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팀 판독기'라는 별명이 이렇게 잘 어울리는 팀이 또 있었을까. 정규 시즌에서 1~4위 팀들에게 전패당하고, 반대로 6~10위 팀들에게 전승을 거둔 아프리카 프릭스는 강팀에게 약하고 약팀에게 강한, 그야말로 '강약약강'의 중위권 수호자였다. 이에 대다수의 관계자가 예측한 2020 LCK 섬머 스플릿 플레이오프 와일드카드전의 결과는 T1의 완승이었다.

그러나 아프리카 프릭스는 이를 보란 듯 뒤집으며 T1을 여섯 번째 약팀으로 만들었다. 아슬아슬한 한타에서 승리하며 1세트를 선취하더니, 3세트에선 아예 한 수 위의 힘을 자랑하며 T1의 롤드컵 직행을 불허했다. 적절한 밴픽과 물오른 기량으로 와일드카드전을 넘어 플레이오프 1라운드로 향한 아프리카 프릭스는 이제 정규 시즌에 넘지 못했던 또 다른 팀 젠지를 만난다.


정규 시즌의 결과는 잊어라

아프리카 프릭스가 최상위권 강팀처럼 완벽한 경기력과 체급 차를 뽐낸 건 아니었다. 그러나 분명한 점은 정규 시즌과는 확실히 달라진 모습을 보였다는 것이다. 밴픽에서는 고민의 흔적이 보였고, T1을 넘지 못할 것이라는 낙인에 열이 제대로 오른 선수 개개인의 폼도 훌륭했다.

아프리카 프릭스는 '클로저' 이주현이 출전한 1세트에서 트위스티드 페이트와 조이를 모두 풀었다. 그리고 T1이 당연한 듯 조이를 가져가자 트위스티드 페이트를 챙겼다. 이는 '기인' 김기인이 아칼리를 꺼낼 수 있는 기반이 됨과 동시에 사이드 운영에 힘을 실을 수 있는 전략이 됐다. 비록 승리의 바탕이 된 건 운영이 아닌 두 번의 교전 승리였지만, 경기가 장기전으로 넘어갔어도 아프리카 프릭스의 손을 들어줄 수 있는 밴픽이었다.

▲ 결과는 패배였으나, 충분히 의미 있었던 2세트 밴픽

2세트는 비록 아프리카 프릭스의 패배로 끝났지만 철저한 준비성과 과감한 결단력, 도전 정신을 엿볼 수 있었다. 바로 '페이커' 이상혁의 선호 픽 트위스티드 페이트를 내주고 아우렐리온 솔을 통한 카운터를 노린 듯한 밴픽을 통해서. 열세인 와중에도 쉼 없이 무언가를 시도하려는 모습 또한 매우 긍정적으로 다가왔다. 아우렐리온 솔 픽의 의미를 살려 승리했다면 더욱 좋았겠지만, 패배에도 불구하고 많은 의미가 남은 한 판이었다.

트위스티드 페이트가 밴 당한 3세트, T1은 '커즈' 문우찬에게 카서스를 쥐여 주며 밴픽을 썩 괜찮게 마쳤다고 생각했을 거다. 아프리카 프릭스의 마지막 픽 창에 이즈리얼의 초상화가 나오기 전까지 말이다. 아프리카 프릭스는 지난 스프링 스플릿 정규 시즌 이후로 사용하지 않았던 탑 칼리스타를 더없이 중요한 무대에 꺼냈고, 이를 멋진 승리로 연결했다.

밴픽이 아무리 좋았다 한들 선수들이 인게임에서 무너졌다면 승리 시나리오는 완성되지 못했을 거다. 그러나 이번 와일드카드전에서만큼은 모든 선수가 칭찬받아 마땅한 플레이를 펼쳤다. 정규 시즌에서 기복을 보였던 '기인'은 예전의 에이스 모습으로 돌아와 '칸나' 김창동의 존재감과 캐리력을 억제했고, 꾸준히 기량을 끌어올린 '플라이' 송용준은 상대나 챔피언 상성에 상관없이 제 역할 이상의 것을 해냈다. 패기 넘치는 '드레드' 이진혁의 선취점과 베테랑 '스피릿' 이다윤의 깔끔한 마무리도 좋았다.


'미스틱-벤' 봇 듀오의 활약은 가장 많은 박수를 받아 마땅하다. 봇에 단 한 번의 투자도 받지 않았음에도 단단한 라인전을 통해 상체의 자유로운 플레이를 가능케 했다. 이에 더해 '미스틱' 진성준은 1세트 미스 포츈과 3세트 이즈리얼 모두 궁극기 대박을 통해 승리에 크게 기여했으며, '벤' 남동현은 시그니처 챔피언 노틸러스는 물론 올해 한 번도 꺼내지 않았던 알리스타를 통한 우수한 플레이 메이킹으로 팬들에게 제대로 눈도장을 찍었다.


하지만, 다음 상대는 젠지

한동안 '룰러' 박재혁의 캐리에 기대며 '눕는 게임'을 즐겨 했던 젠지는 대규모 리빌딩과 어느 정도의 시행착오를 통해 확 달라진 플레이 스타일을 장착했다. 현재 젠지의 첫 번째 무기는 시즌 MVP에 빛나는 '비디디' 곽보성과 그의 파트너 '클리드' 김태민을 앞세운 강력한 상체의 플레이 메이킹이 됐다. 이 무기가 통하지 않았을 때 '룰러'라는 두 번째 무기가 튀어나와 승리를 이끄는 것이다. 여기에 팀원들의 뒤를 든든하게 받쳐주는 숨은 조력자 '라스칼-라이프'가 젠지라는 강팀을 완성한다.


젠지 앞에 선 아프리카 프릭스의 가장 큰 과제는 바로 밴픽이다. T1은 다소 경직되고 정형화된 밴픽 패턴과 챔피언 폭을 갖고 있어 충분히 유리한 구도로 끌고 갈 수 있었다. 그러나 젠지의 핵심 캐리 선수인 '비디디'와 '룰러'는 현 메타의 주요 챔피언을 모두 수준급으로 다루며 '라스칼' 김광희는 탑 챔피언 밴은커녕 선후픽 여부에도 구애받지 않는 스타일이다. 따라서 아프리카 프릭스는 T1전에 비해 밴픽을 통한 재미를 보기 매우 어려운 상황이다.

밴픽에 대한 젠지의 대처 능력은 지난 22일에 펼쳐진 두 팀의 2라운드 대결을 살펴보면 더욱 명확해진다. 아프리카 프릭스는 두 세트 연속으로 아지르-아칼리-트위스티드 페이트를 밴하며 상대의 상체 힘을 약화시키는 선택을 했다. 그러자 젠지는 '라스칼'의 레넥톤을 선픽으로 뽑으며 아프리카 프릭스의 반응을 확인했고, '비디디'는 네 번째 픽에서 느긋하게 오리아나-에코로 우회해 멀끔히 활약했다.

밴픽을 떠나 아프리카 프릭스의 기량이 젠지의 덩치에 통할지도 미지수다. 젠지 선수들의 CS 수급이나 라인전 능력은 명실상부 리그 최상위권이며 종종 가시 돋친 방패로 상대를 때려눕힐 때도 있다. 이에 별다른 사고가 없더라도 젠지가 초반부터 앞서나갈 확률이 높은데, 지난 대결에서는 라인전 차이는 물론 젠지의 치밀한 설계에 아프리카 프릭스의 봇이 연달아 터지며 승부가 빠르게 갈렸다.


▲ 봇 균형이 완전히 무너졌던 두 팀의 2라운드 대결 중간 스코어, 우세한 쪽이 젠지

하지만, 와일드카드전에서의 아프리카 프릭스는 확실히 상승한 경기력을 통해 희망을 보였다. '플라이'는 특유의 반반 능력에 운영 강점까지 더했고, 봇 듀오는 평소의 공격적인 성향을 보이는 대신 몸을 웅크린 채 '테디-에포트'에게 캐리 기회를 주지 않았다. 예전 기억을 되찾은 듯한 '기인'이 약세 탑 라이너마냥 '라스칼'에게 무너지는 그림도 상상하기 어렵다.

올해 정규 시즌에서 두 팀의 상대 전적은 젠지의 4전 전승(세트스코어 8승 1패)으로 매우 극단적이며, 경기 내용 또한 초반부터 균형이 깨진 경우가 대다수였다. 그러나 지금의 아프리카 프릭스는 T1을 꺾고 자신감을 잔뜩 채운 상황이기에 어쩌면 지금까지와는 다른 승부 양상이 나올 수도 있겠다. 평소와 달리 젠지를 진득하게 물고 늘어진다면, 와일드카드전 1세트에서 선보인 역전 한타처럼 강력한 한 방을 날릴 수만 있다면, 또다시 정규 시즌의 결과들을 무시하는 대이변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기적은 준비된 자에게 온다

와일드카드전 종료 후 판독기가 깨졌다는 반응이 커뮤니티를 뜨겁게 달궜다. 하지만 '강팀 판독기'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어쩌면 아프리카 프릭스의 잠재력을 무시한 오명이 아니었을까. '스피릿'은 승자 인터뷰를 통해 "T1은 약팀이 됐고, 젠지도 약팀으로 만들겠다"고 이야기하며 유쾌하게 넘겼지만, 그를 포함한 모든 선수들의 속은 승리와 반전을 향한 열망으로 더없이 뜨겁게 불타고 있으리라.


또한 승부욕의 화신 최연성 감독은 경기력을 끌어올리기 위해선 어떤 일이든 할 것이며, 선수들 역시 그를 따라 전심전력으로 젠지에게 부딪힐 것이다. 비록 승률은 희박해 보이나 아프리카 프릭스는 준비를 마쳤고, 기적은 준비된 자에게 오는 법이다. 과연 아프리카 프릭스는 한 번의 업셋을 넘어 첫 번째 기적까지 만들 수 있을 것인가.

한편, 아프리카 프릭스가 젠지를 꺾는다면 스프링 우승 팀에 이어 준우승 팀의 롤드컵 직행까지 가로막게 된다. 올해 젠지에게 번번이 패했던 아프리카 프릭스이기에 이번 경기에서의 승리는 지금까지 겪은 패배의 아쉬움을 모두 날릴 만큼의 달콤한 보상으로 다가오겠다.


■ 2020 LCK 섬머 스플릿 플레이오프 1라운드 일정

아프리카 프릭스 vs 젠지 - 28일(금) 오후 5시, 5판 3선승제

* 화면 캡처 : LCK 공식 중계 화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