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스포츠를 취재하면서 가장 자주 듣는 이야기 중에 하나는 '프로게이머는 수명이 짧다'는 말이다. 현역 선수들의 나이대를 보면 10대 중후반에서 20대 초중반에 대부분 포진했다. 이는 모든 e스포츠 종목 게임을 훑어봐도 마찬가지다.

그러다가 얼마 전, 오랜만에 해외 축구 소식을 들여다보다가 깜짝 놀란 기억이 있다.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가 아직 현역이라니. 심지어 소속 팀은 우승을 차지했고 그의 기여도 역시 낮지 않았다는 사실에 놀랐다. 백전노장이라는 단어 그 자체라는 생각이 들었다.


◎ 스포츠와 백전노장

모든 스포츠 종목에는 '백전노장'이라고 불릴 만한 베테랑들이 있다. 단순히 나이가 많은데 은퇴하지 않는 선수들 말고 팀의 중심 역할을 해주거나 실제 경기에 나가서도 제역할을 톡톡히 해주는 그런 노장들.

▲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출처 : AC 밀란 공식 홈페이지)

위에서 언급했던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는 전형적인 백전노장이다. 1999년에 선수로 데뷔했는데 지금까지 현역으로 뛰고 있다. 단순히 로스터에만 오른 것이 아니라 작년까지 뛰어난 실력을 자랑했다. 2019/2020 시즌에 18경기 10골, 2020/2021 시즌에는 19경기 15골이라는 기염을 토했다. 이번 시즌엔 그만큼의 활약은 하지 못했지만, 23경기 8골을 기록하기도 했다. 시즌 도중 잦은 부상에 시달렸음에도 꽤 많은 득점을 했다.

국내 스포츠로 눈을 옮겨도 백전노장은 참 많다. 지금은 은퇴했지만, 골키퍼 김병지를 기억하는 사람은 많다. 그는 46세 나이로 은퇴할 때까지 K리그에서 24시즌을 소화한 전설의 골키퍼다. 야구의 전설 이승엽도 은퇴했던 42세까지 12년을 활동했고, 전 농구 선수 양동근도 통산 13시즌을 활동한 뒤에 40세에 은퇴했다. 그 외에도 수많은 종목에서 오랫동안 활동을 이어간 베테랑은 셀 수 없이 많다.

이들의 공통점은 은퇴 직전까지 꾸준히 활동했다는 점과 폼의 하락은 있었을지라도 1인분 혹은 그 이상을 꾸준히 해줬다는 점이다. 그러기 위한 철저한 자기 관리도 모든 백전노장들의 공통 분모였다. 30대 중후반을 넘어 40대가 됐을 때도 후배들에게 체력과 실력에서 밀리지 않기 위한 노력이었다.

예를 들어, 김병지는 선수 생활 내내 비슷한 몸무게를 유지하는 등 철저한 자기 관리로 소문났다. 이승엽 역시 정상급 평가를 받고 있었을 때도 공을 더 잘 치기 위해 매번 타격 자세를 바꾸며 자신을 담금질했다고 알려졌다.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의 경우엔 SNS를 통해 화제가 됐던 영상이 있다. 그가 샌드백에 거꾸로 매달려 상체 운동을 하는 영상이었다. 그가 아직 현역일 수 있는 이유를 단박에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 프로게이머 수명, 짧지 않을수도

반대로 e스포츠에서는 백전노장이라 불릴 만한 선수들이 별로 없다. 워낙 e스포츠 자체의 역사가 짧기도 하지만, 프로게이머 대부분은 10대에서 20대 중반이다. 그 위로는 거의 다 은퇴했다. 확실히 선수 수명이 매우 짧은 스포츠다.

왜 그럴까. e스포츠는 게임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을 순 있어도 보통 순간적인 판단 능력과 빼어난 반응 속도를 중요시하는 스포츠다. 선수 수명이 짧고 20대 중반만 지나도 은퇴가 고려되는 것 역시 이와 같은 생각에서 출발한다고 할 수 있다. 그 나이대가 되면 으레 빠른 판단과 반응 속도를 보여주기 힘들다는 인식 때문이다.

▲ LoL e스포츠에서 '페이커'는 노장으로 분류된다. 그는 96년생이다.

실제로 프로게이머들의 인터뷰나 평소 발언들을 봐도 e스포츠에서는 빠르고 정확한 순간 판단력과 0.1초를 다투는 반응 속도가 중요한 덕목이다. 순간의 위치 선정과 스킬 적중/회피가 승패에 크게 영향을 주는 AOS도 그렇고 정확한 에임이 곧 선수 이력이라는 표현까지 있는 FPS에서는 더욱 그렇다. 그래서 e스포츠에서 '피지컬'이라 하면, 선수들의 근력과 같은 신체 능력이 아닌, 위의 능력들을 일컫는다.

하지만 기성 스포츠라고 해서 순간적인 판단 능력이나 빠른 반응 속도의 중요도가 덜할까? 사실 더한 지는 모르겠지만, 중요도가 결코 낮다고 볼 수도 없다.

단적인 예로 축구의 골키퍼를 예로 들어보자. 골키퍼에게 가장 중요한 덕목은 상대 공격수들의 위치와 공의 현재 위치 등을 실시간으로 파악하는 능력, 빠르게 날아오는 슈팅을 막기 위한 재빠른 반응 속도다. e스포츠가 필요로 하는 필수 덕목과 어찌 보면 비슷하다.

그럼에도 골키퍼에는 유독 나이가 지긋한 노장들이 많다. 오히려 골키퍼의 전성기는 30대 중반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골키퍼가 필드 플레이어들보다 경기 중에 소모하는 체력이 적어 나이가 들어서도 뛸 수 있는 것도 맞지만, 40대가 되어서도 골키퍼의 기본 소양인 순간 상황 판단력과 빠른 반응 속도를 꾸준히 유지할 수 있다는 말도 된다.

사실 기성 스포츠 종목 대부분은 e스포츠 만큼 순간적인 판단 능력과 빠른 반응 속도를 요한다. 그럼에도 백전노장들은 거의 모든 스포츠 종목에 포진했다. 물론, 신인 선수 등 젊고 어린 선수들에 비해서는 위 능력에서 떨어질 수 있겠지만, 경쟁력이 아예 사라질 정도의 차이는 아닐 수도 있다는 뜻이다. 노장 개개인의 평소 훈련과 노력, 개인 관리 능력에 달려있는 말이 더 알맞다.


◎ e스포츠에도 노장은 있지만...

물론, e스포츠에도 노장이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노장 소리를 듣는 선수들의 평균 연령대가 기성 스포츠보다 현저히 낮다. 20대 중반만 넘어도 은퇴 압박을 느끼는 노장이 된다는 것이 슬픈 현실이다.

슬슬 이에 대한 반론이 나오고 있는 추세다. 최근 '페이커' 이상혁은 인터뷰에서 프로게이머의 짧은 수명에 대해 의견을 낸 바 있다. '페이커'는 "게임을 하는데 있어서 피지컬이나 뇌지컬은 아주 서서히 떨어진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내가 생각하기에는 아마 30대 초반까지는 20대 초반과 크게 차이는 없을 거라고 본다"며 프로게이머의 수명이 짧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을 했다.

사실 LoL e스포츠 기준으로만 봐도 노장의 힘은 여기저기서 드러난다. 각 지역 리그 1위팀들이 출전한 2022 MSI의 총 11개팀 중에 노장에 해당하는 나이의 선수들은 정말 많다. T1의 '페이커'를 비롯해 PSG 탈론의 '카이윙', DFM의 '에비'와 '유타폰', G2의 '얀코스', EG의 '임팩트' 정언영은 20대 중반을 훌쩍 넘은 나이로 자신들의 지역 리그 1위를 달성, MSI에 출전했다.

▲ EG 소속 '임팩트' 정언영

이들의 공통점은 하나같이 팀에서 에이스 혹은 그에 준하는 역할을 해내고 있다는 점이다. 데뷔한 지 오래됐음에도 활동 기간 대부분을 각 지역 정상급의 위치에서 보내기도 했다. 그리고 끊임없이 훈련하고 자기 자신을 담금질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국내 기준으로 LoL을 제외하더라도 노장들이 준수한 실력을 자랑하는 경우는 많다. 카트라이더 리그의 이은택과 강석인은 현역으로 활동 중인데 올해 32살이며, 유영혁과 김승태는 96, 97년생이다. 리브 샌드박스 레인보우 식스 게임단에는 92년생 김성수가 활동 중이기도 하다. 그 외에도 정말 다양한 종목에서 준수한 기량을 유지 중인 노장 프로게이머는 많다.


◎ 30대 훌쩍 넘긴 프로게이머, 가능할지도

스포츠의 역사가 계속 이어지려면 신인 선수의 유입은 필수다. 그래서 모든 스포츠 종목 팀들은 전도유망한 신인 선수를 발굴하려고 애쓰며 이들을 제대로 키우기 위한 시스템도 갖추고 있다. 신규 유입이 없다면, 아무리 많은 인기를 누리는 스포츠라도 몇 년 사이에 사라지고 말 거다. 그만큼 신인 발굴은 중요하다. 이는 e스포츠도 마찬가지다.

그와 비슷하게 베테랑, 노장들도 중요하다. 그리고 e스포츠에선 지금보다 노장의 기준이 높아질 수 있다면 더 좋다. 지금의 노장들이 더 오랫동안 준수한 기량을 유지하며 활동하는 모습을 보이면 현역 프로게이머들의 귀감이 될 거다. '20대 중반이 되면 나도 은퇴해야 하나'라는 고민에서 벗어난다는 것만으로도 자신의 현재 활동에 긍정적인 영향을 받을 수 있다.

또한, 프로게이머를 지망하는 유망주들과 이들의 진로를 함께 고민하는 부모 입장에서도 긍정적이다. 당장 내가, 내 아이가 프로게이머로 데뷔해도 25세 전후로 은퇴해야 한다는 것에 대한 고민을 하는 것과 그 걱정에서 벗어나는 것. 여기엔 프로게이머로 진로를 정하는 결정에 있어 큰 차이가 있다.

▲ DFM의 '에비'

기성 스포츠의 노장들처럼 나이 많은 프로게이머들도 자기 관리를 더욱 철저히 하고 훈련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면, 점차 30대 초중반 혹은 그 뒤로도 활약하는 선수가 생길 수 있다. 그런 선수들이 많아지면, 더 이상 20대 중반은 e스포츠에서 노장 취급을 받지 않게 되고 자연스럽게 프로게이머의 선수 수명이 조금씩 늘어날 것이다. 인식의 변화에 따른 영향력이라는 건 서서히, 그럼에도 묵직하게 일어나는 법이다.

언젠가 e스포츠 종목에도 30세를 훌쩍 넘긴, 실력의 전반적인 하락세는 경험했다고 해도 모두의 인정과 존경을 받는 백전노장이 꾸준히 활동하는 장면이 나왔으면 한다. 프로게이머들과 게임단, e스포츠 관계자들, 팬들이 모두 품고 있는 '프로게이머의 수명은 짧다'는 인식이 바뀔 수 있다면, 좀 더 다채로운 이야기가 만들어 질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