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면(異面)은 쉽게 간과하게 마련이다.

대개 사람은 보이는 면을 주로 생각하게 된다. 보이지 않는 부분이 엄연히 존재한다 해도, 그 부분은 쉽게 잊게 된다. 왜? 눈에 보이지 않으니까. 1년쯤 전, 스팀에서 구매한 게임 중 '비세라 클린업(Viscera Cleanup)'이라는 게임이 있었다. 칼을 사용하는 액션 게임의 주인공이 한바탕 휩쓸고 지나간 이후, 무대가 되었던 그 살육의 장을 청소하는 과정을 게임으로 풀어낸 인디 게임이다.

게임을 플레이하다 보면 진짜 별일이 다 생긴다. 피범벅이 된 바닥을 닦다 보면 어느새 물걸레가 새빨갛게 물들고, 깨진 유리와 널려있는 적 잡졸들의 조각난 육편을 치우다 보면 이 아비규환의 참상을 만든 주인공에 대한 분노마저 일어난다. 생각해 보면 그랬다. 크레토스로, 혹은 마스터 치프로, 또는 쉐퍼드 소령으로 분한 내가 파괴행각을 일삼고 다녔을 때, 그걸 다시 정리하는 게임 속 공무원들의 마음이 이렇지 않았을까.

폴란드의 11비트 스튜디오에서 제작한 '디스워오브마인(This War Of Mine)' 역시 그간 게임 상에서 자주 드러나지 않았던 '이면'을 배경으로 삼은 작품이다. 한창 내전이 진행 중인 현대 시점의 전장. 플레이어는 군인도, 특수부대 요원도 아닌, 일상 생활을 영위하던 중 전쟁의 참상을 눈앞에 마주하게 된 민간인의 시점에서 전쟁을 경험하게 된다.

처음엔 그저 '서바이벌'을 주제로 만든 게임일 거라는 단순한 생각만을 했다. 어쨌거나 디스워오브마인은 인디 게임이었고, 대작 게임들이 갖고 있는 화려한 그래픽과 CG, 압도적인 연출을 기대할 수 있는 게임은 아니었다. 인디 게임들의 생존법 중 하나는 유행을 타는 것이고, 아직까지 '생존'이라는 코드는 게임계에서 먹히는 성공 유전자 중 하나다.

하지만 무지가 불러온 이 지극히 단순한 속단은 플레이 과정에서 여지없이 부서졌다. 낮에는 아지트를 보수하고, 밤이 되면 물자를 찾아 위험한 거리를 돌아다니는 과정에서, 난 수없이 많은 도덕적 선택을 마주하게 되었다. 충분한 식량과 약품을 보유했지만, 지킬 힘이 없는 노부부를 앞에 두고 갈등하기도 했고, 총을 든 채 여성을 위협하는 군인을 앞에 두고 뛰어나갈 것인가, 안전하게 모른척 할 것인가를 고민하기도 했다.

▲ 11비트 스튜디오 수석 시나리오 작가 파웰 미코프스키

"'전쟁'에서 모든 이가 군인인 것은 아니다."

이 문장이 내가 디스워오브마인을 플레이하며 느낀 감상의 요약이었으며, 디스워오브마인이 게임 내에 내걸고 있는 슬로건이다. '전쟁'의 주인공들인 '군인'들에게 가려져 볼 수 없었던 '이면'. 디스워오브마인은 그들의 이야기였다.

그런 나에게, GDC2015의 둘째 날 만난 강연자는 특별할 수밖에 없었다. 11비트 스튜디오의 수석 시나리오 작가인 '파웰 미코프스키(Pawel Miechowski)'. 그가 들고 온 강연의 주제는 '독특한 내러티브 방식을 통한 감정 고양(Raising Emotions from Unique Narrative)'이었다. 강연의 제목만 봐도 기대감이 몰려왔다. 디스워오브마인은 근래 해 본 그 어떤 게임보다도 내 감정을 격하게 뒤흔든 게임이었으니 말이다.

강연에 앞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관찰자로서, 당신은 슬픔, 그리고 행복을 느낄 수 있습니다. 장면을 바라보면서 말이죠. 하지만 내면의 감정을 끌어올릴 수 있다면, 그 순간 게임은 영화보다 위대해질 수 있습니다."

이어 그는 '디스워오브마인'을 개발하면서 기조로 삼았던 다섯 가지 방법을 논하기 시작했다.


1. '장르'는 거들 뿐이다.

디스워오브마인에 대한 간단한 소개 이후 파웰의 첫 마디는 '장르를 생각하지 말라'였다. 사실 장르의 결정은 게임을 제작함에 있어 가장 우선시되는 요소 중 하나다. 어떤 장르의 게임을 만들 것이냐에 따라 게임 엔진을 결정하고, 이미지와 아트웍, 설정 등을 곁들이며 살을 붙인다. '장르'는 게임 캐릭터로 치면 '종족'과 같다. 우리가 게임 캐릭터를 만들 때 가장 먼저 결정하는 것이 무엇이던가.

하지만 파웰의 말은 이를 정면에서 뒤엎는 발언이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생존 게임을, 혹은 전략 게임을 만든다는 생각보다, 게임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은가를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게임의 장르는 자연스럽게 따라오기 마련입니다."

▲ "장르를 생각하지 마세요. 자연스럽게 따라옵니다."


2. 테스터들에 대한 지속적인 '관찰'을 이어가라.

이후, 아이디어를 사용한 게임의 프로토타입이 완성된 후에는 이를 테스터들에게 제공한 후, 끝없이 테스터들을 관찰하는 과정이 뒤따라야 한다고 파웰은 덧붙였다. 파웰은 한 여성 유저를 예로 들었다. 테스터중 하나였던 여성 유저는, 게임 도중 필요한 물자를 훔쳤고,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후 다시 훔친 물자를 돌려주려고 시도했다. 이는 그녀가 스스로의 도덕적 기준에 본인을 세운 결과이다.

이 예시는 플레이어가 비도덕적 행동을 할 때마다 게임이 그것을 알게 만드는 시스템을 제작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예를 들면, 테스터가 어떤 비도덕적 행동을 할 수록 게임 속의 캐릭터들이 괴로워하고, 침체되는 식으로 말이다.

그 외에도 다양한 계층의 테스터들에게서 개발자는 영감을 얻게 된다. 전적으로 테스터들의 피드백에 의존하는 형태가 아니다. 앞서 이야기했듯, 필요한 절차는 테스터들에게 테스트 결과를 받는 것이 아닌, 게임을 하는 테스터들이 어떤 부분에서 감정 변화를 일으키는가에 대한 구체적 관찰이다.


3. '정답'이 없는 선택지를 만들라.

디스워오브마인에서 플레이어들이 선택을 하게 되면, 이는 어떤 이득을 얻던 간에 그만큼의 반작용을 가져오게 된다. 가령 생필품인 '식량'을 얻는 과정만 해도 다음과 같이 나눌수 있다. 저항할 수 없는 약자의 물건을 훔치거나, 다른 민간인을 해치고 빼앗거나, 정당한 거래를 통해 구하거나, 그도 아니면 직접 재배를 하는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모든 과정은 그에 따라 또 다른 결과를 초래한다. 식량을 훔치거나 강탈할 경우, 게임 속 캐릭터들은 각자가 가진 도덕적 잣대에 따라 심적 타격을 입게 된다.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며 스스로의 행동에 정당성을 부여하는가 하면, 우울증을 견디다 못해 자살을 하는 사태까지 벌어진다. 거래를 할 경우 도덕적인 문제는 빚어지지 않지만 그 만큼의 물자를 내주어야 한다. 여기서 내준 물자는 훗날 중요한 재료로 사용될 수도 있고, 때로는 나 자신을 지킬 무기가 될 수도 있다.

직접 재배를 통해 식량을 구하는 과정은 가장 깨끗하지만, 그만큼 많은 노동과 자원을 필요로 한다. 육류의 주 공급처인 '쥐'를 잡기 위해서 플레이어는 각종 물자와 시간을 소모해 쥐덫을 놓아야 하며, 채소를 기르기 위해서 각종 농경 장비와 비료 등을 구비해야 한다. 이런 물건을 구하기 위해, 플레이어는 또 다른 선택의 기로에 직면한다.

결국, 명확한 이득은 어디에도 없다. 선택은 플레이어의 몫이다. 선택지를 가진 게임들은 상당히 다양하다. 하지만 웬만한 게임에서의 선택지는 '정답'이 존재한다. 플레이어가 처한 상황에 따라 꼭 해야 하는 선택, 하지 않을 경우 게임 진행이 상당히 어려워지는 선택은 어디에나 존재했다. 하지만, 디스워오브마인의 모든 선택은, 그만큼의 가치와,반작용을 수반한다. 그리고 어떤 선택도, 다른 이들에 의해 '어리석은 선택'으로 여겨질 수 없다. 그 모든 선택에는 '개인의 도덕적 잣대'가 포함되기 때문이다.

▲ "우릴 죽일 건가요...?"

▲ 플레이어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선택지를 제공하라


4. 감정 고양의 최적 조건, '무의식적 행동'을 유도하라.

이어 파웰은 말했다. "대부분의 플레이어들은 이미 익숙합니다.(Most players are programmed)". 게임을 어느 정도 해본 이들은 본능적으로 게임을 시작할 때, 내가 어떤 플레이를 해야 하는가를 느낀다. 나 역시 그렇다. 처음 해 보는 게임이라도, 조금만 진행하면 제작자가 무엇을 원하는지, 어떤 움직임을 해야 다음 스텝으로 나아갈 수 있는지에 대한 감이 잡힌다.

하지만 게임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면 어떨까? 게임에 전혀 익숙하지 못한 사람들이라면, 처음 게임을 진행하면서 조금 더 무의식적으로 행동하게 된다. '좋은 아이템', '좋은 스킬' 등 기존 게임의 기본이 되는 지식이 없으니, 자신도 모르게 마음 기우는 대로 행동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감정'의 동요는, 무의식 중에 더욱 크게 일어난다.

이 '무의식적 행동'에 의한 감정 동요는 이렇게 설명할 수 있다. 게임에 익숙한 대부분의 유저는 목표까지 향하는 최적의 루트를 계산하기 마련이다. 이른바 '이성적 선택'이다. 여기서 게이머들의 행동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이득'이 된다. '어떻게 움직여서, 어떻게 조작해야 최선의 결과가 나오는가?' 흔히 이걸 가장 잘하는 사람들을 우린 프로 게이머라고 한다. 반면 '이득'이 뭔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플레이어는 그 순간의 감정에 의거해 판단을 내리게 된다. 판단 기준의 우선권이 '게임 내에서의 이득'이 아닌, '나 자신의 선택'이 되는 순간이다.

11비트 스튜디오가 주목한 것도 바로 이 사실이었다. 파웰은 말했다. "전쟁 게임이라고 하면 보통 이렇습니다. 총을 쏘고, 적을 없애고, 싸우고, 민주주의를 가져오고...어쩌구 저쩌구..." 이것이 바로 사람들에게 각인된 '익숙함'이다. 나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디스워오브마인'이라는 게임의 제목만을 들었을 때, 난 당연히 주인공이 군인일 거라고 생각했었으니까. 즉, '익숙하지 않은 소재'는 대부분의 플레이어들로부터 '무의식적 행동'을 이끌어낼 수 있다.

▲ 'Not Programmed' → 무의식적 행동 → 감정 고양


5. '심볼'의 활용. 상상력을 자극하라

파웰이 설명하는 감정 고양의 마지막 방법은 상징적 의미를 담은 '심볼'의 활용이었다. 예를 들자면 이런 거다. '디스워오브마인'에서의 부정적 변화는 연쇄적으로 일어난다. 플레이어가 비도덕적 행위를 하면, 게임 내 캐릭터가 양심의 가책으로 괴로워하고, 이런 부정적 분위기는 생존자 그룹 사이에 퍼져 점점 악화된다. 그리고 끝내 캐릭터가 '자살'하는 상황까지 나오게 된다.

이 경우, 디스워오브마인에는 한 장의 사진이 나타난다. 죽어가는 사람, 혹은 직접적으로 목을 메는 이미지가 아닌, 허공에 떠 있는 발 끝의 사진이다. '자살'이라는 상황을 보여줄 수 있지만, 결코 노골적이거나 적나라하지 않은 최소한의 표현이다. 한 가지 더 예를 들자면, 의약품을 구하기 위해 플레이어의 은신처를 찾은 생존자에게 약을 건네줄 때 등장하는 사진을 들 수 있다. 맞잡은 두 손, 그리고 그 사이에 채워진 각종 의료도구의 이미지다.

이런 간단한 사진으로 표현되는 상황의 연출은 흔히 사용하는 '컷신'과는 전혀 다른 접근법이다. 하지만 그만큼의 이점도 존재한다. 모든 상황을 가감없이 보여주는 '컷신'과 다르게 간단한 이미지를 통한 상황 설명은 플레이어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은신처의 상황이 어떤지, 그리고 상황의 뒷배경에 어떤 이야기와, 어떤 일들이 있었을까에 대한 자유로운 상상이다.

"인간의 상상력은 무한합니다. 우리가 만들 그 어떤 연출보다 다채롭고, 구체적이며 또한 강력하죠.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간단합니다. 그들의 상상력이 뭉칠 수 있는 '촉매'를 적절하게 던져주는 것입니다." 5가지 방법에 대한 설명을 모두 마치면서, 파웰이 마지막으로 한 말이었다.

▲ 캐릭터가 자살했음을 알리는 '심볼'. 상상의 여지를 열어두라

강연은 그렇게 마무리되었다. 자리가 모두 채워져 서서 강연을 듣는 사람이 있을 정도로 큰 인기 속에 진행된 짧은 강연은, 수많은 청중들의 박수 갈채 속에 마무리되었다. 물론 11비트 스튜디오의 이런 접근법을 모든 상황에서 써먹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대작들을 많이 내놓았던 기성 게임사일수록 시도하기 어려운 방법이라고 해야 할까?

그럼에도 강연의 끝에서 나는 박수를 치고 있었다. 감정을 끌어내는 비법 또한 훌륭하고 체계적이었지만, 강연의 내용이 논리적으로 너무나도 완벽하고, 흠잡을 수 없었기에 나오는 박수가 아니었다. 나는 이 강연에서, 더욱 중요한 것을 볼 수 있었다. '게이머들에게 도덕적 선택, 그리고 감정의 고양을 일으켜 최고의 경험을 선사하고 싶다는 것'. 바로 '디스워오브마인'의 개발 철학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그 목표까지 달리기 위해, 게임의 장르와 배경 등등 게임의 근간을 이루는 굵직한 소재들도 뒤로 미뤄두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디스워오브마인'이라는 게임에 대한 유저들의 평가를 통해 드러났다.

내러티브에 대한 접근은 최근 많은 게임 개발사들 사이에 화두로 떠오른 소재이며, 사실 이 강연은 그 내용만으로도 충분히 가치가 있었다. '디스워오브마인'의 감정 전달은 분명 기존의 게임들과 차별화되어 있었으며, 동시에 강렬했기 때문이다. 강연장을 빠져나오며 문득 이런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11비트 스튜디오가 플레이어의 감정을 흔들 수 있었던 까닭은, 그들이 플레이어에게 선사하고 싶은 '경험'에 대한 철학을 갖추고 개발에 임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개발자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비법'이 아닌, '플레이어들에게 무엇을 전달하고 싶은가?'로 시작되는 뚜렷한 '철학'이 며, 이 '철학'이 바로 초심을 잃으며 동시에 간과하게 된 '이면'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