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를 하기 위해 작업실을 방문했을 때 가장 먼저 눈길을 사로 잡은 것은 장식장 가득 진열되어 있는 모형들이었다. 키덜트 문화를 가지고 있지 않은 기자였지만, 세심한 손길이 느껴지는 로봇 모형들은 탄성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 놓여진 완성된 '환영 창기사' 피규어는 다른 모형들을 압도하는 포스를 뿜어내고 있었다.

이번 지스타 기간 동안 넥슨 부스에 전시될 예정인 환영 창기사는 도타 2 홈페이지를 통해 제작 과정이 공개된 바 있있다. 이를 본 도타 2 유저 뿐만 아니라 모형에 관심 있는 사람들은 벌써부터 많은 호응과 뜨거운 관심을 표현했다. 이러한 환영 창기사를 제작한, 알 만한 사람은 모두 안다는 실피드의 디자이너 김영신, 그를 만나보았다.



Q. 만나서 반갑다. 먼저 인벤 독자분들에게 소개 부탁한다.

국내 많은 모형 제작 회사 중 하나인 실피드에서 일하는 김영신이다. 특색있는 업체는 아니지만 최근 에그어택 시리즈와 키즈네이션 시리즈로 인기를 끌어 국내·외에서 제작 및 유통을 하고 있다. 또한, 미국에 있는 사이드쇼(Sideshow)에서도 일하고 있다. 주로 외주를 받아 작업하는 '노동자'라 말할 수 있다.


Q. 사이드쇼? 해당 분야에서 유명한 곳인가?

'사이드쇼'는 세계에서 손꼽히는 회사이다. 그곳에서 시리즈 엔지니어와 디자이너, 스크립터와 같은 업무를 담당하고 있으며, 실피드에서는 조형 팀장으로 일하고 있다.


Q. 엔지니어, 디자이너 등 하는 업무가 굉장히 다양한데, 주로 하는 업무는 무엇인가?

특정하게 한 분야만 지목해서 말하기 어렵다. 디자인에서부터 키트(Kit)의 구성, 설계, 원형, 도색, 사진 촬영, 홍보 등을 도맡아 하고 있다. 예전 영세로 작업할 때 혼자 일하다 보니 A부터 Z까지 모든 것을 스스로 했다. 아직도 그때의 버릇이 남은 것 같다.


Q. 모형을 제작하게 된 계기는?

사실 처음 시작하게 된 계기는 철이 없었다고 할 수 있다. 27살에 시작했으니 올해로 10년째가 되었다. 제대한 후 벌었던 돈을 가지고 무작정 해보고 싶다는 생각에 아버지 회사 지하실에 자리를 잡았다. 어렸을 때부터 무언가를 만드는 것을 정말 좋아했기 때문에 시작했지만, 그때만 하더라도 이 직업이 배고플 것이라는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다. 심지어는 당시 일하던 곳도 관두고 시작했다.

배고프면 밥을 먹어야 하듯이 무엇을 만들고 싶은 욕구가 생기면 만들어야 직성이 풀리는 타입인데, 그 당시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이때 아니면 기회가 없겠다 싶어서 모형 제작에 본격적으로 돌입하게 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작업을 위해 지하로 내려간 것이 인생의 헬게이트를 연 것 같다.


Q. 환영 창기사 제작 의뢰를 받았을 때 어떤 생각이 들었나?

처음 가이드를 받았을 때는 투박한 디자인 형태를 받았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생체형의 느낌이 들도록 초벌 작업을 해야겠다 싶었다. 또한, 기존 일러스트는 선한 이미지였는데 좀 더 험상궂게 만들고자 신경 썼다. 덩치도 키웠고, 소위 말하는 '성난' 핏줄을 몸에다 많이 넣었다. 기존의 가이드 라인에서 알게 모르게 변화를 많이 준 편이다.

▲ 실제 피규어의 박력은 사진으로 보는 것을 훌쩍 뛰어넘는다.


Q. 실제로 보니 퀄리티가 상당하다. 통상적으로 이런 피규어를 제작하면 기간은 얼마나 걸리나?

보통 피규어를 4~5개 제작하면 두 달가량의 시간이 걸린다. 하지만 나 같은 경우에는 워낙 성격도 급한 데다 여러 스케줄이 잡혀 있어서 잠을 줄여가면서 제작에 몰두한다. 그렇다 보니 피규어를 제작하면 보통 한 달 이내에 완성한다. 이번 환영 창기사 피규어 같은 경우에는 제작에 2주일, 도색에 1주일이 걸렸다. 시간은 돈이니 열심히 해야 하지 않겠나?(웃음)


Q. 소재가 특이해 보이는데?

레진이라는 소재를 사용했다. 해외에서는 레진을 두고 'garage kit'이라고 부른다. 말 그대로 창고에서 소규모로 작업할 때 사용했던 것이 일반화되면서 지금도 그렇게 부르고 있다. 레진의 경우에는 제작 속도가 빠르고 다듬기가 쉽지만, PVC와 같은 양산형 소재보다는 개별 단가가 훨씬 비싸다. 그렇다 보니 소규모로 제작하는 고 퀄리티 피규어인 경우에는 레진으로 작업하는 것을 선호한다.


Q. 환영 창기사 피규어를 제작하면서 특별히 강조한 부분이 있다면?

환영 창기사의 눈 부분이다. 이런 부류의 피규어는 보통 눈에 신경을 많이 안 쓰는데 환영 창기사를 제작하면서 정말 많이 신경 썼다. 빛을 비춰 보면 실제 초점이 잡힌다. 이렇게 정밀하게 작업한 이유는 박제 같은 느낌을 주기 위해서였다. 눈알 자체도 시중에 파는 소재가 아니라 직접 제작했다. 정말 많은 정성과 노력을 쏟은 부분이다.

깃털 또한 공들인 부분 중 하나이다. 처음에는 실제 깃털을 사용하려고 했었다. 그래서 동대문을 돌아다니면서 재료를 구했었다. 하지만 제작 과정에서 조형으로 대체하게 됐다. 실제로 보면 알겠지만, 깃털마다 하나하나 무늬를 새겼다. 정말 힘든 작업이었고, 피 토하는 줄 알았다.

▲ 초롱초롱한 눈망울이 인상 깊다.

▲ 깃털 역시 상당한 공이 들어갔다고


Q. 작업 과정이 온라인상에 공개가 됐었는데 반응은 어땠는가?

도타 2 인벤에 어느 유저분이 이미지를 퍼가셨길래 반응을 봤는데 평이 괜찮았다. 게임상에서는 작게 보이는 캐릭터를 볼륨감 있게 실체화시킨 것이 신선하게 보이지 않았나 싶다. 그리고 페이스북에 사진을 올렸는데 해외 쪽에서 특히 많은 관심을 보였다. 이에 대해 구매 의사를 밝히는 사람들도 상당히 많았다.


Q. 환영 창기사 피규어를 제작하면서 어려웠던 점은?

시간을 맞추는 것이 가장 힘들었다. 시간에 쫓겨 작업했다 보니 특히 도색 작업에 아쉬움이 남는다. 도색 작업은 쉽게 말하면 포토샵에서 레이어를 추가하는 개념이라 할 수 있다. 욕심 같아서는 두어 번 정도 더 덧칠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해 아쉽다. 그리고 자세를 조금 더 역동적으로 바꾸고도 싶었다. 시간이 더 많았다면 더 높은 퀄리티가 나오지 않았을까 아쉬움이 남는다.

▲ 지스타에서는 골드, 실버, 원색 3종류가 전시될 예정이다.


Q. 환영 창기사 외에도 다른 도타 2 영웅 중 만들어 보고 싶은 것이 있나?

처음 가이드를 받았을 때는 고블린 도적같이 생긴 영웅을 먼저 봤다. 미포라고 했나? 처음에는 그 영웅을 보고 코믹하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이후에 가이드를 받은 환영 창기사의 경우에는 분위기가 정반대였다. 그래서 다른 영웅은 어떤 것이 있나 살펴보게 됐다. 개중에 얼굴에 탈을 쓰고 옛날 보부상과 비슷한 복장을 한 영웅도 있었다. 도타 2의 영웅들의 개성이 다양하다는 것을 느꼈고, 이를 만들어 보고 싶은 욕구가 생겼다. 아, 그리고 PC방 광고에 들어가 있는 머리가 불타는 여자 캐릭터(리나)도 정말 마음에 들었다. 저건 꼭 한번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LED를 달아 효과를 주면 정말 멋질 것 같다.

사실 내가 남들과는 다른 강한 열정(?)을 가지고 있는 부분이 있는데, 무언가를 모으면 그 시리즈를 모두 모아야 성화가 풀린다. 프라모델 같은 경우에도 하나를 사면 그 시리즈를 모두 모아야 한다. 이번에 환영 창기사를 만들었으니 다른 영웅들도 모두 만들어서 시리즈를 완성하고 싶다.


Q. 진열된 모형들이 대부분 로봇이다. 로봇을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건가?

그렇다. 로봇을 정말 좋아한다. 가끔 피규어 제작 외주 혹은 협업 형태의 일이 들어오기도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피규어보다 로봇을 좋아하기에 주로 로봇을 제작한다.

▲ 실제로 마니아들은 와서 몇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고.


Q. 지금까지 제작한 모형 중에 특별히 기억에 남는 것이 있나?

단연 에그 어택이다. 처음 회사에서 에그 어택을 제작할 때는 상품화를 시킨다는 생각은 없었다. 한 번 만들어보자는 생각에 우연찮게 시작했고, 실제 완성시키는 데 1주일이 걸렸다. 그 만큼 가벼운 마음으로 접근했는데 폭발적인 반응을 얻으면서 라이센스 취득도 했고, 해외 쪽 파트너들과 연이 닿게 됐다. 나아가 회사를 알리게 된 계기가 됐다. 에그 어택 하나로 갑자기 모든 것이 뒤바뀐 것이다.


Q. 모형을 완성하고 나면 이에 대해 특별한 애착이 남을 것 같다.

애착이라기보다는 임무를 완성했다는 느낌이다. 난 노동자니깐.(웃음) 무엇보다도 시달렸던 시간 압박에서 해방되는 느낌이다. 왜 그 CF에서 나오는 하늘을 향해 두 팔을 활짝 펼고 점프하는... 그런 기분이다.


Q. 인터뷰하는 동안 노동이라는 말을 유독 강조했는데, 본인을 작가(아티스트)라고 생각하진 않나?

완성된 모형을 두고 작품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그것을 보는 사람들이 판단할 문제라고 생각한다. 나는 엄연히 모형을 장난감이라고 생각한다. 만지면서 즐기는 장난감이 있는가 하면, 보면서 즐기는 장난감도 있다. 내가 만드는 모형은 보면서 즐기는 것으로 생각한다. 이렇듯 모형은 사람을 즐겁게 만들어 주는 개체이지, 이를 두고 예술로 승화시킬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그런 장난감을 만드는 기술자이다. 작가라는 딱딱한 개념보다는 내가 가진 기술 한도 내에서 다른 사람들을 즐겁게 만드는 것이 내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Q. 보통 모형을 제작하는 사람들을 보면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는 성향이 있는데 본인은 어떠한가?

애니메이션을 싫어하진 않지만 그리 좋아하는 편은 아니다. 그저 무언가를 만드는 것을 좋아했을 뿐이다. 프라모델도 좋아했고, 이것저것 직접 만드는 것을 좋아해서 모형 제작을 하게 된 것이다. 오히려 집에는 모형들이 전혀 없다.


Q. 처음부터 모형 제작이 능숙하지는 않았을 텐데, 다른 누군가에게 모형 제작에 대해 배웠나?

몹쓸 자존심일진 모르겠지만, 모형 제작을 배운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그렇다고 관련 전공자도 아닐뿐더러, 특별한 재능이 있는 것도 아니다. 다만 다른 완성된 모형들을 보고, 맨땅에 헤딩하는 식으로 반복해서 그대로 제작하고자 했다. 이러한 노력이 반복되면서 모형 제작에 대한 나만의 노하우가 생기고 실력이 붙은 것 같다. 정상으로 향하는 길이 여럿 있듯이,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나만의 방법으로 노하우를 얻었다고 생각한다.


Q. 사실 이런 문화에 대한 사회의 시선이 그리 곱지만은 않다. 처음 모형을 제작할 당시 부모님의 반응은 어땠나?

모형을 제작하겠다고 한 뒤로 5년간은 어머니가 날 볼 때마다 눈물이 마르지 않았다. 늘 부모님이 나를 보면 꺼내는 첫 마디가 '밥은 먹고 다니느냐?'였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당시 작업하던 지하실에는 늘 먹고 난 사발면이 쌓여 있었다. 지금은 70kg이 넘지만, 그 당시에는 몸무게가 60kg도 채 되지 않았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는 정말 희망도 미래도 없었다. 내 인생이 이렇게 저문다는 생각도 들었었다.

하루는 아버지가 20kg 쌀을 짊어지고 오셨다. 그날 쌀을 씻는데 눈물이 났다. '내가 이것밖에 안 되는구나'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이후 어찌어찌 결혼하게 됐고, 아이를 가지게 됐다. 그러면서 큰 원동력을 얻게 됐다. 나는 굶어도 되지만, 아이만은 굶길 수 없다는 생각에 최선을 다해 일에 몰두하게 됐다.

그래도 지금은 부모님이 내가 하는 일을 지지해주고 응원해주신다. 특히나 일 때문에 미국을 자주 다니게 되자 아들이 성공했다는 생각을 하시는 것 같다. 어른들은 미국에 가면 성공한 것처럼 생각하지 않나.


Q. 앞으로의 계획은 어떻게 되나?

에그 어택은 내년, 내후년까지 스케줄이 꽉 차있다. 여전히 바쁜 일정이다. 그와 동시에 다른 모형들도 제작한다. 그리고 환영 창기사 옆에 다른 캐릭터를 세울 수 있으면 좋을 것 같다.(웃음) 무엇보다도 모형을 제작하는 일 자체를 좋아하기 때문에 앞으로 어떠한 새로운 모형을 만들지는 미지수다.


Q. 모형 제작에 뛰어드는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조언이 있을까?

주변에서 모형 제작을 배우고 싶다는 분들에게서 연락이 가끔 온다. 그럴 때마다 다른 일을 택하라고 말한다. 나는 어떻게 하다 보니 여기까지 왔지만, 그 사람들이 지금 시작한다고 해서 이 정도의 위치에 올 가능성은 희박하다. 또한, 재능이 있다 하더라도 운이 받쳐주질 않으면 힘든 곳이다.

내가 그 사람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모형 제작은 취미로만 남겨라는 것이다. 10년간 모형 제작을 했는데 정말 시간이 어떻게 지나간 지 모르겠다. 모형 몇 개를 만든 것 같은데 뒤돌아보니 아이가 6살이 되어 있고, 이렇게 인터뷰도 하고 있다. 만약 아들이 모형 제작을 한다고 말한다면 뜯어말릴 것이다.



Q. 마지막으로 한 마디 부탁한다.

동업자 분들이면 다들 아실 거다. 이 직업이 얼마나 배고프고, 미래가 없는지. 정말 사실이다. 나도 4~5년 가량은 해가 뜰 것 같지 않는 새벽을 걷는 기분이었다. 인터뷰가 너무 어두웠나? 그 만큼 어두운 시절을 많이 겪었다 보니 모형 제작을 하는 분들을 보면 측은하다. 욕심을 내면 일을 그르치게 되니 자기 역량껏 재미있게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리고 기회를 왔을 때 그것을 잡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실력이 중요하다. 당장 배고프더라도 꿋꿋이 기술을 연마하는게 왕도라 생각한다.

이제 지스타에 환영 창기사가 전시 될 것인데 보시고 기뻐해주셨으면 좋겠다. 그리고 사진을 많이 찍어서 여기저기 많이 알려주셨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