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스포츠화가 된 게임들의 초기에는 대부분 자유분방하고 창의적인 플레이가 주를 이룬다. 프로게이머들은 틀이 잡혀있지 않았을 때 독특하고 독창적인 전략을 선보이고, 이후 해법들이 하나, 둘씩 나오면 어느 순간부터 '정석'이라는 가장 안정적인 운영법이 등장하게 된다.

'정석'이라 불릴만한 운영법이 등장한 뒤에는 전략적인 선수들보다 컨트롤, 멀티태스킹 등 기본기가 단단한 선수들의 시대가 온다. 그런 선수들 중 가끔이나마 놀라운 빌드를 만들어내는 선수들이 흔히 말하는 '스타 플레이어'로 통하는 경우가 많다.

스타크래프트2:군단의 심장도 발매된 지 벌써 1년 4개월이 지났다. 타종족전 같은 경우 아직 새로운 빌드가 나올 여지가 있지만, 같은 유닛으로 싸우는 동족전은 이미 정석적인 운영이 자리 잡은 지 오래다.

그런 가운데 김유진(진에어)은 지난 1일 SK텔레콤 스타크래프트2 프로리그 2014 시즌 4라운드 마지막 IM과 대결에서 조성호(IM)를 상대로 독창적인 빌드를 선보이며 승리했다. 당시 경기를 지켜보면서 암묵적으로 인정하고 있는 '정석' 운영의 빈틈을 제대로 노린 김유진의 빌드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동족전의 한계를 깨뜨린 김유진과 조성호의 경기. 김유진이 노렸던 '정석의 오류'는 무엇이었을까?


■ 극초반부터 전략적일 필요는 없다.



경기 초반은 비교적 무난했다. 김유진은 프프전에서 가장 무난한 빌드로 평가받는 점멸 추적자로 초반 가닥을 잡았고, 조성호는 3추적자 압박 이후 빠르게 앞마당 연결체를 가져가며 로봇공학 시설을 건설했다. 빌드만 놓고 봤을 때 최소 7:3 정도로 조성호가 유리하게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김유진은 점멸 추적자를 준비하면서 파수기의 환상 불사조를 통해 조성호의 빌드를 파악했다. 조성호의 빌드를 빠르게 파악한 김유진이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는 점멸 추적자와 모선핵의 컨트롤로 승부를 보는 것과 소수의 점멸 추적자로 압박만 가하면서 앞마당 확장을 따라가는 것 정도가 일반적이다.

하지만 김유진은 일반적인 '정석의 틀'에서 벗어났다. 초반 전략적 전진 우주 관문이 아닌 점멸 추적자 이후 전진 우주 관문이라는 카드를 꺼냈다. 우주 관문을 건설하는 순간 2초 정도는 '이게 뭐지?' '너무 도박수인데?'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김유진의 심리전과 판단에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 틀에서 벗어난 플레이. 성공하면 혁명, 실패하면 무리수.

▲ 점멸 추적자 이후 예언자. 과연 예상할 수 있는 프로토스 선수가 있었을까?


조성호가 김유진의 점멸 추적자를 확인했을 때 드는 생각은 '막으면 이긴다'였을 것이다. 김유진이 차선책으로 앞마당 확장을 따라간다 해도 자원에서 우위를 선점한 조성호가 절대적으로 유리한 것 역시 사실이다. 결국 조성호는 점멸 추적자에 대한 수비에만 온 신경을 쏟았고, 예언자에 의해 예상치 못한 탐사정 피해를 입었다.



예언자는 예고편에 불과했다. 김유진의 짜왔던 시나리오의 진짜 시작은 지금부터였다. 김유진은 예언자와 점멸 추적자를 통해 조성호를 더욱 압박했고, '막으면 이긴다'는 생각이 조성호의 머릿 속을 지배했다. 김유진은 오히려 조성호를 움츠러들게한 뒤 과감한 트리플 연결체를 시도했다. 프프전에서 트리플 연결체는 상상도할 수 없는 빌드다.

이후 예언자와 환상 불사조를 통해 조성호가 암흑 기사를 준비하고 있는지를 중점적으로 확인하면서 김유진은 로봇공학 시설을 올리지 않고 관문을 폭발적으로 늘리며 조성호의 올인 공격에 대한 준비를 마쳤다. 안정적으로 로봇공학 시설과 제련소를 올리며 인프라 구축에 조금이라도 자원을 투자했으면 조성호의 공격을 막기 힘들었을 것이다.


■ 만만치 않은 조성호의 반격.



하지만 조성호의 반격도 만만치 않았다. 김유진의 트리플 확장을 파괴하기 위해 시도한 공격이 막힐 때 조성호도 김유진의 시나리오에 당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조성호는 마지막 회심의 카드로 암흑 기사를 준비했다. 김유진과 교전이 벌어진 뒤 준비하는 암흑 기사라 김유진에게 로봇공학 시설을 건설할 시간을 충분히 줄만한 상황이었으나 조성호는 병력들을 전진 배치 시키며 언제든지 다시 공격가겠다라는 긴장감을 김유진에게 전달했다.

김유진은 병력 생산에 최대한 집중했고, 상대적으로 로봇공학 시설 타이밍이 늦었다. 그리고 그 때, 조성호의 암흑 기사 두 기가 김유진의 본진으로 난입에 성공한다. 암흑 기사 두 기는 김유진의 관측선이 나오기 전까지 탐사정을 20기 가까이 잡아내며 역전의 발판을 마련했다.

▲ 다소 무리했던 조성호의 공격


암흑 기사의 활약으로 5:5 아니 6:4 정도로 조성호가 유리해보였다. 하지만 조성호는 조급했다. 시간이 자신의 편임에도 불구하고 무리한 공격으로 손해를 봤다. 탐사정 수에서 월등히 앞선 상황이라 제 2확장을 따라가며 경기를 진행했어도 나쁘지 않았던 상황이었다.


■ 작은 차이 하나가 승패를 가른다.

▲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경기를 마무리하는 김유진


김유진의 두 번째 확장기지가 파괴되고, 조성호가 추가 확장을 시도하며 양 선수의 상황은 정 반대가 되었다. 이에 김유진은 최후의 공격을 준비했다. 김유진과 조성호의 병력 규모는 비슷해 보였다. 오히려 불멸자를 갖춘 조성호가 더 좋아 보이는 상황이었다.

수비하는 조성호가 더 좋아보일 수 있었다. 하지만 유닛 한 기, 한 기가 승패를 좌우하는 중요한 상황에서 조성호에게 두 가지 불안요소가 있었다. 첫 번째는 앞서 무리한 공격으로 인해 광전사의 돌진 연구가 되지 않았던 것이고, 두 번째로 모선핵의 부재였다.

게다가 조성호는 기사단 기록보관소까지 올리며 고위 기사로 집정관을 만들려 했다. 급박한 상황에서 건물에 투자하기보다 암흑 기사로 집정관을 만드는 게 더 나아 보이는 상황이었다. 결국, 돌진 광전사와 모선핵을 보유한 김유진은 시간왜곡과 광전사의 힘으로 조성호를 제압하며 이날 경기를 팀의 3:0 승리로 마무리함과 동시에 공동 다승왕 1위까지 차지했다.

김유진은 인벤과 인터뷰에서 "4라운드 포스트 시즌과 다승왕이 걸려있는 중요한 경기에서 안정적으로 맞춰갈 수 있는 점멸 추적자를 사용하기로 했지만, 단 하나의 약점인 앞마당 이후 로봇공학 시설 빌드에 대한 대비가 필요했다. 연습 과정에서 늦은 예언자는 상대가 전혀 예상하지 못할 거라 생각했고 연습시 승률도 굉장히 높았다. 프프전 정석의 심리를 노린 일종의 필살 카드였다"고 설명했다.

동족전은 재미없다는 인식이 강하다. 하지만 이와 같이 발상의 전환을 통한 새로운 빌드가 계속 연구된다면 보다 더 재밌는 경기 양상이 무궁무진하게 쏟아질 것으로 예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