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바쁜 업무 중에도 가끔 PC방을 가보면 생소한 사운드가 귓바퀴를 지나 달팽이관을 울린다. 한 남자는 자꾸만 류승룡 씨가 기분 좋다고 소리치며, 하루에 담배를 한 갑 이상 태울 것 같은 목소리의 남자는 자꾸 주변을 향해 죽으라고 악담을 퍼붓는다. 그리고 목소리만큼 얼굴도 어여쁠 것만 같은 여성은 자꾸 영웅이 죽을 리가 없다며 팀원들을 사지로 몰아 세운다.

그렇다. 요즘 PC방에는 오버워치 열풍이 불고 있다. 비단 PC방의 일이 아니다. 이미 오버워치 공식 대회가 하나 둘씩 열리고 있고, 해외 유명 프로게임단은 물론 전통 스포츠 구단에서도 오버워치 팀을 꾸리려고 눈치를 보고 있다. 그렇다면 e스포츠 기자로서 시대의 흐름에 뒤처질 수 없는 노릇. 게임을 알아야 기사를 쓸 것 아닌가. 고로, 기자는 지난 6월부터 시작된 오버워치 경쟁전에 뛰어들기로 했다.

7승 3패 53점. 주변에 물어보니 나쁘지 않은 점수란다. 고개를 들어 앞자리 동료 기자를 쳐다봤는데 우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배치고사에 47점을 받았다나. 푸하하. 47점이라니, e스포츠 기자 맞아? 도타2랑 하스스톤은 그래도 꽤 잘하던데.

하지만 동료 기자를 깔보며 '억울하면 50점대로 오라'고 놀리던 것도 잠시. 기자는 연패를 기록했고 어느덧 37점까지 떨어졌다. 이래서 주변 사람에게 잘하라는 말이 있나 보다. 동료 기자를 놀린 최후가 이렇게 암울하다니... 그래도 이를 악물고 40점 중반대까지 점수를 올렸다. 현재 기자의 점수는 40점 중반과 후반을 오르내리고 있다.

아직 갈 길이 멀다. 딱히 이유는 모르겠지만, 한 번 지면 점수가 확 깎이고 이걸 복구하려면 2~3연승은 해야 하는 느낌이다. 그래도 어쩌랴. 억울하면 내가 게임을 개발해야지. 오늘도 기자는 본업인 기사 작성도 소홀히 한 채 오버워치를 즐기는, 소위 '월급 도둑'이 되어가고 있다.

어딘지 익숙한 이야기라고? 당연하지. 이건 비단 특정 인물에게만 해당하는 내용이 아니다. 오버워치를 즐기는 유저 대부분이 겪어봤거나 겪고 있는 이야기다. 그리고 앞으로 풀어낼 이야기 보따리 역시 우리 모두의 이야기다.


당신은 한 경기에 56킬을 해봤는가

이번에 소개할 이야기는 화려하게 끝난 배치고사 이후, 연패를 겪기 직전에 벌어졌던 일에 관한 것이다. 참고로 기자는 '중2병'에 걸린 듯한 느낌의 캐릭터를 정말 좋아한다. 과거 상영됐던 '반 헬싱'이라는 영화에서는 특유의 느끼함과 함께 원인 불명의 여유로움을 뽐내다가 운명을 달리 했던 드라큘라를 주인공보다 더 좋아했다. LoL에서는 저급한 성능에도 한껏 멋을 부리며 두 번 죽기를 반복하던 아트록스를 즐겨 했고, 리워크 되기 전에 탑 라인에서 무수히 찢어지던 블라디미르도 특유의 느끼한 목소리와 '중2병스러운' 대사가 맘에 들어 참 열심히 했다.


오버워치에도 이와 비슷한 느낌을 물씬 내는 영웅이 있었으니, 바로 리퍼. 남들은 평범하게 소총이나 쏘아대고 비겁하게 방패 뒤에 숨을 때 리퍼란 친구는 산탄 권총 두 개를 무기로 사용한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재장전하는 모습을 처음 봤을 때는 숨이 넘어갈 정도로 기뻐했다. 총알이 떨어진 총 따위는 과감하게 버리고 새 총을 꺼내는 모습에서 '중2병'을 제대로 느꼈다. 좋아. 이제 나는 리퍼만 한다.

그런데 이 리퍼라는 영웅은 실제로 플레이해보니 내 성향과 많이 달랐다. 본디 FPS에서는 실제 전장에 나선 것처럼 내 목숨을 소중히 여기다가 내가 안전할 때에만 야비하게 총을 쏴야 한다고 배웠다. 그런데 리퍼는 적 앞에 뛰어들어야 제대로 된 대미지를 넣을 수 있었다. 뭐 이래... 이건 마치 가로등으로 뛰어드는 나방이 된 것 같았다. 내가 탱커도 아니고 왜 그래야 하나.

그래도 리퍼에게는 강력한 한 방이 있었다. E스킬 '그림자 밟기'로 적들의 머리 위로 올라간 다음, 땅으로 떨어지며 궁극기인 '죽음의 꽃'을 시전! 그러면 최소 두 명은 내가 자신들을 어떻게 쓰러뜨렸는지 강제로 관람하고 나서야 전장에 복귀할 수 있었다. 이 맛에 리퍼를 하는구나. 리퍼는 게임을 거듭할수록 더욱 짜릿한 쾌감을 선사했다.

▲ 모든 리퍼의 로망(출처 : 오버워치 인벤 '타츠긔s' 님 영상)

연습도 어느정도 했겠다. 본격적으로 배치고사 이후의 경쟁전에 뛰어들 때가 왔다. 영웅 선택 과정에서 리퍼를 골랐다. 별 반응이 없는 채팅창. 그래, 이 친구는 경쟁전에서도 정상적인 픽이구나. 더욱 자신감이 생겼다. 마침 전장도 리퍼가 가장 죄책감을 느끼지 않고 잔인해진다는 저녁 8시의 일리오스. 이제 나의 리퍼가 활약할 일만 남았다.

처음에는 순조로웠다. 상대 딜러는 물론, 탱커까지 녹여버리는 리퍼의 강력한 근접 대미지와 전세를 뒤바꾸는 궁극기. 게다가 팀원들도 각자의 역할을 잘 해낸 덕분에 우리 팀은 순식간에 두 라운드를 승리로 장식했다. 후후. 이제 POTG에 내 리퍼가 뜨는 일만 남았군. 그런데 그때부터 뭔가 심상치 않은 기운이 감지됐다.

2연승에 기분이 정말 좋았던 우리 팀원들은 단단했던 조합을 깨고 젠야타와 한조, 위도우 메이커 등 요상한(?) 영웅들을 고르기 시작했다. 거점 점령 맵에서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그래도 그들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 금방 눈치챘다. 두 번의 라운드 모두 상대에게 점령 포인트를 10%도 내주지 않은 채 승리했기 때문. '우리는 이런 영웅들만 골라도 너희를 이길 수 있다'고 말하고 싶었으리라. 그래도 난 리퍼를 고수했다. 내가 리퍼고, 리퍼가 나니까!

▲ 저기.... 여러분? 여긴 거점 맵인데...

그리고 누구나 예상 가능했던 3라운드 패배가 이어졌다. 장난스럽던 팀원들도 "이제 다시 제대로 해보자"며 진지한 조합을 다시 꾸렸다. 곧장 피드백이 이어졌다. 이겼을 때 조합을 다시 꺼내보자, 탱커 두 명에 딜러 두 명, 힐러 두 명이 가장 좋다더라, 디바 다섯 명에 루시우 한 명을 선택하는 것은 어떨까 등. 그리고 꽤 구색을 갖춘 조합이 완성됐다. 그런데 상대가 이전 라운드의 우리 조합에 화가 많이 났는지 우리를 거세게 몰아 세웠다. 우리 팀은 4라운드 접전 끝에 거점을 내주고 패배했다. 어느덧 라운드 스코어는 2:2.

싸늘했다. 미간에 적팀의 총알이 날아와 꽂혔다. 하지만 걱정하진 않았다. 원래 최후에 웃는 자가 진정한 승리자라고 했다. 그렇게 펼쳐진 5라운드. 기자를 포함한 12명의 용사는 뒤가 없는 사람들처럼 게임에 집중했다. 총알에 한 발이라도 맞으면 흉가에 머무르며 거기에 들어오는 사람의 목숨을 거두는 팝핀 전문 귀신이 되는 것처럼. 그리고 귀신이 되길 조금 더 꺼렸던 우리 팀이 최후의 승자로 우뚝 섰다.

영혼을 불태운 경기가 끝났다. 그 끝이 승리라서 좋았고, 경기 종료 직전에 살포시 'TAB' 키를 눌러 내 성적을 확인하고는 더욱 기뻤다. 금메달 두 개에 은메달 한 개가 킬 포인트와 대미지 부분에 떠 있었다. KD로 따져도 엄청난 성적. 당연히 POTG의 주인공도 내 리퍼였다. 상대가 거점에서 우리 팀원들을 때리는 사이, 교묘하게 걸어 들어가 궁극기로 네 명을 동시에 쓰러뜨린 장면. 기가 막혔다.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한 번 이기는 게 이렇게 힘들다니. 3라운드에 장난스러운 영웅들만 골랐던 팀원들이 미워질 정도였다. 그때 제대로 된 조합을 이어갔으면 이미 이기고 다음 게임을 하고 있었을 텐데. 왜 꾸준히 리퍼를 골라 활약한 내가 '트롤픽'을 고른 팀원들 때문에 이런 고생을 했단 말인가! 너무 화가 나서 눈 앞의 키보드를 내리칠 뻔 했지만, 통장 잔고를 떠올리고는 조용히 손에 힘을 풀었다. 가여운 월급쟁이 인생이여.

그래도 나는 승리했고, 내 리퍼는 그 경기의 주인공이었다. 기념으로 내가 기록한 성적을 사진으로 남겼다. 훗날 내 아이가 태어나면, 아빠가 이런 사람이었다고 자랑하리라. 그러면 옆에 앉아 있던 아내는 '뭐 이런 놈이 다 있냐'는 표정으로 날 쳐다볼 것이고, 아무것도 모르는 내 자녀는 조용히 휴대전화를 가져가서 모바일 게임을 실행하겠지. 후후. 이토록 화목한 가정이라니. 56킬에 너무 심취한 나머지 잠깐 스스로의 미래를 훔쳐 볼 수 있었다.


사실 기사를 여기서 마치고 싶었다. 그다음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반전'이 들어가야 제대로 된 스토리라는 평가를 받는다고 들었다. 오죽하면 로맨틱 코미디에도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는 반전이 들어가겠나. 기자는 이 경기를 마지막으로 약 1주일 동안 승리했다는 문구를 보지 못했다. 연패를 끊었을 때 점수가 37점이었던가. 그 이야기는 다음에 또 해보도록 하지... 브롤터로 떠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