 사라진 후에야 다시 잠에 들 수 있었다.

다음 날 아침. 뭐 정확히 말하면 다음 날인지 아침인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눈을 떴다. 눈을 떴을 때 처음으로 눈에 들어온 건 옆에서 상체만 들이밀고 내 품에 안겨있는 그녀의 모습이었다.
이제는 막 나가는 구만.
슬슬 일을 해야 하기에 나는 그녀의 머리를 손가락으로 콕콕 눌러보았다. 머지않아 그녀가 천천히 상체를 일으켜 세우더니 깜짝 놀라며 나에게서 떨어졌다. 그 후 그녀는 빈혈기를 호소하며 옆으로 꽈당하고 넘어졌다.
리베롤이 정신을 차린 후 나는 그녀에게 물어보았다.
“몸은 괜찮아?”
“아...네. 덕분에요. 그리고...죄송합니다.”
“어떤 걸 미안하다고 하는 거야? 쓰러진 거? 아니면 밤새도록 안겨있던 거?”
“두!...둘다요....”
“괜찮아. 신경 쓰지마. 나한텐 빨리 카운터나 보는 게 사죄하는 거야.”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고 자신감이 넘치는 모습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것도 잠시 다시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으며 쓰러지기는 했지만 열정을 불태우려는 모습은 뭐 나름 나쁘지는 않았다.

그 뒤로 다시 평범한 일상이 반복되었다. 사람 없는 편의점이라는 점부터 평범하지는 않았지만 나에게는 이게 평범한 일상이다.
카운터에 앉아서 이런저런 이야기도 하고, 물류가 들어오는 것 분류하고(이 과정에서 리베롤이 얼마나 쓰러졌는지...), 시시껄렁한 장난도 치면서 지냈다.
이렇게 평범한 생활을 즐기다 보니 문뜩 의문이 들었다.
그녀가 아기처럼 책상에 엎드려서 자고 있을 때마다 생각했다.
정말 그녀가 인형인 것일까?

해답은 바로 나왔다. 당연히 인형이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자 뭔가 기분이 미묘했다. 어떻게 된 걸까. 왜 이런 이상한 기분이 드는 것일까.
나는 이런 마음을 떨쳐내기 위해 다른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저 수혈 팩은 왜 달린 것일까? 위치상으로는 수혈하려고 만든 것 같지는 않은데. 이런 의문을 품고 있을 때 그녀가 부스스 일어났다. 좋은 타이밍이라고 생각하고 그녀에게 질문을 해보았다.
“저기, 리베롤”
그녀가 작게 하품을 하고 대답했다.
“...네. 사장님.”
“그 수혈팩은 왜 있는 거야?”
“아...이거요? 글쎄요. 제 디자이너가 알지 않을까요?”
그녀가 작게 웃음 지었다.
디자이너라..... 그래 인형이니 당연히 디자이너가 있겠지.
순간 내 마음속에서 무언가 꿈틀하고 움직였다. 나는 그 움직임을 억누르려고 했다. 하지만 내 입이 멋대로 움직였다.

“저기 말이야 리베롤.”

더욱 강하게 붙잡으려고 했다. 머릿속으로 되뇌었다. '더이상 말 하지 마'. '그냥 얼버무려' 하고.

“너 말이야.”

하지 마. 그만둬. 무슨 말을 하려는 거야.

“정말로.”

왜 이러는 거야 무슨 결과를 알고 싶은 건데? 어차피 답은 알고 있잖아?

“인형이야?”

“.........”

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녀는 매우 당황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흔들리는 그녀의 눈빛이 나의 죄악감을 자극했다. 그녀가 고개를 반대로 돌리고 조용히 대답했다.
“....네”
“.....그렇구나.”
그 이후 긴 시간 정적만이 흘렀다. 그녀는 의자에 앉아서 멍하니 창밖만 바라보고 나는 과자봉지의 글자 수를 세었다. 매우 조용하다. 그것 이외에는 딱히 특별한 일은 없었다.
다만 슬슬 올 때가 지난 손님들이 아직도 오지 않고 있다는 점이 이상한 점이었다.

4.

그 뒤로 몇 달 정도 지났다. 거리에는 인권단체들이 가끔 지나다니는 것 빼고는 아무도 다니지 않았다. 나는 여느 때처럼 집에서 갈아입을 옷을 챙겨서 편의점문을 열었다. 무언가 이상했다. 불은 전부 켜져 있지만 그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창고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안은 텅 비어있었다. 나는 매점 구석구석을 둘러보았다.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패닉상태가 되어 가만히 서 있었다.
'훌쩍'
어디선가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소리가 들려온 카운터 쪽으로 가보았다. 카운터 밑에는 쭈그려서 다리를 안고 얼굴을 파묻은 리베롤이 있었다. 흰머리카라락이 너무 길어서 카운터 밖으로 길게 삐져나와 있었다. 나는 그녀 앞에 쭈그리고 앉아서 말을 걸어보았다.
“왜 그래 리베롤? 무슨 일이야.”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눈에는 눈물이 가득하고 옷도 눈물에 전부 젖어있었다. 그녀의 눈이 커지며 나에 달려들어 나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제...제발...버리지말아주세요.”
그녀가 또다시 알 수 없는 말을 하기 시작했다. 나를 껴안은 그녀의 팔이 매우 큰 폭으로 떨렸다.
“버..버리지 말아주세요. 부...부탁드릴..게요. 하..하라는...건 뭐든지 다, 할게요... 그..그러니까.. 버리지 마..말아주세요.”
그런 그녀의 모습을 더이상 봐줄 수가 없어 나는 그녀를 끌어안아 주었다.
그녀의 거친 숨소리와 버리지 말라는 소리가 내 귓속을 울렸다.
“괜찮아. 아무도 널 버리지 않아. 적어도 나는 널 버리지 않아. 그러니까 진정해. 리베롤.”
효과가 없는 듯했지만 잠시 후 그녀의 울음소리가 점점 잦아들었다.
시간이 흘러 그녀는 울음을 그쳤지만 그럼에도 팔을 놓아주지 않았다. 나도 그녀를 안은 채로 가만히 있어 주었다.
침묵 속에서 그녀가 살며시 입을 열었다.
“악몽을...꿨어요.”
“괜찮아. 꿈일 뿐이야.”
“....무서웠어요.”
“걱정 하지 마. 다 잘될 거야.”
“사장님도...지휘관처럼 나를 버릴 것 같아서..”
그녀의 말끝이 흐려지더니 내 등 쪽 옷을 강하게 부여잡았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나는 절대 너 안 버려.”
“약속할 수 있어요?”
“이 가게를 걸고 약속할게 절대 너 안 버려.”
“.....고마워요...사장님.”
그녀가 다시 울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공포의 눈물이 아닌 안도의 눈물이었다. 나는 천천히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 후 그녀는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갑자기 빈혈로 쓰러지고 또다시 빈혈로 쓰러지는 정상적인 모습 말이다.
그 이후 나는 그녀에게 과거사를 묻지 않았다. 딱히 물어볼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저 그녀가 이대로 내 옆에만 있어 주면 바랄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신은 존재하지 않는 것인지 그 바람마저 들어주지 않으려고 한다.


5.

이른 아침이었다. 나는 창고에 틀어박혀서 잠을 자고 리베롤은 가게를 보고 있었다. 요 며칠 리베롤이 앓아눕는 바람에 이틀 연속으로 가게를 보아서 나는 간만에 깊은 잠에 취해있었다. 밖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린 것 같아서 눈이 떠졌다가 이내 다시 감겼다.
한참 후 눈이 떠진 나는 밖으로 나가보았다.
매장 내부는 처참했다. 무슨 소동이 있었는지 모든 물건은 바닥에 난잡하게 깔려있고, 붉은색 종이 같은 것들이 떨어져 있었다.
벽면에는 붉은색 글씨로 평화 인권, 인형은 사라져야 한다, 인형을 고용하는 쓰레기 같은 업주는 사라져야 한다는 등의 글씨가 적혀있었다.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리베롤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정신이 나가는 줄 알았다. 자리에 주저앉을 뻔한 걸 겨우 버텼다. 나는 리베롤을 찾아보려고 했다. 매장 내부는 물론 카운터 밑에도 창고구석에도 없었다.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내 머릿속이 평정심을 잃고 미쳐 날뛰려고 했다. 나는 편의점 밖으로 나와 보았다. 매점밖에도 수많은 글씨가 쓰여 있었다.
마을을 달렸다.
없다.
도로를 달렸다.
없다.
산길을 달렸다.
없다.
낡은 폐건물에도 전부 들어가 보았다.
없다. 없다. 없다. 없다. 그 어디에도 없다.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한두 방울 씩 떨어지던 빗방울은 어느새 장대비가 되어 내렸다.
온몸이 마비되는 것처럼 느껴졌다. 뇌가 정지하고 세상이 정지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모든 걸 잃어버린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달렸다. 포기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 포기를 할 수 있겠는가. 미친 듯이 달렸다. 이윽고 나는 강변에 있는 폐쇄된 큰 도로에 도착했다. 찾았다. 넓은 지평선 같은 도로 저편에서 이쪽으로 달려오는 그녀의 모습이 보였다. 그 뒤로는 10명 남짓한 사람들이 쫓고 있었다. 빗속에서도 그녀의 흰색은 눈에 띄었다. 나도 그녀 쪽으로 달려갔다. 점점 그녀와 가까워졌다. 드디어 찾았다. 눈물이 고일 뻔했다. 그녀가 바로 내 앞 10M도 안 되는 거리에 있다. 그녀와 가까워지는 그 짧은 시간 나는 효율적으로 그녀가 도망칠 수 있는 상황을 그려보았다. 그리고 한가지 결론에 도달했다. 나는 그녀를 지나쳐서 10명 남짓한 사람에게 달려들었다. 가속도를 받은 내 몸을 날려 그중 한 사람에게 주먹을 날렸다.
“도망가 리베롤!”
나는 그녀에게 소리쳤다. 그 순간 누군가의 주먹이 내 얼굴을 강타했다. 크윽. 나는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하지만 내 시야는 그녀에게 고정되어있었다. 10M 정도 밖에서 나와 엇갈린 그녀는 우물쭈물하다 나에게 한 발짝을 내디디고 있었다. 나는 다시 한번 그녀에게 소리쳤다.
“오지 마! 도망가라고!”
그녀의 발걸음이 멈추더니 몸이 떨리듯이 고개를 끄덕이고 뒤를 돌아 달렸다. 그런 그녀의 뒤를 쫒아 가려는 남성이 있어서 나는 온몸을 던져 그 남자의 다리를 팔로 안았다. 주먹이 날라 왔지만 놓지 않았다. 눈두덩이가 찢어져서 피가 흐르는 듯 했지만 놓지 않았다. 그녀가 내 시야에서 사라진 후에야 팔을 풀 수 있었다. 다행히도 그들은 그녀를 쫓지 않고 나에게 화살을 돌렸다.
무차별한 구타가 쏟아져 내렸다. 그 위로는 매정한 빗방울이 내렸다. 나는 이를 악물고 버텼다. 팔의 관절이 비틀리고, 귀에서 이명이 들리고, 발이 짓밟혔다. 무릎을 꿇고 쓰러지면 머리로 로우킥이 날아왔다. 뒤로 쓰러지면 그들은 나를 강제로 일으켜 세워서 폭행을 이어갔다.
아프다. 죽을 듯이 아프다. 갈비뼈가 부러진 것 같고 팔과 무릎관절은 반대로 꺾인 것처럼 아팠다. 고문을 당하던 사람이 차라리 죽이라고 말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이윽고 내 앞에 있던 사내가 날카로운 칼 하나를 꺼내 들었다.

이 이후로는 처음부분을 읽어보았다면 알 것이다. 그녀는 총을 들고 다시 돌아왔고 이내 사람을 쐈다.
그렇다. '살인죄'. 혹은 '살인 미수죄'. 그 후 정신을 잃은 나는 편의점에서 깨어났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내부는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고 벽에 낙서도 다 지워져 있었다. 그걸 전부 다 치우는데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렸을까. 또한 나는 얼마나 오래 누워있었던 걸까. 나는 온몸에 감겨있는 붕대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사용하던 것과 같은 재질이다. 인형인 그녀는 특수한 붕대를 사용하는데 주변에서 붕대를 구할 수가 없어 자신의 것을 풀어서 사용한 것 같다.
그녀의 붕대는 팔다리의 고통을 참기 위해서 압박용으로 묶어둔 것이다. 그런 붕대를 풀었다는 건 지금 그녀가 엄청난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 생각을 하자 순간 눈물이 눈가에 고였다.
카운터에는 편지 한 장이 놓여져 있었다. 나는 그 편지를 읽지 않고 바로 밖으로 나갔다. 이유는 내용이 대충 예상이 되었고, 그걸 읽을 시간에 그녀를 찾는 게 더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나는 거리를 걸었다.
그녀가 내 옆에 있어 주기를 원했다. 그녀가 인형이건, 사람이 건, 동물이 건, 그런 건 이제 중요하지 않다. 지금의 나에게는 '그녀'라는 존재가 중요했다.
고장 난 것 같이 움직이는 무릎 때문에 빠른 속도는 아니어도 걸을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며 걸었다. 다행히 그녀는 얼마 멀지 않은 곳에서 발견했다. 건물과 건물 사이 틈에서 쓰러져있는 흰색 소녀라면 딱히 누가 더 있을까.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 그녀에게 다가가 보았다.
“여기서 뭐 하는거야?”
“....어떻게 오셨어요...”
“네가 밖에서 오래 돌아다닐 수 있을 리가 없잖아. 당연히 이 근처에 있겠다 싶어서 주변만 돌아다녔지.”
“저를 정말 잘 아시네요.”
“당연하잖아. 일어나. 돌아가자.”
“안돼요”
“갑자기 무슨 소리야.”
그녀가 천천히 상체를 일으켜서 나를 바라보았다. 지금 보니 그녀의 팔다리가 퉁퉁 부어서 덜덜 떨리고 있었다. 나는 내 몸에 둘러져있던 붕대를 풀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그거 풀면 안 돼요!”
“너도 지금 내 말 안 듣는데 내가 네 말을 들어야 하나?”
차분하게 반박을 한 후 나는 그녀의 몸에 붕대를 둘러주었다.
그러자 그녀의 팔다리가 진정이 되었다. 나는 그녀의 눈을 바라보며 다시 한번 말했다.
“돌아가자. 리베롤”
“안돼요”
“어째서지?”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제가 돌아가면 사장님이 또 다칠 테니까요.”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저 같은 게 이런 곳에 오는 것이 아니었어요. 저는 불량품이에요. 전술 인형인데도 싸움을 못 해 지휘관에게 버림받고 탄광에 갔다가도 버림받고 이곳에 온 거에요. 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 제가 가는 곳은 어디나 불행만 따라와요. 저는...저는 폐기 되어야 해요. 그게 제 역할이에요. 저 같은 건 처음부터 없었어야 할지도 몰라요. 태어날 때부터 불량이었어요. 이게 제 운명이에요. 그러니......”
그 말을 듣자 살짝 웃음이 나왔다. 나는 그녀의 말을 가로막으며 말했다.
“그게 어쨌다는 거야.”
그녀의 두 눈이 커지며 말했다.
“.......네?”
“전에 내가 했던 말 기억해? 카운터 밑에서 했던 말.”

그녀의 표정이 순간 얼어붙으며 말을 멈추었다. 그때의 말을 기억해냈는지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한줄기가 흘러내렸다.

나는 단어 하나하나에 힘을 주어 또박또박 말했다.

“나는 절대 널 버리지 않아. 리베롤.”

한줄기 눈물이 떨어진 그녀가 멍하니 나를 바라보았다. 새 햐얀 피부 위로 그녀의 눈물이 흐른 자국이 남겨졌다. 나는 손을 뻗어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그리고 그녀의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그녀의 표정이 알 수 없게 변하더니 이내 울음을 터트렸다.
그녀가 내 품으로 달려들었다. 그녀는 울었다. 계속 울었다. 하지만 슬픔 따위는 조금도 없었다.
어렸을 때는 '기쁨의 눈물' 이 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몰랐다. 철부지어린 나는 '울면 슬픈 거지 뭐가 기쁘다는 거야' 라며 그 단어를 부정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이해할 수가 있었다. 우리는 울었다. 기뻐서 울었다. 서로에게 자신이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 깨달아서 울었다. 자신이 이곳에 남아있어도 된다는 안도감에 울었다. 그녀가 이곳에 남아준다는 것에 울었다. 우리는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돌아가자. 리베롤”
그녀의 두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렸지만 전혀 슬퍼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는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네.”





에필로그.

우리는 다시 편의점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다시 평소와 같은 일상이 반복되었다. 경찰은 오지 않았다. 며칠 동안은 도망을 가야 하나 고민을 했지만, 뉴스에서 '인형이 사람을 살해' 같은 기사도 나오지 않고 근처에서 사이렌소리도 울리지 않는 거로 봐서는 인권단체에서 신고를 안 한 것 같았다.
뭐 당연히 '평화 인권'단체가 폭력을 사용하고 인권을 짓밟는 짓을 했다는 사실을 뉴스를 통해서 알리고 싶지 않았던 것 일 거다.
그 덕에 우리는 평화로운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여전히 사람은 아무도 들어오지 않고 파리도 날리지 않는 편의점이지만 이 생활에 만족한다. 매일 그녀를 만나고 매일 그녀를 보고 매일 그녀를 만질 수 있는 이 현실에 나는 매우 만족한다.
그녀가 인형이라는 사실은 나에게는 아무런 가치 없는 말이다. 나에게는 그녀의 존재가 중요한 것이다. 그녀의 종족 따위는 알 바 없다.
“사장님? 뭘 그렇게 생각하고 계세요?”
“아, 아무것도 아니야. 오늘 수고했어. 이제 들어가서 쉬어.”
“네...문은 언제든지 열려있으니 언제든 들어오셔도 좋아요.”
도대체 뭘 배워 온 건지 원.
나는 그냥 씩 웃어주며 그 말을 흘려들었다. 그녀도 살짝 미소를 지으며 숙소로 바꾼 창고로 발걸음을 옮겼다.
“아, 잠깐 리베롤”
그녀가 뒤를 돌아섰다.
“사랑해.”
내가 날린 기습에 당황했는지 그녀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러다가 갑자기 그녀가 나에게 다가왔다. 내 앞에 선 그녀는 팔로 내 목을 감아서 자신 쪽으로 내 머리를 끌어당겼다. 그녀의 입술이 내 입술위에 닿았다.
“저도요”
입술 뗀 그녀가 조용히 말했다. 그리고 그녀는 빈혈을 일으키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나는 쓰러진 그녀를 번쩍 들어 올려서 창고에 있는 침대에 눕혀주었다.
내가 나가려 하자 그녀가 팔을 붙잡으며 말했다.
그녀는 어린아이같이 순수한 눈빛을 보내며 말했다.
“제가 잠들 때까지만 머리 쓰다듬어 주세요. 안그러면 또 악몽을꿀거 같아요.”
그 눈빛에 이끌린 나는 조용히 침대 옆에 앉아서 조용히 그녀의 흰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내가 머리를 쓰다듬어 주자 그녀가 실실대며 웃었다. 그리고 그녀는 만족한 듯이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그녀의 편안한 표정보자 이제는 악몽 같은 건 꾸지 않을 것 같아 보였다. 사랑스럽게 잠이든 그녀를 보자 나도 모르게 흐뭇한 미소가 피어났다.
나는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조용히 말했다.


좋은 꿈 꿔. 리베롤.




fin





수능이 4일 남았네요. 하하. 댓글은 관종인 저에게 힘을 줍니다. 부족한 글이지만 읽어 주셨다면 감사 인사 올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