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살다 보면 구매해도 돈이 아깝지 않은 것들을 만나게 된다.

개인적인 기준으로는 한 방울만 묻히면 죽은 사람도 벌떡 일으켜 탭댄스를 추게 하는 '알보칠', 출시된 지 1년이 좀 넘은 '갤럭시 노트', 편의점에서 파는 천 원짜리 커피 등이 해당한다. 기준은 간단하다. 일단 싸거나, 아니면 가격 대비 성능이 우수하거나.

사과 박스에 만 원짜리를 차곡차곡 쌓아놓고 사는 갑부가 아니기에, 버릇처럼 가성비부터 따지게 되었던 것 같다. 비단 생필품뿐만 아니라 다른 데에서도 그랬다. (그렇게 아낀 돈이 주말에 여자친구 만나는 데 몽땅 나간다는 게 문제지만...)

▲ 기자를 웃게 해주는 가성비 제품들.


게임도 마찬가지다. 사 놓고 몇 판 해본 뒤, 담배 한 대 피면서 순간의 욕망을 절제하지 못한 자신을 반성하게 하는 게임이 있고, 벅차오르는 감동을 주체 못하여 개발자를 찾아가 볼에 뽀뽀라도 해주고 싶은 게임도 있다.

'히어로즈 오브 마이트 앤 매직3(이하 HOMM3)'는 후자에 해당한다. 아니, 그 정도 비유도 적합하지 않다. 앞서 가성비를 설명하는 데 투자한 세 문단은 이 게임의 존재 이유 그 자체니까.



'HOMM3'는 굳이 많은 수식어가 필요 없는 작품이다. 한때 국내에서도 대중적인 인기를 끈 '문명' 시리즈, 영국에서는 이혼 사유로도 적용되는 '풋볼 매니저' 시리즈와 함께 '세계 3대 악마의 게임'으로 통하는 작품인데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점심시간인데 한 판 해볼까?'라는 가벼운 마음으로 이 게임을 실행했다가는 그날 업무고 뭐고 다 제치는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게임플레이 하나하나가 강력한 중독성이라는 시너지로 귀결되지만, 그 사실을 깨우칠 땐 이미 늦었다. 전체적인 호흡, 그러니까 한 판에 걸리는 시간이 상당히 큰 작품임에도 전혀 지루함을 느낄 수 없다는 것이 'HOMM3'의 진정한 무서움이다. 몰입도가 이렇게까지 높다 보니 가성비가 나쁠 수 없다.

기자는 'HOMM3'를 상당히 늦게 만난 편이다. 2001년에 처음 만났으니 출시된 지 약 2년이 지나고 나서다. 이전에도 그런 게임이 있다는 건 알았지만, 굳이 찾아서 플레이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뭐가 사람이고 뭐가 몬스터인지도 모를 만큼 서양물 가득 머금은 그래픽이 첫째 이유였다. 게임플레이도 뭔가 복잡해 보였다. 스크린 샷이 내게 말했다. '흐...흥! 나 진입 장벽 높거든?'이라고.

'모토레이서2'는 온 세상의 상쾌함을 집대성하여 뿜어냈고, '악튜러스'는 묵직한 줄거리 속 깨알 같은 유머로 방과 후 하굣길을 즐겁게 만들어주던 때였다. 재밌는 게임이 그렇게 많은데, 굳이 소문만 듣고 취향에 맞지도 않는 작품을 선택할 이유는 없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HOMM3'에게 죄송할 정도로.

▲ "죄송합니다. 일찍이 재미를 몰라뵈어서 죄송합니다."


중학교 3학년 때였던 것 같다. 인문계 고등학교 갈까 말까 한 성적인데도 허구한 날 게임만 붙드는 친구가 하나 있었다. 나도 다를 게 없어서 맨날 그 친구 집에 놀러 가 게임을 하고 그랬다. 친구의 모니터 속엔 항상 'HOMM3'가 있었다. 그 광경을 보고 '이 자식, 뭐 이런 게임을 하고 있냐'라고 생각하던 찰나, 그 친구가 마우스를 쥐여주면서 했던 말이 아직도 기억난다.

"태학아, 이거 해봐. 그냥 이동만 해도 재밌어."

친구 말은 사실이었다. 지금껏 거부해왔던 자신이 원망스러울 정도로 'HOMM3'의 재미는 가히 충격적이었다. 그저 말을 이동시키는 것뿐임에도 '모험을 하고 있다.'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고, 게임 내 텍스트를 읽는 게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었다. '얼씨구, 기자가 기사 쓰면서 흥분하고 있네?'라고 생각할 수 있겠다. 하지만 'HOMM3'를 즐겨 했던 유저라면, 기자의 첫 만남에 조금은 공감하리라 생각한다.

▲ 화살표 한칸 한칸마다 모험이 깃들어 있었다.


그냥 그랬던 작품이 3편 접어들면서 몰입도가 확 늘었던 것은 아니었다. 'HOMM' 시리즈는 1편이나 2편 모두 뛰어난 몰입도와 재미를 갖고 있었다. 3편으로 접어들면서 국내 유저들의 폭발적인 호응을 받게 되었다는 게 정확하다. 개인적으로는 시리즈 최초로 정식 한글화가 이루어진 것, 윈도우 전용으로 출시되어 대중성을 확보했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라고 본다.

한글화된 'HOMM3'는 전작들과는 비교가 어려울 정도로 강력한 몰입도를 선보였다. 오브젝트 하나하나에 새겨진 글귀를 읽는 재미가 가득했다. 플레이어의 움직임은 그 자체로 서사가 되었고 이 덕분에 개발사에서 마련한 메인 캠페인이 아닌, 임의 설정 맵을 플레이하더라도 모험의 느낌이 났다. 이는 타 게임에서 보기 어려운 특징 중 하나다.

'HOMM3'는 '아마겟돈 블레이드'와 '쉐도우 오브 데스'라는 이름으로 두 개의 확장팩을 출시했지만, 원작만으로도 충분한 볼륨을 갖추고 있었다. 오리지널 'HOMM3'에는 총 8개의 종족이 등장하는데, 각 종족의 테크트리 및 유닛 구성이 뚜렷하게 구분되었다. 이 덕분에 장시간 플레이하더라도 별다른 지루함을 느낄 수 없었다.

게임의 첫인상은 보통 그래픽이 좌우하지만, 'HOMM3'는 듣는 순간 플레이어의 엄지손가락을 강제로 올려버리는 BGM이 진짜 무기였다. 기사를 쓰면서 오랜만에 몇 곡 찾아봤는데, 그중 한 곡이 기자의 노스텔지아를 자극했다. 사내다운 기상으로 턱턱 걸어가면서도 감수성을 놓치지 않은 '스트롱홀드'의 테마.

여담으로 'HOMM3' 이후 등장한 시리즈는 모두 팬들의 호불호가 갈렸지만, BGM에 있어서만큼은 항상 높은 완성도를 보여줬다. 노장의 마지막 자존심이라는 듯.

[ ▲ '히어로즈 오브 마이트 앤 매직3 - 스트롱홀드 테마 ]


'HOMM3'의 게임플레이는 크게 세 갈래로 구분된다. 게임 전체를 관망하는 '전장', 적 영웅과 직접 부딪히거나 중립 몬스터를 만날 때 나오는 '전투', 아군의 보급소이자 병참 기지, 그리고 최후의 보루인 '도시'.

맵을 오브젝트로 꾸역꾸역 채우는 것은 'HOMM' 시리즈의 전통이지만, 3편으로 들어서며 이 부분이 극대화됐다. 당시 버전은 800x600 해상도가 최대였기에 현세대 게이머의 눈에는 조금 투박해 보일 수 있으나, 플레이어로 하여금 '할 게 많다'라고 인식하게 하는 데는 부족함이 없었다.

플레이어는 한 종족의 운명을 책임지는 총사령관으로서 임무를 수행하게 된다. 군대를 양성해 주변 산적들을 처리하고 광산에서는 금을, 벌목지에서는 목재를 지원받을 수 있다. 병력을 양성하는 데 사용되는 금은 특히 중요했다. 게임 후반쯤 되면 요새에서 자체 생산하는 자원으로도 수비가 가능했지만, 초중반에는 이러한 자원 수급에 총력을 기울여야 살아남을 수 있었다.

전장의 오브젝트들은 각자 쓰임새가 있다.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언젠가 꼭 사용해야 할 때가 왔다. 어떤 선택이 더 나은 미래를 가져다주는지 선택하는 건 플레이어의 몫이며, 이러한 고민은 게임플레이 내내 끊임없이 만나게 된다. 지금이 적 도시를 쳐야 될 때인지, 아니면 포탈을 타고 날아와 우리 도시를 방어해야 하는지부터 시작해, 도망치는 산적들을 추격할지 내버려둘지와 같은 사소한 것까지 모두 결정해야 한다. 이 모든 요소가 어우러져 'HOMM3'를 완성했다.



'HOMM3' 특유의 몰입도는 어느 한 가지 이유로 설명하기 어렵다. 영웅 이동 노선에서부터 강조되는 서사와 전략, 각 유닛의 뚜렷한 특성에 기인하는 전술, 열심히 자원을 모아 최종 테크트리 건물을 올릴 때 느끼는 뿌듯함 등, 몰입의 이유로 댈 만한 요소는 수없이 많다. 하지만 굳이 하나만 꼽으라면 기자는 'HOMM3' 특유의 그래픽을 선택하겠다.

당시 기준으로도 'HOMM3'의 그래픽이 뛰어난 것은 아니었다. 유닛들의 움직임은 나무토막처럼 뻣뻣했고, 도트가 튀는 전장 그래픽도 솔직히 좀 투박했다. 그런데 이러한 요소들이 한데 어우러지면서 오히려 독창적인 스타일을 만들었다고 본다. 화면이 빼곡한데도 가독성이 뛰어났던 것은, 오브젝트 디자인도 한 몫 했지만 대비가 뚜렷한 원색 위주의 색감 구성이 가장 큰 이유였다. 이후 등장한 4편의 화면은 'HOMM3'과 비교하면 오히려 다운그레이드라고 느껴질 정도로 심심했다. 파스텔 톤의 색감이 첫째 이유였다. 또, 탑뷰와 쿼터뷰 시점은 각자의 특징이 있지만, 개발팀이 이러한 요소들을 간과한 것으로 보였다.

▲ 어딘가 심심했던 'HOMM4'


'뉴 월드 컴퓨팅(New World Computing)'은 '마이트 앤 매직' 시리즈와 'HOMM' 두 프랜차이즈만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쌓은 게임 개발사였다. 이들은 'HOMM3' 출시와 함께 최전성기를 맞이했지만, 4편을 시장에 내면서 급속도로 몰락했다. 모회사 '3DO'가 재정난에 빠지면서 급하게 게임을 출시한 게 원인이었다.

사실 'HOMM4'가 재미없는 작품도 아니었고, 전작에서 발전한 부분도 꽤 있었다. 그런데 게임 플레이 내내 어딘가 허전한 느낌이 들었다. '허전함'은 그간 출시됐던 'HOMM' 시리즈에서 찾아볼 수 없었던, 그야말로 신성 모독에 가까운 치명적인 단점이었다.

기자는 '뉴 월드 컴퓨팅'이 사라지면서, 다시는 'HOMM3' 스타일의 게임을 보지 못할 것이라 생각한다. 핵심 개발자 한 명만 퇴사했을 뿐인데도 게임 색이 확 바뀌는 걸 너무나 많이 봐왔으니까. 유비소프트로 판권이 넘어가면서 러시아 개발사인 '나이발 인터랙티브'가 'HOMM5'를 만들기는 했다. 그것도 꽤 잘 만들었다. 헌데 3편의 그 맛은 아니었다.

▲ 'HOMM5'는 제법 좋은 작품이었지만, 3편의 몰입도를 제공하지는 못했다.


기자가 '뉴 월드 컴퓨팅'의 몰락을 아쉬워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경쟁작(?) 개발자 '시드 마이어'는 문명3를 출시할 때 "게임의 재미 요소를 모두 넣었다."라고 언급한 바 있다. 그는 플레이어에게 끊임없이 선택권을 제공했고, 그로 말미암은 변화가 게임 내에서 직접 드러나게 했다. 그게 시드 마이어가 생각하는 '게임에서 가장 매력적인 요소'였다.

'뉴 월드 컴퓨팅'도 이를 전략 시뮬레이션으로 풀어낼 줄 아는, 정말 몇 안 되는 개발사 중 하나였다. 문명과는 표현 방식만 달랐을 뿐, 'HOMM3'가 문명 시리즈보다 부족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턴제 전략 시뮬레이션 초보자에게는 오히려 장점이 더 많다는 것이 개인적인 생각이다.

당시 이런 능력을 갖춘 개발사는 굉장히 드물었고, 지금에 와서도 마찬가지다. 역사에 이름을 새겼던 장인의 뜻하지 않은 은퇴 소식은, 언제나 아쉬울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