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정글러. 2016 롤챔스 서머 시즌 플레이오프 SKT T1(이하 SKT)와의 경기 4세트 종료 후 전용준 캐스터가 '스코어' 고동빈을 가리켜 한 말이다. 당시 고동빈은 전 라인이 밀리는 상황에서 오로지 갱킹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며 정글러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캐리가 무엇인지를 제대로 보여줬다. 해설진들은 모두 그를 칭찬하기 바빴고, 경기를 지켜보는 시청자들 심지어 SKT를 응원하는 팬들도 그의 미친 경기력에 찬사를 보낼 수 밖에 없었다.

LCK 프로씬에 몇 남지 않은 1세대 프로게이머 중 한 명인 고동빈은 이처럼 꽤 오랫동안 최상위권 기량을 유지하고 있다. 또한, '앰비션' 강찬용과 함께 지금까지 모든 롤챔스에 개근한 유이한 선수이며, IEM, 올스타전, 롤드컵 등 다수의 국제 대회 출전 경험도 보유한 베테랑이다. 그런 그에게 부족한 것은 딱 하나다. 바로 보여주고 있는 기량에 비해 우승 커리어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고동빈이 가지고 있는 우승 타이틀은 2013년 열린 인천 실내&무도 아시안 게임과 MLG 윈터 챔피언십, 그리고 2014년 열린 IEM 시즌8 월드 챔피언십이 전부다. 최정상급 선수들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그 흔한(?) 롤챔스 우승컵마저 들어본 적이 없다.

5년이 넘는 시간 동안 먼 길을 쉬지 않고 달려온 고동빈은 2013 롤챔스 서머, 2015 롤챔스 서머, 2016 롤챔스 서머 시즌에 이어 롤챔스 우승 타이틀을 향한 4번째 도전을 앞두고 있다.



탑에서 원딜, 그리고 정글로

고동빈의 첫 시작은 탑 라이너였다. 2011년 10월, 국내 최초의 LoL 프로게임단 스타테일 소속 탑 라이너로 데뷔한 고동빈은 LCK가 정식으로 막을 연 2012년 스프링 시즌에 원거리 딜러(이하 원딜)로 전향해 참가했지만 16강에서 탈락했고, 팀에 '로코도코' 최윤섭이 합류한 서머 시즌엔 탑으로 복귀했으나 8강에 그쳤다. 그가 본격적으로 사람들에게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것은 스타테일이 해체되고, 다시 원딜로 포지션을 변경해 kt 롤스터(이하 kt)에 입단하게 되면서부터다.

kt라는 새로운 옷을 입고 2012-2013 윈터 시즌에 참가한 고동빈은 많은 이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바로 압도적인 KDA 수치로 말이다. 당시 3위로 시즌을 마무리한 고동빈의 KDA는 무려 9.8이었다. 평균 데스는 1.2, 한 경기당 대략 한 번밖에 죽지 않는 수치다. 원딜에게 있어 필수 덕목인 안정감만큼은 최고라 할 수 있었다.

▲ kt 불리츠 시절 '스코어' 고동빈과 그의 서포터 '마파' 원상연

하지만 그의 이런 플레이는 팀의 성적이나 메타에 따라서는 단점이 될 수도 있는 요소였다. 그게 가장 잘 드러난 것은 2014년 서머 시즌. 당시 kt 불리츠가 16강 조별 리그 탈락이라는 최악의 성적을 기록했을 때 가장 큰 패인으로 꼽혔던 건 고동빈이었다. 당시 원딜 캐리 메타가 크게 유행하면서 하드 캐리가 가능한 '임프' 구승빈이나 '데프트' 김혁규 같은 원딜러가 팀을 이끌어가는 추세였기에 고동빈의 안정적이고 팀적인 플레이가 오히려 독으로 작용하고 말았던 것이다. 롤드컵 선발전에서 역시 이렇다 할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곧바로 탈락하게 된 고동빈. 계속되는 부진 속에 찾아온 슬럼프를 극복할 무언가 변화가 필요한 시기였다.

고동빈의 선택은 포지션 변경이었다. 단일팀 체제가 도입된 2015년, kt에 남게 된 고동빈은 돌연 정글러로 포지션을 바꿨다. 결과론적으로 보자면 그를 최고의 자리에 올려 놓는 선택이 됐지만, 훗날 인터뷰에서 고동빈은 포지션을 변경하고 연습 과정에서 어려움이 많아 개인적으로 힘든 시간을 보냈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를 버틸 수 있게 해준 건 그 어떤 보상도 아닌 단지 열심히 하면 견딜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런 노력은 무대에서 고스란히 드러났다.

프리 시즌에 데뷔전을 치른 고동빈은 당시 좋은 기량을 뽐내던 '벵기' 배성웅과 '체이서' 이상현을 상대로 준수한 경기를 펼치며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그리고 경기를 거듭할수록 점점 더 기량이 상승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순식간에 최상위권 정글러 반열에 이름을 올렸고, 국제 대회인 롤드컵과 올스타전에서도 맹활약하며 세계적인 플레이어로 발돋움했다. 하지만 '우승'이라는 타이틀은 손에 닿을듯 하면서도 좀처럼 닿지 않았다.


고동빈에게 숫자 2란?(feat.콩)

오랜 경력과 녹슬지 않는 실력을 자랑하는 고동빈이지만 유독 우승과 인연이 없었다. 덕분에 숫자 2와 준우승을 상징하는 '콩'과 관련한 별명도 다수 가지고 있다. 그 시작은 2013년 롤챔스 서머 시즌, SKT T1(이하 SKT)을 상대로 승승패패패라는 역스윕 패배를 당해 준우승에 머물렀던 것부터였다.

정글러로 포지션을 변경한 2015년, 서머 시즌 결승 무대에 오른 고동빈은 SKT라는 벽에 부딪혀 다시 한 번 준우승에 머물러야 했다. 그리고 대망의 2016년 서머 시즌 결승 무대에서 고동빈에게 콩라인 도장을 단단히 찍어버린 경기가 나왔다.

▲ 바론 체력 '2'

플레이오프에서 천적 SKT를 패패승승승으로 제압하고 결승에 오른 kt. 상대가 정규 시즌에서 압도적인 기량을 보여준 ROX 타이거즈(이하 ROX)였지만, 기세만큼은 kt도 물러설 수 없었다. 양 팀은 서로 한 세트씩 주고받으며 명승부를 펼쳤고, 우승과 준우승을 가르는 마지막 5세트가 시작됐다. kt가 전투에서 이득을 취하며 기세를 타기 시작했고, 정글러인 '피넛' 한왕호를 잘라내고 바론을 두드렸다. 이 바론만 손에 쥔다면 승기를 완벽히 잡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바론 버프의 주인은 다름 아닌 ROX였다. 고동빈의 강타가 바론 체력을 '2' 남겼고, 하늘에서 떨어지는 갱플랭크의 궁극기 '포탄 세례'에 스틸 당하고 만 것이다. 이 바론을 기점으로 경기 주도권은 완전히 ROX 쪽으로 넘어갔고, 22시 22분에 '하차니' 하승찬이 잘리는 결정적 실수가 나오면서 ROX의 승리로 경기가 종료됐다. 이 경기에서 나온 다섯 개의 숫자 2와 준우승 타이틀은 고동빈에게 '콩라인' 이미지를 완전히 심어줬다. 이어진 롤드컵 선발전 결승에서도 kt는 삼성에게 단일팀 체제 이후 처음으로 패배하며 2위에 머물렀다.

▲ KDA, 킬 관여율, DPM 모두 리그 2위를 기록했다.

멤버 대격변을 거친 2017 시즌에도 숫자 2는 고동빈을 떠나지 않았다. KDA, 킬 관여율, DPM 등 정규 시즌의 모든 주요 수치에서 2위를 기록한 것. 게다가 정규 시즌에서 보여줬던 불안한 경기력과 팀워크에도 불구하고 포스트 시즌에 확 달라진 모습으로 결승 무대에 안착하는 데 성공, 최소 준우승을 확보하며 팬들 사이에서는 '콩이 '스코어'를 부른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지독하리만치 질긴, 운명이라면 운명이라고 볼 수밖에 없는 숫자 2와 고동빈의 인연이다.


우승을 향한 그의 도전은 계속된다


물론 준우승이라는 타이틀도 무시할만한 성적이 아니다. 하지만, 최상위권 선수로 평가받는 고동빈이기에 준우승 가득한 성적표가 더 아쉬울 수밖에 없다. 게다가 이번 시즌에는 2016 세체탑 '스멥' 송경호와 중국에서 돌아온 전 삼성 왕조의 멤버 '폰' 허원석-'데프트' 김혁규-'마타' 조세형까지 거물급 선수들을 대거 영입하며 우승을 위한 총알 장전을 단단히 한 만큼 우승을 향한 갈망이 그 어느때보다 클 것이다.

결승에서 kt를 기다리고 있는 건 무결점 플레이를 자랑하며 일찌감치 결승에 직행한 SKT다. 하지만 연승을 거듭하던 MVP와 삼성을 포스트 시즌서 3:0으로 완파하고 결승에 오른 kt의 기세도 만만치 않다. 또한 정규 시즌에서 SKT를 상대로 2전 전패(세트 스코어 2:4)를 기록하긴 했지만, 모든 세트가 누가 이겨도 이상하지 않을 박빙의 승부였다. 게다가 kt는 당시 패인으로 꼽힌 뒷심 부족 문제가 상당히 해결됐다는 것을 지난 경기들을 통해 증명하기도 했다. 단순히 정규 시즌의 결과만 보고 우열을 판가름하기엔 쉽지 않은 승부다.

이제 대망의 결승전이 사흘 앞으로 다가왔다. 이미 세 번이나 미끄러져 상처투성이일 테지만, 여전히 달리기를 멈추지 않고 있는 고동빈. 그의 끝없는 노력과 도전이 과연 2017 롤챔스 스프링 스플릿에서 결실을 맺을 수 있을 것인지, 오는 22일 인천 삼산월드체육관에서 열리는 SKT와 kt의 결승 빅매치에서 그 결과를 확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