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회 게임비평 문학상 공모작>

 

<테라>, 그 곳에 투영된 참된 인간사회의 본질을 찾아서

 

<‘고정관념’ 이란 허물을 벗어 마침내 본질을 찾다>

 

  지금 우리네 현실은 필연적으로 경쟁과 최선을 필요로 하고 이것들은 성공과 생존에도 밀접한 면모를 지니기 때문에 우리에게 감히 끝없는 경쟁사회를 거스를 여유란 없다. 잠시 숨돌릴 틈도 없이 연쇄적으로 실체화되는 경쟁의 작태는 우리에게 무의식적 페르조나를 강요함과 동시에 인간으로써의 본질을 상실케 하는 치명적 모순을 내포한다. 학교에서는 인간이 공동체 사회 속에서 조화롭게 살아가는 법을 가르치지만 막상 현실과 마주한 우리는 전쟁 같은 하루의 연속과 조우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하루를 살아가는 우리의 발걸음역시 결코 평탄하지 않다. 탄탄대로를 걷다가도 갑작스러운 돌부리에 넘어지기도 하고 예고 없는 비바람에 몸을 웅크리기도 한다. 삶의 굴곡과 무게는 어떠한 방식으로든지 또다시 우리에게 다가선다. 그리고 그 시련을 극복하지 못한 채 애처롭게 사그라드는 인생들을 목격할 때 우리는, 점진적으로 팽창하고 있는 현실에 대한 염세적 아우성의 실체가 그것의 불변성에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닳게 된다.

 

 그 때문일까, 사람은 누구나 본능적으로 꿈을 찾는다. 꿈이란 무의식의 한 켠 희미한 기억의 조각들을 더듬어 찾아낸 간절한 소망일 수도 있고, 혹은 뚜렷하게 직시한 목적과 이상향의 종착점 일 수도 있다. 가장 확연한 사실은 꿈을 갖는다는 것 자체가 페시미즘적인 관념을 어느 정도는 희망적으로 정화 시켜준다는 것에 있다.

 

 

 

  게임 속 세상(가상현실)은 그 존재가치 자체가 서사적인 자유분방함과 무겁지 않은 유희적 삶을 표방한다. 필연처럼 뒤따르는 제약이 적을뿐더러, 그 의미가 퇴색된 살벌한 경쟁을 억지로 요구하지도 않는다. 또한 현실에서 겪을 수 없는 갖가지 비현실적인 경험을 만끽 할 수 있다는 점이 한없이 매혹적이다. 이쯤에서 우리가 재확인 할 수 있는 사실은, 현실이란 인간이 인식하고 있는 매 순간 직접적으로 마주하는 객관적 시야지만 꿈을 대변하는 가상현실은 인간의 내면 속에 깃든 바램으로부터 파생된 주관적 환상이라는 것이다. 이렇듯 현실과 가상현실의 사이에는 너무나 이질적인 감성이 그윽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가상현실의 존재사유가 ‘인간의 바램’ 에 기초한다는 사실을 확인한 순간, 우리는 두 시공간이 굉장히 밀접하며 유기적이라는 사실 또한 깨닳게 된다.

 

 

  게임 비평문을 적는 내가 ‘꿈’ 이나 ‘인생’ 을 들먹이는 것이 과분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게임 세상을 이루는 가상현실의 본질은 ‘지금, 이곳에, 내가, 있다.’ 라는 사실을 전제하기 때문에 우리가 꿈꾸는 환상 또한 현실과 수직적인 연관성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요컨대 게임을 이루는 가상의 현실은 내가 살아 숨 쉬는 시공간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고, 그곳에서 살아가는 또 다른 플레이어나 NPC 들은 하나의 세상이 유기적으로 맞물려 나갈 수 있게 하는 톱니바퀴의 한 면이며, 그곳에서 내가 만들어 낸 나의 케릭터는 또 다른 세상 속에서의 ‘나’ 를 대변한다. 한 걸음 더 진보된 시야에서 해석하자면 가상현실 속에서도 무언가를 배울 수 있는 요지는 충분하다는 것이다. 문제는 그 가상현실 속에서 살아가는 자신이 이 새로운 현실을 어떻게 받아 들이냐에 달려있다.

 

 

[게임 자체를 현실의 연장선으로 인식하느냐, 아니면 새로운 시작으로 받아들여 창조적이며 유기적으로 그 세상에 응답할 것인가]

 

 

  사실, 불과 십 수년 전 만 하더라도 게임은 단지 가치가 퇴색된 시간을 소비하기 위한 오락적 수단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작금에 이르러서도 평면적인 관점에서 볼 때 게임은 절대적으로 ‘오락’ 에 불과하다. 하지만 단순한 놀이의 수단으로써 시작된 게임이 하나의 ‘문화’ 혹은 ‘스포츠’ 로 자리매김한 이유는 고정된 관념에서 탈피한 인식의 변화가 가장 주요했다. 게임에 대한 수많은 열정이 응집됨에 따라,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피상적인 틀에서 과감히 벗어나 누구도 심각하게 고심하지 않았던 가상현실의 본질에 한걸음 더 다가섰고, 그 행위는 마치 연못에 작은 이슬방울 하나가 떨어져 커다란 동심원을 그리듯 결국 게임이 지닌 진정성에 닿았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 이곳에 있는 나’ 는 이 놀라운 문화충격의 출처가 현실과 가상현실의 긴밀한 연관성에 있다고 보고 가상현실을 대표하는 <테라> 의 페러다임과 이데올로기 속에서 현실의 한 조각을 찾아보려한다.

 

 

<아르보레아의 품에서 찾아낸 현실의 조각들>

 

또 다른 세상 속에서의 자아성찰

 

 개인과 개인이 만나 협력과 질서를 통해 존속한다는 사회의 참뜻에 닿기 위해서는 반드시 전재되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인간이 사회의 구성원이자 형성자로써 인식되기 이전에 스스로를 깨우치기 위한 과정을 끊임없이 거쳐야 한다는 사실이다. 물론 이 사실은 인간이 사회적 동물 이라는 사실과도 전혀 무관하지 않다.

 ‘나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은 전 인류의 결코 끝나지 않는 숙제이다. 내면 철학의 시조라고 평가받는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사람들에게 ‘너 자신을 알라’고 설교 했지만 정작 그 자신도 ‘나는 누구인가’ 에 대한 답을 찾아내지 못했다. 명백한 이율배반 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결코 그를 비난하지 않는다. 그것이 ‘나’ 를 기초로 한 끊임없는 질문을 실천이란 요소와 연계하여, 궁극적으로 지속적인 자아성찰을 이루라는 가르침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 일 것이다. 때문에 우리는 오늘도 끊임없이 해답 없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며 진정한 나를 깨닳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과연 현실의 연장선인 가상현실 속에서 자아성찰은 어떻게 이루어질까? 거부 할 수 없는 아찔한 매력이 스민 환상을 쫓아온 플레이어에게 <테라>는 시작의 첫걸음부터 기꺼이 선택권을 내어준다. 꿈결 같은 환상으로의 첫걸음을 내딛은 순간 플레이어의 시선은 케스타닉, 휴먼, 하이엘프, 포포리, 엘린, 아만, 바라카 라는 7가지의 생소한 이 종족에 닿고, 우리는 그 들 중 나를 대변할 또 다른 종족을 찾는다. 그 뿐만 아니라 케릭터 커스텀 마이징 시스템을 통해, 또 다른 나의 세분화된 외형을 내가 직접 설계하고, 현실에서 우리가 갖고 있는 직업(학생, 직장인, 가정주부, 등)이 아닌 검투사, 창기사, 무사, 광전사, 마법사, 궁수, 사제, 정령사 라는 8가지의 직업 중 하나를 자율적으로 선택 함 으로써 우리는 <테라> 속의 나를 찾아간다. 플레이어라는 주체에게 가상현실 속에서 ‘나’를 대변할 ‘또 다른 나’를 선택할 수 있는 권리가 주어지는 것이다. 물론 이 선택사항들은 현실에서는 결코 찾아 볼 수 없는 이질적이며 추상적인 것들 이지만, 우리가 자신에게 주어진 (가상)현실에 의구심을 갖거나 당황하지 않는 까닭은 아르보레아(테라의 주 배경)에서 펼쳐질 모험과 유희를 기대하는 마음이 더욱 비대하기 때문 일 것이다.

 

 

 자, 이쯤 되면 벌써 답은 나왔다. 자신의 취향에 맞는 종족과 직업을 선택함으로써 내면 속에 잠들어 있는 ‘또 다른 나를 일깨운 것’과 모험과 유희라는 ‘목적’을 가진 여정이라면 우리는 <테라> 라는 세상 속에서의 나를 충분히 찾아 낸 셈 이다.

 

 

 ‘의식의 변화’ - 제거된 불필요 한 경쟁, 부각된 협동과 이해의 정신

 

 사실 우리가 존재하는 사회가 가진 현실성은 매 순간 변화한다. 그리고 그 현실의 코드는 인의적으로 짐작이 불가능한 가변적 요인으로 관영되었기 때문에, 우리의 하루는 늘 긴장 혹은 해긴으로 가득 차 있다.

예고 없는 불행 앞에서 인간은 추풍낙엽과도 같이 아련한 존재로 전락하고 만다. 그 때문인지 우리는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싶어 했고 그 인간 본연의 본능은, 가슴이 철처하게 파손된 현대사회와는 너무도 모순적인 협동과 이해란 감정으로 발전해 왔다. 지독한 개인주의가 팽배한 현대사회에서도 인간의 본능은 끝없이 사람을 쫓고 그리워 했던 것이다. 앞서 나는 우리의 현실은 필연적으로 경쟁과 최선을 필요로 한다고 했지만, 마치 진흙 속에서도 꽃은 피듯 그 긴박함 가운데 에서도 웃음과 눈물이란 감정이 끝없이 피고 졌다. 아직까지 우리의 감성이 완벽하게 매몰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커다란 버팀목으로써 자리매김 한 것이다.

 

  <테라>에서의 삶은 이처럼, 철저하게 개인주의를 배반함과 동시에 완벽하게 협동주의를 부각 시켰다. 아르보레아에서 살아가는(테라를 플레이하는) 사람들의 목적은 ‘개인’이 아닌 ‘단체’로 존재 할 때 비로소 빛을 발했고, <테라>라는 세상을 구축하고 지탱하는 컨텐츠 시스템역시 최우선적으로 협동을 필요로 했다. 이것은 단순하게 이론적인 가능성에 머물지 않고 구체적이고 명확하게 <테라> 안에서 실현된다.

 

  많은 사람들의 절대적 지지를 얻고 있는 소위 말하는 ‘대작게임’들은 플레이어에게 비현실적 환상을 토대로 격전적인 심리적 슬로건을 건 낸 후 끝없이 그 타이틀에 몰두하게 한다. 예컨대 <월드 오브 워크레프트>의 얼라이언스와 호드의 대립구조, 혹은 <아이온>의 천족과 마족의 대립구조가 바로 그 경우에 해당한다. 이것은 단지 그 세계을 이루는 세계만의 유기적이며 자연스러운 흐름의 한 단계가 아니라, 그 세상의 초기 설정에서부터 ‘기획자’라는 절대자가 플레이어와 플레이어 사이의 대립을 가시화 한 후 기학적인 형태로 방관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달리 말하자면 숙명이라는 단어를 내세워 뫼비우스의 띠 와도 같은 무한한 전장의 한 켠으로 플레이어를 내 몰아 버린 것이다. 이것은 가상현실을 살아가는 플레이어의 주체의식을 상실 시킬 뿐만 아니라, 하나의 가상현실을 온전히 만끽 하는데 있어서 커다란 방해요소로 작용한다. 다시 말해, 이런 형식의 행위는 비현실적인 환상과 조우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전투적인 감성을 촉구함과 동시에 단순한 오락적 흥미를 유발 시킬지는 몰라도 플레이어 한명 한명을 그 세계와 동화 시키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반면에 <테라>는 인간의 내면 속에 본능적으로 잠재되어 있는 로맨티시즘을 바탕으로 인터페이스를 구축함과 동시에, 그 속을 현실과 크게 이질적이지 않은 시스템으로 채워 뒀다. 그것이 바로 앞서 말했던 협력과 이해의 요소이다.

<테라>의 전개 방식은 아르곤 이라는 절대 악의 존재에서 기반한다. 삶의 터전(사회)으로 투영되는 아르보레아의 존속과 인류의 생존에 대한 문제야기는 그곳을 여행하는 플레이어로 하여금 서사적으로 흐르는 <테라>의 이야기에 조금 더 집중하게 한다. 뚜렷한 ‘목적’ 을 가진 공동체의 발걸음은 소통과 협력에 기반 하기 때문에, 당연하게도 아르보레아를 살아가는 플레이어들은 누군가의 강요로 인해 서로에게 검을 들이대지 않는다. 아르곤 이라는 강력한 ‘공공의 적’ 의 존재는 자연스럽게 유기적 협력과 자발적 공생을 이끌어 내는 주석이 되었고, 플레이어들은 ‘공통된 모토’ 를 향해 여정의 걸음을 맞추었다. 바로 이것이 불필요한 경쟁과 대립 이라는 현실의 연장선에 오락적 의미를 부여한 다른 게임들과 비교 했을때, <테라> 가 가지고 있는 가장 뚜렷한 노랑이며 초록이다.

 

 아르보레아를 살아가는 유저들은, 마치 현실 속 사람들처럼 각자의 개성을 지니고 있다. 공장에서 마구잡이로 찍어낸 듯 똑같은 외형과 성격이 아닌 오직 ‘나’ 만을 반영하는 케릭터들, 그리고 그 개개인이 모여 자신이 가진 능력과 기술을 응집함으로써 진정한 협동과 공생을 이끌어 낸다. 창기사의 묵직한 탱킹, 더불어 근접 대미지 딜러들의 희생어린 공격을 필두로 원거리 딜러들의 지원사격과 힐러 계열의 서브는 마치 공동체 사회 속 에서 우리에게 요구되는 협동정신을 데쟈뷰 시킨다.

 

 

  나오미 노빅의 저서 <테메레르> 에서는 표면적으로 인간과 용 사이의 교감과 우정을 그리고 있지만 조금 더 유심히 살펴보면, 전혀 다른 성격을 지닌 존재들이 이해와 협력을 통해 성장한다 는 점에서 한 층 더 큰 감동과 여운을 이끌어 낸다. 이 소설 속에서 테메레르는 다른 용들과 펼치는 선의의 경쟁 속에서 자아의 의미를 더욱 굳건히 하고, 자신을 찾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다.

이쯤에서, 우리는 도무지 끝을 알 수 없는 지독한 ‘경쟁사회’의 부조리에 회의를 느낀 것이지 발전을 동반하는 선의의 ‘필요경쟁’ 을 멸시하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사실을 확실히 해두어야 겠다.

 

 디터미니즘이 뜻하는 결과에 따른 조건 논제는 정성적이지만, 의식의 확대 혹은 사회의 발전 위해서는 협동이 따라야 하다는 사실을 분명히 입증한다. 이와 같이 <테라> 는 처음 게임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이 변화했던 순간처럼, MMORPG 게임 속에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경쟁’ 혹은 ‘대립’ 이라는 요소를 과감하게 생략함으로써 가상현실의 의미를 현실에 한걸음 더 가깝게 했다. 의식의 변화가 한 층 진보된 형태의 가상현실을 구축해낸 것이다.

 

 

 <아르보레아에서 찾아낸 공동체 사회의 본질>

 

  우리의 마음은 그 자체만으로도 하나의 사회를 형성화 하고 있다. 마빈 민스키가 말한 ‘마음의 사회’ 라는 표현은 두리뭉실 했던, ‘사회에 대한 인간의 본능’을 확고히 정립했다. 마음의 사회는 실체화 되지 않았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무형의 산물이다. 또한 마음의 사회는 인간이 표상하는 대상 자체가 사회 공동체 라는 사실에 근거한다. 이런 연유에서라도 인간이 직접 만드는 사회는, 인간을 좀 더 관용적인 마음으로 포용해야 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행하는 모든 것들이 단지 결과로만 평가되고 채점된다면, 현실에서 바라보는 환상(꿈)을 향한 사람들의 진실된 노력의 과정은 그 의미를 잃어 버리고 말것이다. 또한 지속적인 경쟁이 요구하는 사회의 부름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목적만을 이루겠다는 이기적인 마음은, 참된 사회의 본질을 철저히 짓밟는 행위라는 것 역시 깨닳아야 한다. 이해와 협력의 중요성은 수없이 되 내인다 할지라도 결코 과하지 않다. 그것을 바탕으로 선의의 경쟁이 펼쳐지는 순간 세상은 조금 더 밝은 빛을 발 할 것이다.

이와 같이 볼때 이해, 협력, 경쟁, 양보, 사랑 등, 모든 인간들에게 공통적으로 주어진 권리를 망라해서, 모든 인간 활동의 의미는 인간이 추구해야 할 가치에 대한 반성과 창조에 있다. 스스로 소중한 모든 것에게 선을 긋지 말고 먼저 다가서는 용기가 뒤따라야 사회가 우리에게 바라는 중점에 도달 할 수 있다는 뜻이다.

아프리카의 속담 중에, ‘빨리 가고 싶으면 혼자가고 멀리가고 싶으면 함께 가라’는 말이 있다.

 

 

그렇다면 과연 지금 우리는 [혼자 가고 있는가, 아니면 함께 가고 있는가?]

 

 

 삭막한 사막 속 홀로 남겨진 것과도 같은 고독이 팽배한 현실, 그 속에서 마주 친 <테라>는 달콤한 오아시스 같은 존재였다. 그리고 ‘함께하는 공동체‘ 라는 사회의 원초적인 부분을 자극한 <테라>를 통해 나는 '현실보다 현실같은 현실'을 살아 갈수 있었다.

그 의미가 퇴색되어 버린 낡은 시간의 한 켠에서 벗어난 내 앞에는, 우거진 녹림과 광활한 대지가 펼쳐졌다. 그리고 그곳에서 나는 아르보레아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눈을 마주 보았으며, 그들과 거짓없이 교감했다.

매서운 바람이 얼굴을 할퀸다. 그것이 또 다른 시련을 의미한다 할지라도 되찾은 ‘나’ 자신과, 함께 해주는 동료들이 있기에 기꺼히 그 시련에 맞설 수 있다.

오늘도 나는 땀으로 써내려간 한편의 서사시를 걷는다. <테라> 그곳은 비록 치열한 전장의 연속일 지언정 내 영혼 한켠에는 따스한 감성이 싹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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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본   http://blog.naver.com/sojujsh/130128053095

 

 

4회 게임비평상 응모작품입니다. ㅎ 엄청 열심히 쓴다고 썼는데... ㅠㅠ 투고할때 당시도 뭔가 비평에 걸맞지 않은 허울뿐인 글이라고 자각하긴 했으나, 그걸 꺠닳고도 강제투척한 결과는 역시나 광탈이네요 ㅋㅋ 아쉽기도 하지만 조금 더 배우고 조금 더 노력해서, 5회 게임비평상 응모떄는 양질의 비평을 쓸 수 있도록 노력해야 겠습니다! ㅜ

 

혹시 4회 게임비평상에 투고 하신 인벤 유저분들 계시나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