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치고, 가난하고, 자유롭게 숨쉬기를 열망하는 이들을 나에게 보내다오.
너의 해변에 넘치는 비참한 낙오자들, 집 없고 폭풍에 시달린 이들을 나에게 보내다오.
내가 황금의 문 옆에서 횃불을 들고 있으리니“

- Emma Lazarus, “The New Colossus” 중





이는 미국 뉴욕항 입구 리버티섬에서 이민자들을 맞이했던 아메리칸 드림의 상징, ‘자유의 여신상’ 기단에 새겨진 시의 일부이다. 오른손에 들고 있는 횃불은 자유의 빛을, 왼손에 들고 있는 책은 미국의 독립선언서를, 왕관에 달린 7개의 뿔은 북극해, 남극해를 포함한 7개의 바다와 대륙을 의미한다. 또한, 몸을 감싸고 있는 곳은 로마 공화국의 민주주의를, 잘 보이지 않지만 자유의 여신상이 밟고 있는 쇠사슬은 노예 제도 폐지에 따른 자유를 상징한다고 한다.

이렇듯 자유의 여신상은 미국의 자유와 민주주의의 상징이자 19세기 이후 끊임없이 세계 각지에서 유입되던 이민자들의 꿈의 상징이기도 한, 그때부터 지금까지 미국, 그리고 뉴욕의 상징으로써 많은 이들에게 희망을 준 기념물이기도 하다.

하지만 만약, 자유의 여신상이 뉴욕이 아니라 다른 곳에 세워져있었다면 어땠을까. 항구가 아니라 멕시코, 혹은 캐나다와의 국경 어디쯤 세워져있었다면? 더 나아가 미국이 아니라 다른 나라에 있었다면? 일부 사람들은 이런 호기심을 두고 “쓸데없는 생각”이라 일축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논의가 실제로 있었고, 거의 근접했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자유의 여신상은 1886년 미국의 독립 100주년과 미국과 프랑스 국민 간의 친목을 기념하기 위해 프랑스에서 선물한 것이다. 크기를 생각하면 당연하겠지만, 하나의 큰 완성품이 아니라 프랑스의 조각가 바르톨디가 외부 디자인을, 에펠탑으로 유명한 공학자 에펠이 내부 프레임을 담당해 뼈대 위에 구리판을 붙이는 방식으로 만들어진 동상이다. 총 길이 46미터에 달하는 동상을 한 번에 옮길 수 없었기 때문에 미국으로 운송할 때는 다시 분해해 수백 개의 상자에 담아 배에 실어 보내졌다.

▲ 발 주변의 쇠사슬은 노예제도 폐지에 따른 자유를 상징한다.


하지만 프랑스의 선물을 받은 뉴욕시는 난감한 상황에 빠졌다. 자유의 여신상 재조립 비용은 물론 동상이 올라갈 기단 공사비용조차 없었기 때문. 기단부를 제작하기 위한 모금활동은 지지부진했고, 동상 조각이 들어있는 상자는 항구 구석에서 먼지만 쌓이고 있었다. 이 소식을 들은 다른 도시들은 자유의 여신상 조립이 어려우면 자신들에게 넘기라며 뉴욕시에 갖가지 ‘딜’을 제안했고, 뉴욕시 역시 이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이때 등장해 모금활동에 불을 붙인 것이 퓰리처상으로 유명한 ‘조셉 퓰리처’이다. 그는 자신이 소유한 신문인 The World의 지면을 할애해 “프랑스가 보내온 귀중한 선물을 둘 자리마저 없다는 것은 뉴욕 시는 물론 미국이라는 나라에도 크나큰 수치가 아닐 수 없다”고 말하며 본격적인 모금 활동에 나선다.

퓰리쳐는 The World를 통해 모금활동을 부자들에게 의존하는 사람들을 비판하며 “자유의 여신상은 프랑스 백만장자들이 미국 백만장자들에게 주는 선물이 아니라, 모든 프랑스 국민이 모든 미국 국민에게 주는 선물이다”라고 외쳤다. 또한, 아무리 적은 양이라도 모금활동에 동참한다면 The World의 1면에 이름을 실어주겠다고 말함과 동시에 모금액에 동봉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지면에 실어주었다.

결과는 대성공. 꼬마아이가 서커스 구경을 위해 모은 돈을 기부했다거나 적은 양이지만 복권 당첨금을 보내온 부부의 이야기 등의 감동적인 이야기들은 사람들에게 좋은 자극이 되었고, 그 결과 12만 명의 사람들이 10만 달러 이상의 금액을 기부한다. 뉴욕시는 이렇게 모은 돈을 바탕으로 자유의 여신상 기단부 공사와 재조립 작업을 끝낼 수 있었다. 만약 당시 모금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면 자유의 여신상을 보기 위해 지금처럼 배를 타고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버스를 타고 옆을 지나갔을지도.

▲ 자유의 여신상이 뉴욕에 있을 수 있는 이유. 퓰리처


이보다 더 재미있는 이야기도 있다. 미국 일간 워싱턴포스트(WP)의 11월 19일 보도에 따르면 자유의 여신상이 원래는 ‘무슬림 농부상’이었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역사가 마이클 오렌의 주장에 의하면, 자유의 여신상을 제작한 프랑스인 조각가 바르톨리가 원래는 ‘자유의 횃불을 든 이집트 여성 농부’상을 만들려 했다는 것이다.

젊은 시절 이집트로 떠난 여행에서 많은 고대 유적들에 감동한 바르톨리는 이집트에 거상을 세우고 싶다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그리고 1860년대에 실제로 수에즈 운하에서 근무하게 되자 당시 이집트 총독인 이스마일 파샤에게 운하 입구에 “이집트, 아시아의 빛”이라는 이름의 횃불 비슷한 것을 든 거대한 여성 동상을 만들자고 제안한다. 당시 이집트 여성이라면 이슬람교를 믿었을 터이니 무슬림 농부상이라 해도 크게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 워싱턴포스트의 의견이다.

하지만 이집트에 스핑크스의 두 배 크기의 거대한 동상을 세우겠다는 꿈은 이스마일 총독이 파산하면서 끝을 맞이했고, 바르톨리는 이집트 대신 미국 해안으로 눈을 돌린다. 이후 바르톨리는 잘 알려진 것처럼 1884년 자유의 여신상을 완성했고, 프랑스는 1886년 미국의 독립 100주년을 기념해 미국에 선물한다. 만약 당시 이집트의 재정상태가 조금만 더 좋았더라면 지금의 자유의 여신상이 아니라 무슬림 농부상이 수에즈 운하 근처에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역사학자 오렌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무슬림 농부가 이상적인 서구 여성으로 변화하면서 그 이름 역시 ”아시아를 밝히는 빛“에서 ”세계를 밝히는 자유“로 바뀐다. 남아있는 것은 오직 횃불뿐이다. 40년이 넘는 시간 동안 Lady Liberty는 아메리카 드림을 꿈꾼 수백만 1세대 이민자들에게 더 나은 삶과 자유의 가능성을 보여줬다.”






자유의 여신상은 산업 시대에서 건설할 수 있는 불가사의다. 산업 시대에 건설하게 되는 불가사의들은 많은 양의 식량이 있어야 하고, 한번 건설을 진행할 때마다 인구의 절반 이상인 '8'을 필요로 한다. 게다가 이 과정을 5번 거쳐야 해서, 완공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 고난의 과정을 거쳐 '자유의 여신상'을 완공하면 그만큼 소모한 자원과 노동의 가치를 한다. '자유의 여신상'은 산업 시대부터 사용 가능한 비행기 유닛의 공격력을 20% 올려주고, 매일 1일 1회 50의 석유를 제공(산업 시대 기준)한다.

석유 자체는 무시해도 될만한 효과지만, 비행기 공격력 20% 증가의 효율은 매우 크다. 비행기는 훈련소 인구와 상관없이 생산할 수 있으며, 도서관 연구 및 비행장을 모두 최대로 업그레이드하면 기체 공간이 3만큼 주어지기 때문에, 복엽기(공간1) 한 대와 비행선(공간2) 한 대를 생산할 수 있다.

유닛의 체력을 증가시켜주는 화약 시대 불가사의 '베르사이유'와 비행기의 공격력을 증가시켜주는 '자유의 여신상'을 함께 조합해서 활용하면 계몽 시대는 피해 없이 충분히 초토화할 수 있으며, 방공 타워가 없는 산업 시대까지 손쉽게 완파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