킹스맨: 시크릿 에이전트(Kingsman: The Secret Service, 이하 킹스맨). 제목부터 화끈한 돌직구를 던진다. 이건 '비밀요원'들을 소재로 한 이야기라고.

누적 관객수 350만여 명. 주변 사람들에게서 소감 한 마디씩 듣는 것은 식은 죽 먹기였다. 곳곳에 올라온 리뷰 제목만 모아봐도 대강 어떤 작품인지가 한 방에 훅 느껴진다. 이건 뭐, 굳이 보기도 전에 이야기를 꿰찰 지경이다.

그런 상태로 영화관에 들어섰으니 뭔가 찜찜할 수밖에. "저기 막차다! 뛰어! 무조건 뛰어!"라며 등 떠밀려서 엉겁결에 올라탄 기분이랄까. 어쨌든 이제 나도 '킹스맨 본 사람'의 대열에 합류했으니, 만약 누군가 내게 "무엇이 기억에 남았느냐" 묻는다면, 음... 그렇지. '멋들어진 수트?'라고 자신있게 대답해 줄테다.

공상과학 장르로 분류해도 될 수준의 무기들, 숨 들이키며 집중하게 만들었던 롱-테이크 난투 액션, 한나 엘스트롬의 화끈하고 도발적인 19금 대사... 조각조각 잘라놓고 보면 다들 아쉬울만큼 매력적인 요소들이다.

하지만! 그래도! 이 장르의 먹이사슬에서 최상위에 군림하는 것은 역시 '수트'다. 꼭 맞게 재단된 맞춤 수트의 단정한 이미지와 사방팔방 때리고 부수고 썰어대는 액션. 극과 극처럼 결코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이 두 가지를 섞어준 매개체를 찾아보자면 아마도 '비밀요원'이 아닐까.

상상에 상상을 이어가다가 보면, 거의 대부분 '난 어쩔 수 없는 게이머'라는 종착역에 닿곤 한다. 뭘 하든, 무엇을 보든, 자연스레 게임과의 연결고리를 먼저 생각하게 되니까. 수백만 명의 누적관객수를 기록했다지만, '킹스맨' 역시 예외일 수는 없었다. 굳이 핑계를 하나 더 붙이자면, "킹스맨에 너무도 게임 같은 장면들이 연속적으로 펼쳐졌기 때문"이라고 해두겠다.

어쨌든, 그런 이유로 한 번 준비해봤다. 수트, 액션, 그리고 비밀요원. 이 세 가지 키워드를 담아낸 게임에는 무엇이 있을까. 이 글을 보고 있는 당신이 만약 게이머라면, 이미 머릿속에 리스트가 만들어질 수도 있을 것이다.


골든아이 007 GoldenEye 007



거창한 설명은 필요 없다. 제목에 들어간 세 개의 숫자, 007만으로도 충분하다. 영화는 물론 게임으로도 수많은 시리즈를 줄줄이 엮어냈던 전설의 코드네임이 아니던가.

비록 가상의 인물일지라도, '수트가 잘 어울리는 남자'를 꼽으라 하면 제임스 본드를 빼놓기가 어렵다. 어느 매체에서 다룬 킹스맨 리뷰 중에도 제임스 본드가 거론된 바 있는 걸 보면, 애초부터 007은 이 글에도 출연할 운명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회의실에서 이 기획기사의 개요를 발표하기 한참 전부터.

007 시리즈 가운데, 뭇 게이머들의 엄지 손가락을 치켜세우게 한 작품을 딱 하나만 꼽으라면 '골든아이'에 한 표를 던지고 싶다. 1997년 닌텐도64용으로 출시됐으며, 동명의 영화 '골든아이'(1995)가 원작이다.

2010년 닌텐도DS와 Wii로 다시 발매된 적이 있으며, 이듬해 '골든아이 007: 리로디드(007 Goldeneye: Reloaded)'라는 이름으로 PS3와 Xbox360까지 진출했다. 리마스터까지 되면서 자꾸 새로운 영역으로 뻗어 나아가는 건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다. 물론 'Wii 버전 메타크리틱 평점은 무난하게 나왔는데, 닌텐도DS판 성적은 왜 그 모양인가'라고 묻는다면 묵비권을 행사하기로 하겠다.

콜린 퍼스의 환상적인 액션을 연이어 떠올리다보니, 문득 우리 본드 형님을 다시 한 번 찾아보고 싶어진다. 아 참, 깜빡 잊을 뻔했네. "자매품 '007: 퀀텀 오브 솔라스(007: Quantum of Solace)'도 있습니다."



노 원 리브스 포에버 2 - No One Lives Forever 2: A Spy in H.A.R.M.'s Way



이 타이틀을 추천한 K모 기자는 '킹스맨과 싱크로율이 가장 높은 게임'이라고 평했다. 그러고 보니, 제목에 이미 '스파이'가 들어가 있다. 대표 이미지에 나온 주인공은 정장도 갖춰 입고 있다. 남자는 아니지만, 어쨌든 정장이니까 그냥 넘어가도록 하자.

'노 원 리브스 포에버 2'는 2002년 출시된 잠입 FPS 장르 게임이다. 2년 정도 먼저 출시된 전작이 버젓이 있긴 하지만, 그쪽엔 대표 이미지에 수트가 빠져있어서 탈락 처리했다. 게임 내에서 정장을 입을 때가 있을 가능성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아버지는 항상 말씀하셨다. 첫인상이 제일 중요한 법이라고.

게임의 시대적 배경은 미국과 소련 간의 긴장이 팽배해있던 때. 주인공인 케이트 아처(Cate Archer)는 거대 범죄조직 H.A.R.M.에 관련된 활동들을 미션으로 진행하게 된다. 킹스맨의 주인공 에그시도 작품 안에서 거대한 음모를 저지하기 위한 라인을 그리고 있으니, 상당부분 유사한 프레임이라고 해석해도 될 듯하다.

부제에 적힌 H.A.R.M.은 설정상 국제 규모의 범죄조직이다. 케이트는 그 안에서 스파이로 활동하는 인물로 등장한다. 남자라도 웬만한 간담으로는 엄두도 못낼 외줄타기적 삶이라니. 이 당찬 여걸에게 무릇 박수를 보낸다.



데스 투 스파이 - Death to Spies



'데스 투 스파이'는 2차 세계대전 시기를 배경으로 하는 3인칭 잠입액션 게임이다. 2007년 10월 윈도우 PC용으로 출시됐으며, 2008년에 스팀으로도 나왔다. 후속작으로 2009년 출시된 '데스 투 스파이: 모먼트 오브 트루쓰(Death to Spies: Moment of Truth)'가 있으며, 두 타이틀을 세트로 묶어 슬며시 할인해주는 에디션도 찾아볼 수 있다.

이 작품에서는 소련 시점의 이야기를 다룬다. 주인공인 세미온 스트로코프(Semion Strogov)는 소비에트 연방 방첩 조직 스메르시(SMERSH, 스메르슈라고 적기도 한다)에 몸담고 있다. 스메르시란, 러시아어로 게임의 타이틀명이기도 한 '데스 투 스파이(스파이에게 죽음을!)'라는 문장의 약자다. 거 참, 일관성 하나는 격하게 칭찬해주고 싶다.

스메르시는 독일과 소련 간의 전쟁 당시 실존했던 방첩 부서의 명칭이다. 첩보 활동 저지 뿐만 아니라 반란 요소 차단, 점령 사업 등이 주된 임무였으며, 스탈린이 직접 지휘했다고 알려져 있다.

다시 게임 속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데스 투 스파이'에서 세미온은 독일 나치세력의 요주 인물을 암살하거나 기밀을 탈취하는 전형적인 첩보원으로서 플레이하게 된다. 권총 한 정과 제한된 숫자의 탄환을 기본 무기로 하며, 소총, 다이너마이트, 나이프, 교살용 줄, 그리고 클로로포름(소설 등에서 마취제로 많이 등장하는 바로 그것!)도 있다.

마취제 같은 아이템이 등장하면 어떻게든 써보려고 안달하게 될 거라고 개발자들이 단순하게 생각한 모양인데... 그러면 꼭 나같은 단순한 유저들은 반드시 걸려든다. 정말 간만에 가슴 졸여가며 잠입 플레이를 했던 걸로 기억한다. 휘유, 정말 힘들었어...



팀 포트리스 2 - Team Fortress 2



정말 이걸 넣어야 하나? 아니, 넣어도 될까?

고민과 걱정의 반복이었다. 앞서 다뤘던 게임들이 하나같이 진짜 '스파이' 같은 스타일리시함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생각이 들었다. '잠시 여담하는 셈 치고 짚어보면 되지 않을까? 진지함 가운데 감초 같이 껴있는 쉬어가는 코너처럼.' 고민은 끝났다. 이 짧은 한 문단을 위해 고민했던 내 시간들에게 뒤늦게나마 애도를 표한다.

킹스맨은 악당이 추진하려 하는 범세계적 음모를 저지한다는, 너무도 뻔한 스토리라인을 그린다. 여기에 소위 말하는 '보틀 테이스트(병맛)'가 더해져, 누군가에게는 흥미를 유발하는 기폭제가 됐다. 팀 포트리스 2의 스파이는 바로 그 병맛의 키워드로 받아들였으면 한다.

'팀 포트리스 2'에 지원형 병과로 등장하는 스파이 캐릭터는 이름도 이름이지만, 정장도 흠 잡을 곳 없이 잘 차려입었다. 사용하는 말투도 정중한 편이다. 녹음된 목소리까지 들어보면 영락없는 젠틀맨이다.

여기까지는 좋았다. 하지만 이 캐릭터를 볼 때 머리부터 본 사람이라면, 이 모든 긍정적인 이미지는 애초에 생기지도 않았으리라. 얼굴에 뒤집어 쓴 그 무언가를 봤을 때, 이미 진한 약 냄새를 포착했어야 했다. 뭐, 그게 아니더라도 실제 플레이를 해보면 정중한 예의와는 몇 광년쯤 떨어진 캐릭터라는 걸 알게 될테지만.

스파이는 '팀 포트리스 2'에서도 독보적인 개성을 가진 간판급 캐릭터라는 평이 많다. 문제는 전반적으로 게임에 능숙한 사람들을 겨냥한 병과라는 점. 스파이의 통통 튀는 매력(?)에 빠져 입문한 초보 유저들이 많다는 건, 이 게임의 유저들 사이에서 공공연하게 돌아다니는 사실이다.

그러다보니 스파이 유저들에 의한 셀프 테러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불안정한 뇌관이나 진배 없다. 같은 게이머의 입장에서, 게임을 잘 못한다고 해서 비난해서는 안 된다는 걸 잘 안다. 하지만 이들이 본의 아닌 삽질을 선사할 때마다 복면부터 수트까지 일도양단으로 찢어발기고 싶은 건 어쩔 수 없는 본능의 영역인 듯하다.



맨인블랙: 에일리언 크라이시스 - MIB: Alien Crisis



007 시리즈와 함께 '영화로 더 유명할 것 같은' 시리즈에 꼽히는 맨인블랙. 아마 에이전트 K, 에이전트 J라는 캐릭터보다 토미 리 존스윌 스미스를 기억하는 사람이 더 많지 않을까.

사실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거지만, 맨인블랙 시리즈의 원작은 1990년대 초반의 만화다. 그때부터 일관되게 이어온 시리즈라서 그런지, 맨인블랙의 인지도는 범접할 수 없는 수준이라고 하겠다. 비밀요원들의 이야기라는 점은 꼭 들어맞는데, 배경은 남다르다. 외계인이나 악마, 변이체와 같은 초자연적 존재들을 대상으로 범지구적인 활동을 벌이기 때문. 그 스케일만큼은 가히 제왕급이라 할 수 있다.

뭐, 원작이 만화든 영화든 간에, 우리에게 중요한 건 게임이다. 당연히 '원작이 아니니까', '게임보다 영화가 더 유명하니까'와 같은 이유로 지레 포기해서는 안 된다. 이 시리즈가 게임으로 존재했음을 하나라도 더 많은 사람에게 알리는 것이 게임기자로서의 사명이니까.

공식적으로 알려진 시리즈 첫 작품은 3인칭 슈팅 게임 '맨 인 블랙(Men in Black, 1997)'이다. 총 4개 타이틀로 정리해볼 수 있으며, 가장 최근 작품이 바로 '맨인블랙: 에일리언 크라이시스'다. 윌 스미스와 토미 리 존스가 열연했던 에이전트 J와 K 대신, 새로운 요원 에이전트 P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음... 최신작의 출시 시기를 살펴보니, 비슷한 시기에 영화 '맨인블랙 3'가 개봉했다고 나와있다. 게다가 그쪽엔 여전히 반가운 얼굴들이 등장한다. 거 참, 마케팅하기에 참 어렵지 않았을까 하는 괜한 걱정이 든다. 사후약방문(死後藥方文)을 한참 넘어선 뒷북이지만.



히트맨 시리즈 Hitman Series



대단원은 역시 익숙한 걸로 매듭지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가 더 유명한 시리즈를 꼽았으니, 게임이 더 유명한 사례를 짚으며 끝내자는 심산이기도 했다. 장담컨대, 007만큼은 아닐 수도 있지만, 코드네임47 역시 '수트' 하면 딱 떠오르는 게임 캐릭터임에 분명하다.

아니, 오히려 게임으로만 영역을 한정짓는다면 47이 좀 더 우세할지도 모르겠다. 개인적으로는 아무리 생각해도 딱 떨어지는 수트 라인보다는 반짝이는 스킨헤드가 더 강렬하게 다가오지만 말이다.

게임 내 설정상 코드네임47이 입고 다니는 검은색 수트는 '맞춤형 핸드메이드'다. 듣기만 해도 맞추는 비용부터 감히 상상할 수도 없을 듯하다. 킹스맨 영화에서도 양복점에서 요원들의 수트를 맞춰주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것보다도 훨씬 비쌀 것 같은 느낌이다. 물론 코드네임47은 돈이 정말, 아주 정말 많으니 결코 걱정해줄 필요는 없다.

아쉽게도, 코드네임47은 수트 외의 중요한 키워드인 '비밀요원'과는 조금 동떨어진 존재다. 그는 살인청부업자이자 히트맨(본래 마피아 세계의 용어로, 특정 대상 제거를 위해 고용 or 양성한 일종의 킬러를 일컬음)이다. 존재의 본질 자체가 합법과는 거리가 먼 '모태범죄자(Natural Born Criminal)'일 수밖에 없는 운명인 셈이다. 게임할 때 잠입 액션을 펼치게 되니, 그걸로 '비밀'이라는 키워드까지는 타협해볼 수 있겠다.

범죄자라고는 하지만, 어떤 부분에서는 정의를 외치는 인간들보다 낫다는 생각도 든다. 대부분의 경우 목표한 인물 외에는 위해를 가하는 일이 없는 탓이다. (물론 내가 게임을 할 땐 보이는대로 쏘고 다녔지만.) 비밀요원 콘텐츠의 액션 장면에서 무고한 시민들이 죽어나가는 걸 너무 자주 본 탓이려나...


비밀요원이라는 존재들에게는 일종의 환상 같은 것이 따라다니곤 한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다뤄지는 요원들의 이야기를 보면서, '어, 그 양복 입고 다니던 남자가 혹시?'라는 엉뚱한 상상을 해본 적도 없지 않다. 그러다보면, 그 환상의 기저에 '수트'가 자리하고 있다는 걸 부정하기 어렵다.

수트가 주는 '품위 있고 멋들어진' 신사로서의 모습. 임무를 위해서라면 사람 목숨쯤 아무렇지 않게 여기는 무뢰배나 다름없는 모습. 영화를 통해 비춰지는 비밀요원의 이미지는 그 두 가지가 반죽되어 빚어지게 마련이다. '현실은 영화와 다르'겠지만.

이제서야 고백하자면, 처음 구상한 기사 콘셉트는 굉장히 단순했다. 킹스맨을 보고 그것과 비슷한 느낌의 게임을 찾아보자는 것. 적지 않은 수의 게이머들이 그랬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나 역시 실제로 머릿속에 이미 떠오른 게임 몇 개가 있었다. 하지만 뻔한 게임들만 나열하면 심심하니, 가급적 다양한 작품들을 찾아보려 시도했다. 키워드 검색만 몇 시간을 했는지 당최 가늠이 되지 않을 정도다.

수트를 검색하니 최첨단 나노슈트를 입은 캐릭터들이 튀어나오고, 잠입 액션이나 스파이 등을 검색하니 '씨프'나 '어쌔신 크리드' 같은 게임들이 나온다. 애초에 걔네가 빠진 이유는 '수트'가 없기 때문인데! 어쩌겠나. 프로그래밍 집합체 따위가 생각이란 것을 할 수 있을리 없으니... 오죽했으면 '히트맨 비슷한 게임'이라고까지 검색해봤을까.

본의 아니게 너무 커져버린 이 프로젝트(?)를 무사히 끝낼 수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이 거창한 듯 거창하지 않은 기획의 단초를 제공해준 '킹스맨'이라는 단어의 사전적 의미와 그에 대한 짧은 감상을 적으며 글을 마치고자 한다.


* 킹스맨 (Kingsman) : 영국 육군 랭카스터 공작 연대(The Duke of Lancaster's Regiment)에 소속된 최하위 계급(사병과 동급이라고 한다).

2시간 동안 난무했던 비범한 액션을 다 보고왔더니 '최하위 계급'이란다. 딱히 뭔가 거창한 걸 기대했던 건 아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이상하게 허무하다. 뭐, 그래도 설마설마 했던 '왕의 남자' 이런 건 아니라서 다행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