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퓨터가 세상에 태어난 지도 70년이 지났고, 우리나라의 컴퓨터 역사도 어느덧 50년이 다 되어간다. 무릇 역사를 알아야 미래를 볼 수 있다는 말이 있듯이, 지금 이 시점에서 반세기에 걸친 우리나라의 컴퓨터 역사를 정리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에 세계에서 두 번째이자 아시아 최초로 한국 땅에 인터넷을 보급한 '대한민국 인터넷의 아버지', 전길남 박사는 NDC 2015 행사에서 '20세기 대한민국 컴퓨터 개발 역사 워크숍'을 진행, 프로세서와 운영체제, 컴퓨터와 한글 입출력에 대한 50년의 역사를 되짚어보는 시간을 마련했다.



■ 개회사

이번 워크숍은 2000년대 이전, 컴퓨터라는 분야에서 우리가 어디서 시작했는가에 초점을 맞췄다. 우리가 어디서 왔고, 어디로 나아가야 하는지 궁금했다.컴퓨터의 역사는 70년이 넘는다. 1940년대에 시작했고, 그때 저도 태어났다. 반면 우리나라가 컴퓨터를 도입한지가 대략 50년 정도 된다.

우리가 어디서 왔는가를 알아야 우리의 현 주소를 알게 되고, 앞으로 어디로 나아갈 수 있는지, 어디로 가야할지 알 수 있고, 방향성을 세울 수 있다. 때문에 우리가 어디서 왔는가를 먼저 제대로 잡아야겠다 싶었다. 그러고 나면 컴퓨터를 제일 먼저 시작한 미국, 영국과 우리는 무슨 차이가 있고, 또 후발 주자들인 중국, 일본과는 무엇이 다른지 비교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전길남 박사

내가 79년, 36살 때 한국에 왔다. 그때부터 인터넷을 만들려고 한건 아니고, 그때 한국에서 전자기술연구소를 새로 창립했다. 반도체, 컴퓨터 특성화를 위해 만들어진 연구소였다.

당시 과연 어떤 컴퓨터를 만들어야 하는가에 대해 많이 고민했다. 메인프레임을 만들지, 아니면 마이크로 컴퓨터를 만들지 말이다. 당시에는 대학교에서는 컴퓨터 관련 연구 환경이 안되어 있었고, 당시 기업에서는 TV, 비디오 레코더 등에 힘을 쏟았다. 그래서 이렇게 국책 연구소에서 개발하고 기업에서 생산하는 방식을 취해야 했다. 초창기 컴퓨터를 만들었던 분들을 모시고 관련 이야기를 들어보려고 한다.



세션1 '프로세서' - 16비트 프로세서와 마이크로 프로세서

최초의 컴퓨터는 진공관에서 시작했다. 독일, 미국 등에서 40년대 부터 시작한게 최초이다. 하지만 아시다시피 이 시기에 우리나라는 전혀 참여하지 못했다. 물론 그 다음 단계인 트랜지스터를 활용한 컴퓨터도 마찬가지다. 트랜지스터는 몇백, 몇만, 몇백만 개가 모여야 하는데, 그럴 여력이 없었다.


우리나라가 컴퓨터 관련 산업을 시작한 것은 60년대 이후다. BIT-Slice와 마이크로 프로세서 때에는 '이걸 만들어 쓸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리고 70년대가 되어서 본격적으로 컴퓨터 개발을 시작했다. 16비트 프로세서를 만든 것이 최초고, 이것이 바로 전화 교환기에 사용을 위해 만들어졌다.


▶1-1. 16비트 프로세서 개발 (강진구)

40년 전, 70년대 초반에 한국에 들어와있는 컴퓨터는 몇대 안되었다. 그때는 그렇게 들어와 있는 컴퓨터를 어떻게 잘쓸까, 그러니까 사용법을 배우는데 급급한 시대였다. 그런데 그때, 감히 '우리가 만들어보자'라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토대가 전혀 없었다. 개발 인력도, 자본도, 툴도, 정보도 없었다.


너무나 무모한 도전을 했기 때문에 그만큼 벌을 많이 받았다. 밤을 많이 세우면서 몸으로 떼우게 됐다. 그때 다같이 고생했던 식구들에게 이 자리를 빌어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컴퓨터를 만드는데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코어, 16비트 프로세서였다. 당시 청와대 등에서 사용하기 위한 특수한 핫라인 전화 전용 교환기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 교환기에 들어가는 컨트롤러가 미국 회사의 제품인 NOVA-1200 이었다. 그리고 이 컨트롤러를 국산화 해, 10 키로바이트 가량 되는 전용 소프트웨어를 구동할 국산 미니컴퓨터가 필요했다.

1973년부터 1976년까지 4년 간의 개발기간을 거쳤고, 1976년 10월 발표했다. 개발 인력은 KIST의 연구원 3명이 투입됐다. 개발에는 NOVA 컴퓨터와 전용 소프트웨어를 활용했다.


그렇게 완성된 것이 국산 16비트 컴퓨터 '세종 1호'다. '세종 1호'는 기존 NOVA 컴퓨터와 몇가지 다른 특징을 가졌는데, '세종 1호'는 통합 버스를 사용하여 시스템 복잡도를 줄이고, 원가를 크게 낮출 수 있었다. '세종 1호'는 추후 삼성에서 제작한 '센티넬'이라는 전화 교환기에 컨트롤러로 2개가 들어갔고, 둘 중 하나가 고장나도 나머지가 백업으로 작동하는 등 안정성을 도모했다. 이는 씨티뱅크, 호텔신라, 강원도청 등에 총 300여대가 판매되어 사용되었다.


▶1-2. 마이크로 프로세서의 개발(박성배, 유영욱)

마이크로 프로세서는 프로세서와 단어 하나 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 하지만 이 단어 하나가 역사를 바꾸었다. 1940년대 이후 생긴 직업의 반은 이 마이크로 라는 단어와 연관되어 있다. 그리고 이게 없었다면, 지금 이 자리에서 이렇게 여러분과 이야기를 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다들 아시다시피 최초의 컴퓨터는 애니악이다. 하지만 이게 크기가 2층 건물 만하다. 무게는 30톤, 진공관을 8천개 사용했고, 전력을 15만 와트를 소비한다. 코끼리 한마리가 5톤 정도인데 대략 비교가 되는가?


이와 비교해 현재의 스마트폰이나 노트북의 성능은 비약적으로 상승했다. 이들은 하나의 완전한 컴퓨터 시스템이다. 애니악은 1초에 5천 번의 연산을 할 수 있었지만, 지금의 스마트폰은 1초에 5조번의 연산을 수행한다. 약 10억배 이상 빨라진 것이다. 여러분이 코끼리 60억 마리를 손에 들고 다닐 수 있게 한 것이 바로 마이크로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만든 마이크로 프로세서는 1981년 삼성에서 만든 KS51000이다. 이는 4비트 짜리 마이크로 프로세서로, 4비트 CPU와 1키로바이트 ROM, 32바이트의 RAM 으로 구성되었다.


이를 조사할 때 가장 고민한 것이, 우리나라 최초가 어디인가 였다. 이전까지 한국전자기술연구소에서 제작한 K8048이 최초의 마이크로 프로세서라고 여겼는데, 81년 삼성에서 발표한 논문을 조사해 새로이 확인하게 됐다. 우선 기준은 칩이 제작되었어야 하고, 이를 실제로 사용 테스트를 해서 정상적으로 동작했고, 또 문헌에 기록으로 남겨져 있어야 한다.

해서 이 KS51000 의 제작자를 통해 칩이 실제로 제작되었고, 성능 시험도 성공했다는 것을 확인하여서 이것을 최초로 인정하게 되었다. 그 다음이 한국전자기술연구소에서 1983년 이종덕 박사가 시작해서 김춘길 박사가 완성한 K8048은 인텔 8048과 호환되는 8비트 마이크로 프로세서다. 여기서부터 한국의 컴퓨터 개발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고 본다.



세션2 '운영체제' - 한국 유닉스(UNIX) 개발사

▶유닉스 OS(손덕주)

유닉스는 1972년, 미국 AT&T의 벨 연구소에서 만든 컴퓨터 운영체계다. 이후로 꾸준히 개량되어 왔고, 1979년에 가장많이 보급된 유닉스 버전7이 나왔다. 유닉스는 C언어로 작성되어서 확장성 면에서 큰 장점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나라에서의 유닉스는 81년 처음 서울대에서 사용했다. 유닉스 버전7 PDP 11/70을 PDP 11/44으로 포팅해 사용했으며, 이 컴퓨터가 바로 한국 최초의 인터넷을 연결하는 호스트로 사용 됐다.

이후의 유닉스 개선 및 포팅은 멀티프로세서를 사용해야 하는 행정전산망용 주전산기(일명 TICOM)을 위해 멀티프로세서OS로서 이루어졌다. 총 네차례 개발이 이루어졌는데, 1987년 처음 TICOM I 을 위해 35명의 인력이 4년 동안 개발했으며, 이는 유닉스 버전3.0을 사용했다. 이어서 TICOM III을 위해 유닉스 버전4를 토대로 20명이 3년 간 투입됐다. 그리고 95년부터 3년 간, 또 98년부터 3년 간 연속적으로 유닉스 OS를 개발, 시스템 소프트웨어 개발 노하우를 쌓을 수 있었다.



세션3 '컴퓨터' - 마이크로 컴퓨터와 서버 컴퓨터

▶3-1. 마이크로 컴퓨터 개발(정덕진)

1973년 미국 제록스 에서 '제록스 알토' 라는 16비트 컴퓨터를 개발했다. 이후 1974년, 인텔이 8비트 프로세서인 인텔8080을 발표, 이때부터 PC(Persnal Computer) 개념의 마이크로 컴퓨터가 본격적으로 만들어지기 시작한다.

정덕진 개발자

1977년은 유명한 마이크로 컴퓨터인 '애플2'가 나왔다. 그리고 이 때는 한국에서도 처음 마이크로 컴퓨터를 만든 해이다.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에서 금성전기와 함께 인텔의 8비트 프로세서 8080A를 탑재한 GSCOM-80A가 나왔다.

1976년, 한국전자기술연구소(KIET)가 설립되었고, 보다 본격적인 개발을 위한 장기 계획을 통해 1980년 8비트 마이크로 컴퓨터인 HAN-8과 1982년16비트 컴퓨터 HAN-16를 개발했다. 1984년에는 16비트 마이크로 컴퓨터인 GMC-5010을 개발하고 상용화 했다.


HAN-8을 개발할 때부터 확장성을 염두에 두고 메모리 보드 등 모든 부분을 16비트 까지 확장할 수 있도록 해서, 개발 기간을 단축시킬 수 있었다. 또 다이나믹 메모리를 사용했다. HAN-8의 개발을 완료했을 때, 겨울이었는데 밤 늦게 밖에 나오니 눈이 내렸다. 그때의 감정, 희열은 말로 다 할 수가 없었다.


이후 개발한 마이크로 컴퓨터의 상용화와 보급을 위해 1차 교육용 마이크로 컴퓨터를 5000대 보급하는 사업이 진행 되었다. 민간 업체인 삼성전자, 동양나이론, 삼보컴퓨터, 금성사, 한국상역이 참여해 1천대씩 제작했다. 다만 기본적으로 80만원은 되야하는데 24만원의 가격으로 제작해 보급하니, 실제 사용에는 무리가 있었다. 그럼에도 국책 사업을 통해 직접 컴퓨터를 개발하고 생산, 판매까지 하여 시장을 형성한 것은 매우 중요한 경험이자 발전이었다.


▶3-2. 유닉스 컴퓨터 개발(임기욱)

처음 유닉스 컴퓨터를 개발할 때, 전 세계적으로 오픈시스템에 우호적인 분위기 조성됐다. 또 오픈 시스템에 맞는 공용 부품이 많이 제공 되었고, 이걸 활용해 개발기간을 많이 단축시킬 수 있었다. 이것들을 구입해 시스템 인티그레이션을 해 유닉스 운영체제를 이식했고, 이렇게 시스템 조립에 의한 슈퍼 마이크로 컴퓨터가 개발됐다.


두번째로 개발한 것은 행정전산망 주전산기로, TICOM I에 해당하는 서버급 유닉스 컴퓨터였다. 금성과 삼성, 대우, 현대가 참여하여 상용화, 수백대가 행정전산망 구축에 사용되었다. 초기에는 문제가 많았으나, 정부의 지원으로 빠르게 안정되었고 지속적으로 사용되었다.

세번째인 TICOM III는 이런 문제를 수정하는데 주력했고, 또 모든 참여사와 관련자의 바람대로 CPU를 모토로라의 제품에서 인텔 펜티엄으로 교체했다. 유닉스 서버 컴퓨터로 만들어진 이 컴퓨터는 94년 이후 약 10년 간 수백대가 행정전산망에 사용되거나 판매되었다.


이러한 서버 시스템의 개발 성공으로 상용 병렬 컴퓨터 개발도 시도했다. 당시 세계 추세에 따라 MPP(Massively Parallel Processor) 구조로 개발이 시도되었으며 다양한 원천기술에 대한 연구도 병행되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개발 막바지에 세계 시장에서의 MPP 시스템에 대한 선호도가 급격히 추락해 상용화되지 못했다.



세션4 '패널토론' - 프로세서, 운영체제, 컴퓨터

이어서 세션1에서 세션3까지의 발표자들과 전길남 박사가 함께 모여 그간의 강연 주제에 대해서 토론을 나누는 기회가 주어졌다. 이들은 개발 당시의 이야기와 현재의 기술 현황 등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와 함께 동종 업계에 종사하는 후배 개발자들에게 여러 조언을 던졌다.

좌로부터 강진구, 박성배, 전길남, 김명준, 손덕주, 정덕진, 임기웅

강진구 : 이러한 이야기를 통해, 저희가 과거 이런 개발 과정을 거칠 때 어떤 창의성을 발휘했는지 확인하고, 이것이 동기부여가 되어 여러분의 도전에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임기욱 : TICOM I를 개발할 때에는 금성, 삼성, 대우, 현대 등이 참여했는데, 기업들에게 기술이 전혀 없었다. 우리가 같이 하지 못했다면 만들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기술 문제에 더해, 국가기관의 시스템 형성이라는 확실한 수요시장이 있었다. 그래서 그때의 개발이 가능했다고 본다.

현재에 와서 국가기관이 "우리가 가르쳐줄게, 이걸 가져가서 팔아" 라고 한다면 아무도 오지 않는다. 국가에서 수요시장을 제공해야 한다. 현재는 그것이 없기 때문에 컴퓨터 산업에서는 어렵다.

그렇다면 이러한 연구개발이 어디로 가야하는가? 기업이 하지않는, 보다 미래의, 리스크가 훨씬 큰 미래의 기술이나 산업을 타겟으로 해야 한다. 그것이 국가 연구소가 지향할 수 있는 바라고 본다.

전길남 : 과거 처음 컴퓨터를 만들기로 결정했을 때, '어떤' 컴퓨터를 만들 것인가를 두고 많은 고민을 했다. 메인프레임도 있고, 마이크로 컴퓨터도 있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마이크로 컴퓨터로 방향잡기를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면에서 당시 임기욱 개발자 등이 참여한 유닉스 컴퓨터의 개발이 잘못되었다면 현재 이런 일도 불가능할 만큼 큰 일이 났을 것이다. 하나하나가 잘 이루어져 나갔다.

손덕주 : 현재 소프트웨어 개발은 커뮤니티가 아주 큰 역할을 하고, 매우 중요하다. 소프트웨어의 지속적인 개발과 유지보수는 커뮤니티가 필수적이다. 해외의 유닉스나 리눅스 개발자들을 보면 이런 사례가 매우 많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현재 소프트웨어 개발 커뮤니티가 적고, 이러한 커뮤니티 개발이 매우 어렵다. 자발적 개발자가 많지 않아서다. 이러한 현실을 보완하고, 보다 커뮤니티가 활성화되는 것이 이런 전문적인 소프트웨어 개발에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지 않을까 한다.



■ 세션 5. 한글이 화면에 띄워지기까지 - 한글의 입출력(I/O)

지금이야 스마트폰과 컴퓨터에 한글이 출력되는 것이 매우 당연한 일이지만, 70년대만 하더라도 한글 입력은 커녕, 프린터에 활자가 찍히는 것도 어려웠다. 한 글자씩 풀어쓸 수 있는 영어나 글자 자체가 이미지처럼 굳어진 한자와는 다르게, 한글은 초성-중성-종성이 합쳐져야 비로서 하나의 글자가 되는 복잡한 알고리즘으로 구성되었기 때문이다.

기자가 현재 키보드로 기사를 작성 및 수정하고, 모니터로 기사를 보고, 프린터로 내일 있을 NDC강연 시간표를 출력하는 지금의 상황은 많은 연구원들의 피나는 노력과 열정, 그리고 머지 않은 미래에 한글로 이뤄진 정보화시대가 다가올 것을 미리 예측한 선구자적 정신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 시절, 한글 입출력의 필요성이 제고되지 않았다면 지금과 같은 편안한 디지털 한글시대는 좀 더 늦게 왔거나, 혹은 오지 않았을 수도 있다.

70년대, 한글을 화면에 띄우기 위해 청춘을 바친 선구자들을 추억하고 그 후 일어난 진보의 길을 되짚어보기 위해, 그 당시를 겪었던 대표격 인물들인 이만재(서울대학교 융합기술연구원 특임연구위원)박사와 박승규(아주대학교 교수) 박사, 정왕호(워드프로세서 '명필' 개발자) 전 연구원 및 이기식(아이티젠 고문) 박사가 컴퓨터 개발 역사 워크숍의 2부에 참석해 자리를 빛냈다.



이만재 박사가 정리한 '한글 프린터 연구개발' 연대기가 제일 먼저 발표되었다. 한글 프린터 연구는 196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전화요금 고지서를 위해 한글을 인쇄할 필요성이 대두되면서 기존의 영문 글자 이미지에 한글 이미지를 추가 및 대체해 소프트웨어로 해당 이미지를 여러 번 출력해 인쇄하는 '풀어쓰기'가 초기의 한글 프린터 방식이었다.

이후 초성과 중성, 종성을 모두 한글자로 묶어 글자 인쇄 영역을 줄여 비용을 절감할 수 있던 '모아쓰기' 방식이 1970년대 연구되었으며, 1977년 발표자인 이만재 박사가 개발한 잉크젯 방식의 콘솔 프린터를 통해 14도트 인쇄가 가능해지며 한글 처리가 훨씬 용이해졌다. 이후 1980년대 한글 표준 코드를 통해 한자 출력까지 가능해지며 다양한 상업용 프린터가 보급될 수 있었다.

윈도우OS 시대인 1990년대에는 한글처리가 프린터 내부의 프로그램이 아닌 운영체제에서 이뤄지고, 나아가 프린터의 해상도 및 윈도우OS탑재 컴퓨터의 처리능력이 급격히 증가하며 한글 프린터 기술이 진일보하게 되었다. 나아가 글자 크기 변화가 힘든 초기의 비트맵 폰트 대신 글자의 외곽선을 사용하는 아웃라인 폰트가 도입되어 현재 한글 및 한자 출력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지금처럼 프린터가 한글을 출력하기까지 약 50년의 세월이 걸린 것이다.




한글 컴퓨터 터미널(Terminal, 컴퓨터 공학에서는 '단말기'를 의미: 데이터를 입력, 표시하는데 쓰이는 하드웨어 기기) 연구 개발의 역사도 못지 않다. 한글 터미널에 대한 발표를 맡은 박승규 박사는 한글을 모니터에 손쉽게 띄울 수 있고, 해당 내용을 수정 혹은 부분 삭제를 가능하게 하기 위해 많은 연구원들이 부던히도 노력했다며 1970년대를 회상했다.

국내 한글 터미널 개발의 대표작으로는 1977년의 '한단 1호'를 들 수 있다. 이 한글 터미널에는 CPU에는 한글 모아쓰기 소프트웨어가 탑재되어, 연결된 TV스크린을 통해 키보드로 입력된 글자들을 출력하는 것이 가능했다. 이어 흑백TV보다 안정적인 화면에서 더 많은 한글을 표현할 수 있는 '한단 2호'가 개발되었고, 그 후 한글 터미널 분야는 발전을 거듭하며 현재에 이르렀다.

거진 40년의 역사를 거친 한글 터미널 구현은 한글의 초성,중성,종성을 모두 하나의 글자로 모아쓸 수 있는 '모아쓰기'의 입력방식 추가 및 임베디드시스템 (embedded system: 마이크로 프로세서 시스템을 의미)구현의 첫 사례라는 점에서 상당한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여기까지 정리한 박승규 박사는 다음에 이어질 한글 워드 프로세서의 개발 역사의 발표자인 정왕호 전 연구원에게 마이크를 넘겼다.




한글 입력을 위한 워드프로세서 개발은 비교적 최근인 80년대부터 진행되었다. 당시 국내엔 이미 사무 자동화 시장이 상당히 커진 상태였으며, 컴퓨터 관련 분야에 대한 표준화 활동도 활발히 진행되던 시기였다. 컴퓨터의 보급과 동시에, 한글 텍스트를 표현하기 위해 굳이 영어로 입력할 필요 없이 손쉽게 한글로 입력할 수 있는 워드 프로세서가 많이 필요한 시점이기도 했다.

이에 기존의 영문은 물론, 한글과 함께 주로 사용되던 한자까지 입력하고 편집하고 프린트까지 할 수 있는 한국어 워드 프로세서 소프트웨어가 개발되었다. 1980년 WORD80부터 시작한 워드 프로세서 소프트웨어 개발 기술은 점점 발전을 거듭했으며, 1983년 워드 프로세서 '명필'도 상품화에 성공하면서 해당 분야는 점점 발전하게 되었다.

한글코드 및 키보드 자판의 표준 규격 제정을 주도하며 자신이 개발한 한글 워드 프로세서 '명필'을 상용화하는데 성공한 정왕호 전 연구원은 이후에도 국가공인 인증제도의 도입 및 정착이라는 세계 최초 업무를 마지막으로 현재 일선에서 은퇴했다. 허나 그가 개발한 '명필'은 지금과 같은 한글 워드 프로세서의 대중화의 첫 단추를 상징하는 작품으로, 독립기념관에도 전시되었을만큼 독보적인 제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세션 6. ■ 패널 토론 - 2015년, 한글 정보화 시대의 주역들이 전하는 메세지

짧게는 30년, 길게는 50년의 시간 동안 이뤄진 한글의 입출력 연구 개발은 지금과 같은 정보화 시대에 대한민국도 함께 참여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그 당시 선구자들의 노력이 있기에 하루하루 기술은 더 발전되고 세상은 한층 더 편해졌다.

60년대부터 80년대까지 한글 컴퓨터 분야의 발전을 위해 노력한 주역들은 아직도 더 많은 변화를 바란다. 지금처럼 한글을 보다 쉽게 사용할 수 있는 컴퓨터환경의 시대에서 하고 싶은 것들이 너무 많다. 하지만 주역의 자리에서 한 발 물러난 지금은 50년 뒤의 미래를 바꿀 수 있는 후계자에게 미래를 맡겨야 한다.

한글 입출력 연구개발의 역사 설명 이후 이뤄진 패널 토론에선 발표자 3명과 워드프로세서 '명필' 개발 및 한일 자동번역 시스템을 개발한 이기식 박사가 참여, 현재의 젊은이에게 도전하고 노력할 것을 당부했다. 70년대의 한글 입출력 분야가 그랬듯이, 미래를 위해 필요하지만 섣불리 손대지 못하는 분야에 과감히 도전하라는 것이 그들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폐회사. 전길남 박사 - 한국 컴퓨터 역사 50년,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또 어디에 있는가

5시간 남짓의 시간에 걸친 '20세기 대한민국 컴퓨터 개발 역사 워크숍'이 끝났다. 꽤 긴 시간동안 진행되었음에도 처음부터 끝까지 자리를 뜨지 않고 모든 이야기를 경청한 전길남 박사가 마무리를 맺기 위해 다시 강연장에 올랐다.



전 박사는 일단 넥슨의 컨퍼런스 공간인 1994홀의 규모를 슥 훑어보며, "넥슨을 비롯해 많은 게임 개발사가 본격적으로 활동하며 지금 우리나라를 세계 최고의 게임강국으로 올려놨으나, 운영체제나 데이터베이스, 컴퓨터 언어 등 아직 다른 나라의 기술력을 따라가지 못하는 분야도 많다"라며 아쉬움이 담긴 한 마디를 전했다. "그렇기에 더 본격적으로 해야 한다. 이제 시작해야 한다."는 따끔한 충고도 이어졌다.

이번 행사에서 다룬 것은 우리나라 컴퓨터 개발 역사의 일부분이었지만, 이를 계기로 발전을 위해 과거를 되짚어 보는 활동이 폭넓게 전개되길 소망한다는 그의 전길남 박사. 폐회사를 위해 준비한, 당부와 격려가 담긴 마지막 인사로 행사가 정리되었다.

"한국 컴퓨터 역사 50년, 우리는 어디서 왔는지, 어디에 머물러 있는지를 파악하는 것이 숙제입니다.
이번 워크숍이 많은 의미가 되었음 좋겠군요. 앞으로도 우리, 잘 해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