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한 해는 '유비 소프트'에게 악몽 같은 한 해였을 터다. 엄청난 프로모션을 펼쳐가며 내놓은 메인타이틀인 '어쌔신 크리드 유니티'가 완전히 판을 말아먹었기 때문이다. 그뿐인가? 최대 규모의 필드를 보여준다던 '더 크루'에도 유저들은 그저 시큰둥. 그나마 밥값 좀 한 게임이 '파크라이4'인데 이 역시 전작의 그늘에서 크게 벗어났다고 말하기 어려웠다.

그래서일까? 지난 6월 진행된 'E3' 당시, 유비의 라인업은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현대를 배경으로 삼은 '더 디비전'과 '고스트 리콘', '레인보우 6: 시즈'를 비롯해 강렬한 액션성을 선보인 '포 아너', 그리고 어쌔신 크리드의 새로운 시리즈인 '어쌔신 크리드 신디케이트'까지, 이미지 쇄신의 의지가 바다 건너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게임스컴2015'가 진행 중인 독일 쾰른. 4관에 있는 비즈니스 관에서 유비 소프트와 짧은 만남을 가졌다. 주제는 '어쌔신 크리드 신디케이트'. 개발진이 갈려나가고, 유비 소프트의 주식을 폭락시킬 정도로 전작은 아픈 상처를 남겨두었다. 이미지 쇄신과 화려한 부활을 원하는 유비의 바람이 진짜 이뤄질지 살펴볼 좋은 기회가 아닐 수 없었다.



■ 똑같아 보이지만, 생각외로 '많이 다른' 알맹이

게임스컴에서 플레이할 수 있는 버전은 '이비 프라이'로 플레이하는 암살 미션. 일단 눈에 띄는 점은, 런던 시내를 걸어 다니는 사람의 수가 생각 외로 적었다는 점이다. 이는 전작인 '어쌔신 크리드 유니티'에서 '현실과 같은 시내 구현'을 모토로 파리에 엄청나게 많은 NPC를 만들어냈다가 대차게 욕을 먹은 이후 피드백이 반영된 흔적이라 할 수 있었다. 확실히 전작의 사람들은 너무 많았다. 덕분에 큰 문제 없이 원하는 목적지까지 도달할 수 있었다. 전작이었으면 대여섯 명은 넘어뜨리고서야 도착했을 곳이다.

주의 깊게 살펴보니, 런던의 모습이 굉장히 잘 구현되어 있다. 어둑한 조명, 습기에 찬 거리, 마차가 다니면서부터 넓어진 도로와 아직 남아 있는 구시대의 모습 등, 사실 내가 산업혁명기의 런던을 가본 적이 없으므로 '정확한 고증이다.'라고는 말할 수 없겠지만, 일단 그런 느낌은 충분히 준다.

▲ 19세기 런던의 느낌

'이비 프라이'는 남성 캐릭터인 '제이콥 프라이'와 함께 이번 작품을 이루는 두 명의 주인공 중 하나로, 어쌔신 크리드 세계관 내에 세 번째로 등장하는 플레이어블 여성 암살자다(아블린 그랑프레, 차오 윤). 이비의 플레이 스타일은 제이콥과는 확연히 다른데, 수틀리면 힘으로 다 때려 부수고 보는 제이콥과 달리 이비는 애초에 수틀릴 일을 없게 하는데 특화되어 있다.

이비의 가장 큰 특징은 은신 후 움직임 없이 부동자세를 유지할 시, 모습이 흐릿해지면서 '카멜레온 스킨'이라는 기능이 발동되는데, 이 동안 적이 나를 발견할 수 있는 영역이 극도로 좁아진다. 이 덕에 전작에서 어쩔 수 없이 은신을 풀고 전투를 벌여야 했던 상황(막다른 곳에 숨어 있는데 상대가 다가온다든가 하는)에서도 이비는 조용히 모습을 감출 수 있다.

▲ 광학 미ㅊ....아니 카멜레온 스킨

동시에 또 살펴볼 것은 '장비'다. '신디케이트'의 가장 상징적인 장비는 역시 '암살검'에 달려 있는데, 이는 전작에서도 흔히 볼 수 있었던 일종의 클리셰다. (예를 들어 3편의 '코너'는 암살검을 돌려 단검처럼 사용했고, 유니티의 '아르노'는 소형 칼날 발사기인 '팬텀 블레이드'를 암살검에 숨겼다.) 그 정체는 바로 '로프 런처'. 흡사 '아캄 시리즈'의 배트맨이나 '저스트 코즈'의 리코처럼, 팔뚝에서 발사되는 와이어다.

물론 본작의 로프 런처는 최첨단 과학의 응집체가 아닌, 산업혁명기의 구린 과학력으로 적당히 만든 모습이다 보니 장력이 그리 좋지는 않다. 높은 곳을 오르려면 레펠을 타듯 기어올라야 하는 건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이 '로프 런처'는 나름의 의미가 있다. '어쌔신 크리드 유니티' 이전의 작품들은 일종의 '게임적 허용'을 적용하였기에 건물의 높이가 실제 건물만큼 높진 않았다. '어쌔신 크리드 유니티'에서 노틀담 성당의 정상을 밟아 보면 확실히 느껴진다. 전작과 비교해보면 아찔할 정도로 높기 때문이다.

▲ 자세히 보면 로프와 갈고리가 보인다.

더군다나 그때보다 더욱 발전하고, 높은 건물들이 즐비한 런던에서, 기존의 육탄 파쿠르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싸움보다 벽타기를 더 잘하는 암살자들이니 올라가긴 하겠지만, 언제 그걸 기어 올라가고 있나. 이 '로프 런처'는 다른 방식으로도 사용 가능한데, 고지대 사이를 연결해 하강 없이 움직일 수 있는 통로를 만드는 데 쓰인다. 이 역시 어쌔신 크리드를 하다 보면 숱하게 겪는 '어 이 탑이 아닌데...?'하는 상황을 해결해주는 요긴한 기능이다.

또 한가지 주목할 만한 장비는 바로 '무성 수류탄'이다. 사실 이 장비는 내가 쓰면서도 '이래도 되나'싶을 정도로 유용한 장비였다. 이 장비는 기존의 폭탄류와 같은 투척 장비로, 탄착점의 일정 반격에 강력한 전기 충격을 줘 상대를 사살한다. 문제는 이게 소리가 안 난다는 점이다. 어쌔신 크리드 시리즈에 '폭탄'류가 존재한 건 꽤 오래되었지만, 이 폭탄들은 그만큼의 위험을 안고 있었다. 엄청나게 큰 소음을 동반한다는 것. 어차피 다 들켜서 어쩔 수 없이 난전이 벌어지는 와중에 에라 모르겠다 하고 던지거나, 싸움 전에 강력하게 선제공격을 가하는 용도로 사용되었던 것이 기본이다.

하여튼 이 '무성 폭탄'의 등장 때문에, 암살이나 서브 미션을 해결하기 위한 난이도는 단숨에 줄어들었다. 나중에 너무 이 장비에 의존하게 될까 봐 걱정이 될 정도로 말이다.

▲ 왜 이게 소리가 안나는지는 모르겠지만, 써보는 순간 사기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암살' 파트는 그대로, 하지만 더욱 강력한 '동기 부여'

'암살' 미션은 '어쌔신 크리드 유니티'와 마찬가지로 독립적인 공간 안에서, 다양한 변수를 이용해 상대를 암살해야 한다. 이 부분은 전작과 같았는데, 사실 이건 그렇게 비난할만한 요소는 아니다. 암살자라는 개념이 '암살'보다는 일종의 상징적 의미로 통한다는 걸 아는 기존의 유저들이라 해도 2-4편까지 이어진 와장창 대작전식 암살은 그리 좋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오히려 유니티에서 유일하게 마음에 들었던 부분이 정교하고 변수를 갖춘 이 암살 파트였다.

다만, 조금 더 변한 점이 있다면, 특정 조건을 이뤄냈을 때 평소와는 다른 '유니크 킬'의 기회를 준다는 점이다. 어쌔신 크리드 시리즈의 특성상, 암살만 정확하게 이뤄내고 내가 살아남기만 한다면, 그 내용은 뭐가 되었든 크게 연관이 없다. 다음 임무 진행에 영향을 주는 것도 아니고, 그저 게이머 개개인의 성향에 달린 문제일 뿐이다.

▲ 특정 조건을 맞춰야만 가능한 '유니크 킬'

그러나 이 때문에 '유니티'에서 정교하게 설정해 둔 '암살'을 위한 시스템은 준비해둔 것에 비해 활용도가 크게 높지 않았다. 말이야 열쇠 지기에게서 열쇠를 훔치고, 폭동을 유도하고, 특별한 루트를 이용해 잠입하라고 하지만, 장비와 기술만 어느 정도 해금 되어 있다면 그냥 우격다짐으로 밀고 들어가 다 쳐죽이고 암살 대상까지 같이 갈아버리는 플레이도 불가능했던 것은 아니다. 아니 오히려 그게 더 쉽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라는 말이 그렇게 어울릴 수가 없었다.

'유니크 킬'은 유니티부터 이어진 '변수 획득'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게 만들어주는 기능이다. 시연 당시 나는 전작의 경험들을 살려(모조리 다 했다. 심지어 유니티는 두 번 샀다...) 진짜 유령처럼 미션 장소를 누비고 있었는데, 옆에서 조언을 해주는 유비 소프트 스텝이 특정 장소를 가리키며, '저기로 가면 특별한 무언가가 있을 거다'라고 말해주었다.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갔더니, 웬 놈이 떡하니 서서 자신의 계획을 설명한다. "가짜로 잡힌 것처럼 해서 안까지 들어간 다음에, 한 방에 끝내버리는 게 어떠십니까?". 싫을 리가 없다. 승낙하고 나면, 잠시 죄수로 변해 적진의 심처로 들어가게 되는데, 이때 너무 빠르게 이동하면 주변의 경비가 의심을 품는다. 천천히, 그리고 자연스럽게 움직이는 게 포인트. 성공적으로 대상 앞까지 이동하면, 갑자기 게임의 장르가 버튼 액션이 되면서 암살이 이뤄진다. 그 순간 이비는 산업혁명기의 영국 여자라곤 전혀 볼 수 없는 아크로바틱한 움직임으로 상대를 처치하는데, 이때 기분이 게임 플레이의 백미다.

▲ 이 친구와 만나면 '유니크 킬' 기회를 얻는다.

이 '유니크 킬'은 암살 파트 내 존재하는 '사이드 미션'에 대해 강력한 동기를 부여한다. 솔직히 말하자면 '어쌔신 크리드'를 플레이하는 대부분의 게이머들은 자신이 진짜 '암살자' 같기를 바란다. 수류탄 하나 까고 들어가 어버버한 적들을 하나하나 다 썰어버리는 그 유명한 '무쌍 플레이'는 그저 그게 편하니까 하는 거지, 암살자보다 전사가 되고 싶어 하는 플레이가 아니라는 뜻이다. 뭐 그런 사람도 있을 수 있지만…. 어쨋든 이 '유니크 킬'은 성공 시 나 자신이 진짜 완벽한 암살자가 된 것 같다는 느낌을 충실하게 안겨준다. 마치 내가 특별한 게이머가 된 것 마냥.


두 명의 캐릭터, '독'인가? '잠재력'인가?

한 가지 걸리는 점이 있다. '어쌔신 크리드 유니티'의 기조이자 목적지에는 '멀티 플레이'가 있었다. '유니티'라는 단어가 의미하는 '통합'은 메인 미션 중 자연스럽게 벌어지는 암살단과 템플러 사이의 관계에서도 쓰이지만, 전 세계 플레이어들을 하나의 게임으로 묶는다는 야심 찬 기조가 숨어 있는 중의적 표현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예상은 참담히 빗나갔다. 무지막지한 서버 렉과 이에 따라 줄어드는 유저의 숫자. 그리고 예상치 못한 트롤링으로 만들어진 유저들의 냉혹한 시선까지, '어쌔신 크리드 유니티'의 멀티플레이는 진짜 마음 맞는 이들과 함께라면 재미있지만, 무작위 플레이어와 하기엔 다소 부담되는 콘텐츠가 아닐 리 없었다. 처음 선전한 것보다 멀티 플레이로 즐길 수 있는 요소가 훨씬 적었던 것도 있었지만.

때문에 유비 소프트는 '어쌔신 크리드 신디케이트'에서 과감히 '멀티플레이'를 지워버렸다. 이제 정말 남은 것은 싱글 플레이뿐이다.

문제는 싱글 플레이에서 플레이하는 캐릭터가 한 명이 아닌, 두 명이라는 점이다. 유비가 살짝 밝혔던 바로는 4분의 1 정도가 '이비 프라이'고 나머지가 '제이콥 프라이'의 영역이다. 이는 그동안 유비의 작품들이 갖고 있던 장점인 '캐릭터 중심의 동기 부여'에서 조금 초점이 벗어난 디자인이라 볼 수 있다. '어쌔신 크리드 시리즈'의 가장 큰 매력은 이 게임들이 '암살단 VS 템플러'의 대립 구도가 아닌, 주인공 암살자 개개인의 성장 과정과 그 과정에서 겪게 되는 주인공의 내면적 갈등, 그리고 이의 해소 과정까지 아우르는 '일대기'라는 점이다.

▲ 훌륭한 '일대기'를 보여준 전작들의 주인공

2편 3부작의 주인공인 '에지오 아디토레'의 매력은 이미 천하제일. 철없던 어린 시절부터, 그랜드 마스터까지 이루는 이 이야기는 어쌔신크리드 팬들이 가장 사랑하는 이야기다. 아메리카 원주민과 영국인의 혼혈이라는 태생적 한계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고민하던 '코너 켄웨이' 그리고 해적과 암살단이라는 어울리지 않는 두 집단에 속하게 되며 진짜 자신이 해야할 일을 찾는 '에드워드 켄웨이'의 이야기까지, 어쌔신 크리드 시리즈는 게임이라는 틀 안에 훌륭히 주인공의 일대기를 녹여냄으로써 그 매력을 드러냈다. '유니티'의 경우 주인공인 '아르노 도리안'이 워낙 허약한데다 여자 때문에 이성적 사고를 하지 못하는 막가파식 순정남이어서 인기를 끌지 못했지만 말이다.

논점은, "두 명의 캐릭터가 과연 하나의 캐릭터보다 좋은가" 하는 것이다. 알려졌다시피, '이비 프라이'와 '제이콥 프라이'의 성향은 굉장히 다른데다, 성별조차 다르다. 두 남매가 만들어낼 싱글 플레이에서의 시너지가 얼마나 강력할지는 아직 모르겠다만, 자신이 직접 그 캐릭터의 감정에 이입되고, 주인공이 된다는 느낌은 확실히 덜 할 수밖에 없다. 전작들에서 게이머가 '주인공'이 되었다면, 이번 작품은 일종의 '관조자'가 되어 주인공 두 명이 펼치는 활극을 보는 느낌이랄까? 싱글플레이가 유일한 콘텐츠인 '신디케이트'에서 이 점이 과연 좋게 작용할지, 혹은 실수가 될지는 아직 판단하기 어렵다.

▲ 두 남매가 전작 못지 않은 감상을 줄 수 있을까?

그래도 기대를 할 수 있는 이유는, '어쌔신 크리드 시리즈'의 메인 작품들(속편, '로그' 및 스핀오프작품 제외) 중에선, 짝수 번째로 나오는 시리즈들이 굉장히 안정된 완성도를 보여주었다는 거다. 1편에서 교훈을 얻은 유비는 2편에서 제대로 각성했고, 3편에서 시험 삼아 해상전을 넣은 후, 4편에서 해상전의 완성을 이뤄냈다. 5번째 메인작품이었던 '유니티'에서 얻은 교훈을 유비는 과연 잊지 않았을까? 11월 발매가 예정된 '어쌔신 크리드 신디케이트'. 직접적인 판단은 그때 이뤄지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