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PX가 롤드컵 우승 후 이적을 택한 탑 라이너 '너구리' 장하권을 잡았다. 팀원인 '크리스프-LWX'가 2022년, '도인비-티안'이 2021년까지 계약 기간이 남은 상태에서 FPX는 할 수 있는 최대의 투자이자 변화를 시도한 셈이다.

FPX가 당대 최고의 탑 라이너를 데려오는 선택이 항상 실효를 거둔 것은 아니었다. 2020 시즌에 '김군-칸'이라는 롤드컵 우승-4강 주자를 모두 기용했지만, 2019 롤드컵 우승했을 때 기량이 나오지 않았다. 특히, 팀 합이 안 맞아 유리한 상황에서도 허무한 패배를 경험하곤 했다. 올해는 2019년과 비슷한 조건이 갖춰지지 않았을 때 약점이 드러나는 팀이 됐다.

그렇다면 '너구리'는 FPX에 새로운 변화를 불러일으킬 수 있을까. 방법은 어찌보면 단순하다. FPX가 2019년처럼 잘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주면 된다. 이는 개인 기량은 이미 충분히 인정받은 '너구리'가 얼마나 팀 플레이에 자신을 잘 녹여내느냐에 달렸다.



’너구리’ 첫 번째 역할 : 잠든 '도인비 매직' 깨우려면

▲ '티안-도인비-LWX'(출처 : 라이엇 차이나)

FPX는 '도인비' 김태상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팀이다. 발이 풀린 '도인비'가 정글러 '티안'과 함께 돌아다니며 협곡 전반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게 기본 승리 공식이었다. ‘도인비’는 글로벌 궁극기를 보유한 챔피언을 필두로 합류전에서 우위를 점하는 능력이 발군이었다. 2019 롤드컵 준우승팀인 G2 역시 만만치 않은 속도를 자랑했지만, '도인비-티안'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했을 정도니까.

그런 FPX의 힘은 2020년에 잘 나오지 않았다. 이전까지 '도인비'가 큰 교전 없이 빠르게 라인을 밀고 로밍을 갈 수 있었던 구도가 사라지며 나온 결과였다. 라이즈와 같은 '도인비'의 단짝 친구들의 라인 클리어 능력이 너프를 받았고, 그 외의 주력 카드는 밴당하기 일쑤였다. 게다가, 라인전 힘 싸움이 중요해진 메타에선 '도인비'의 힘이 더 빠졌다. 초반 단계 스노우볼마저 느려지니 '도인비'도 무리한 플레이를 시도해 이득을 챙기려다가 미끄러진 경우가 잦았다. 해당 플레이를 보면서 '도인비 매직'을 실현해야 한다는 게 오히려 ‘도인비’에게 부담감으로 다가온 듯했다.



'너구리'는 이런 상황에서 FPX에게 확실히 힘을 실어줄 만한 선수다. 올해 섬머 스플릿에서 '너구리'가 보여준 가장 큰 변화는 합류 능력이다. 그 중 미드로 향하는 감각적인 로밍이 가장 날카로웠다. '고립 데스' 수치 변화에 가려졌을 뿐, 시기적절하게 내려가는 판단이 그의 성장을 더 잘 보여준다. 이전 '너구리'는 탑에서 무리하게 솔로 킬을 시도하거나 버텨보려고 했겠지만, 이젠 팀에 도움이 될 만한 최상의 선택을 할 줄 안다.

영상처럼 '너구리'는 상대가 예측하지 못한 타이밍에 나타난다. 귀환 후 미드로 향해 상대 갱킹 타이밍에 역습하는 데 성공하는 의외의 움직임을 보여줬고, 끝난 줄만 알았던 한타의 후반부에 나타나 추가로 이득을 챙겼다. '너구리'이기에 가능한 플레이였다.

'너구리'가 이런 로밍 플레이를 LPL에서 선보인다면 이는 '도인비'에게 큰 힘이 될 것이다. 2019년에 보았듯이 한 번 풀리기 시작하면 G2-IG보다 빠른 속도를 낼 줄 아는 게 '도인비'다. 허를 찌르는 탑 다이브에 능하기에 ‘너구리’에게도 ‘도인비’라는 존재가 든든해 보인다. 그런 두 선수가 서로를 봐주면서 시너지가 나온다면, FPX는 2021년에 다시 한번 큰 틀을 짤 수 있겠다.



’너구리’ 두 번째 역할 : 탑과 엇갈린 ‘LWX’에게 필요한 콜


큰 틀을 잡았더라도 작은 부분에서 흔들리면, 판은 얼마든지 뒤집힐 수 있다. 올해 FPX는 그런 양상이 잦았다. 유리할 때도 종종 팀과 'LWX'가 판단이 엇갈리면서 허무한 패배를 경험하곤 했다. 롤드컵 선발전이나 PO와 중요 경기에서도 이런 양상이 이어졌기에 단순 사고로 보기 힘들었다. 근본적인 문제점이 해결되지 않은 듯한 ‘LWX’와 FPX였다.

‘LWX’는 팀의 집중 투자를 받았을 때 능력을 발휘하는 선수다. 2019년에는 ‘도인비-티안’이 봇 라인에 확실히 힘을 실어주며 ‘LWX’를 키웠다. 2019년 ‘LWX’를 대표하는 챔피언인 카이사(섬머 32경기 승률 78%, KDA 6.6/ 섬머 PO 7전 전승 KDA 7.5)는 그렇게 만들어졌다. 한타 때 일방적으로 밀고 들어가는 상황에서 ‘폭격기’ 역할을 해주는, 충분한 성장이 바탕이 된 상황에서 ‘LWX’는 매서운 선수였다.

문제는 ‘LWX’가 팀 지원을 받지 못하는 2020 시즌에 터지고 말았다. 정글러 ‘티안’이 탑에 힘을 주거나 서포터 ‘크리스프’가 자리를 비우면 ‘LWX’는 바로 위험에 노출되곤 했다. 게다가, 'LWX'는 혼자서라도 더 성장할 시간을 갖길 원했지만, 팀원들은 한타를 위해 자리를 잡고 있었다. 곧 벌어질 수 있는 한타에 참여하기 보단 홀로 라인을 밀고 성장하려는 판단을 내렸다. 하지만 갑자기 열리는 한타에 'LWX'는 어디로 향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곤 했다.



▲ 미드에 모인 팀원, 성장 바란 'LWX' 엇갈린 판단

특히나 ‘LWX’는 탑 라이너와 합이 잘 맞지 않아 보였다. 섬머 정규 스플릿 IG전(영상)에 이어 롤드컵 선발전에서 승부를 결정짓는 5세트 경기에서 비슷한 양상은 다시 나온다. 초반부터 ‘더샤이’ 강승록의 오른이 순간이동으로 내려와 ‘LWX’를 끊어내는 장면이었다. 당시 드래곤이 나오는 타이밍이었기에 ‘LWX'의 죽음은 더 크게 굴러갈 수 있는 아찔한 상황이었다. 이때 '김군'의 순간이동 ‘콜’이 없었거나 ‘LWX’가 홀로 무리했을 가능성 모두 존재한다. 무엇보다 팀적으로 심각한 문제는 두 선수가 각자 라인만 밀며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한타 단계에서도 ‘LWX’와 탑 라이너 간 판단은 확실히 갈렸다. ‘칸’ 김동하의 레넥톤이 '티안'의 지원을 받아 잘 성장한 상태였다. 홀로 ‘더샤이’ 럼블을 다이브로 끊어낼 만큼 격차를 벌린 경기였다. 그런 레넥톤이 전성기 타이밍에 내려와 교전을 열어봤지만, ‘LWX’와 손발이 맞지 않으면서 별다른 이득을 챙기지 못했다. ‘LWX’는 눈 앞에 있는 ‘닝’의 자르반 4세만 바라봤다. 앞 라인부터 차례로 제압하는 그림을 그렸는지 홀로 4명을 밀어내는 ‘칸’의 진입에 호응하지 않았다. 대신 ‘LWX’는 자르반 4세의 움직임에 궁극기-점멸을 낭비한 게 전부였다. 그렇게 제대로 된 저항조차 못 해본 FPX는 흐름 그대로 패배하고 말았다.

▲'칸' 진입에 호응하지 못한 'LWX'(출처 : FPX 유튜브)

이런 2020의 사례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너구리’는 확실히 ‘LWX’와 방향성을 맞춰야 한다. 봇으로 향할 수 있는 상대 순간이동 여부를 확인하는 기본적인 것부터 깊이 있는 오더까지 말이다. ‘너구리’가 아무리 감각적으로 한타를 열어도 팀이 호응하지 못하면 승리할 수 없다. 한타에서 핵심 딜러 포지션을 맡은 ‘LWX’과 합은 필수인데, 이를 위해 ‘너구리’는 중국어라는 언어의 장벽까지 허물어야 한다. 완벽한 소통이 당장은 쉽지 않다. 즉각적인 소통이 힘들다면, 미리 합을 맞춰야만 원하는 한타 구도 설계가 가능하다.

희망적인 건 ‘너구리’ 역시 사이드를 밀다가 끊기던 과거를 극복한 선수란 점이다. ‘너구리’도 자신이 성장해 캐리 해야 한다는 강박 아래 자주 끊기고 힘들어하던 시기가 있었다. 이젠 ‘상체’ 중심의 게임에서 벗어나 다양한 경기 양상을 소화해낼 줄 아는 선 경험자로 거듭났다. 이런 성장 경험이 긍정적으로 작용했을 때 ‘너구리’와 FPX가 시너지를 낼 수 있겠다.

LPL은 ‘너구리’에게 새로운 도전의 무대다. 무결점의 합을 완성한 담원에서 벗어나 새로운 환경과 언어에 적응해야 한다. 그렇지만 오래 전부터 ‘너구리’는 중국의 뛰어난 선수들과 대결을 바라왔다. ‘더샤이’의 경기를 챙겨봤고 ‘빈’과 진검 승부를 이전부터 언급했기 때문이다. 이들과 만나 승리하기 위해선 2020 시즌이 아쉬웠던 FPX를 다시 2019년의 위치로 되돌려 놓아야 한다. 자신의 약점을 극복하고 성장한 ‘너구리’라면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그가 FPX에서 어떤 영향을 줄지 지켜보는 게 다음 시즌 LPL을 지켜봐야 하는 이유 중 하나일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