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선택에는 정답과 오답이 공존한다. 그리고 어느 쪽이든 내가 선택한 길은 "원래부터 나에게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라고 생각하는 편이 마음이 편하다. 그리고 내 선택이 옳았다는 걸 증명하면 된다.

스타2에 이런 저그가 있었나 싶다. 처음 그를 알았을 땐 "피지컬이 뛰어나고 무난한 운영을 즐기는 한계가 극명해 보이는 A급 선수"정도의 느낌이었다. 하지만 틀렸다. 그는 언젠가부터 조금씩 발전했고 깜짝 필살기도 사용할 줄 알게 됐으며, 새로운 전략을 보여줄 때마다 자신이 옳았음을 증명했다.

그리고 8월 18일 SK텔레콤 스타크래프트2 프로리그 2015 시즌 4라운드 5주차 4경기 CJ 엔투스 정우용과 대결에서 그는 전대미문의 전략을 선보였다. 아무도 시도하지 않았던 것을 처음 시도하는 건 엄청난 노력이 동반되고, 사람들의 박수를 받는다. 물론, 성공했을 경우에. 그는 보란 듯이 메카닉에 대한 새로운 파훼법으로 '군단 숙주'를 내놓았다. 진에어 그린윙스 섹시보이 이병렬의 이야기다.

■ 정석에 도태되지 마라, 끊임없이 생각하면 답은 있다

▲ 트리플 사령부를 준비중인 정우용


스타크래프트1의 영향일까. 전략시뮬레이션 게임의 초반은 어느 정도 정석이란 게 존재한다. 어느 타이밍에 얼마나 일꾼을 최적화시켜서 어떤 테크를 탔을 경우 위험부담이 제일 적고, 안정적인지 말이다.

최근 스타크래프트2 테란 VS 저그에서 테란의 메카닉이 정석처럼 떠오르고 있다. 많은 저그 선수들은 메카닉의 단단함에 무릎을 꿇었고, 메카닉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40~50분을 넘나드는 장기전 끝에 승리하는 경우가 전부였다. 메카닉이 유행처럼 번지기 전부터 즐겨 사용해온 정우용은 요즘 트랜드가 물 만난 고기 같았을 것이다.

정우용은 역시 메카닉으로 초석을 다지기 위해 트리플 사령부를 준비했다. 이제 관심은 저그인 이병렬에게 집중됐다. 다른 저그들처럼 무난하게 자원을 많이 확보한 뒤 타락귀와 무리 군주, 울트라 등 빠른 체제 전환으로 승부를 볼 것인지, 아니면 초반에 올인을 시도할지 귀추가 주목됐다.

■ 이제는 쉽게 볼 수 없는... 날아올라라 식충이여!



이병렬의 선택은 군단 숙주였다. 정확히 말하면 식충의 공중 업그레이드를 통한 일명 '날식충'이었다. 이병렬은 2일 펼쳐진 프로리그 3라운드 4주차 진에어와 CJ의 경기에서 김준호를 상대로 화려한 날식충의 위엄을 보여준 바 있다. 하지만 대 테란전에서 날식충이 통할거라 생각한 선수들은 많지 않았다.

이병렬은 제 2확장보다 번식지를 빠르게 올려 뮤탈리스크로 테란의 화염차 견제를 막아냈고, 군단 숙주의 날식충을 통해 정우용의 본진을 급습, 부속 건물들을 파괴하기 시작했다.

▲ 날아올라라 식충이여!


■ 군단 숙주가 가져온 두 가지 효과

사실 이 경기를 돌이켜보면 군단 숙주 즉, 날식충이 거둔 효과가 테란에게 심대한 피해를 주진 않았다. 하지만 경기를 봤던 사람이라면 가장 수훈갑으로 군단 숙주를 뽑을 것이다. 그렇다면 군단 숙주의 어떤 점이 이병렬을 승리로 이끌었을까?

첫 번째, 정우용의 멘탈을 흔들었다. 과연, 정우용이 이번 경기를 연습하면서 이와 같은 상황을 한 번이라도 겪어봤을까? 절대 아닐 것이다. 경기 속에서 당황한 모습이 여실히 드러났다. 비교적 중반이라고 할 수 있는 타이밍에도 정우용의 광물은 2500을 돌파했고, 날식충에 대해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두 번째, 공격이 최고의 수비였다. 이병렬은 군단 숙주 자체로 테란에게 심각한 피해를 주진 않았다. 하지만, 소소한 군단 숙주 견제로 테란이 공격할 틈을 주지 않았고, 매우 평온하게 자신이 할 것들을 차례차례 이어갔다. 일반적인 테란과 저그의 양상이었다면 중반 이후부터는 테란의 화염차가 저그의 확장들을 돌아다니며 일벌레 사냥에 나섰을 법한 타이밍이었다.

■ 이병렬의 두 번째 효자 '살모사'

▲ 녹차라떼 냠냠


군단 숙주로 초반 주도권을 완전히 가져온 이병렬은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고 원활하게 자원을 채취했고, 다수의 살모사를 생산하기 위해서도 차질이 없었다. 상대적으로 앞선 테크를 밝은 저그는 아직 전투 순양함은 커녕, 밤까마귀와 바이킹의 숫자도 모자란 테란을 상대로 교전에서 훨씬 더 우아하고 고급스러운 유닛들을 통해 압도할 수 있었다.

무리 군주가 긴 사거리를 이용해 툭툭 건드리고, 그 밑을 히드라리스크와 여왕이 엄호했다. 그리고 바이킹이 무리 군주를 견제하기 위해 앞으로 나서면 다수의 살모사가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지상군의 머리 위로 납치를 시도했다.

▲ 저그도 우아할 수 있다


■ 마무리는 저그의 큰형님 '울트라리스크'



정우용은 불리한 상황에서 어떻게든 저그의 공격을 막아내며 공성 전차와 화염 기갑병, 바이킹, 밤까마귀, 토르 등 메카닉 유닛으로 한 방 공격을 준비했다. 하지만 이미 이병렬의 자원은 만수르 부럽지 않았던 상황. 이병렬은 비워진 인구수를 대규모 울트라리스크 부대로 채우며 정우용을 격파했다.

비록, 이날 팀이 1:3으로 패배하며 스포트라이트는 받지 못했지만, 이병렬이 보여준 모습은 '저그도 이 정도로 진화할 수 있구나'하며 감탄을 자아내기 충분했다. 프로리그에서 보여준 대 프로토스전 군단 숙주, 2015 스베누 스타크래프트2 스타리그 시즌3에서 보여줬던 몰래 부화장, 그리고 메카닉을 상대로 보여준 군단 숙주 전략까지, 2015년 저그는 이병렬 혼자 진화시켜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항상 무난하고 안정적인 운영 패턴의 선수로 인식되어 왔던 이병렬, 그래서 매번 개인리그에서 8강 문턱에 좌절이라는 오명을 달고 있었다. 하지만 2015년 이병렬은 180도 변했다. 앞으로 있을 스타리그 8강과 프로리그에서도 이병렬의 경기는 충분히 지켜볼 만한 가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