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게임 하나를 소개하려한다. 이 게임과의 첫 만남은 조금 기이했다. 당시 게임의 메카, 용산은 돈을 뺏는 형들로 가득 찬 무서운 동네 였기 때문에 천천히 진열장을 둘러본다는 것은 자살 행위나 마찬가지인 곳이었다. 그런 곳에서 진열장에 걸린 패키지 박스 하나가 내 발길을 멈췄다.

범선을 배경으로 캐릭터가 그려진 '대항해시대2'박스였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내 손에 들려있었다. 적지 않은 돈이 었는데 아무 고민없이 구입했던 것이다. 5.25인치 플로피 디스켓 4장과 암호표 그리고 비스코 상품 카탈로그가 전부였던 이 패키지가 내 인생에 커다란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것을 그때는 알지 못 했다.

'대항해시대2'는 럼주를 마시며 거친 바다와 싸우는 바다 사나이에 대한 동경을 만들어냈다. 이 때의 감정이 장난 반 진심 반으로 해군에 지원하는 계기가 됐다. 전역 후 회사를 다니다가 '대항해시대2'가 들려준 바다 사나이의 이야기를 잊지 못해 해양경찰이 됐다. 그리고 나서도 '대항해시대2'가 나에게 가르친 게임의 매력에서 벗어나지 못해 게임 기자가 됐다. 정말 까도 까도 매력이 샘솟는 게임이다.

어쩌면 대기업에서 월급을 충실히 모으거나 좋은 신랑감인 공무원으로서의 삶을 살았을지도 모른다. '대항해시대2'가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마 '대항해시대2'를 하지 않았다면 생기지 않았을 일이다. 절대로.그래서 엄마가 게임하지 말라고 하는 거다.

내 인생에 적지않은 영향을 주고, 지금의 나를 있게 한 '대항해시대2'. 이 게임을 추억하는 기사를 쓰기위해 다시 플레이했을 때 스크린 샷이나 영상을 찍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대항해시대2'는 나를 온전히 게이머로 돌아가게 했다.

▲ 이 화면을 기억하고 있다면...



대항해시대2 -"상상의 날개를 펼쳐 드라마를 쓰는 내가 바다 사나이."

'대항해시대2'는 '코에이'의 작품이다. 20대 후반 30대 초중반 게이머에게는 익숙할 '光栄'. 원래 코에이는 '단지처의 유혹'과 '나이트 라이프' 등 성인용 소프트 웨어를 만들던 회사로 '삼국지', '신장의 야망' 그리고 '대항해시대' 시리즈로 황금기를 열었다.

코에이의 황금기를 연 이 작품은 배를 타고 전 세계를 탐험하며 교역과 전투를 하는 게임이다. 어렸을 때는 메르카토르 도법을 코에이에서 만든 줄 알았을 정도로 시대적 배경이랑 어울리는 드라마를 게임 속에 잘 녹여냈다.

또한 엔딩을 본 후에도 정처 없이 항해를 계속 즐길 수 있어 놀라운 자유도로 찬사를 받은 '루나틱돈3'보다 더 높은 자유도를 선사한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끝 없는 수평선과 맞닿아 있는 끝 없는 진행이야 말로 바다의 드라마, '대항해시대'가 궁극적으로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닐까.

플레이할 수 있는 캐릭터로 1편의 주인공 레온의 아들, 조안 페레로를 비롯해 총 6명이 등장한다. 각자 바다로 나갈 수밖에 없는 사연을 지닌 인물들로, 배경 설정이 그 시대에 있을 법한 이야기로 채워져 있다. 개성 강한 배경 설정 덕분에 새로운 캐릭터로 플레이하면 새로운 기분이 들기도 한다.

무엇보다 '대항해시대2'의 이야기 전달방법은 노골적이지 않다. "우리가 디자인한 이야기는 이런 이야기야. 반드시 당신들은 이 길로 걸어야만 해."라는 당시의 통념을 박살내어 플레이어로 하여금 머리속에 항해일지를 쓰게 만들었다. 물론 정해진 스토리 라인이 존재하지만, 자신만의 드라마를 만들 수 있는 토대를 제공한 것이다.

특히 피에트로 콘티의 배경 이야기는 눈물 없이 볼 수 없다. 빚을 갚기 위해 항해에 나선 콘티의 뒷 모습에서 대출금을 갚기 위해 일하는 우리네 뒷 모습이 겹쳐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다.

▲ 저 땐 저랬어...


6명의 캐릭터는 서로 유기적으로 영향을 준다. 완전히 독립된 개체처럼 보이지만, 각자의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과정에서 서로를 만나며 크거나 혹은 작거나 영향을 끼친다. 새로운 캐릭터를 플레이 할 때 괜히 반가운 느낌은 덤.

플레이할 수 있는 캐릭터뿐만 아니라 '파이널 판타지'시리즈의 시드 같은 감초, 롯코 알렘켈이나 대항해시대 시리즈 최고 존엄 하이레딘 등 매력적인 캐릭터들이 무수하게 등장해 바다를 수 놓는다. 매력 터지는 캐릭터들이 바다 위에서 저마다의 드라마를 써가는데 어찌 즐겁지 않을 수가 있으랴.

역사적으로 대항해시대는 15세기부터 17세기, 약 200년간을 지칭하는 말로 인류가 바다 길을 열기 위해 끊임없이 도전하던 시기로서의 의의를 가진다. '대항해시대2'는 플레이어에게 그 시대 뱃사람들이 가졌을 도전 정신과 성취 욕구를 그대로 전달한다. 바르톨로메우 디아스와 바스코 다 가마가 폭풍을 뚫고 희망봉을 발견했을 때의 희열을 게이머도 똑같이 느끼는 것이다.

▲ 일기토!


해군 군가 중 '상륙하는 하룻밤에 빈털터리'라는 대목이 있다. 럼주를 들이켜며 왁자지껄 노래를 불러대는 '대항해시대2'의 술집 모습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시대가 변해도 뱃사람들이 느끼는 감성을 조악한 그래픽으로도 훌륭하게 표현했다.지금 글을 읽고 있는 독자들의 심장도 진하게 풍기는 남자의 향기 덕에 쿵쾅 거리고 있을 것이 틀림없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뱃사람들은 미신을 많이 믿는 경향이 있다. 여자를 태우면 부정 탄다거나, 밥그릇이나 생선구이는 뒤집지 않는다는 것 등은 항해술이 발달한 지금도 지켜지고 있다. 게임의 배경이 되는 시절은 오죽했을까?. '대항해시대2'는 항구내 NPC와의 대화와 선수상, 십일조 등의 요소로 당시 시대상을 잘 반영하고 있다.

사실, 대항해시대의 시대적 배경은 노예무역이나 식민지 경영 등 어두운 면이 없지 않지만, 게임은 바다에 대한 로망, 즉 교역, 전투, 탐험에 초점을 맞춰 흥미로운 부분만을 뽑아 재미요소를 만들었다. 이런 왜곡은 코에이의 장기이기도 한데 적절한 왜곡과 강조를 통해 몰입을 유도하고 있다.

▲ 수많은 오프닝을 봐왔지만, 나에게는 이게 최고의 오프닝




사회과 부도 옆에 펴놓고-"엄마 이거 공부하는 거라니까?"

코에이가 의도했던 의도하지 않았든 간에 '대항해시대2'는 지식 전달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국민학생이 메르카토르 도법의 오차와 토마스 찰머스의 "무한이라는 장엄한 개념 앞에서 변동이 심한 시간이라는 개념은 작아질 수밖에 없다."라는 말을 어떻게 알았겠는가.

학교에서 판치기(동전을 책 위에 올려놓고 책을 손바닥으로 쳐서 동전을 뒤집는 놀이) 용도로 밖에 사용하지 않았던 사회과 부도를 수도 없이 뒤적거리면서 나 자신도 모르게 지식을 체득하게 됐다.

보물과 유적이 등장하는 위치를 빼곡히 메모해둔 사회과 부도를 옆에 펼쳐놓고 플레이한 덕분에 밤에 몰래 게임을 하다가 부모님께 걸려도 공부하고 있었다고 둘러댈 수도 있었다. 그때는 PC통신에 접속해 공략이라도 볼라치면 어마어마한 후폭풍을 감당해야 됐기 때문에 사회과 부도가 최고의 공략집이자 교과서 였다.

▲ 세계지도를 그대 머릿속에


그뿐만 아니라 게임에 등장하는 항구 도시의 표현을 통해 각 지역의 식생과 문화 스키마도 자연스레 얻을 수 있었다. 특히 게임 내 최고 무기인 '성기사의 검'을 구입할 수 있었던 통북투는 아직까지 뇌리에 각인되어 '파나마 운하'와 함께 가보고 싶은 도시로 생각하고 있을 정도다.

2012년 이슬람 무장세력 안사르딘이 퉁북투의 유적, 젠네 모스크를 파괴하고 있다는 소식에 경악을 금치 못했고, 이스탄불-아테네 무역루트와 금 무역 루트를 통해 그 당시 정세를 파악할 수 있었으며 향료 무역을 통해 세계사의 흐름을 알 수 있었다. '대항해시대2'를 하지 않았다면 절대 몰랐을 일이다.

'대항해시대2'는 교과서에는 없는 아프리카 서안의 폭풍과 남아메리카 동안의 조류 지식 그리고 조선 지식도 담고 있다. 대놓고 지식을 전달하지는 않지만, 플레이어가 스스로 궁금증을 느껴서 찾아보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게임 내 최강의 함선 '쉽'에 대해 알아보고자 대학교 도서관을 찾기도 했고, 나오와 카락을 구분하기 위해 잠시나마 포르투칼어와 스페인어를 공부하기도 했다.

▲ 항구마다 분위기가 달랐다.


누가 시켜서한 게 아니다. 지적 호기심을 채우기 위해 스스로 찾아본 거다. '스타크래프트'가 한참 유행할 때 한 대학에서 '스타크래프트' 캠페인 대사를 실용 영어 교재로 사용한 것 처럼 재미를 느끼는 과정에서 지식을 얻은 것이다.

이는 요즘 나오는 교육용 게임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소위 말하는 교육용 게임은 지식 전달에 초점을 너무 맞춘 나머지 게임 본연의 재미를 잃어서 게임인지 게임의 탈을 쓴 교과서인지 헷갈리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 교육용 게임에 정부도 관심을 두고 있는 이때 '대항해시대'처럼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는 요소 발굴이 필요하다. 고전이 괜히 고전이 아니다라는 말이 와닿는 부분이다.

▲ 블랙잭도 배울 수 있었고 말이야... 초반엔 교역보다 블랙잭 수익이 더 좋을 정도.




얼그레이 한잔과 time to sail-"영국 귀족이 삶이 이랬을까"

"manners maketh man" 영화 킹스맨에 나오는 대사다. maketh는 잘 사용하지 않는 고어(古語)로, 우리로 치면 선비 정신에 근거해 설교하는 느낌에 가깝다. 점잖고 절제된 어감이다.

'대항해시대2'를 요즘 게임에 비교하면 maketh와 비슷하다. 개인적으로 최신 게임들은 속도감을 중시해 차 한잔 마시며 여유롭게 플레이하기 힘들다고 생각한다. 차를 키보드에 쏟아도 마우스를 정신없이 움직여야만 하니까. 느긋하게 게임 속 드라마에 몰입할 시간적 여유조차 허락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하지만 '대항해시대'는 여유롭게 배경음악을 들으며 차 한잔을 음미할 수 있는 게임이다. 그러고 있으면 마치 영국 귀족이 된 듯한 착각에 빠질 정도다. 그만큼 느긋하고 여유롭다. 칸노요코가 참여한 OST는 지금 들어도 감동 그자체다. 저작권 문제로 기사에서 소개하지 못하지만, 한 번 찾아 들어보길 권한다.

음악을 들으며 제독이 된 것처럼 혼자 상상의 나래도 펼쳐보기도 하고, 식량과 물이 떨어진 상태에서 괴혈병까지 돌았을 때는 잠시 게임을 멈추고 고민해보기도 한다. 일종의 현실 RPG가 가능하다. 게이머 본인의 상상력을 발휘해 게임을 더욱 다채롭게 만들 여지를 제공한다는 점이 어쩌면 '대항해시대2'의 최고 장점이 아닐까?

▲ 지금들어도 세련된 배경 음악




역사로 남을 추억 -"너 같은 사람 다시는 못 만날 거야."

'대항해시대2'를 즐겁게 했던 이유는 바다 사나이들이 펼치는 드라마에 자신의 상상력을 덧댄 이야기가 더해졌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계속 게임을 하며 시대상에 맞춰 자신만의 향해일지를 써내려간다는 것 자체가 큰 즐거움이자 재미였던 것 같다.

전열함대의 기함에서 지휘하는 제독의 모습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꼬꼬마의 가슴 속에는 나름의 드라마가 큼직이 각인되어 아직까지 잊지 못하는 추억으로 자리잡았다.

15년 가까이 기다린 정식 넘버링 시리즈를 앞에 두고도 '대항해시대2'가 남긴 추억의 옷자락을 놓지 못하고 있다. 마치 좋아했던 친구가 애인이 생겨 홧김에 아무나 사귀고 있지만, 여전히 마음은 그 사람을 항해 있는 것과 비슷하겠다고 할 수 있겠다.

현재 만나고 있는 사람이 더 예쁘고, 더 조건이 좋을지언정 좋아했던 사람과 함께한 추억을 아름답게 품고 있는 것 마냥 '대항해시대2'에 대한 추억은 역사로 계속 기억될 것 같다. 이 게임이 없었다면 지금의 나는 없었을 테니까 말이다.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 "이 게임을 하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쯤 어떻게 살고 있을까?" 이정도의 질문을 던질 게임이라면 충분히 인생 게임이라 불릴만한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다.

▲ 나의 집은 배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