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스포츠는 각본 없는 드라마라고 한다.
경기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팽팽한 긴장감과 절정으로 치달아가는 승부, 그리고 극적인 반전과 함께
승패가 결정되는 모습은 기-승-전-결 로 이루어진 극(드라마)의 구조와 흡사하다.
아니, 연출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더욱 스릴 있고 생생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이처럼 드라마틱한 경기는 깊은 인상을 남기게 되는데, 사람마다 몇 개씩은 잊혀지지 않는 감동의
장면들이 있을 것이다. 치열한 한일전 경기일 수도 있고, 대기록의 위업을 달성한 순간 일수도 있다.
기자는 손발이 오그라들 만큼 짜릿한 전율을 느낀 최고의 장면을 다름 아닌 한 게임 경기를 통해 기억한다.



EVO 2004 MOMENT # 37
2004 에볼루션 대회, 장면 37

The Beast… is UNLEASHED !
야수가 해방되었다.






위의 동영상은 대전 격투 팬이라면 대부분 알고 있을 정도로 유명한 것으로, 「스트리트 파이터 III」대회
준결승전 1 세트 경기를 담고 있는 영상이다.



때는 2004년... 스트리트 파이터 시리즈의 마지막(당시로써는) 버전 업인
STREET FIGHTER III : 3RD STRIKE 가 출시된 지 수 년이 흐른 때로 기술의 이해도와 전술적인
완성도가 극에 다다른 시점이었다.



더 이상의 명장면은 없을 것처럼 생각되던 그 당시, 미국 라스베이거스에 위치한 한 경기장에서
아직도 전설로 회자되는 격투게임 최고의 장면이 만들어졌으니... 위 동영상에서는 이것을
야수의 해방이라고 말하고 있다.



The Beast (야수)라는 단어는 격투게임 계에서 신화적인 존재로 자리하는 한 인물을 지칭한다.
The Beast DAIGO 라고 불리는 우메하라 다이고, 그는 일본 도쿄 출신으로 당시 캡콤
개발본부장 이었던 ‘오카모토 요시키’ 가 10 년에 한 번 나올 인재라고 평가 할 정도로 천재적인 게이머였고,
상대 캐릭터 “춘리”를 플레이한 저스틴(justin wong)이라는 선수 역시 다이고에
전혀 밀리지 않는 초고수 플레이어였다.



둘은 대회 준결승전에서 맞붙게 되었는데 경기 룰은 3 세트 2 선승 제였고, 1 세트는 다시 3 라운드 중
2 라운드를 따내면 되는 방식이다.



경기가 시작되고 첫 세트의 1 라운드는 다이고(켄)의 승리, 2 라운드는 저스틴(춘리) 승리로 1 : 1 상황에서
격투 게임 전설의 동영상이라고 불리는 바로 그 장면이 탄생한 3 라운드가 시작된다.




[ 준결승전 1세트 1,2,3 라운드 동영상 ]





3번째 라운드인 만큼 초반에는 10 여 초 간 별다른 공격 시도 없이 탐색전을 벌이게 된다. 그러던 중
갑자기 시작된 저스틴의 공격으로 연달아 2번의 봉익선을 허용하며 다이고의 체력이 급격하게 소진되었다.
이때 저스틴의 체력은 거의 가득 찬 상태였으므로 다이고에게는 절망스러운 상황이 되어버렸다.



반면에 절대적으로 유리한 상황을 맞이한 저스틴은 안정적인 승리를 위해서 방어적인 전법을 택하였다.
자잘한 공격만으로도 충분히 상대를 눕힐 수 있기에 위험부담이 적은 소극적인 공격만 유지한 채
시간을 벌어가면서 느긋하게 플레이를 펼치게 된다.



그러나 누구라도 힘이 빠질 만한 이 상황에서 다이고는 최후까지 승리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았다.
조급한 기색 없이 침착하게 스텝을 밟으며 상대의 방어적 심리를 이용해서 구석 쪽으로 밀어붙였고
코너까지 밀린 저스틴은 결국 몇 번의 심리전에 걸려 체력이 절반 넘게 소진된 채 탈출한다.



이후 서로 동시타격을 허용하며 다이고의 체력은 실낱만큼 만큼 남게 된다.
말 그대로 스치기만 해도 죽는 상태로, 막는 것(가드)조차 무의미한 절체절명의 상황을 맞이한 것이다.




[ 동시 타격 ]



그때까지 기세를 잃지 않기 위해 계속해서 공격을 이어가던 다이고는 일순간 공세를 멈추고 마치
무언가를 기다리는 듯 일정거리만 유지한 채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는다. 이 순간 둘 사이에는
묘한 정적이 흐르며 저스틴의 머릿속은 복잡해지기 시작한다.



격투게임의 고수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곧 초 집중상태로 무언가를 기다린다는 것임을 잘 알고 있다.
저스틴은 지금 다이고가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고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보기 위해
똑같이 기다리면서 움찔움찔 몇 번의 페이크를 건네 보았지만 다이고는 그저 고요할 뿐이었다.



이렇게 시간이 흘러만 가면 결국 승리는 자신의 것이 되겠지만 저스틴은 코앞까지 다가온 승리의 유혹과
팽팽한 심리적 대치상황의 압박을 참아내지 못하고 결국 미끼를 물게 된다. 다이고가 기다리는
바로 그 한 수, 봉익선을 시전해 버린 것이다.




[ 봉익선(鳳翼扇) ]



봉익선(鳳翼扇)은 난타형 발차기인 백열각의 돌진형 필살 기술로 연타속도가 빨라
블로킹이 힘들고 막기(가드)를 해도 일정한 피해를 입기 때문에 상대의 체력이 거의 없는 상황에서
확정적인 마무리 기술로 최적의 기술이라고 할 수 있다. 저스틴으로서는 그 당시 최적의 선택을 한 셈이다.



봉익선이 발동되고 다이고의 눈앞까지 발차기가 쇄도해 들어가던 그 순간, 다이고의 패배는
결정난 듯 보였고 장내는 고요해졌다. 하지만 그때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다이고는 그 상황에서 자신에게 최악의 기술인 바로 그 봉익선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한타 한타 한타… 총 15번의 숨 쉴 틈 없이 몰아치는 발차기가 블로킹으로 막힐 때마다
탄성이 흘러나왔다. 수많은 스트리트 파이터 게이머들이 꿈에서나 그려보던, 이론으로만 가능했던
그런 일이 벌어진 것이다.




[ 공중 블로킹 ]




여기에 쓰인 블로킹 이라는 기술은 일반적인 막기(가드)와 다른 것으로 상대의 공격이
히트하려는 순간에 레버를 앞으로 전진시켜 가드 시 발생하는 피해까지 없애고 경직시간을 줄여주어
반격의 기회를 잡는 초 고 난이도의 기술이다.


상대의 기술과 타이밍을 정확히 예측하지 못하면 사용하기 힘들기 때문에 저스틴이 봉익선을
마무리 기술로 사용할 것이라는 데에 모든 것을 걸은 올인 승부였던 것이다.


처음의 타격 타이밍에 정확하게 반응한 것 뿐 아니라 왼발 7타 오른발 7타 도합 14번의 발차기를
정확하게 계산해서 막아내고 피니쉬 1타는 점프해서 블로킹한 후 공중 콤보와 연이은
질풍신뇌각(疾風迅雷脚)으로 마무리 하게 된다.



바로 여기에서 또 한 번 다이고의 침착함과 용의주도함을 확인 할 수 있다. 마지막 1타를 공중에서
블로킹 했다는 것은, 이어지는 공중콤보, 질풍신뇌각의 데미지와 상대 잔여 체력을 정확하게 가늠해서
마무리를 시도 했다는 것이다.



결국 애초에 봉익선을 기다리는 시점에서 자신의 빈사상태를 이용한 유인책과 상대의 남은 체력을 계산한
한 방 마무리까지 모든 것이 계산 되어져 있었다는 이야기다. 장면을 보면 볼수록, 알면 알수록
소름이 돋을 수밖에 없다.




[ K.O. 다이고 1 세트 승리 ]




그렇게 시간이 멈춘 듯 길고 긴 몇 초가 지나고 승패를 알리는 K.O. 마크가 나타나는 순간
장내는 환호성과 박수소리로 가득 메워졌다. 모두 일어선 채 열광적인 함성을 지르는 모습이 증명하듯이
그야말로 길이길이 남을 명장면이 만들어진 순간이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마지막 구절이 다시 한 번 심금을 울린다.


... you had to be there.
당신은 그 자리에 있었어야 했다.



이후 다이고는 남은 한 세트마저 2 라운드 연속으로 따내며 승리하고 결승전에 진출하지만
아쉽게 패배하여 준우승에 머물게 된다.



전설의 동영상은 여기서 이렇게 끝나지만, 그는 아직도 현재 진행형인 게이머이다. 은퇴 후 한동안
모습을 보이지 않았으나 최근 「스트리트 파이터 IV」 의 발매와 더불어 다시 한 번 전설을 만들기 위해
활동하고 있다고 하니 다음 행보가 기다려진다. 과연 다시 한 번 그 전율을 느낄 수 있을까.




[ 스트리트 파이터 IV, 다이고(류)의 역전승 경기 ]


※ 우메하라 다이고 팬 사이트 (http://beastdaigo.j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