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동안 히어로즈 오브 더 스톰 e스포츠는 '그들만의 리그'로 불릴 정도로 뚜렷한 '3강 체제'의 길을 걸어왔다. TNL-스네이크-MVP 블랙 시절부터 작년 MVP 블랙-템페스트-L5가 중국 대회 및 글로벌 챔피언십까지 제패해버렸기 때문이다. 국내 리그가 진행되면 수준 높은 4강 이상 경기만을 기다리는 팬들이 많았다. '3강' 팀은 히어로즈 프로씬의 기준과 같았다.

중, 하위권 팀은 살아남기 위해 강팀의 승리 공식을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패자전과 최종전에서 패배는 곧 탈락으로 이어진다. 언제 다시 찾아올지 모르는 메이저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내야 한다는 강박이 그들의 경기마저 지배하는 것처럼 보였다. 자신들만의 플레이는 나오지 않고 강자가 제시한 메타를 따라가기 급급했다.

그런데, 2017년부터 히어로즈 씬에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여전히 MVP 블랙-L5-템페스트가 강한 것은 사실이지만, 밑에서 치고 올라오는 팀들의 경기력이 범상치 않다. 다시 합류한 마이티가 템페스트에게 인상적인 풀 세트 접전을 펼치며 '3강'의 자리를 위협하고 있다. 오픈 디비전을 뚫고 올라온 블라썸(전 슈프림 믹스테잎) 역시 끈질긴 경기 끝에 값진 1승을 거뒀다. 최하위인 레이븐과 오픈 디비전 1위인 언밸런스까지 자신만의 색깔을 내는 상황.

이러한 변화의 기본 바탕은 무엇일까. 히어로즈 글로벌 챔피언십 코리아(HGC KR)로 리그가 개편되면서 하위권팀도 많은 경기를 펼칠 수 있게 됐다. 이전 토너먼트 제도에서 탈락과 직결되는 패배를 두려워하며 경기에 임해야 했지만, 이제는 몇 번 패배하더라도 한 시즌을 활동할 수 있는 여유가 생긴 것이다. 패배에 대한 두려움보단 우리 팀의 장점과 연습한 것을 보여주자는 마음가짐을 가질 수 있게 됐다.

▲ 모두 끌어당기는 'H82' 김정우의 아르타니스의 매력!

최근 진행했던 선수들의 인터뷰에서 이런 마음가짐이 잘 나타났다. HGC KR에서 단 한 세트도 승리하지 못했던 '무승 후보' 레이븐이 첫 라운드 마지막 경기에서 MVP 미라클에게 두 세트를 따내는 저력을 보여줬다. 승리의 주역이었던 'H82' 김정우는 팀원들과 해보고 싶은 플레이를 마음 껏 펼쳐보자는 의논을 했다고 한다. 그 결과, 모두를 놀라게 한 레이븐과 아르타니스가 나올 수 있었다.

레이븐이 뒤가 없는 탈락 위기였다면, 연패 중이던 아르타니스는 한동안 '관' 속에서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레이븐 역시 MVP 블랙을 상대로 꺼내봤지만, 통하지 않아 다시 쓰지 않는 방향으로 팀원과 논의했다고 한다. 하지만 정규 시즌이 끝나지 않았기에 레이븐은 다시 아르타니스를 꺼낼 수 있었다. 그리고 자신들의 예상 밖의 저력과 가능성을 많은 이들에게 알릴 기회를 스스로 잡았다.

2부 리그인 오픈 디비전에서도 각 팀의 스타일은 더욱 짙어지고 있다. 2회 차 연속 우승을 달성한 언밸런스는 '안무서운사람' 이승구를 중심으로 하는 팀이다. 그의 활약 여부에 따라 승패가 갈린다는 점 때문에 팀명을 언밸런스로 지었다고 한다. 팀원들이 이승구가 무서워지도록 보좌해주는 것이 그들 특유의 색깔이다. '조류왕'으로 불렸던 이승구는 일리단과 같은 픽으로 '캐리왕-트롤왕'을 오갔지만, 이제는 자신들의 스타일을 확립해 어느덧 확실한 에이스로 거듭났다. 한 명에게 많은 것을 맡기는 위험한 전략이지만, 꾸준히 연마해 자신들만의 강력한 무기로 만들어낸 것.


그리고 언밸런스와 같은 팀들이 더 높은 곳을 바라볼 만한 환경이 생겼다. 작년까지 슈퍼리그에 진출하지 못하면 다음 예선까지 기달려야 했지만, 이번 시즌에는 오픈 디비전부터 포인트를 쌓아 올라갈 수 있다. 자신들의 성장하는 모습을 시청자들과 함께할 수 있으며, 블라썸처럼 다음 정규 시즌에 1부 리그인 HGC KR에 도전할 수 있다. HGC KR에 출전해 진정한 프로로 거듭나며 지원금까지 놓치고 싶지 않은 만큼 1부 리그로 향하기 위한 그들의 발전은 이어질 것이다.

프로게이머와 선수들도 사람이기에 매 경기 자신의 모든 것을 보여줄 수는 없다. 탈락과 패배의 불안감 속에 모두가 배짱 있게 플레이할 수 없으니까. 팀에서 준비한 전략이 통할지는 경기 전까지 아무도 모른다. 이런 상황에서 부담감을 조금이라도 내려놓고 제 플레이를 펼치는 팀이 멋진 모습을 보여주는 경우가 많다.

MVP 블랙의 기세가 하늘을 찌르던 시기에 많은 이들의 예측을 뒤집고 우승을 차지한 선수들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그동안 MVP 블랙을 만나 위축됐지만, 패배에 대한 두려움을 내려놓고 제 플레이만 펼치겠다고. TNL-L5를 거친 '노블레스' 채도준과 L5 '정하'의 답변이다.

L5처럼 모든 선수들이 치열한 프로 무대에 대한 부담감을 덜진 못할 것이다. 그래도 이번 HGC는 제도적으로나마 그들이 제 플레이를 펼칠 수 있게 돕는 역할을 했다. '필패' 카드를 다시 꺼내 승리를 거둔 레이븐의 'H82' 김정우가 보여주지 않았는가. 이번 리그 개편은 프로들의 탈락에 대한 '마음의 짐'을 덜어주고 새로운 도전을 꿈꾸는 이들에게 목표를 제시했다. 새로운 HGC라는 발판이 마련된 상황에서 프로들이 더욱 자신의 진가를 발휘할 수 있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