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임, 신뢰, 그리고 자율성'

좋은 팀을 설명하기 위해 자주 사용되는 단어들이다. 이 단어들을 몸에 지니고 있던 팀들이 모두 위대했던 것은 아니지만, 위대한 팀에는 세 개의 단어가 따라다녔다. 그렇지 않은 경우는 거의 없었던 것 같다.

DRX와 이야기를 나누며 떠오른 키워드를 나열하니, '책임-신뢰-자율성'이 배치됐다. 위대한 팀이 탄생할 거란 오두방정을 떠는 것은 아니다. 솔직하게 DRX가 2021년 어떤 성적을 거둘지 여전히 감이 오지 않는다. 최상위권을 노릴 만한 개인 기량인가? 아직은 글쎄.

다만, 두 가지 생각은 떠올랐다. 옳게 구성된 선수단이구나. 재미있는 경기를 하는 팀은 되겠구나. 그 정도는 주장할 수 있을 듯하다. 적어도 응원하는 팬들에게 즐거움과 희망을 줄 것 같았고, 어이없는 실망감은 남기지 않을 것 같았다.



-책임

혼란스러운 체계를 가지고 있던 DRX는 최병훈 단장을 영입하면서 정상 궤도에 진입하고 있다. 최 단장은 입단과 동시에 굵직한 일들을 해결했다. 김대호 감독이 자격 정지를 당한 급박한 상황에서 김상수 감독 대행을 선임했다.

최 단장은 "팀 전체는 물론이고 나부터 굉장히 당황했다. 하지만 선수단이 중심을 잡기 위해서는 감독 대행이 있어야겠다는 생각이 금방 자리 잡았다. 워낙 신인 선수들이 많은 로스터였다. 감독 후보군을 두고 고민이 많았다"라며 당시를 회상했다. 프랜차이즈를 맞이해 2군 코치진과 로스터를 구성하고 정리한 것도 최병훈 단장이었다. 선수단에 관한 모든 관리 영역을 담당하고 있다. 큰 것부터 작은 것까지 모두 그의 손길 안에 있다.

그렇다고 선수단의 게임 내적인 영역에 관여하는 건 아니다. 이는 오롯이 김상수 감독 대행과 김무성 코치의 울타리 안에 있다. 김 감독 대행은 깊은 선수-코치 경험을 바탕으로 밴픽과 팀 전체적인 관리에 집중한다. 프로 선수로서 나아가야 할 방향까지 제시해준다고 한다.

피드백 큰 줄기 역시 김 감독 대행의 권한이다. 김 감독 대행은 "넓게 보려고 한다. 피드백 시간에 어떤 점을 선수들에게 강조했으면 좋겠는지, 어떤 것이 선결 과제인지를 무성 코치와 상의한다"라고 전했다. 그리고 피드백 시간에 무성 코치가 말하지 못한, 부족한 부분이 있었다면 추가 전달 사항을 알리고 선수들의 심리적인 면을 돌본다.


피드백 시간을 주도하는 사람은 김무성 코치다. 무성 코치가 지난해 DRX가 보여준 게임 스타일, 방향성을 모두 체득하고 있는 유일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최 단장은 "계속해서 피드백을 하고 있었고, 선수단 역시 무성 코치가 하는 피드백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상황이었다. 현재 역할에 익숙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덕분에 김상수 감독 대행은 밴픽에 더욱 집중할 수 있게 됐다. 김 대행은 "약간 운이 따르기도 했겠지만, 여태까지 경기들 모두 구상했던 대로 흘러갔다. 상대 밴을 예측했고, 스크림 때 연습했던 챔피언들이 높은 확률로 대회까지 이어졌다. 연구에 많은 시간을 쏟을 수 있었기 때문이지 않았나 싶다"라며 조심스럽게 이야기했다.


-신뢰

명확하게 나뉘어 있는 책임, 그 밑바탕에는 신뢰가 깔려 있다. 먼저 신뢰를 보내준 사람은 최 단장이었다. 최병훈 단장은 김상수 감독 대행과 먼저 충분한 공감대를 형성했고, 이를 바탕으로 영입했다고 한다.

최 단장은 "처음 오퍼를 넣었을 때는 고민을 많이 하셨다. 나 역시 이유에 대해서 공감됐다. 기존 색깔이 강했던, 만들어진 팀에 급하게 들어오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김 감독 대행이 여러 부분에서 열려 있는 분이셨고, 북미 생활 후반기에 아쉬웠던 성적을 만회하고 싶어 하는 열망이 강했다. 자신의 가치를 보여주려는 의지가 뚜렷했다"고 기억을 떠올렸다.

김상수 감독 대행이 기존 팀의 색깔에 관한 이해와 존중을 보여준 것도 두터운 신뢰를 쌓을 수 있는 이유였다. 최 단장은 "선수단 기존 틀을 김상수 감독 대행이 건들고 싶어 하지 않았다. 유연한 분이다. 우리는 신인이 많고, 약간 가둬있지 않은 자유로운 분위기가 특징이다. 생활은 물론 게임 내적인 부분에서도 그랬다. 잘 융화되면서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는 분이 필요했는데, 그게 김상수 감독"이라며 미소를 띠었다.


김 대행의 이해와 존중 덕분에 무성 코치는 피드백 권한을 받을 수 있었다. 김 감독 대행은 "분명 욕심도 있었다. 하지만 욕심을 내기보다는 무성 코치에게 맡기는 게 팀을 위해 좋아 보였다"고 운을 뗐다.

그리고 "무성 코치가 라인전 디테일을 정말 잘 본다. 대회 중간에는 이런 사람이 피드백을 해야 효과가 좋다. 피드백 시간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방대하고 많은 정보를 주는 거보다 짧은 시간에 몰입감을 느낄 수 있도록 전달해야 한다. 하나라도 확실하게 알아가는 게 그 시간에는 중요하다. 이런 프로세스를 진행하기 위해서는 내 욕심을 차리면 안 됐다. 내가 알고 있는 모든 걸 주입하려고 하면 오히려 부정적이다"라고 설명했다.

무성 코치에게 피드백 권한을 준 이유는 하나가 더 있다. 어떻게 하면 더 좋은 환경을 제공해줄 수 있을까라는 고민 끝에 나온 결과였다. 김 대행은 "피드백을 주도하게 되면 책임감을 느끼고, 성과를 냈을 때는 보상을 받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또한 일에 대해 보람도 더 있을 거고, 더 집중할 수 있을 것 같았다"며 의견을 밝혔다. 그는 김무성 코치가 유쾌하고 야망이 있으며, 책임을 질 줄 아는 사람이라는 말을 덧붙였다.

현재 DRX를 향하는 코칭 철학도 들어볼 수 있었다. 키워드는 역시 '신뢰'였다. 김 대행은 "신뢰가 있으면 욕심이 줄어들고 역할을 분담하게 된다. 책임이 생기는 거다. 그래야 실패했을 때 미안함과 전우애를 느낄 수도 있게 된다. 또 신뢰가 있어야 개인이 자신의 능력을 원 없이 보여주고 보상을 받을 수 있다. 그런 팀을 원한다"고 강조했다.



-자율성

책임과 신뢰만으로 DRX의 중후반 게임 능력이 설명될 수 있을까. 최병훈 단장은 '킹겐' 황성훈의 인터뷰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 인터뷰가 정말 와닿더라. 김상수 감독 대행은 플레이의 제한을 두지 않는다고 했는데 정말 그렇다. 덕분에 선수들이 슈퍼 플레이를 마음껏 펼칠 수 있고, 좋은 한타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 처음 미팅 때부터 게임 내외로 사고가 열린 사람이라는 느낌이 강했다"며 호평을 보냈다.

DRX가 가진 보물은 자율성이었다. 김상수 대행도 이에 동의했다. 그는 "우리의 한타 능력은 자율성을 억제하지 않고 개인들의 실수와 욕심을 조율해서 나오는 현상 같다. 신인이라는 틀에 갇혀서 일단 실수를 줄이고, 기계적인 운영만 하겠다고 계획을 짰다면 그런 한타들이 나오지 못했을 거다"라고 설명했다.

주장을 맡은 '솔카' 송수형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조금 이상하거나 특이하게 싸움 각을 볼 때가 있다. 하지만 감독-코치님이 별말 하지 않으시고, 이대로 해도 괜찮을 것 같다고 말씀해주신다. 그래서 좋은 싸움으로 연결될 때가 많았다. 요즘 말로 깨어있으신 분들이다"라고 밝혔다.

깔끔함과 담백함도 있다. 자율성 사이에 창조성을 만들기 위한 수단으로 김 대행이 사용하는 단어들이다. "더 깊게 얘기하면 우리는 신인팀이라 너무 어려운 걸 추구하기보단 즐기고 쉽게 소화할 수 있는 것들은 준비해야 한다. 그러면서도 가볍거나 수동적이지 않아야만 한다"고 말했다.



-속성으로 지었으나, 착실한 내진설계

어수선했던 DRX는 반듯하게 정돈된 분위기를 풍겼다. 최병훈 단장은 모든 부분에서 빠르게 중심이 잡혔다고 기뻐했다. 각자 자신의 위치에서 역할을 충실하게 이행해낸 결과라는 것이다. 주장 '솔카'는 "지금은 체계적으로 자리를 잡았다는 생각이 든다. 감독님은 게임 지식이나 경험이 풍부하시고, 무성 코치님은 피드백을 정말 잘하신다"며 칭찬 일색이었다.

'솔카'는 말을 이어갔다. "처음 김대호 감독님이 자격 정지를 당했을 때는 선수단이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나는 많이 현실적인 사람이다. 우리가 바꿀 수 있는 건 없으니, 상황에 최선을 다하자고 이야기를 했다"며 침착한 표정을 지었다.

뚜껑을 열어보기 전에는 여러 전문가들이 DRX를 꼴찌와 근접한 팀이라고 평가했다. 잘해야 6위를 두고 포스트 시즌 싸움을 할 거라고. 그러나 시즌 초반인 지금 4승 2패 +1로 4위에 있다. 한화생명e스포츠와 비교해 세트 득실 하나가 부족할 뿐이다. 최고의 반전을 보여주는 팀이라고 해도 잘못된 표현은 아닐 거다.

아직 어떻게 끝이 날지는 모른다. 몇몇 강팀과의 대전이 남아있고, 초반 지표가 좋지 못하다는 단점이 두드러진다. 모든 게 불투명한데, 그럼에도 한 가지는 명확하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지금까지 시청자들은 결코 DRX 경기를 지루해하지 않았다. 벌써 절반 이상의 성공을 거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