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28일 인벤 자유게시판에 게시했던 글입니다.
백일선 이슈가 터진지 모르고 글을 업로드했다 그대로 묻혀 쓸려간 점이 안타까워 재업로드합니다.

간담회 참여자 발표가 다가온 만큼 최대한 많은 분들이 읽어주시고 해당 이슈에 대해 함께 고민해주셨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감사합니다. 










회사원 A씨는 '전투' 콘텐츠를 즐기는 유저입니다.
25렙을 달성해 학수고대하던 첫 모의전을 치은 A씨. 안타깝게도 초심자였던 A씨는 패배의 쓴맛을 보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A씨는 이에 굴하지 않고 더 열심히 스펙을 올려 승리를 쟁취하겠노라 다짐합니다.
 
자영업자 B씨는 '교역' 콘텐츠를 즐기는 유저입니다.
B씨의 꿈은 대륙 구석이라도 좋으니 한 번이라도 시장이 되어보는 겁니다. 어려운 목표긴 하지만, 자신의 투자가 타 유저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단걸 알기에 오늘도 투자전을 위한 돈벌이를 떠납니다.
 
백수 C씨는 '모험' 콘텐츠를 즐기는 유저입니다.
C씨는 현 업데이트에 제공된 모든 발견물을 수집하는데 성공했지만, 더 이상 즐길 모험 콘텐츠가 없음을 깨닫고 다음 발견물 업데이트까지 숨이나 참기로 했습니다. 흡!


 발견물 다 찾았어요! 이제 뭐... 하죠? 
대항해시대 온라인 발견물 올클리어 스크린샷 / (네이버 블로그 '키네틱에너지'님 포스팅 발췌)


전투, 교역 그리고 순환 콘텐츠 

혹시, '순환 콘텐츠'라는 단어를 들어보신 적 있으신가요? 들어보신 적 없으시더라도 어디에선가 이와 비슷한 단어는 보신 적이 있으실겁니다. '수직적 콘텐츠'라던가 '수평적 콘텐츠' 같은 단어들이요.

'수직 콘텐츠'란 일반 RPG게임의 스펙업, 레벨업 등의 성장형 콘텐츠를 말합니다. 위를 향해 끝없이 성장하고, 올라가는 방식이죠. 반대로 '수평 콘텐츠'는 수평적이고 평등하며, 누적되는 요소가 없거나 적은 콘텐츠를 의미합니다. 특정 게임들에서 볼 수 있는 악기연주 등의 시스템이 여기에 해당하구요.

그렇다면, '순환 콘텐츠'는 어떤 부류의 콘텐츠를 말하는 걸까요?

'순환 콘텐츠'는 게임에 큰 규모의 업데이트나 구조 변화가 없거나, 적더라도 자체적으로 재생산될 수 있는 형태의 콘텐츠를 의미합니다. 구세대 게임들의 순환 콘텐츠는 PK, PvP 등 유저간 대전으로 수렴되는 경향이 있었고, 최신 게임들은 UCC, 메타버스 등으로 표현되는 콘텐츠 재생산이란 방향으로 흘러가는 모습을 보이는 중이죠.

회사원 A씨, 자영업자 B씨가 즐기던 '모의전'이나 '투자전'은 큰 틀에서 보자면 순환 콘텐츠의 면모를 갖추고있다 할 수 있는겁니다.


 알 베자스 연대기에서도 교역 콘텐츠 순환의 일부를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물론, <대항해시대 오리진>의 투자전은 캐쉬 재화가 투입될 수 있는 만큼 콘텐츠가 온전히 순환된다 말하긴 힘든 면이 있습니다. 허나, 이 부분에 대한 이야긴 넘어가도록 하지요. 이 글의 주제는 투자전의 공정성을 논하고자 하는게 아니니까요.
 
요점은 이겁니다. 전투/교역 콘텐츠는 자신들의 카테고리에서 하나의 고리를 이뤄 순환할 수 있는 구조가 마련되어있고, 이 구조는 유저들에게 지속적인 플레이 동기를 부여할 수 있는 수단 중 하나란 점. 그에 비해 모험 콘텐츠는 이 '지속적인 플레이 동기'를 부여해줄 고리가 빠져있단거구요.


 모험/교역/전투로 대표되는 세 기둥 중 교역/전투는 순환 구조의 큰 틀은 갖춰두긴 했습니다.


흔들리는 삼각대 

전통적으로 대항해시대 시리즈의 모험 콘텐츠는 '발견물 수집'으로 구현되어왔습니다. 세계 각지에 숨겨진 학술적 가치를 지닌 발견물을 찾아 도감을 채워나가는 방식이 뼈대였죠. 열심히 노력해 찾아낸 발견물을 차근차근 쌓아가는 콘텐츠. 즉, '수직형 콘텐츠'에 해당 했으며, 한 번의 플레이 이후 콘텐츠를 다시 플레이할 동기가 적은 '1회성 콘텐츠'였습니다.

콘솔 게임으로 출시되던 시기엔 이것만으로도 충분했을겁니다. 지속적으로 서비스되는 온라인 게임과 다르게 콘솔 게임은 끝이 있어도 상관 없으니까요. "모든 발견물을 모았어!"라는 만족감과 함께 게임 플레이를 끝맺어줄 수 있단 점. 이게 전투나 교역과 차별화된, 모험만이 가지고 있는 가치 중 하나였단 점은 분명하지요.


 대항3의 경우, '무대륙 발견'이나 '세계일주'등이 엔딩을 대체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하지만 <대항해시대 오리진>은 다릅니다. 지속적으로 서비스되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게임입니다. 설령 지금처럼 파티 기능도, 친구 추가 기능도 없는 유저간 접촉에 소극적인 형태로 게임 개발이 지속된다 해도 끊임없이 업데이트하고, 계속해서 콘텐츠를 확장해가야하는 숙명을 타고났습니다. 

<대항해시대 오리진>은 게임 플레이를 매듭짓고, 완결낼 수 있는 콘솔 게임으로 출시된게 아니니까요.

1회성 콘텐츠는 개발진에게도 부담이 되기 쉽습니다. 개발에 드는 코스트에 비해 유저들의 소비 속도가 빠르기 때문이죠. 때문에 1회성 콘텐츠를 핵심으로 내세우는 게임들은 대개 콘텐츠 공백 기간을 줄이기 위해 다양한 장치를 마련해둡니다.

<대항해시대 5>의 경우 발굴포인트의 회복 속도가 굉장히 느리도록 설정해 모험 콘텐츠의 소모 속도를 늦춰 놨으며, 중국에서 개발한 대항라이크 게임 <대항해의 길>의 경우 하루에 모험 콘텐츠에 사용 가능한 행동력의 한계를 지정해 강제적으로 모험을 즐길 수 없게 해놨습니다. <대항해시대 오리진> 역시 육지 탐색이 확률성이라 개발진이 원한다면 밑도 끝도 없이 늘어지게 만들기 좋은 구조입니다.


 <대항해의 길>은 극단적인 선택으로 모험 콘텐츠의 소모를 막았습니다.


콘텐츠 소모 속도의 조절은 개발 시간의 확보는 물론, 유저의 성취감도 극대화시켜줄 수 있는 만큼 그저 나쁘게만 볼 요소는 아니긴 합니다. 그러나, 1회성 콘텐츠만으로 이루어진 모험 계열이, 시간이 지날수록 어떤 식으로 변화하게 될 진 예상하기 쉽고, 그만큼 걱정하게 될 수 밖에 없기도 합니다.

모험 콘텐츠를 모두 소모했다면 전투나 교역을 해도 되지 않냐고요? 글쎄요. 안타깝게도, 이 주장이 나오는 시점에서 모험은 교역/전투와 동일선상에 놓기 힘든 서브 콘텐츠라 말할 수 밖에 없게 됩니다. 선단레벨업 정도만 제외하면 교역/전투는 스스로 적당히 순환하며 다음 업데이트까지 시간을 벌 수 있는 구조거든요. 
 
홀로 서기가 가능한 콘텐츠와 불가능한 콘텐츠의 차이는 명백합니다. 심지어 이는 대항해시대 콘솔 시리즈엔 없던 '플레이어 간 경쟁요소'를 도입해 달성한거구요.
 
시리즈 전통을 따라 모험/교역/전투 세가지 요소를 기둥으로 게임을 개발했지만, 정작 그 중 하나만 콘솔 시대의 구조 그대로 뒤쳐져버린겁니다. 마치, 한 다리만 낡아 흔들거리는 삼각대처럼 말이죠.


 모험 발견물은 저택에 보고하는 것과 동시에 컨텐츠가 완벽히 소모되고, 재생산되지 않습니다.


 대항해시대 온라인의 유산, '논전' 

그래도 다행인 부분이 있습니다. 모험 콘텐츠가 순환 구조를 이룰 수 있는 예시를 선배격 게임인 <대항해시대 온라인>이 제시해둔 바 있기 때문이죠.

바로, '논전'입니다.


 <대항해시대 온라인>의  '논전'


'논전'은 <대항해시대 온라인>의 모험가 계열 콘텐츠 중 하나입니다. 세계를 항해하고 미지의 영역을 탐험하며 찾아낸 각종 발견물을 한 장의 '카드'로 삼아 덱을 꾸리고, 이를 통해 유저간 대결을 펼칠 수 있는 콘텐츠죠.

덱에 넣을 수 있는 카드 숫자는 제한되어 있으며, 각 카드마다 가지고 있는 코스트도 존재해 다양한 룰과 조건으로, 초보 유저부터 베테랑 모험가까지 모든 플레이어가 즐길 수 있는 미니 게임입니다. 발견물 카드는 서로의 학술적 연관성에 따라 콤보 효과를 가지고 있기도 합니다. 덕분에 자신이 찾아낸 발견물을 살펴보고, 그에 맞는 콤보를 고려해 덱을 꾸리는 재미가 쏠쏠하죠.

논전이 게임 플레이에 실질적인 영향을 주는 일은 거의 없긴 합니다. 승리한다고 경험치나 두캇을 벌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단지 상대의 발견물 카드를 빼앗아오는 정도에 그치거든요. 

그래도 '자신이 찾은 발견물로 카드 대결을 한다'라는 컨셉이 주는 특별한 매력과 즐거움이 있었기에, 은근히 많은 유저가 알게 모르게 논전을 즐기곤 했습니다.


 자신이 발견한 발견물로 차곡차곡 콤보와 덱을 만드는 재미가 있었습니다.


이 외에, 논전 최강자를 가리는 '아카데미'라는 대회도 게임 내에서 주기적으로 개최되곤 했습니다.
정해진 시간, 정해진 도시에서 '아카데미'란 이름의 논전 대회가 개최되고, 여기서 높은 성적을 낸 유저는 아카데미 우승자로써 게임 공지에 기재되는 영광을 누릴 수 있었죠.

발견물을 찾아낸다는 행위가 단순히 도감의 빈자리를 채우고 끝나는게 아니었던 셈입니다. 비록 게임적 이득을 볼 부분이 없긴 해도, 발견이란 행위 그 이후를 기대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요소로 작용한겁니다.

실제로 <대항해시대 온라인> 팬사이트나 블로그들에 방문해보면 그 시절 작성된 논전 소개글이나 공략글, 콤보 DB 등을 찾아볼 수 있고, 이를 통해 논전이 부분적으로나마 순환 콘텐츠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불완전하긴 해도, 논전과 아카데미는 모험계열 순환 콘텐츠의 방향성을 제시해주고 있습니다.


'곁다리 모험'을 벗어나길 바라며.

<대항해시대 오리진>의 모험 콘텐츠는 라이브 게임으로썬 굉장히 소모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개발자 서신을 통해 모험 컨텐츠에 메이저 업데이트를 할 것을 예고하긴 했지만, 설명을 보면 발견 자체의 연출과 UX에 집중하고 있단 인상을 줄 뿐, 현재 모험 콘텐츠가 가진 '순환 불가능'이란 숙제에 대한 해결점은 보여주고 있지 않습니다.

 모험 콘텐츠의 보강이 약속되어 있긴 합니다만, 1회성 콘텐츠란 점은 변하지 않습니다.


물론, 현재 전투나 교역의 순환 콘텐츠가 온전하단 의미는 절대 아닙니다. 모의전은 간접적 유저 대전이라 동기 부여도가 낮고, 교역의 투자전은 캐쉬 재화가 투입될 수 있어 두캇벌이의 온전한 목적이 되어주지 못합니다.

그러나 모의전과 투자전의 불완전성이 논전 콘텐츠의 필요성을 부정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겨울 베옷도 안 입은 것보다 낫다"라는 말이 있죠. 아무리 하찮고 별볼일 없는 물건도 없는 것보단 낫단 의미입니다. 전투와 교역은 순환의 여지라도 있는 반면, 모험 콘텐츠는 겨울 베옷조차 없는, '발견과 수집'이란 1회성 콘텐츠만 있는 '알몸' 상태인게 문제입니다.




과연 <대항해시대 오리진>은 '모험'이란 요소를 게임의 핵심 콘텐츠로 내세울만큼의 청사진을 가지고 있는걸까요? 게임을 시작하며 가장 먼저 유저들에게 제시하는 방향성이 모험을 포함한 세 갈래의 길이었던 만큼, 이 중 가장 겉돌고 있는 모험 콘텐츠에 대한 충분한 보강이 시급합니다.  선대가 남긴 '논전'이라는 이름의 그럴싸한 유산도 있는 만큼, 더더욱이요.

꼭 논전이 아니라도 좋습니다. 모험 콘텐츠가 다른 콘텐츠들의 '곁다리' 신세를 벗어나려면 그만큼 가치있고, 부분적으로라도 지속/순환될 수 있는 콘텐츠가 필요하단겁니다. 

삼각대가 더 이상 무너지지 않도록  말이죠.

▲ 모의전, 투자전에 준할 만한 콘텐츠가 절실히 필요합니다.
(<대항해시대 온라인> 유저 창작 작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