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적, 남들 다 있다는 플레이스테이션2나 드림캐스트 같은 콘솔 게임기와는 거리가 멀었던 나는 당시 막 런칭되어 코어 게이머들 사이에서 입소문을 타고 퍼져나가고 있던 '스팀'을 통해 게임을 즐기곤 했다.

밸브 코퍼레이션의 서비스, '스팀'이 정식으로 자리잡기 전부터 '카운터 스트라이크'나 '데이 오브 디피트' 같은 모드 게임을 즐기던 기자는 어느 날 '스팀'에 접속해 가지고 있던 게임 코드들을 모두 등록했다. 아마도 '하프라이프' 전체 게임을 포함하는 코드였겠지만, 당시까지 나에게 '하프라이프'의 인식은 단지 모드를 돌아가게 해주는 시동장치나 다름 없었다.

용돈이 부족했던 학생인 만큼 인터넷에서 유행하는 다양한 싱글, 멀티 게임 모드들을 찾아 플레이했고, 이 모드들은 언제까지고 무한할 것 같았다. 하지만 '데이 오브 디피트'도, '카운터 스트라이크'도, '네추럴 셀렉션'도 손에 잡히지 않던 어느날, 나는 스팀 라이브러리에 등록되어 있는 '하프라이프'를 실행시키고 말았다.

그때 깨달았어야 했다. 이 게임이 내 삶을 얼마나 크게 흔들어 놓을지 말이다.



자네, 처음 보는 얼굴이군? - 이전에 없던 FPS, '하프라이프'


훈민정음을 만든 세종대왕, 그리고 이를 한글로 재탄생시킨 주시경이 있듯, 모든 것에는 창조자가 있고 이를 정립한 이가 있다. 때론 한 사람이 막강한 능력을 발휘해 모든 역할을 맡아 처음부터 완전체로 만들어내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의 물건들은 창조자부터 다양한 사람들을 거쳐 발전해왔다.

매일 감사드리는 두 국문학 먼치킨 조상님

그렇다면 FPS라는 게임 장르를 이야기 해보자. 많은 이들은 FPS의 창조자는 '울펜슈타인3D'라고 한다. 물론 '울펜슈타인3D'가 1인칭을 사용한 최초의 게임은 아니며, 또 처음으로 총을 쏜 게임도 아니다. 하지만 그 게임이 최초일 수 있는 것은, 그런 다양한 요소가 FPS라는 게임 장르 안에서 혼합되어 발휘되는 가능성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이전까지의 FPS들은 빠른 움직임과 순간적인 컨트롤에 의존한 속도감 있는 플레이를 중시했다. 하지만 이는 그만큼 필드를 일정한 규칙을 가진 놀이터로서만 기능하게 했고, 때문에 굉장히 비현실적인 장소가 많았다. 우주선의 조종실인데 아무리 보아도 조종과 관련된 물건은 직각으로 세워진 유리벽 뿐이거나 하는 식이었다.

아! 전기톱! 훌륭한 스토리텔링 수단이지!

때문에 이러한 구조에서는 캐릭터나 무기 등을 제외한 그 어떤 설정도 크게 필요하지 않았고, 스토리가 없어도 유저는 맵을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적을 학살하기 바빴다. 이 당시 존 카맥이 했다는 "게임에 있어 스토리는 포르노의 그것과 같다. 있어야 하긴 하지만, 그리 중요하진 않다"는 발언 역시 이 시기에는 유효했다. 왜냐하면, 그 당시 FPS 에는 스토리를 전달할 수 있는 방법도 없었고, 또 개발자들은 스토리를 전달하고자 하는 의지도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FPS는 '몰입감'이라는 막대한 장점을 처음부터 내포하고 있었고, 이를 스토리텔링의 도구로 삼고자 한 이들에 의해 최근들어 FPS는 오히려 가장 영화같은 스토리텔링을 선사하는 게임 장르로 탈바꿈했다. 그 대표주자가 바로 '콜오브듀티'와 '헤일로' 다.

너랑 나는 형제!

더불어 단순히 총을 쏘는 슈팅 뿐만 아니라 맵 상의 다양한 오브젝트와 상호작용하고, 또 기존의 어드벤처 장르의 장점을 답습, 3차원으로 이루어진 입체 퍼즐을 풀어나가는 방식의 FPS들도 속속 등장했다. 밸브의 '포탈' 시리즈가 그 대표격이다.

그리고 이러한 두가지 FPS의 시작점에 바로 '하프라이프'가 있었다. '하프라이프'는 롤러코스터식 동선에 각종 지형 퍼즐을 도입한 레벨 디자인으로 많은 이들을 열광케 했고, 그러면서도 FPS의 기본인 슈팅 역시 놓치지 않았다. 간단히 말해, 지금의 슈팅 게임에서 '당연히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다양한 요소들이 이 게임에서 처음 도입되었다.

It's Party Time!

그리고 이 기사는 FPS라는 장르를 재정립해 완성해 낸, 레일에 놓인 열차처럼 정해진 코스를 따라가는 FPS의 아버지인 '하프라이프' 시리즈에 대한 찬사이자, 기억의 재조명이다. 3편이 나오지 않는 이유는 모르겠지만, 왜 1편이 전설이 되었는지는 알 수 있지 않겠는가?



오늘은 바쁜 날이야 고든! - 침묵의 스토리텔링, 그 묘한 매력


'하프라이프'는 블랙 메사를 관통하는 모노레일 열차에서 시작한다. 이 모노레일 장면은 조용하고 잔잔하기 그지없는 장면이지만, 그 당시 플레이했던 그 어느 게임보다 깊게 기억에 남는 도입부였다. 모노레일을 타고 블랙 메사를 돌고 있으면, 간간히 들려오는 안내 방송에 하나씩 귀기울이게 되고, 또 창 밖으로 비춰지는 흥미로운 일들을 구경할 수 있었다.

왠지 쓸쓸하다

일단 게임을 시작하면 마치 학교에 처음 입학한 아이를 대하듯 뻔한 구조의 튜토리얼을 거치거나, 혹은 그런 것도 없이 달랑 무기 하나만 쥐어주고 허허벌판에 떨어뜨려 놓는 그 당시 다른 게임의 도입부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그러니까, '뻔뻔'했다. 이 도입부는 마치, '당신은 원래 여기서 일하는 과학자 고든 프리맨이고, 평상시처럼 일터로 가고 있다. 모든 것이 익숙하고, 그다지 새로울게 없지만, 뭔가 심상치 않다. 그렇지 않아 고든?'하고 나에게 자연스레 말을 건네는 직장 동료 같았다.

평화로운 일상, 아무런 특별할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하루인데도 플레이 하는 나는 긴장을 놓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이건 이 게임의 시작에 불과하니까. 그러니까, 분명 무슨 일인가 일어날 것이란건 짐작하고 있다. 하지만 그게 무엇인지는 짐작조차 가지 않는다.

평화로운 블랙 메사의 하루

사전 정보가 없는 나는 궁금하다. 이 연구소는 뭐하는 곳이지? 좀비라도 튀어나올까? 아니면 단순한 산업재해? 그리고 그 의문이 절정에 달할 즈음, 나, '고든 프리맨'이 참여한 실험이 어딘가 잘못 되버리고, 연구소에는 헬게이트가 열린다. 심장이 뛴다. 이 긴박감, 장황한 대사도, 치밀하게 짜여진 영상도 없는 게임에서 가능한 것이란 말인가?

'하프라이프'하면 떠오르는 것 중 하나는 흥미로운 세계관과 스토리다. 하지만 재미있는 점은, 우리의 주인공 '고든 프리맨'은 아무런 대사도 하지 않으며, 또 게임 내에서 텍스트, 혹은 오디오 등 그 어떤 방식의 별도 기록도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이다. 이 게임에서의 서사, 그리고 그 전달은 굉장히 간단한, 적나라하게 말하면 별거 없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거 산재처리 되나요?

하지만, 이러한 세세한 서사 전달이 없음에도 플레이어가 이루어나가는 게임이 전체로 보았을 때 큰 서사의 구조를 띄고 있음을 발견할 때, 큰 놀라움이 다가온다. 쉽게 말하자면, '하프라이프'를 플레이하며 유저는 자신이 조금 전에 했던 행동의 결과들을 시시때때로 마주친다.

길을 막고 있던 거대 크라켄을 죽여서 길을 열었지만, 그것이 뜻하지 않게 다른 결과를 초래하기도 하며, 혹은 반대로 어떤 선의의 행동이 길을 막아 진행 방향을 바꾸게도 한다. 또 종국에는 별 생각없이 쏘아올린 로켓이 지구 멸망의 단초를 제공하기도 한다. 이렇게, 유저는 자기자신이 만들어내는 인과관계와 서사를 직접 목격하게 되며, 어떻게 이야기가 흘러가게 되는지 누구보다 잘 알게 된다.

아저씨, 저를 아세요?

이는 게임 내내 등장하는 의문의 인물 'G맨' 같은 캐릭터와 결합해 하나의 신비주의를 만들어 냈고, 게임 내에서 직접적으로 제시되는 단서가 별로 없음에도 많은 관심을 끌었다. 게임이 출시된지 한참이 지났음에도 스토리와 설정을 정리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이는 그전까지의 FPS들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조금 늦었군요, 고든 프리맨 - 블랙 메사라는 이름의 미로


'하프라이프'에서 처음 사건이 발생하고 어느정도 게임을 진행할 때 까지는, 게임을 하고있던 기자 역시 그저 단순한 총쏘기 게임 정도로 생각했다. 하지만 첫 난관에 봉착하자 잘못 생각했다는걸 깨달았다. 물로 가득 찬 방에 둥둥 떠다니는 박스들과, 그 물에 잠겨 막대한 양의 전기를 뿜어내는 잘려나간 전기선, 그리고 내 손에 쥐어진 것은 한자루 권총과 쇠지레-일명 빠루-뿐이었다.

다른건 필요없다

이 게임에서 플레이어가 상대해야 하는 적은 단지 고든 프리맨에게 총부리를 겨누고 이빨을 들이대는 몬스터들 뿐만이 아니었다. 블랙 메사라는 연구소 전체가 고든의 생존을 위협했다. 곳곳에 배치된 절단 레이저와 함정처럼 숨어있는 헤드크랩, 올라타려고 하면 추락해 박살이 나는 엘리베이터, 그리고 연구소 앞 거대한 호수에 왜 있는지 모를 거대한 바다괴수까지...

순조롭게 진행하다가도 더이상 앞으로 나갈 수 없는, 마치 막혀있는 것 같은 지형도 많았고 그 앞에서 이건 버그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며 쪼그려 있기도 했다. 하지만 항상 모든 맵에는 해답이 있었다. 그런 맵 퍼즐은 먼저 문제를 확실히 파악하고, 해결책을 생각해 가상의 시나리오를 그려본 후, 직접 시행하는 순서로 해결해 나갔다. 그리고 실행 단계에서의 실패의 댓가는 죽음이었다. 무수한 세이브-로드가 반복됐다.

졸렬하다 졸렬해! 사이버데몬 보고 배워라!

더구나 등장하는 적들의 인공지능 또한 매우 뛰어났다. 그전까지 FPS의 적들은 남자 중의 남자, 마치 와일드 웨스트 건맨처럼 정면으로 당당하게 걸어와 자신이 가진 거대한 총을 꺼내들고는 화력을 자랑하곤 했다. 그건 멋있을지는 몰라도, 사실성과는 거리가 먼 모습이었다.

하지만 '하프라이프'의 적들은 간이 작은 대신 지능적이었다. 내가 적을 발견해 사격을 시작하면 그들은 먼저 엄폐물로 달려가 숨었다. 그리고는 내가 움직일 때마다 빼꼼 고개를 들고는 무기를 쏘는게 아닌가. 당시 이건 신선하다 못해 하나의 센세이션에 가까웠다. 아니, 컴퓨터가 저렇게 치졸하게 싸운단 말인가?

너 뭐야! 너가 왜 여기있어!

각각의 적은 자신의 장단점에 따라 싸우는 방식이 달랐고, 두가지 이상 종류의 적이 있다면 서로 다른 패턴으로 상당히 높은 난이도를 자랑했다. 달려오는 에일리언 그런트를 상대하다 보면 저 멀리서 전기를 쏘는 보르티곤트에게 인수분해되어 버리곤 했다. 또 적의 종류도 외계생물체부터 총을 쏘는 특수부대까지 다양했고, 이는 게임의 전투 파트가 결코 지루해지지 않는 효과를 불러왔다.

중요 포인트마다 자리잡고 있는 맵퍼즐과 그 사이사이를 채운 다채로운 적들, 슬슬 다양한 무기로 적을 유린하는데 지쳐갈 때 쯤이면 쉬어가라는 듯 맵퍼즐이 나왔고, 또 이런 패턴에 적응해갈 때면 두가지가 동시에 튀어나오기도 했다. 로켓 발사대를 둘러 싼 촉수들을 상대하는 스테이지에서 몇시간씩 해결법을 고민하며 '과연 이 게임은 사람이 깨라고 만든걸까' 고민한 그때가 15년도 더 지난 과거였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다.


하나, 둘... 그리고 다음은?


사실, '하프라이프'가 우리나라에서 크게 알려진 것은 2000년대 초, 밸브의 디지털 게임마켓 '스팀'의 서비스가 본격화되고, 공식 한글화를 거쳐 많은 유저들에게 선보여지고 나서부터 였다. 당시 '하프라이프'의 번역은 한국어 더빙까지 지원했지만, 그 어마어마한 퀄리티로 인해 그야말로 컬트적인 인기를 끌었다. 텍스트 한글화에 '왈도'가 있다면, 음성 한국어화엔 '장비를 정지합니다'가 있었다.

▲ 정지가 안돼, 멈출 수가 없어!

물론 이 한글화로 일방적인 저평가를 내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하프라이프'가 가진 게임성 자체에 의문을 가질 수는 없는 없었다. 그야말로 완벽한 게임이었으니까. '하프라이프'는 치밀하게 짜여진 스크립트 같은 진행의 게임을 제시했고, 마치 이렇게 행동하도록 유도되어진 환경에서 플레이어는 연기자가 된 듯 게임을 플레이 했다.

이러한 특징은 '밸브' 게임 자체의 특징이 되어서, 추후 발매된 '포탈' 시리즈나 '레프트4데드' 시리즈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하프라이프 : 로스트 코스트' 부터 도입 된 코멘터리 모드를 통해 과연 '밸브'가 얼마나 플레이어의 행동 패턴을 분석하고, 또 그 상황에 알맞는 행동을 하도록 유도하는 법을 연구하는지가 드러난다. 맵에 놓여진 다양한 오브젝트를 무수히 많은 플레이 피드백을 통해 재조정하고, 레벨 디자인을 고쳐나가는 것이 '밸브'의 방식이었고, '하프라이프'가 가장 멋진 레일슈터가 될 수 있었던 이유다.

아직...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어...

이 기사를 쓰기 위해 다시 한 번 '하프라이프'를 플레이하며, 그래픽을 비롯해 몇가지 부족한 것들이 속속 눈에 들어오는데 놀랄 수 밖에 없었다. 내 기억 속에서, '하프라이프'는 완벽한 무결점의 게임이었기 때문이다.

'완벽한 게임'이란 타이틀은 단순히 게임을 잘 만들기만 해서는 얻을 수 없다. 막대한 양의 게임들 속에서 완벽함이란 사실 새로움과 비슷한 의미를 가진다. 창작물에 있어서 완벽하다는 기준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바뀌기 마련이고, 그러기에 '기존의 판단 기준을 적용할 수 없는, 완전히 새로운 시각으로서 접하게 되는' 게임들은 그들이 개척한 분야에서 자연스럽게 완벽한 게임이 되기 마련이다.

이래도 괜찮다, 나오기만 해다오!

그만큼, 발매시점에서 '하프라이프'는 완벽한 게임이었으며, 시간이 지나자 전설이 되었다. 이후 시리즈가 계속되는 동안에도 '하프라이프2', '하프라이프2 에피소드1', '하프라이프2 에피소드2' 들은 각각 완벽에 다가가 전설이 되었다(다만, 에피소드1은 좀 부족했지만). 이제 기자는 3편을 기다린다. 그게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또다른 완벽을 기대하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