퓨터 기술의 발전은 게임의 많은 부분을 변화시켰습니다. 특히, 그래픽 만큼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입니다. 몇 년 전만 해도 '실사와 같은 그래픽'이라고 하면 깜짝 놀라곤 했지만, 지금은 이 수식어가 붙지 않으면 "뭐야, 이거"라며 그냥 무시해버릴 정도까지 왔습니다.


이런 경향은 MMORPG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엔씨소프트가 리니지2를 통해 국내 게임계에 정교한 그래픽의 풀 3D MMORPG를 소개했고, 그 이후에 출시된 월드오브워크래프트(이하 WoW)도 흡사 애니메이션을 보는 듯한 자연스럽고 친화적인 3D 그래픽으로 유저들의 눈을 즐겁게 했습니다. 그 당시 각 커뮤니티 게시판에는 두 게임 간에 각자의 게임성과는 별도로 어떤 게임이 그래픽이 더 좋은지에 대한 열띤 논쟁이 펼쳐졌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결국, 승자는 끝내 밝혀지지 않았지만요.


아무튼, 앞의 두 게임은 국내에서 폭발적인 흥행을 이루어냈고, 그 이후부터 MMORPG는 당연히 풀 3D가 표준인 것처럼 인식 되어 왔습니다. 그 이후에 출시된 게임들을 보면 컨셉 상 횡스크롤을 택하지 않은 경우를 빼고는 풀 3D가 아닌 게 드물 정도니까요.



[ ▲ 리니지2 VS WoW ]




포스트 WoW 또는 리니지 MMORPG 들에서 뛰어난 그래픽과 더불어 또 한가지 강조되는 부분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대규모 전투'입니다. '실사같은 캐릭터들이 수천 명씩 그룹을 지어 화려한 스킬을 난사하며 치열한 전투를 펼치는 판타지 속 세상..'. 머리 속에서 상상만 해도 괜히 즐거워지는 바로 요런 것이죠. 국내 유저들이 MMORPG의 특징이 잘 녹아있는 대규모 전투를 유난히 선호하는 것도 "MMORPG = 화려한 그래픽 + 대규모 전투"라는 경향이 굳어지는데 일조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 중에 수많은 게임들이 제 갈 길을 찾지 못하고 서비스 조기 종료라는 운명을 맞이해야만 했습니다. 또한 그런 MMORPG들의 대부분은 게이머들에게 즐거움을 줄 수 있는 새로운 아이디어 없이 선배들을 단순히 모방하거나 장단점을 그대로 답습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이런 고질적인 악순환이 몇 년간 반복되는 상황이 다름 아닌 대한민국 MMORPG의 현주소입니다.







, 마음을 가볍게 하고 위의 그림을 보면서 함께 상상해 봅시다. 일반적인 '3D' MMORPG의 필드에서 두 플레이어가 서로 PvP를 하고 있습니다. 플레이어1이 플레이어2에게 '파이어볼'이라는 마법을 시전합니다.


서버(Server)는 플레이어1이 사용하는 파이어볼의 효과와 캐릭터의 움직임이 담긴 정보를 플레이어1의 클라이언트로부터 전송 받아서 다시 플레이어2의 클라이언트에 전송합니다. 플레이어2의 클라이언트는 서버로부터 받은 정보를 가지고, 클라이언트에 있는 지정된 그래픽 텍스쳐를 불러와서 몇 가지 과정을 거친 후 플레이어2의 모니터에 그려내게 됩니다.


이는 플레이어1도 마찬가지입니다. 같은 방식으로 플레이어2가 파이어볼에 맞는, 그리고 그 이후의 동작들을 자신의 모니터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 과정은 실시간으로 이루어져야 하고, 두 플레이어간에 시간의 어긋남도 있어서는 안됩니다. 만약, 누군가에게는 실시간으로 보이고, 누군간에는 한참 뒤에 각각의 행동이 보여진다면 PvP는 사실상 불가능하겠죠.


만약에 2D 게임이라면 아무리 화면에 보여지는 캐릭터의 수가 많더라도 클라이언트는 대부분 적은 용량의 텍스처를 불러오거나 기존에 불러온 텍스처를 재활용하기 때문에 큰 부담없이 구현해 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풀 3D MMORPG이며, 하나의 캐릭터를 이루고 있는 폴리곤과 텍스쳐의 수는 2D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많고, 필드에 단 두 사람만 존재하는 경우도 극히 드뭅니다. 이게 문제의 핵심입니다.


방금 두 명의 플레이어가 PvP 하고 있는 상황에서 각자가 자신의 길드원 2명 씩을 더 데려와 함께 플레이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아래는 화살표를 그리다 경우의 수가 너무 많아 다 못채우고 포기해버린 그림입니다.



[ ▲ 정신없이 그리다가 토가 나와서 일단 포기했습니다. ]




원래는 그림에 나온 것 보다 화살표가 더 많아야 합니다. 필드에 한 사람이 더 추가될 때마다 각각 전송하고, 전송받아야 하는 정보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게 됩니다. 서버는 플레이어1의 정보를 전송받아 플레이어2,3,4,5,6에게 다시 전송하고, 정보를 받은 각각의 클라이언트는 실시간으로 이 모든 상황을 모니터에 뿌립니다. 이는 앞서 설명한 것처럼 플레이어2도 마찬가지고, 플레이어3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치 거미줄 처럼 각각에 대한 정보를 서버에 전송하고, 다시 서버는 각각의 플레이어에게 재전송합니다. 실시간으로요.


활동하는 캐릭터가 많아지면 많아질 수록, 각 클라이언트는 서버로부터 엄청난 양의 정보를 전송받게 됩니다. 각 캐릭터의 동작, 음성, 효과음 등 모든 것을 실시간으로 동기화해야 합니다. 해당 MMORPG의 그래픽 퀄리티가 리니지2나 WoW을 넘는 상당한 수준이라면 전송되는 정보의 양은 다시 한번 크게 증가합니다.


각각의 캐릭터는 물론이요, 수 많은 캐릭터의 광원효과, 그림자효과 등의 부가적인 그래픽 효과까지 클라이언트가 한번에 처리해내야 하는 상황에 이르게 되고, 결국 클라이언트는 자신의 한계를 견디지 못하고 조금씩 느려지다가 결국 활동을 멈추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MMORPG를 플레이하면서 종종 겪는 '렉' 현상입니다. 서버 마저 주고 받는 정보 때문에 그 한계를 견디지 못한다면, 서버다운으로 이어지게 되죠.


하지만, 현실은 5~6명 내지는 10~20명 정도가 아닙니다. 대부분의 MMORPG들이 수십, 수백명은 기본으로 보고 있으며, 최근 오픈한 모 MMORPG는 1000:1000 전투를 표방하고 있습니다. 이런 대규모 인원이 한 자리에 모인 상황에서 해당 MMORPG가 퀄리티가 뛰어난 풀 3D 그래픽임을 가정한다면, 아무리 최신 기술이 발전했다고 하더라도, 현재의 하드웨어와 인터넷 회선은 쉽사리 감당해 낼 수가 없습니다. 이런 것을 고려한다면 대규모 전투에서 렉이 생기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할 정도입니다.


WoW 오리지날 때의 안퀴라즈 사건과 지금의 필드 전장, 겨울손아귀호수으로 인한 극심한 렉, 그리고 매 순간이 정지되어 제대로 플레이가 불가능했던 리니지2 초기의 공성전이 바로 그 증거입니다. 그래서, 리니지2는 공성전 맵에 진입할 때는 강제적으로 사양을 일시적으로 대폭 낮춰 이런 문제를 해결해 보고자 했습니다. WoW도 호드와 얼라이언스의 대립이라는 주요 컨셉을 희석시키는 리스크를 감수하면서, 오리지날 이후 대부분의 주요 컨텐츠들을 필드가 아닌 인스턴스 지역에 구현해 오고 있습니다.



[ ▲ 3D MMORPG에서 사람이 몰리면 여지 없이 등장하는... ]




이런 것을 보면, MMORPG에서 그래픽의 발전은 기술적인 한계와 맞물리면서, 게임성과 시스템적인 면에서 많은 제약을 가하고 있다는 것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천문학적인 개발 비용과 기간이 투입되면서 상당한 기대를 모으던 해외 MMORPG 2종이 작년에 출시되었습니다. 에이지오브코난과 워해머 온라인. 둘다 화려한 그래픽과 대규모 전투를 가장 큰 특징으로 내세웠지만, 안타깝게도 좋은 성적을 거두지는 못했습니다. 물론, 직접 해보면 누구라도 게임성에는 고개를 끄덕거리지만, 대부분 초반 이후 컨텐츠 외에는 거의 구현되지 않았다는 것을 지적합니다. 즉, 최종 목표로 하는 컨텐츠 양이 100이라면 겨우 20~30을 완성하는데 머무르고 있습니다.


이 두 게임의 사례는 화면상에 보여지는 모든 유저들의 행위가 실시간으로 동기화가 되야 하는 MMORPG에서 극한의 그래픽을 추구하는 것은 아무리 많은 돈과 인력, 시간을 투자한다고 하더라도 일부 '월드' 조차 구현하기가 힘들다는 것을 반증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왜 국내 개발사가 제작한 MMORPG들이 말 그대로 '허허벌판에 캐릭터가 몹을 잡을 수 있는 정도'만 해서 클로즈베타를 시작하는지 약간은 이해가 될 수 있습니다.


또 하나, MMORPG에서의 그래픽은 최초 제작과 추가적인 업데이트시의 '비용적인 문제'를 야기시킵니다. 리니지2를 예를 들어 봅시다. 리니지2는 아이템 등급제를 채택하고 있습니다. 전체 아이템들은 각각의 등급이 나눠지고, 각 등급 안에는 아이템에 성능에 따른 또 다른 서열이 있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유저들은 각 등급 안에서 오직 최고의 아이템만을 사용하려고 합니다. 이런 아이템 시스템의 맹점으로 인해 각 등급의 최고급 아이템 외에는 거의 버려지는 형태가 되는거죠.


하지만, 풀 3D 게임이기 때문에 제작사는 수많은 그래픽 디자이너를 확보해 그것이 버려지든, 귀중하게 다뤄지든 똑같이 각 종족별, 각 성별에 맞는 그래픽 텍스쳐를 제작해야만 합니다.


예를 들어 '푸른 늑대의 흉갑'라는 방어구 아이템이 업데이트 될 예정이고, 그 아이템이 B 등급의 최하위 아이템이어서 유저들로부터 버림받을 것이 확실하다고 해도, 드워프가 착용했을 때의 외형과 엘프가 착용했을 때의 외형을 각각 제작하고, 추가로 남성, 여성 캐릭터에 크기와 모양이 맞도록 추가 제작해야 합니다. 그나마, 국내에서 제일 규모가 큰 엔씨소프트다 보니 수백명의 그래픽 디자이너를 채용해서라도 완성시키는 거지, 대부분의 중소 업체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수준입니다. 보통 MMORPG에서 별거 아닌 업데이트를 질질 끌면서 유저들을 속 태우는 것도 이 때문이죠.


WoW를 보면 '우려먹기'의 달인이라고 할 정도로 기존 아이템 외형을 그대로 가져다 쓰면서 '색'만 살짝 바꾸는 경우가 많은데 이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풀 3D 그래픽를 MMORPG에 도입하기로 결정한 그 순간부터 이와 같은 '고비용의 족쇄'는 개발자와 제작사를 사정없이 압박하기 시작합니다.



[ ▲ 저희가 이러고 싶어서 이러는게 아닙니다.(?) ]





실, 친분이 있는 국내 개발자들을 사석에서 만나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눠보면, 정말 획기적인 아이디어가 많이 나옵니다. 그 중에는 실제 구현되면 유저들로부터 상당한 인기를 끌만한 획기적인 것들도 종종 나오고요. 어차피 개발자도 개발자 이전에 게임에 열광하는 하드코어 게임머이기 때문에, 이는 어찌보면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출시되는 결과물을 보면, 글의 서두에 언급한 것처럼 과거를 그대로 답습하는 게 대부분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실망도 많이 했었습니다. 하지만, 곰곰히 생각해보면 대규모 전투와 화려한 그래픽을 원하는 유저들의 기대에 부응하려다 주어진 비용과 시간, 인력에 한계에 부딪혀 좌초된 것은 아닌지 심히 안타깝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제는 개발사들도 그 부분을 잘 알기에 MMORPG 보다는 아예 인스턴스 지역이 주 활동 영역이 되는 마비노기 영웅전 또는 C9 같은 MO 액션 게임들을 더 많이 출시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역시나 게시판 등을 보면 아직도 대부분의 유저들은 심리스 방식의 거대한 필드를 더 선호하는 듯 합니다. 대규모 전투도 마찬가지고요.


분명, MMORPG에서 그래픽이 만들어내는 딜레마는 게임을 제작하는 주체인 제작사와 개발자가 하드웨어 발전에 맞춰서 풀어 나가야 할 필연적인 숙제입니다.


하지만, 게임을 만드는 입장에서 '풀 3D MMORPG'를 시도했을 경우 감내해야 하는 구현적, 그리고 비용적인 부담은 새로운 게임성과 아이디어를 시도할 수 없게끔 만드는 벽이 되고 있습니다. 사실, 일명 온라인 게임 1세대 때 출시된 2D MMORPG들과 요 근래 몇 년간 출시되었던 국산 MMORPG를 비교해보면, 예전의 게임성을 반에 반도 담지 못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최근, 오래 전에 출시한 올드게임들에 유저들이 대거 복귀하는 것도 어떻게 보면 과거를 그리워 하고 있다는 반증일 수도 있습니다.


직접 플레이하는 유저들도 화려한 그래픽 보다는 게임성과 개발자의 아이디어를 먼저 눈여겨 보는 너그러운 마음을 가져주신다면, 제작사와 개발자들도 그래픽적인 제약 때문에 수 년간 '마을' 하나, '월드' 하나 만들어야만 하는 제약에서 벗어나, 자신이 오래전 부터 품고 있던 신선하고 기발한 게임성과 아이디어를 게임 속에 적절하게 풀어낼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될 수 있습니다.


그렇게만 된다면, 예전의 그 때처럼 국내 MMORPG가 재도약 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한번 해봤습니다. 전 세계 휴대용 콘솔 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닌텐도 DS가 오직 그래픽 퀄리티로만 승부한 것이 아닌 것 처럼요.



[ ▲ 사진 속 게임은 울티마 온라인 ]



Inven Vito - 오의덕 기자
(vito@inve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