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걷던 길을 걷게 하고, 낯선 곳을 방문케 하는 포켓몬 GO의 힘은 실로 놀라울 정도다. 더 나아가 포켓몬 GO와 함께하는 '여행'을 준비하고, 실제 행동에 옮겨 버스와 기차에 몸을 싣는 트레이너들도 적지 않다고 하니,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 힘에 다시 한번 놀라게 된다.
봄의 내음이 조금씩 풍겨오는 3월이 가까워지고 있는 요즘은 둥지와 핫플레이스를 향한 발걸음 대신 여행을 계획 해볼만한 시기다. 봄의 시작을 알리는 입춘과 초목이 싹트는 우수가 지난 지금이 적기가 아닐까. 서울은 아직 바람이 매섭지만, 남쪽 지역은 최고 12도로 포근한 날씨가 연일 이어지니 말이다.
포켓몬 GO와 좋은 추억을 만들 여행지로 '경주'를 추천한다. 곳곳에 보이는 한옥채 풍경은 현대 가옥의 새로운 멋이 담겨있어 낭만적이다. 우리의 선조가 남긴 위대한 유산을 통해 가슴 벅찬 감동과 한층 더 성숙해질 수 있는 여행지. 바로 경주다.
사실 경주가 갖는 의미를 놓고 보면, 포켓몬 GO를 위해 떠날 적합한 여행지는 아니다. 오히려 포켓몬 GO는 여행을 떠날 핑곗거리에 불과하다. 하지만 집 밖을 떠나 학창 시절엔 몰랐던 고고한 매력과 추억의 감성을 되새기고 견문을 넓힐 수 있다면, 이보다 더 좋은 핑계가 있을까. '여행'이라는 본질에 더 많은 의미를 부여하고 포켓몬 GO는 부가적으로 즐길 재미 요소라 생각해보자. 술을 먹기 위해 술집에 가는 것이 아닌, 밥을 먹기 위해 밥집에서 술을 시키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천 년 신라의 '고고한 매력을 가진 곳 경주. 철없던 시절, 아련하게 떠오르는 수학여행의 추억을 되새기고, 새로운 추억을 만들어줄 낭만 신라의 수도로 여러분을 안내한다.
신라의 낮과 밤, 반전 매력이 가득한 알찬 '당일치기' 코스
지천에 널린 것이 유적이고 보물인 천 년 신라의 수도 경주. 눈에 담아야 할 유적이 너무 많기에 당일치기 여행을 계획하기가 쉽지 않다. 자고로 여행이란 마음의 여유를 갖기 위해 보다 느긋하게 즐겨야 하는 만큼, 최소 1~2박 여행을 추천하고 싶다. 하지만 월요일의 출근과 수업이라는 압박에 자유롭지 못한 것도 사실. 이러한 바쁜 현대인을 위해 알찬 당일치기 여행을 추천한다.
오전과 점심녘쯤에 불국사와 석굴암을 관광하고, 황남동에 돌아와 저렴한 경주 한정식으로 약간 늦게 점심을 해결한 뒤, 대릉원에서의 낙조, 첨성대 주변 계림숲과 안압지의 야경을 즐기는 코스다. 그리고는 다시 황남동으로 돌아와 저녁 식사를 마치고, 마지막 차편에 몸을 실으면 된다.
빠듯하지 않겠냐고? 금요일 저녁에 일찍 잠들고, 토요일 아침에 일찍 출발하면 된다. 바쁜 현대인을 위한 여행 코스니 어쩔 수 없지 않은가. 숙박비 부담을 덜어내고 저예산으로 여행하려면 어쩔 수 없다. 조금만 부지런하면 더 알찬 여행이 될 수 있다.
경상도 여행의 필수 코스 - 경부 고속도로의 낭만 '금강 휴게소'
서울/경기권에서 경주로 향할 때 보통 네비게이션은 중부 내륙 고속도로를 권장한다. 거리가 더 짧기 때문. 그리고는 자연스레 선산 휴게소(포켓몬의 성지 플래카드가 걸린 곳)를 들리라고 한다. 경상북도로 향하는 고속버스 대부분이 빠른 운행을 위해 중부 내륙 고속도로를 이용하고, 또 선산 휴게소를 들린다.
충주 ↔ 대구 구간이 막힐 땐 경부 고속도로를 이용하는 고속버스도 있다. 간혹 개인 취향에 따라 경부를 이용하는 기사분들도 있긴 하다. 이렇게 확률은 낮지만, 경주로 향하는 버스가 약간 더 돌아가는 경로인 경부 고속도로를 탔다면, 운이 매우 좋은 날인 것이다.
추풍령 휴게소와 함께 대한민국에서 가장 오래된 금강 휴게소는 마을로 향하는 길목과 저수지를 끼고 있어 멋진 자연 풍경을 자랑한다. 봄에는 새싹과 노란 풍경이 일품이고, 여름에는 가볍게 물놀이와 낚시를 즐기기 좋으며, 가을에는 단풍이, 겨울에는 얼어붙은 저수지의 모습이 일품이다. 사계절 밤낮 할 것 없이 늘 아름다운 휴게소다.
거리상 조금 더 돌아가야 되지만 경부 고속도를 타고 금강 휴게소에 들릴 것을 추천한다. 자연경관을 보며 갖는 힐링 타임도 여행에 빠져서는 안 될 묘미이니 말이다. 경주의 유적 사지가 메인 디쉬라면, 금강 휴게소는 애피타이저이자 본격적인 여행을 알리는 신호탄이다.
한옥채 매력에 푹 빠져보시라, 맛과 멋의 요충지 '황남동'
경주에 도착했음을 알리는 톨게이트의 모습은 '한옥'이다. 도시 곳곳을 지날 때마다 보이는 한옥채가 비로소 여행을 왔다는 느낌을 고취 시킨다. 시내에 들어설 때면 이곳이 정말 한국이 맞는지 착각이 들 정도. 그만큼 잘 보존된 유적과 콘셉에 맞게 지어진 한옥채의 모습이 절묘하게 어우러져 있다.
그중에서도 황남동이 딱 그러하다. 큰 도로 사이로 보이는 언덕 모양의 능선은 여러 왕릉이 모여 만들어낸 황남동의 고유 풍경이다. 여행객을 배려하여 곳곳에 배치된 관광 표지판, 신호대기선과 등불마저도 신라답게 꾸며져 다른 여행지와는 확연하게 다름을 느낄 수 있다.
황남동은 보는 멋과 함께 숙식을 해결하기 좋다. 고려-조선 시대에 귀빈이 머물렀던 객사 동경관의 의미를 살린 한옥 호텔 황남관을 비롯하여 저렴한 한옥 민박, 한옥 게스트하우스가 다양하게 분포되어 있다. 고속버스 터미널에서 도보로 20분 정도밖에 되질 않는다.
관광을 위해 보문단지나 불국사, 석굴암행 버스가 정차하는 서라벌 네거리와도 가깝다. 동쪽에 안압지와 계림숲, 남쪽에는 교촌 향교, 북쪽으로는 대릉원을 끼고 있다. 여러 유적지를 도보로 다닐 수 있는 교통의 요충지인 셈.
경주를 여행한 이들이 먹거리가 없고, 맛집은 비싸다고 입 모아 말하지만, 황남동은 저렴한 가격에 맛좋은 토속 음식을 다양하게 즐길 수 있다. 한정식으로 여행객에게 유명한 도솔마을과 멧돌 순두부 정식은 마치 전라도 인심을 보는듯한 반찬 가짓수와 저렴한 가격을 자랑한다. 단체 관광객이라면 식사가 어렵겠지만, 6인 이하의 여행객이라면 걱정 없다.
팥과 견과류가 가미된 황남빵의 본점도 황남동에 있다는 사실. 숙박과 식사, 관광까지 모두 해결하기 좋은 황남동은 여행객이 머무르기 매우 좋다.
신라인의 불국정토(佛國淨土) 염원이 담긴 '불국사'
경주하면 으레 떠오르는 곳 불국사. 토함산 중턱에 있는 대한불교 조계승 소속의 사찰이다. 신라시대 중창되었다가 고려, 조선을 거치며 수축되었고, 임진왜란 때 불타버리기도 했다. 1995년에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이다.
이른 아침 첫차를 탔다면 아마 10시 전후로 경주에 도착, 불국사는 아마 11~12시쯤에 도착한다. 시간상 점심을 먹고 황남동 근처의 유적을 관광하는 게 보통이지만, 가장 먼저 불국사로 향할 것을 추천한다. 고요한 산속에서 따사로운 햇살 사이로 보이는 불국사의 웅장한 모습은 해가 중턱일 때 봐야 그 진면목을 눈에 담을 수 있기 때문이다. 불국정토를 이루고자 했던 신라인의 염원이 담긴 불국사의 진짜 모습을 놓쳐서야 되겠는가.
불국사 관광은 일주문으로 시작하여 불이문으로 나오는 게 일반적이다. 하지만 주말 점심녘에는 일주문 근처에 주차 공간이 부족할 때가 많다. 간혹 일부 시내버스는 불이문에 서기도 하고, 일부 네비게이션은 후문 방향으로 안내하기도 한다.
어디로 입장하는지는 사실 큰 상관이 없다. 하지만 불국사가 처음이라면, 가장 일반적인 관광 코스의 시작인 일주문으로 향할 것을 권장한다. 웅장하고 경건한 모습에 분명 마음을 빼앗기게 될 것인데, 순서대로 하나씩 즐겨야 하지 않겠는가. 불이문 주차장에서 일주문까지 도보로 10분 정도 걸으면 된다.
익히 알려진 석가탑, 다보탑 외에도 불국사는 손과 발길이 닿는 모든 것이 국보 문화재이자 보물 문화재다. 보는 이로 하여금 경건함 마음을 벅차게 하는 여러 종류의 불상은 지혜로운 선조의 유산이고, 우리의 자랑이다.
포켓스탑을 돌리고 포켓몬을 잡는 것도 중요하지만, 불국사에서만큼은 국보와 보물이 가진 의미를 되새기고, 국사 시간 때 들을 수 없었던 자세한 불국사의 뜻깊은 역사를 살펴보길 권한다.
기학적인 신라 예술의 결정판 '석굴암'
불국사에서 토함산 산길 코스로 약 50분, 차로 약 20분이면 석굴암에 도착한다. 시간상 여유가 있다면 산길 코스로 석굴암에 향하는 것도 제법 운치 있다. 그리 험하지 않은 산길이라 초보자도 쉽게 등산할 수 있다. 토함산의 솔바람 소리를 들으며 디그다를 잡고, 경주 시내를 보는 한눈에 내려볼 수 있으니 말이다.
사실 석굴암은 가는 시간과 또 되돌아가는 시간을 고려하면, 당일치기 여행객에겐 부담이 되는 것도 사실이다. 규모도 작은 편이다. 그래서 석굴암은 들리지 않은 여행객이 제법 많다. 하지만 신라 시대 최고의 기술력으로 천 년을 넘게 보존되고 있는 석굴사찰, 해외에서는 불국사보다 석굴암을 더 관광 우선순위로 둔다고 하니, 여까지 와서 눈에 담지 않으면 섭섭하지 않겠는가.
석굴암은 중국, 인도처럼 자연스레 형성된 동굴에 조성한 천연석굴이 아니다. 당시 신라 최고의 기술력이 동원됐는데, 화강암의 자연석을 조각하여 인공적으로 축조됐다. 이런 석굴사찰이 천 년이 넘게 보존되고 있는 것이다.
일제 강점기 시절부터 최근까지 여러 보수 과정을 통해 현재는 석불 안쪽으로의 통행을 막고, 보존을 위해 유리로 막아둔 채 에어컨이 가동되고 있다. 본존불 주위의 방을 돌며 참배하는 건 요즘 시대에서 불가능하다. 하지만 그 작품의 위대성만 보더라도 통일신라 불교의 찬란함을 느끼기에 부족함이 없으므로 꼭 석굴암에 들리길 권한다.
발견된 유물만 무려 1만 1천 500여 점, '천마총-대릉원'의 위엄
여러 왕릉이 능선처럼 이어진 대릉원은 낙조와 함께 감상할 때가 가장 멋지다. 석굴암에서 황남동으로 넘어온 뒤, 식사를 마치고 대릉원에 도착했는데 아직 하늘이 파랗다면, 근처 한옥채 카페에서 잠깐 휴식을 취할 때다. 비로소 하늘이 붉게 물들었을 때 대릉원에 입장하길 추천한다. 미추왕릉과 지능왕(추정)의 능선 너머 보이는 붉은 노을이 고요하고 적막한 분위기를 만들어 줄 것이다.
보문단지 호수 위로 비추는 붉은 노을도 아름답지만, 여러 왕릉의 능선 너머로 해가 지는 모습 역시 일품이다. 배도 부르는데 낙조까지 끝내주니, 이보다 더 아름다운 산책 코스는 없지 않을까 싶다.
밤에 보고, 밤에 걸어야 더 아름다운 '첨성대-계림숲-석빙고'
해가 완전히 자취를 감췄을 때, 첨성대과 계림숲은 인위적으로 꾸며진 조명이 적막한 어둠을 밝히며 로맨틱한 분위기를 조성한다. 머리를 식히며 복잡한 생각의 매듭을 하나씩 풀어나가는 힐링 시간의 시작이다. 벗과 걸을 때는 평소 나누지 못한 진중한 얘기를 나누고, 연인과 걷는다면 로맨틱한 감정을 끌어올리기에 적합하다. 썸남썸녀에게는 안압지보다 고요한 어둠 속 절제된 첨성대의 야경이 더 좋을 것이다.
첨성대까지는 주변 사물과 건물, 나무가 환하게 주변을 환하게 밝혀주지만, 계림숲에 들어서면 딱 필요한 불빛만 비추고 있어 약간 적막한 분위기가 이어진다. 석빙고로 향하는 길은 시골길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 바닥에서 등불처럼 비추는 조명 덕에 꽃길처럼 느껴진다.
경주의 밤은 짧다. 겨울이라 해가 빨리 저무는 탓도 있지만, 첨성대과 계림숲을 비추는 화려한 불빛이 10시에 꺼지기 때문이다. 안압지도 비슷하다. 이 때문에 황남동 주변 대부분 카페, 음식점이 10시에 문을 닫으니, 늦지 않게 야경을 즐겨야 한다.
아름다운 신라의 달밤, 경주의 야경 명소 '동궁과 월지'
불국사와 석굴암으로 숙연해진 마음을 대릉원의 적막한 노을과 첨성대의 절제된 야경으로 달래기는 조금 부족했을 터, 안압지의 화려한 아경은 마음을 가다듬기에 좋다. 일상으로 돌아가기 위한 여행의 종착지에서 화려했던 신라의 달밤을 상상해보라.
웅장했던 경주의 낮과 고요하면서도 차가운 경주의 밤. 벅차오르는 감정의 변화를 하루새 다 담고 추억하는 것 또한 경주 여행의 묘미이자, 경주를 기억하는 하나의 방법이다.
안압지는 문무왕 시절에 축조된 궁원지이자 경주의 대표 야경지로 유명하다. 삼국 통일 후 국력이 강해진 신라는 수수하고 토속적인 문화를 벗어나 화려하고 선진적인 건축물을 선호하기 시작했는데, 이러한 신라의 예술이 안압지에 담겨 있다.
사실 안압지라는 이름은 조선 시대에 기록된 이름이다. 신라의 멸망 후 조선시대 이르러 동궁과 월성이 무너져내리자 '화려한 궁궐은 없고 기러기와 오리만 날아든다'는 시 구절과 함께 기러기 '안(雁)' 자와 오리 '압(鴨)' 자를 써서 안압지로 불리게 됐다. 본래 이름은 월지(月池). '달이 비추는 연못'이란 뜻이다.
도시화도 막지 못한 '경주'의 매력은 끝이 없다
포켓몬 GO라는 핑곗거리를 안주 삼아 떠난 경주. 아마 20대 후반, 30대 성인 남녀라면 수학여행의 추억으로 남아있을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신혼여행, 가족여행, 혹은 졸업여행의 추억이 담긴 우리나라의 여행의 메카. 그리고 자랑스러운 세계문화 유산이기도 하다. 풋풋했던 추억이 아련해질 때, 어른의 감성으로 다시 느끼는 경주의 감성은 홀릭에 빠져들게 할 정도로 필연적이다.
신라의 낮과 밤 속 반전 매력에 초점을 두고 알찬 당일치기 코스를 추천했기에 미처 소개하지 못한 유적지도 대단히 많다. 드라이브 코스가 낭만적인 김유신 묘와 선덕여왕릉, 전통문화가 살아 숨 쉬는 양동민속마을, 무려 93년간에 걸친 국가사업으로 조성된 황룡사와 분황사, 천 년 신라의 태평성대 염원이 담긴 문무대왕릉 등 경주는 손이 닿고 발이 닿는 곳 모두가 고분이요, 보물이자, 유적이다.
주택 단지가 조성되고 고층 아파트가 들어서는 도시화 속에서도 경주의 고고함을 막지 못한다. 신라인의 풍류가 흐르는 경주에서는 퍼내고 퍼내도 끝이 없을 정도로 유물이 계속 출토되고 있다. 강산이 변하는 10년 뒤에는 새롭게 출토된 유물이, 새롭게 조성된 유적지가 또 다른 낭만 감성을 자극할지 모른다.
무릇 여행이란 나 자신을 위한 것이다. 경주가 아니더라도 가볍게, 쉽게 실천할 수 있는 선에서 자신만의 여행을 즐겨라. 소설가 파울로 코엘료는 여행은 언제나 돈의 문제가 아니고 용기의 문제라고 하더라. 친구와 가족과 연인과 혹은 홀로 떠나도 좋다. 혹시 알겠는가. 망나뇽과 잠만보가 기다리고 있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