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재와 스타일, 액션 3박자가 맞아떨어진 수작, 뒷심은 아쉽다


'기원: 변이'라는 한국어 타이틀명이 정해지기 전, 영문판 제목인 '아노 뮤테이셔넴'으로 알려졌던 이 작품은 2018년 차이나조이에서 처음 공개된 이후 인디씬에서 알음알음 이름을 알려왔다. 도트와 3D를 절묘히 섞은 그래픽으로 구현한 사이버펑크풍 세계관과 횡스크롤 액션, 그리고 SCP라는 소재까지 더하는 등 관심이 갈 만한 요소들이 가득했던 것도 그 원동력 중 하나였다. 따로 떼어놓아도 바로 눈길이 갈 법한 소재들이 한 곳에 모였으니, 이를 신생 인디 개발팀이 어떻게 완성시켜나갈지 눈길이 끌릴 수밖에 없다고 할까.

그 잠재력을 눈여겨본 건 유저뿐만이 아니었다. 2019년에는 SIE가 직접 중국의 유망 개발사를 지원하는 '차이나 히어로 프로젝트'에 선정되기도 했으며, 이후에도 GDC와 BIC, TGS 등 여러 게임쇼에 출품하면서 유저 및 관계자들에게 존재감을 알려왔다. 그런 행보를 직접 취재해온 만큼 개인적으로 기대가 큰 작품이었지만, 과연 그 무게감 있는 소재들을 어떤 식으로 완성시켜나갈지 확신할 수 없었다. 재료가 원체 좋으니 잘 손질해서만 내놔도 충분한 소재들이지만, 유저들의 기대감이 높고 매니아층도 많은 소재인 만큼 그 까다로운 입맛을 맞추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기대 반 우려 반으로 접하게 된 '기원: 변이'는, 결론부터 말해 상당히 짧은 작품이다.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정독해서 20시간 정도면 거진 훑어보고도 남는다. 그런데 특유의 분위기와 스타일, 그리고 기본기는 예사롭지 않아서 자꾸 보며 입맛 다시는 그런 느낌이 있다.

게임명: 기원: 변이(Anno: Mutationem)
장르명: 액션 어드벤처
출시일: 2022. 03. 17.
개발사: 씽킹스타즈
서비스: 라이트닝 게임즈
플랫폼: PC, PS

관련 링크: '기원: 변이' 오픈크리틱 페이지


픽셀과 3D의 절묘한 배합으로 눈이 갈 수밖에 없는 매력적인 그래픽 스타일


게임을 평가하고 선정할 때 그래픽이나 비주얼이 절대적인 기준은 아니지만, 상당히 큰 비중을 차지하는 건 사실이다. 사람이 살면서 오감 중 가장 많이 의존하는 감각이 시각 아니던가. 게임을 플레이할 때도 마찬가지고.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는 말처럼 그래픽이나 비주얼이 좋으면 더 거부감 없이 몰입하기 쉽기도 하다.

이 게임은 이미 차이나조이 2018에 처음 공개됐을 때부터 눈길을 사로잡을 비주얼을 선보여왔다. 2D와 3D를 혼합하는 그래픽 기법 자체는 흔하지만, 캐릭터는 픽셀로 구현하고 배경은 3D로 처리하면서도 서로 이질감 없이 어울리게 만들었기에 눈에 들어올 수밖에 없었다. 물론 100% 픽셀 그래픽 구현했을 때와 비교할 수는 없고, 3D가 섞여있다는 게 눈에 보이긴 하지만 그게 어색하기는커녕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 규모는 크지 않지만, 픽셀+3D 스타일로 표현한 사이버펑크 풍미에 빠져들 수밖에 없다

대체로 2D, 그것도 픽셀로만 그래픽 작업 그것도 고해상도에도 대응할 정도의 작업을 하려면 코스트가 많이 들기 마련이다. 그래서 3D를 섞거나 아니면 아예 3D로만 작업하는 경우도 있지만, 이때도 3D라는 요소를 외부로 드러내기보다는 픽셀, 2D의 느낌을 온전히 살리는 것에 주력하는 사례가 대부분이다. 그런 기법을 선택한 것 자체가 일부러 레트로 2D 게임의 느낌을 내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픽셀에, 고퀄리티 3D 그래픽을 섞어서 특유의 분위기를 내는 작품도 있긴 하다. 그러나 이 작품이 2D 픽셀과 3D를 결합한 이유는 조금 다르다. 2D 횡스크롤 액션뿐만 아니라 사이버펑크풍 도시를 오가는 3D 어드벤처의 느낌을 더하기 위한 것이었다.

물론 기술이 발전하고 구도에 대한 이해가 높아지면서 2D만으로도 입체적인 도시의 느낌을 구현할 수는 있다. 그렇지만 사이버펑크하면 흔히 떠오르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은 마천루들 저편에 돋아난 무질서하고 난잡한 네온 간판들과 쓰레기가 널브러진 거리를 상하좌우로 오가는 캐릭터의 모습을 일일이 포착하기는 상당히 번거롭다.



▲ 3D 어드벤처를 베이스로 하되, 전투 구간에서는 2D 횡스크롤 액션에 초점이 맞춰진다

더군다나 SCP까지 더해진 어드벤처 게임인 만큼 더욱더 입체적인 공간이 필요했다. 사회의 안전을 위해 철저히 격리, 확보, 보존해야 할 존재들을 다루는 SCP의 특성상 시설의 구조는 미로처럼 복잡다단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런 고민을 3D 배경을 도입하면서 해결한 셈이다. 여기에 3D하면 흔히 생각하는 그런 스타일이었다면 픽셀 그래픽과 어울리지 않았겠지만, 픽셀 그래픽에 가깝게 작업한 맵을 입히면서 위화감을 최소화했다. 전투 때 이펙트 역시도 픽셀에 기준을 맞춰 구현, 통일감을 살렸다.

그래픽 스타일뿐만 아니라 광원의 배치나 라이팅, 셰이더의 섬세한 조율도 사이버펑크 장르 특유의 분위기를 살리면서도 기껏 구축한 픽셀 그래픽의 느낌이 뭉개지지 않게끔 한 원동력이었다. 앞서 언급했듯 사이버펑크 장르는 무질서하게 들어선 네온 간판 등, 색감이 다른 광원들이 유달리 많이 보이는 장르다. 그런 씬이 없는 사이버펑크는 사이버펑크가 아니라고 해도 될 정도로, 분위기를 조성하는 핵심 포인트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는 광원이 그만큼 많이 배열되어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를 자칫 잘못 조율하면 난잡해보일 수밖에 없는데, '기원: 변이'는 이 부분에서 놀랄 정도로 정리가 잘 되어있다. 언뜻 보면 무질서해보이지만, 그 무질서한 광원의 혼합 때문에 캐릭터나 이펙트의 색감이 뭉개지거나 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오히려 도시 곳곳에 들어선 네온 간판이나 홀로그램, 각종 시그널 등이 존재감을 보이면서 특유의 꽉 찬 느낌이 살아났다.

물론 이는 오픈월드가 아닌, 맵의 지정된 구역에만 상호작용하고 입장이 가능한 고전적인 어드벤처 구조를 채택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긴 하다. 상식적으로 풀프라이스가 아닌, 하프프라이스의 인디 게임에서 이 정도의 퀄리티의 그래픽으로 도시 곳곳을 제약 없이 돌아다닐 수 있는 게임을 기대하긴 어렵지 않던가.

▲ 퀄리티 자체는 나무랄 곳이 없지만

▲ 규모 자체는 크지 않다

대신 그만큼 밀도를 높이고, 분위기를 살릴 각종 오브젝트와 NPC들을 배치하면서 그 각각의 퀄리티를 살리는 형태로 우리가 흔히 기대하는 '사이버펑크', 그리고 SCP의 느낌을 자아냈다. 천재 해커에 괴짜 과학자부터 사이버펑크하면 떠오를 법한 신체 곳곳에 의수를 단 갱단원에 삶의 터전을 잃고 지하로 쫓겨난 지하인들, 기업과 정부에서 부릴 법한 각종 최첨단 장비로 무장한 특수 요원들과 최신 로봇, 1차 격리에 실패해서 통째로 폐쇄된 섹터 내부를 떠도는 각종 괴생명체와 돌연변이까지. 10시간이면 다 둘러볼 정도로 공간 자체는 그리 넓지 않지만, 그 공간을 밀도 있게 꾸며내면서 빠져들 수밖에 없는 분위기를 자아냈다.

▲ 대체 뭔 실험을 했길래 이런 놈들이 격리도 안 되고 발전기에서 튀어나오는 거요

▲ 척 봐도 수상쩍은 냄새가 나는 연구시설들을 탐색하면서, 비밀을 파헤쳐보자

사실 그래픽이나 비주얼은 말로 이러쿵저러쿵 설명하기보다는, 직접 눈으로 보고 느끼는 게 더 확실하긴 하다. 복잡한 이론과 기법은 결국 유저들이 빠져들게 할 만한 결과물을 내기 위한 수단이니까. 4년 동안 데모와 트레일러를 통해 꾸준히 특유의 스타일을 유저들에게 어필해왔던 '기원: 변이'인 만큼, 그 감각이 과연 플레이하면서 쭉 유지되는지 아니면 과장이 섞인 것인지가 더 궁금할 것이다.

특히 최근 게임계에서 인게임과 트레일러가 다른 일들이 몇 번 있었으니, 그 부분에 대해 의심을 할 수밖에 없지 않던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셀화풍 캐릭터 일러스트가 나오는 파트를 제외하고 나머지는 트레일러와 인게임플레이가 비슷하다. 다만 씬의 시퀀스가 일부 재배열되어있기 때문에, 그 장면을 게임플레이에서 다시 보았을 때는 느낌이 다소 다를 여지는 있다.



어드벤처와 2D 횡스크롤 액션, 두 스타일을 압축하고 짜낸 진국

▲ 누나의 병을 고칠 실마리를 찾아 고군분투하는 동생과 이를 찾아 나서는 누나의 이래저래 꼬인 모험기 시작이다

그간 여러 차례 게임쇼, 그리고 스팀 페스티벌 참가를 통해서 편린을 보여준 '기원: 변이'는 액션 게임에 가까웠다. 그러나 그 조각들을 모아서 본 전체 윤곽은 고전적인 어드벤처의 비중이 꽤 높았다. 해결사로 일하고 있는 주인공 앤 플로레스는 어느 날 동생 라이언이 자신의 병을 고칠 단서를 찾다가 녹티스 시티를 주름잡는 갱단 '주먹파'에게 쫓기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라이언의 행방을 뒤쫓다가 앤 역시도 주먹파의 기습을 받지만, 자신이 앓고 있는 '광폭화'를 제어하기 위한 전투복 덕에 빠르게 수습한 뒤 동생과 주먹파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누군가가 남긴 단서를 모으면서 도시에 숨겨진 비밀을 하나하나 파헤치게 된다는 것이 '기원: 변이'의 주요 내용이다.

이러한 과정을 각 맵에 흩어져있는 각종 단서를 찾고, 그 단서를 모아서 해킹한 뒤 다음 섹터로 나아가면서 풀어냈으며, 일부 구간에서 적과 전투가 붙거나 컨트롤이 필요한 퍼즐이 있을 때만 2D 횡스크롤 액션으로 전환되는 방식으로 게임이 진행된다. 게임 내 메인 소재가 사이버펑크와 SCP라는 두 축으로 구성되었다면, 게임플레이는 사이버펑크풍 도시와 수상쩍은 연구소를 돌아다니면서 비밀을 파헤치고 이야기를 진행해나가는 어드벤처 게임과 그 과정에서 갖가지 적과 맞서 싸우는 2D 횡스크롤 액션 두 개의 층위로 구성된 셈이다.


작품의 비주얼 완성도는 이미 충분히 언급된 만큼, 과연 그 비주얼 못지 않게 각 장르에서 기대할 법한 재미를 줄 수 있느냐가 관건일 것이다. 특히나 어드벤처나 횡스크롤 액션 모두 다 역사가 깊은 장르고, 그만큼 걸작들도 많다보니 어줍잖은 완성도로는 명함조차 내밀기 어렵기도 하다. 그런 두 장르를 병렬시킨 만큼, 그에 맞는 완성도를 기대하게 된다.

그런 어려운 과제를 '기원: 변이'는 생각보다 기본기를 탄탄하게 담아내면서 충실히 풀어나갔다. 어드벤처 게임하면 곳곳에 있는 단서를 모으면서 이야기를 풀어가고, 그 과정에서 게임 속에 녹여낸 배경과 BGM을 음미하면서 세계관의 특유의 분위기를 즐기는 그런 맛을 기대하기 마련이다. 이를 픽셀 그래픽과 3D를 조합해 사이버펑크 분위기가 물씬 나는 비주얼은 물론이고, BGM에서도 '소녀전선', '퍼니싱: 그레이 레이븐'의 OST를 작업한 뱅가드 사운드와 협업해 미래적이고 디스토피아적인 분위기를 한층 살렸다. 그러면서도 종종 철부지지만 천재 해커인 아야네가 브리핑을 빙자해 구애(?)하는 장면이나, 어느 순간부터 중요한 일전을 앞두고 체력 회복제인 옥수수 주스(?)를 파는 옥수수 상인 같은 개그 요소를 넣으면서 가끔씩 분위기를 환기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 말하는 옥수수라니, 수상쩍은 걸

▲ 왜 하필 옥수수 주스인지 모르겠지만, 효과는 확실하다

여기에 사이버펑크하면 떠올릴 '해킹'과 '스캔'을 어드벤처에 맞게 변용한 것도 주효했다. 종종 어드벤처 게임을 하다보면 길이나 단서를 잘 못 찾아서 헤매는 경우가 있는데, 스캔 기능을 활용하면 맵에 있는 주요 오브젝트를 표시해서 비교적 쉽게 찾을 수 있게 한 것이다. 다만 단순 소모품이나 잡동사니가 들어있는 상자도 동일한 표시가 뜨기 때문에 어느 정도 수고는 해야 했다. 아울러 스캔을 사용하면 처음 접촉해서 정보를 알 수 없는 적의 스테이터스를 바로 확인할 수 있어 전투에서도 상당히 유용했다.

해킹은 문을 열거나 퍼즐식과 암호식 두 종류인데, 암호식은 바이오하자드처럼 맵 곳곳에 있는 문자 힌트를 찾은 뒤 그 순서에 맞게 문자를 배열하는 식으로 구성이 되어있었다. 그 힌트들은 도시와 각 지역 구석구석에 배치되어있고, 때로는 숨어있는 퀘스트나 이런 곳도 갈 수 있나 싶은 곳에 위치해있어 탐색하면서 파고드는 묘미가 있었다. 아울러 그렇게 해서 수거한 아이템들을 분해하고 합성, 조합해서 상위 무기나 전투에 유용한 아이템으로 제작할 수 있는 직관적인 시스템을 갖춰서 탐색의 맛을 한층 더 살렸다.

▲ 각종 잡동사니도 분해한 뒤에 소모품이나 여러 유용한 아이템으로 합성이 가능하다

▲ 익숙한 합성 공식이긴 한데, 어쨌거나 치료제가 필요하다면 기억해두자

그렇게 단서를 찾아가면서 이야기를 풀어가는 과정뿐만 아니라, 2D 횡스크롤 액션식 전투도 완성도가 상당히 높았다. 대시와 점프를 기반으로 하는 고전 횡스크롤 액션 전투에 회피와 반격을 가미하고, 그에 맞춰서 적들의 공격 템포나 패턴의 속도도 데모 때보다 상당히 끌어올렸다.

그렇게 전투의 속도감을 한층 끌어올리면서 속성 및 방어 개념도 탑재, 무기의 종류나 무기에 장착한 칩셋에 따라 더 효과적으로 전투를 진행하는 육성과 파밍의 재미도 가미했다. 칩셋뿐만 아니라 전투하면서 얻게 되는 포인트들로 스킬이나 특성을 해금, 더 다채로운 전투를 즐길 수 있었다. 그에 따라 적들의 공습도 더 매서워지는 건 물론이다.

특히 인간형 보스들은 방심하는 순간 바로 뒤를 노리거나 제 때에 오브젝트를 순서대로 파괴하지 않으면 피해를 입는 까다로운 패턴으로 무장한 터라 빠르게 움직이는 와중에도 정확하게 적의 공격이나 패턴을 캐치하고 대응해야만 했다. 보스뿐만 아니라 때로는 각기 다른 적들이 각자의 패턴으로 공습해와서 당혹스러울 때도 있고, 일부 패턴은 패링이 불가능해서 일보 후퇴만이 답일 때도 있었다.

▲ 이제 스탯 좀 올리고 스킬도 찍었으니 무쌍 가는 건가 싶지만

▲ 그만큼 강적들이 등장하기 마련

▲ 아이사츠도 없이 덤비는 야생의 닌자 녀석, 패턴은 파악했으니 패링 맛을 보여주마

그렇지만 소울류처럼 회피가 제약이 된 건 아닌 터라, 빠르게 추스리면서 틈을 노리는 플레이는 얼마든지 가능했다. 또한 실드를 파괴하면 무적 상태가 되면서 큰 대미지를 줄 수 있는 피니시 무브를 사용할 수 있고, 주변의 적에게 피해를 주는 특성을 찍어서 위기를 모면하기도 했다. 또한 주요 구간에는 세이브 및 도시나 혹은 다른 구역으로 이동할 수 있는 전송 포인트를 배치해서 중요한 전투를 앞두고 대비하기도 쉬웠다.

더군다나 콤보를 이어가거나 앤이 일정 횟수 이상 피격되면 '광폭화'를 발동, 체력을 순식간에 회복하고 무적에 가까운 상태가 되는 터라 소울라이크급으로 어려운 건 아니었다. 물론 이렇게 말만 들으면 광폭화를 발동해서 보스를 다 쓸어버리는 일방적인 전개만 떠오르겠지만, 그렇기 때문에 가면 갈수록 보스들의 움직임이 대부분 빠르거나 시도 때도 없이 공격을 이어서 한 번이라도 집중이 흐트러지면 계속 얻어맞게 되는 식으로 액션이 단조로워지는 현상을 방지했다.

▲ 변신은 짧지만 강력하다. 대신 게이지를 모으려면 콤보를 꽤 쌓아야 한다.

개발사에서는 컨트롤러를 권장하고 있고, 실제 플레이도 컨트롤러에 최적화되어있지만 키보드 지원도 나무랄 곳이 없었다. 초반의 키 세팅은 다소 좀 불편할 수 있지만, 사소한 키 배치까지 다 바꿀 수 있게 되어있었기 때문이다. 아날로그 스틱에 해당하는 키까지 다 배치가 가능해서 우측 스틱을 움직여서 무기를 스왑하고 좌측 스틱을 움직여 소모성 아이템을 쓰는 그런 조작도 키보드만으로 아무 문제 없이 해결이 가능했다. 최적화도 썩 괜찮은 편이라 PC, PS버전 어느 것이든 쾌적하게 즐길 수 있다.

▲ 개발사에서는 컨트롤러를 권장하고 있지만, 키보드 세팅도 세밀하게 갖춰서 플레이에 아무 문제가 없다



SCP의 느낌을 더 살릴 수 있었을 텐데, 끝맛은 다소 아쉽다


소재도 좋고, 어드벤처 요소도 기본기가 갖춰진 데다가 전투도 꽤나 속도감 있게 전개되는 만큼 엔딩은 생각보다 빨리 찾아온다. 필드가 꽤 밀도 있다고 하지만 구역 자체가 녹티스 시티, 스코프 시티, 마가렛 타운, 항구, 42번 도로 다섯 개 구역에 전투 파밍이 가능한 전송 구역도 여덟 곳에 불과하다. 밀도가 아무리 높아도 절대적인 수가 부족하기 때문에 그 안에 담아낼 수 있는 경험의 총량이나 스토리의 총량도 한계가 있는 셈이다.

그나마 풀프라이스 게임이 아닌, 하프프라이스의 인디 게임이기 때문에 이는 어느 정도 이해가 가능한 부분이다. 이곳저곳에 있는 단서를 찾아 퍼즐을 풀면서 길을 찾고, 동시다발적으로 덤벼드는 각종 적들을 여러 컨트롤로 요리해나가는 재미 하나만큼은 끝까지 달리는 기간 동안 원없이 즐길 수 있으니 말이다. 그 과정에서 접하게 될 풍경이나 음악, 그리고 SCP와 사이버펑크의 풍미가 녹아들어간 여러 문서나 오마주, 설정들은 훑어보기만 해도 상당한 퀄리티인 것이 체감이 된다.

▲ "술을 섞고 인생을 바꿀 시간", 역시 사이버펑크하면 바텐더가 빠질 수 없지

▲ 그런데 설마 본인이 나타날 줄이야

다만 한국어판은 번역이 이를 온전히 뒷받침하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 인물 간의 대화는 대체로 번역이 무난하게 된 편이지만 가끔 더빙과 맞지 않았고, 툴팁의 일부 문장은 번역기를 돌렸을 때 나올 법한 문장이 나오는 일도 있었다. 대체로 공문서나 연구자료처럼 문장 구조가 칼 같고 정확하게 잡힌 것들은 직접 번역도 쉽고 번역기를 돌려도 무난하게 나오다보니 번역 상태가 굉장히 양호한 것은 그나마 다행이라고 할까.

디테일까지 신경을 쓴다면 거슬리는 분야지만, 그래도 스토리의 맥락 자체는 파악이 가능하니 넘어간다고 치자. 그런데 어느 시점부터 "아 이런 좋은 소재를 안 쓰고 그냥 흘러가나?"라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 전투 데이터만 어떻게 구해와서 가상훈련 프로그램에 재현한 SCP-682 비스무리한 도마뱀은 그렇다쳐도, 실험기지 같은 곳을 가면서 지나치게 되는 소재들은 꽤나 그럴싸했기 때문이다.


▲ 이런 게 SCP지. 더 갖고 와...아니지, 다 갖고 와

▲ 기억을 롬으로 판매한다는 사이버펑크스러운 설정도 있긴 한데, 비중은 크지 않다.

▲ 더빙은 "그럼 끊을게, 치료 받을 시간이라서"였을 텐데...이외에도 중국어를 번역기로 돌린 듯한 구간이 더 있다

그런 걸 대부분 스쳐가는 모습에서, 마치 소년만화에서 분량상 혹은 어른의 사정상 해당 분량은 연재하지 못하고 "우리의 싸움은 이제부터 시작이다!"라고 쓰는 그런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위원회가 등장하는 시점과 마지막 챕터가 특히 그랬다. 위원회에 대한 묘사가 부실한 거야 SCP에서 모티브를 따왔다는 게 누가 봐도 짐작이 갈 만해서 그렇다쳐도, 마지막의 급전개는 그간 차곡차곡 사이버펑크풍 도시와 SCP풍 연구시설을 오가면서 활극을 벌여왔을 때와는 사뭇 다르다. 어드벤처 요소나 전투의 퀄리티는 쭉 이어지지만 마지막에 가서 이야기의 고삐를 놓치고 만 느낌이랄까.





'기원: 변이'에 관해 이야기할 때마다 화룡점정이라는 말이 계속 머릿속을 맴돈다. 마치 한 문제 차이로 등급이 갈리는 걸 보는 심정이랄까. 이 리뷰를 어떻게 마무리지어야 할지 모를 정도로 여러 생각이 오가고 있다.

리뷰어, 기자이기 이전에 게이머로서 과연 이 작품이 어떻게 완성될까 초창기부터 쭉 지켜봐왔던 만큼, 이 아쉬움을 풀기 위해선 무엇이 필요했을지 각종 잡념들과 안타까움이 망령처럼 떠도는 건 어쩔 수 없다. 바이오하자드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했으니 바이오하자드 시리즈처럼 난이도를 세분화하는 건 어땠을까부터 잡몹은 괜찮았는데 보스몹은 좀 더 SCP스러운 소재를 살렸어도 괜찮지 않았을까 하는, 온갖 잡념이 리뷰를 쓰는 동안 떨쳐지지가 않았다.

그렇게나 아쉬움이 남은 이유는, 더 높은 경지에 오를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한 끗발 차이로 밀려나버렸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보통 누가 시험에 떨어졌다거나 성적이 생각한 것만큼 나오지 않아 좌절하고 있을 때, 가능성이 없다 싶으면 그냥 다음에 잘하면 된다고 넘기는 식으로 상투적인 충고를 던져주고 끝마치지 않나.




▲ 분량은 다소 아쉽지만, 각 스타일에서 기대할 만한 요소들과 비주얼이 꽉 차있다.

그런데 이 작품은 기껏 초반에 잘 구축해온 틀과 빌드업을 마지막에 가서 다소 급하게 끝내버린 느낌이었다. 한국어판 같은 경우에는 번역도 아쉬웠으니, 그렇게 디테일이 미흡한 것이 더더욱 눈에 밟힌다. 그 전까지는 확실히 수작이라고 하기엔 충분한 작품이었다. 어드벤처와 액션 두 장르가 갖춰야 할 기본기도 확실하고, 비주얼에서는 흠잡을 곳이 없다. 픽셀 그래픽과 3D를 혼합했음에도 사소한 부분 하나도 이질감이 없이 레트로와 현대적인 느낌을 동시에 담아냈고, 각각의 장점을 살려내 도시를 탐색하는 어드벤처의 느낌을 충실히 살렸다. 스토리의 양 자체는 많지 않지만, 숨어있는 단서를 찾아서 이야기를 풀어가는 동선이나 고전 게임에서 영감을 받은 암호풀이는 간단명료하고, 그 사이사이에 숨은 오마주나 패러디도 깨알 같다.

액션도 회피, 패링부터 적의 약점을 간파해 맞춤 공략을 하거나 최후의 수단으로 '광폭화'를 통해 일거의 소탕하는 등, 그 바리에이션의 폭도 굉장히 넓고 각각의 스타일이 살아있었다. 콘텐츠 볼륨 자체가 그렇게 많지 않지만, 그 안에서 구현할 수 있을 법한 요소들은 꽉꽉 채웠고 설계도 잘 되어있어 게임플레이에 속도감도 붙는다. 어느 덧 끝까지 와버린 탓에 아쉬움이 느껴질 정도로, 그리고 마지막 끝에 살짝 턱에 걸린 것 때문에 뒤를 돌아보고 입맛을 다시게 될 정도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