훌륭한 덕겜의 표본, 덕심을 이어가게 할 후속타가 관건


이제는 몰?루콘으로 더 잘 알려진, '블루 아카이브'가 2월 4일 일본 선출시에 이어 마침내 지난 9일 정식 출시됐습니다. 서브컬쳐의 본산지 일본에 먼저 출시한다는 소식이 들렸을 때만 해도 유저들의 반응은 사실 반신반의했습니다. 시기가 안 좋아서 아주 강력한 경쟁작과 맞부딪힌 데다가, 일본 서비스 초기엔 서버가 불안정해서 4대 명검 중 임시 점검과 연장 점검이 몇 번이나 뽑히곤 했으니까요.

그래서 다른 국산 덕겜들처럼 일본 시장의 벽을 못 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있었지만, 이벤트 때마다 나름 준수한 매출에 각종 2차 창작이 이어지면서 서브컬쳐 유저들에게 꾸준히 어필해오고 있습니다. 특히 일본 서버에서 지난 10월 12일까지 한 '선상의 바니 체이서' 이벤트의 픽업 캐릭터들은 일러스트 커뮤니티 해시태그 상위권에 오르기도 했고, 이벤트가 끝난 지금도 자주 일러스트가 올라오곤 했죠.

보통 게임의 성과를 얘기할 때 매출 순위를 지표로 이야기하는 게 보통이라 이런 말을 대뜸 꺼내는 게 낯설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덕겜'이란 이런 분야입니다. 눈길이 가는 캐릭터부터 시작해서, 밈이 돌고 그것이 재창작되다가 그런 것들을 통해 흔히 말하는 입덕을 하면서 차츰차츰 정을 쌓이고, 그게 반복되면서 다른 종류의 무한동력이 돌아가는 구도니까요.

이미 일본 서버에서 플레이해본 사람도 있고, 전해들은 것이 있다보니 아마 사전 설명은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김용하 PD를 비롯해 서브컬쳐에 정통한 개발진들이 각을 잡고 만든 작품이니까요. 그런데도 굳이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간단합니다. 이건 '진짜'라는 거죠.

게임명: 블루 아카이브(Blue Archive)
장르: RPG
출시일 : 2021. 11. 9
개발 : 넷게임즈
배급 : 넥슨
플랫폼: 모바일



덕후가 아니고선 만들 수 없는 소재에 세심하고 깨알 같은 디테일


보통 서브컬쳐, 덕겜하면 눈이 한 근은 되어보이는 미소녀들이 등장하는 게임 혹은 애니메이션풍의 무언가를 채택한 게임이라고 뭉뚱그려서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게임을 덕후라면 다 좋아하지 않을까, 막연하게 판단하고 시장에 내놓기도 하죠. 물론 그게 99% 맞는 말이지만, 개중에는 일부 서브컬쳐 유저에게만 호응받는 식으로 소재를 풀어가거나 덕후가 아닌 일반적인 유저들까지 폭넓게 겨냥하다보니 '덕겜이 아니다'라고 판정을 받기도 합니다.

후자의 경우는 보통 덕들에게 잘 먹힐 소재들에 대한 이해도가 부족해서 어딘가 어긋나버린 물건을 내놓곤 하죠. 그런 케이스가 국산 덕겜에서 꽤 여러 번 있었기 때문에 국산 덕겜이 나올 때마다 매번 불안감을 표했던 것이지만 블루 아카이브는 좀 결이 달랐습니다. 서브컬쳐 스타일에 대한 이해도가 부족하다면 도저히 소화해낼 수 없는 소재를 정말 훌륭하게 다뤘기 때문이죠.

블루 아카이브가 표방하는 키워드를 보면 학원, 청춘, 밀리터리, 판타지입니다. 왜 하필 밀리터리지?라고 의아할지 모르지만, 흔히 말하는 '덕'들 중에 밀리터리에 대한 환상을 가진 층은 꽤 많습니다. 국내에서는 학원물에 밀리터리 요소를 가볍게 섞은 판타지는 "이게 말이 돼?'라고 하면서 보통 잘 안 다루는 소재지만요.


▲ 이미 밈으로 잘 알려져있지만, 농담이 아니라 진짜로 이렇습니다

▲ 최신형 전차의 전투력은 3여고생이니, 4여고생이면 능히 제압을...이 아니라, 학원 도시에 뜬금없이 전차가?

블루 아카이브는 이걸 심각하지 않고 발랄하고 가볍게, 그리고 얼렁뚱땅 넘어가는 그 매력을 잘 살려냈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스포일러이긴 하지만 이미 밈으로 퍼져버린 "은행을 털자"를 비롯해, FLAK 41 대공포 맞고도 양호실에 쉬면 낫는다거나 허구헌날 폭파당하는 급양부가 며칠 지나면 예산은 깎여도 멀쩡히 다시 운영된다거나 등등. 일반 상식으로는 총기로 무장한, 혹은 탱크까지 몰고 다니는 교복 미소녀들의 밝고 건전(?)하면서 스펙타클한 일상이 핍진성이 없고 허무맹랑하게 보일지 모르겠습니다.

일본 서비스할 때도 대략 알고는 있었는데, 그걸 우리말로 읽어보니까 기대 이상(?)으로 훅 들어오는 느낌이었거든요. 만일 국내에서 먼저 서비스했다면 "이게 정말 될까? 코어한데?"란 생각이 절로 들 정도였습니다. 일본 서비스가 먼저 진행되면서 퍼진 밈 등으로 예방주사를 맞아서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항마력이 부족한 유저에겐 다소 다른 의미에서 과한 자극이 됐을지도 모릅니다.

▲ 음, 이것은 마치 부먹과 찍먹처럼 중대한 문제...가 아니라, 그렇다고 급양실을 진짜로 털 줄이야

그런 게 일반적인 스타일이라 국내에선 잘 시도되지 않았던 본토풍의 밀리터리 섞인 학원물의 느낌이 블루 아카이브에서는 각이 살아있었습니다. 특히나 요즘 밀리터리 요소를 채택한 덕겜들 대다수가 포스트 아포칼립스의 묵직한 분위기 위주라 산뜻함이 더 돋보이기도 하죠. 그 산뜻함이 단순히 일회성으로 끝나지 않게 캐릭터들의 컨셉이나 방향성도 잘 잡혀있고, 그 조합으로 빚어내는 스토리의 방향도 잘 갖춰져있습니다.

캐릭터들의 면면을 보면, 서브컬쳐 게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속성을 확실히 캐치할 수 있습니다. 쿨한 인상이지만 엉뚱한 매력이 있는 시로코, 전형적인 트윈테일 츤데레 세리카, 광기 그 자체로 보이지만 선생님만 보면 순애 그 자체로 변하는 츠루기, 카리스마 있어보이지만 허당 그 자체인 쵸로인 아루, 그런 아루를 부추기면서 남들이 곤혹스러워하는 걸 보고 즐기는 귀여운 메스가키 악동 무츠키 등등. 서브컬쳐 계열을 접하지 못했다면 다소 낯선 용어들이겠지만, 플레이하면서 그 속성과 매력을 진하게 담아낸 캐릭터들이 딱 한눈에 들어왔습니다. 스토리나 캐릭터의 대화를 보면 볼수록, 그 풍미가 더욱 진하게 느껴졌죠. 그냥 겉핥기로만 배웠다면 흉내낼 수 없는, 그 특유의 엉뚱하고 톡톡 튀는 서브컬쳐풍 학원물의 면모가 담겨있었거든요.


▲ 훌륭한 캐릭터 속성의 표본이로군.jpg

게임의 구성을 봐도 서브컬쳐 게임에서 기본이라고 할 수 있는 요소는 충실히 다 갖춰져있습니다. 로비 화면은 물론이고 캐릭터와 호감도를 쌓을 수 있으면서 이리저리 꾸며볼 수 있는 숙소 콘텐츠인 카페, 자기가 좋아하는 캐릭터의 이야기를 다룬 인연 스토리, 메인스토리 외에도 각 학원 및 동아리에 소속된 캐릭터들의 비하인드 스토리까지 볼 수 있는 서브 스토리까지 구비되어있죠. 풀더빙까지는 아니지만 중요한 부분은 더빙이 되어, 몰입감까지 어느 정도 갖췄습니다.

그중 덕심을 관통하는 가장 핵심 포인트를 하나 꼽자고 하면, 몰?루의 주인공, '아로나'를 꼽겠습니다. 밈이 너무 퍼져서 "얜 플레이어블로 안 나옴?" 이런 질문을 가끔 듣긴 하는데, 실제로는 비서 AI죠. 귀엽고 발랄한 캐릭터 디자인에, 음성합성 시스템이긴 하지만 직접 제 아이디까지 붙여서 말을 걸어주는 걸 듣고 있노라면 진짜 AI 미소녀와 컨택한 느낌이거든요. 처음에 만났을 때부터 마주보면서 손가락을 마주대는 듯한 구도부터 심상치 않았는데, 거기까지 듣노라면 정말 빠져들 수밖에 없죠. 아마 덕후가 아닌 분들이라면 체감이 안 되겠지만...아, 설명 못하겠습니다. 물론 몰?루 이미지가 좀 강해서 깨긴 할 테고 리세마라에 지친 분이라면 좀 질리실 테지만, 로비 화면에서 마주치다보면 "딸기 우유는"하며 졸고 있는 아로나의 모습에 아빠 미소를 자연스레 짓게 될 겁니다.

▲ 몰?루 이미지가 너무 강해져버리긴 했지만...그래도 아로나는 귀엽습니다

뿐만 아니라 점차 게임을 하면서 해금되는 메모리얼 로비는 단순히 움직이기만 하거나 움찔거리는 것에 그치지 않아서 더 빠져듭니다. 캐릭터 인연 스토리의 클라이막스를 보여주다보니 그 상황에 몰입되기도 하고, 반응도 디테일하기 때문이죠. 그냥 터치하면 반응하는 게 전부가 아니라, 터치한 방향으로 캐릭터가 눈길을 준다거나 드래그하는 손길에 따라 시선이 향하는 식으로 교감하는 느낌을 더했습니다.

▲ 시선, 표정, 대사, 디테일 모두 살린 메모리얼 로비

게임 내 캐릭터의 움직임도 예사롭지 않습니다. 얼핏 보면 짜리몽땅한 3D풍 SD 캐릭터로만 보일 텐데, 전투 중 사격하고 장전하는 모션이나 승리 모션뿐만 아니라 대기할 때나 카페에서 터치할 때 반응 등 세세한 부분도 캐릭터의 특성을 살린 섬세한 애니메이션이 돋보였거든요. 보통은 사소하다고 그냥저냥 넘어가거나 공통 모션을 쓸 법도 한데, 그렇게 해서는 도저히 살릴 수 없는 덕심의 디테일이 살아있었습니다.

▲ 군필 여고생의 깨알 같은 약실 확인-이상 무, 우리 덕겜 맞습니다



아기자기함 속에 숨어있는 전술, 가볍게 즐길 수 있는 루틴


설명이 조금 길어지긴 했지만, 그만큼 블루 아카이브가 '서브컬쳐' 작품으로서 깊이 있고 뛰어난 작품이란 뜻이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서브컬쳐 '게임'인 만큼, 서브컬쳐 요소는 살짝 제쳐두고 게임플레이나 기타 요소도 분석해볼 필요는 있습니다. 요즘 서브컬쳐 게임은 백가쟁명의 시기이니, 게임으로서 어느 정도 퀄리티가 뒷받침되어야만 유저들에게 어필할 수 있으니까요.

청량함이 돋보이는 퀄리티 있는 일러스트를 보다가, 앞서 잠깐 언급됐던 SD풍 3D 캐릭터들을 보면 아마 조금은 짜게 식을 여지가 있습니다. 거기다가 실제 플레이화면을 보면 그 짜리몽땅한 SD풍 3D 캐릭터가 그냥 총들고 오토로 치고받고 싸운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간단하게 보입니다. 엄폐물들이 있긴 하지만, 그곳으로 숨으라고 지시하거나 그런 컨트롤은 거의 없이 캐릭터들이 알아서 자리잡고 싸워대기 때문이죠.

아기자기한 그래픽에 오토, 이러면 아마 방치형이 떠오를 테지만 블루 아카이브는 그런 유형과 상당히 거리가 있는 게임입니다. 밀리터리라는 요소가 스토리에선 양념 같은 느낌이지만, 게임플레이에선 꽤나 진지하게 다뤄지고 있는 느낌이거든요. 우선 캐릭터마다 샷건, 서브머신건, 돌격소총, 권총 등 다른 무기를 들고 있고 그 무기에 따라 공격 사거리가 제각각 다르고, 엄폐물에 숨어서 사격하거나 혹은 정면에 나서서 싸우는 등 패턴도 달라집니다.


여기에 공격-방어타입 분류도 단순히 서로 맞물리는 3속성 혹은 5속성 구도가 아니라, RTS에 가깝게 다소 복잡하게 짜여있죠. 아군 캐릭터는 관통, 폭발, 신비 3가지 공격 타입과 경장갑, 중장갑, 특수장갑 3가지 방어 타입이 나뉘어져있고 적이나 스킬, 구조물에 붙어있는 공격 타입이나 방어 타입까지 포함하면 각각 5종-4종으로 구분됩니다. 그리고 이게 캐릭터마다 제각각 따로 적용이 되어있습니다. 일례로 호시노나 츠바키는 둘 다 관통형에 탱커 역할로 분류되어있지만, 방어 타입은 각각 중장갑과 특수 장갑으로 서로 다르죠.

여기에 맵 유형도 세 가지에, 그 유형마다 엄폐물의 구성이나 밀도, 특징도 달라서 이에 맞춰 캐릭터를 조합할 필요도 있습니다. 스테이지를 진행하면서 이를 고려하고 안 하고의 효율 차이가 상당히 크기 때문이죠. 그래도 일본 서버 출시 전부터 CBT 때 피드백을 거쳐서 그런 정보들이 상성 표시창에 일목요연하게 잘 요약되어있습니다. 또 캐릭터가 유리한 전장도 스테이터스창에 바로 볼 수 있어서 캐릭터를 편성할 때 쉽게 참고할 수 있죠.


▲ 상당히 복잡한 구조지만, 나름 깔끔하게 정리해뒀습니다

각종 데이터들이 복잡한 것에 비해서 전투 방식은 단순해보이고, 고퀄리티 그래픽으로 화려하게 치장한 것이 아니다보니 단조롭게 보일지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나름 집중력을 요구하는 구성입니다. 그냥 정면에서 힘싸움하는 구도가 아니라, 엄폐물을 사이에 두고 이곳저곳에서 총격전을 벌이는 양상이기 때문에 신경쓸 게 많기 때문이죠.

아군 캐릭터의 사거리에 대해서 앞서 잠깐 언급했는데, 적도 마찬가지라서 전투하는 장면을 보다보면 꽤나 화면을 넓게 사용하는 편입니다. 그렇게 분산된 와중에 아군 캐릭터의 체력 상황을 잘 살펴보면서 체력을 회복해주거나, 위험한 유닛을 잽싸게 스킬을 써서 컷해버리는 센스도 필요하죠. 전방의 적을 먼저 뚫지 못하면 후열 저격수에 얻어맞는다거나, 범위 힐을 지원하는데 아군 캐릭터가 적을 공격하려고 이동하는 사이에 엉뚱하게 떨어지는 일도 있으니 주의가 필요합니다. 이렇듯 캐릭터를 단순히 키워서 방치하는 게 아니라, 제대로 부대를 편성해서 전투를 파악해나가는 묘미가 있죠.

그걸 여러 번 반복하는 게 아니라, 한 번 깬 스테이지는 별도 티켓 없이 스킵이 가능하기 때문에 육성 자체는 굉장히 쉽습니다. 나중에 어느 정도 각이 잡히면 하루 숙제를 하는데 크게 시간을 투자하지 않아도 될 정도죠. 그러다보니 한 번 집중해서 3성 클리어를 노리고, 혹은 안 될 경우에는 행동력을 빠르게 녹이면서 모인 재화로 캐릭터를 육성해서 돌파하는 루틴 자체는 잘 잡혀있습니다.

▲ 유우카(좌)만 신경 쓰고 있었는데, 아루(우) 앞의 엄폐물이 깨질 줄이야. 비상!

▲ 일단 전방의 적부터 정리하고 아이 니드 힐링! 세이브까지 완벽하다

▲ 어쨌든 한 번 3성 클리어하면, 그 다음부터는 스킵이 가능해져서 편하다

물론 일본에서 먼저 서비스를 했기 때문에, 어느 정도 공략법이 이미 나와있는 상태라 일본 출시 때보다 유저들이 훨씬 더 빠르게 효율적인 조합을 짜서 편하게 플레이하고 있긴 합니다. 히비키, 이오리, 여기에 PVP까지 고려하면 슌을 포함하는 이른바 3대장 픽이 빠르게 퍼지고 있으니까요. 특히나 스테이지가 어느 정도 진도가 나가면 제한시간을 맞추거나 위협적인 유닛을 컷하기 어려워서 많이들 애먹는데, 후방을 지원하는 스페셜 캐릭터 중에서 히비키가 독보적인 딜 지원 능력을 보이다보니 흔히 말하는 '없찐'이 되기 쉽습니다.

물론 히비키가 없어도 권장 레벨에서 조금 낮은 수준에서도 클리어는 가능하지만, 누구나 빨리빨리 스테이지를 클리어하고 싶은 욕망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나마 이런 리세마라의 니즈를 캐치했기 때문인지, 국내에 들어와서는 '계정초기화' 메뉴를 마련해뒀습니다. 앱을 종료하고 데이터 초기화를 하거나 앱을 삭제하지 않아도 리세마라를 빠르게 할 수 있게끔 한 것이죠.

▲ 계정 초기화로 데이터나 앱 삭제 없이도 빠른 리세마라가 가능

▲ 그렇지만 급히 이륙해버린 1인...나머지는 애정으로 극복한다!



앞길이 예고되어있긴 하지만 당장 부족한 볼륨, 가끔 이질감이 드는 스크립트

▲ 익히 잘 알려진 3대장 픽, 이 공략이 없던 초기 일본 서버도 진도가 상당히 빨랐던 걸 생각하면...

이미 빨리빨리 다 스토리를 밀어버릴 공략법이나 캐릭터 티어표도 다 공개된 만큼, 블루 아카이브의 콘텐츠 소모 속도는 일본 서버보다 빠를 것이 명약관화입니다. 숙제도 그냥 스킵으로 빨리빨리 쉽게 끝내고, 막혔다고 해도 행동력 조금 더 투자해서 이전에 깼던 스테이지들을 반복 스킵해서 펌핑도 가능한 게임이니까요. 거기다가 빠르게 가는 지름길까지 알려졌으니, 그 속도가 더욱 가속될 수밖에 없는 거죠.

그렇게 숙제도 빨리 끝내버릴 수 있고 급속성장도 쉬운 편이다보니, 빨리빨리 끝나버린 뒤에도 계속 그걸 붙들고 있을 무언가를 제공해줘야 합니다. 아쉽게도 블루 아카이브는 그에 대한 답도 이미 나와있는 상태입니다. 준비는 계속 하고 있긴 한데, 그걸론 상당히 부족하다는 것이죠.

이미 일본 서버가 출시되면서 흔히 말하는 미래시대로 적용될 텐데, 그것만 봐도 아쉬움이 묻어납니다. 앞서 서브컬쳐 게임의 디테일이 살아있다고 언급했는데, 그 디테일부터가 다 적용된 게 아닙니다. 우선 메모리얼 로비는 아직도 일부 캐릭터만 적용된 상태죠. 로비 따위가 뭐가 중요하냐고 물을 수도 있는데, 로비창에 있는 캐릭터를 이리저리 훑어보거나 터치 반응 대사 등을 들으며 흐뭇해하는 게 덕후의 감성이니까요.

▲ 그래도 메모리얼 로비 수는 일본 서버와 동일하게 1성만 빼고 다 갖춰져있고

▲ 카페 초대권 등 편의성이 개선됐으니 다행

그걸 정말 잘 저격했고 완성도도 정말 훌륭하지만, 다 갖춰지지 않아서 문제인 셈입니다. 일반 게임으로 말하자고 한다면, 특전을 모으는 재미도 게임을 붙잡게 만드는 요소인데 그게 덜 갖춰졌다고 말하는 게 좀 더 이해하기 쉬울 겁니다. 그나마 일본 서버 초창기 버전이 아니라서 카페에 자신이 원하는 캐릭터를 초대할 수도 있었죠. 그래서 인연 랭크를 좀 더 빨리 쌓을 수 있고, 애정캐의 인연 스토리와 메모리얼 로비를 비교적 빨리 해금할 수 있긴 합니다. 그걸 다 한 뒤에 이벤트까지의 공백 시기에 붕 떠버린다는 문제는 여전히 남아있긴 하지만요. 특히나 리세마라로 운 좋게 1티어픽 다 뽑은 유저들이라면 더욱 더 그 권태기가 빨리 다가오죠.

그래서 플레이하면서 여유롭게 스토리를 읽다보면, 가끔씩 거슬리는 파트들이 눈에 보입니다. 일본식 어투라던가, 혹은 통일성 없이 중구난방으로 혼용되는 용어들 같은 것들이죠. 일례로 '스케반'이라는 표현이 자주 등장하는데, 그게 어디서는 스케반으로 나왔다가 불량배로 나왔다가 하거든요. 스케반이라는 용어는 흔히 말하면 불량여고생인데, 롱스커트 세라복에 마스크를 쓴 8~90년대 일본 학원 폭력물에서 나오는 그런 스타일의 불량학생을 생각하면 이해하기 쉬울 겁니다.

그 용어에서 이름을 따온 베네수엘라 게임스튜디오도 있을 정도로 올드 서브컬쳐 유저들에겐 감이 딱 오는 단어인데, 이젠 유행(?)이 아니다보니 좀 낯선 개념이긴 합니다. 그래서 이해하기 쉽게 불량배로 고쳤는데, 그게 일괄적으로 적용되지 않아서 혼용된 느낌입니다.

일각에서는 스크립트 자체가 개발진이 밝힌 것과 다르게 일본어로 쓴 것 아니냐는 의혹도 나오고 있기도 합니다. 그렇다기엔 뜬금없이 일본 속담 같은 게 튀어나온 것도 아니고, 튜토리얼을 빼면 일본식 어투가 나오는 부분은 크게 없었습니다. 가끔씩 그런 게 튀어나오는 정도였으니까요. 스크린샷이 PV와 달리 일본 버전과 동일하긴 한데, 일본에서 먼저 내려고 일본어로 그린 이미지들을 PV엔 수정본으로 넣었지만 게임 내엔 적용이 안 된 걸로 보입니다.

이처럼 일본 서비스가 먼저였던 만큼 일본에서 자주 쓰는 용어 혹은 일본식 용어에 익숙한 사람에게 크게 문제 없는 것들은 그냥 일본식으로 써놨는데, 그걸 국내 서비스에 맞춰 다시 검토하고 수정하는 작업에서 조금 착오가 생긴 해프닝 정도인 것 같습니다. 사실 그냥 스토리를 스킵해버리고 뺑뺑이 돌기 바쁜 게임이었다면 별로 신경이 안 쓰였겠지만, 워낙 진도 빼는 속도가 빠른 게임이고 할 거 다 한 뒤에 여유롭게 스토리 보는 맛이 있는 게임이다보니, 그런 티끌을 보게 될 확률도 높아서 거슬릴 뿐이었죠.

▲ 아직 총력전이 나오려면 1주일 남았으니 그 동안 스테이지 밀고, 스토리를 음미하며 기다리는 수밖에

▲ 이벤트 열릴 때까지 숨 참습니다(흡)





블루 아카이브는 이미 본산지에서 검증을 마친 게임인 만큼, '덕겜'으로서는 나무랄 곳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국내 출시 전에는 걱정이 앞서기도 했습니다. 거침없이 정통파 서브컬쳐를 따르다보니, 국내에선 그간 정서나 기타 이유 등으로 가지치기 당하기 일쑤였던 것들까지 넣어버렸거든요. 선생-학생이 말 놓고 꽁냥꽁냥하는 느낌에, 그것도 종종 학생이 노출도 높은 옷을 입고 그런 게 지적받지 않을까 우려가 있었죠.

그래서 일본에서 7세 이용가를 받았던 블루 아카이브가 국내에선 15세 이용가로 등급을 받고, 일본에서 나온 그 모습 그대로에 편의성이 개선된 버전으로 나왔습니다. 일본 서버에서 스토리를 읽었을 때도 이건 진짜다, 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걸 우리말로 다시 읽었을 땐 더욱 임팩트가 컸죠. 근래에 보기 드물었던, 밝고 건전(?)하고 청량하면서도 엉뚱한 정통파 학원 청춘물의 느낌을 온전히 담아냈으니까요. 여기에 각종 국산 밈들에, 폭넓게 어필할 수 있는 퓨처 베이스풍이 기반이 된 청량한 OST가 시너지를 발휘하면서 폭발적인 위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앱스토어 매출 2위, 원스토어 매출 1위에 이어서 오늘(11일) 구글 매출 TOP10 안에 진입하는 등 성과를 거두고 있죠.


물론 일러스트나 밈을 보다가 인게임 그래픽에서 다소 괴리감을 느껴서 첫인상이 팍 구겨질 수도 있긴 합니다. 일본 서버에서 처음 접했을 때도 3D SD 캐릭터가 좀 아쉬운 요소로 보였거든요. 그렇지만 실제로 플레이해보면 그 3D SD로 각종 동작들을 아기자기하고 섬세하게 담아낸 것이나, 아웅다웅하는 것 같아도 화면을 넓게 전략적으로 쓰는 전투를 접하면서 매력을 느끼게 되죠. 빨리빨리 숙제를 끝낼 수 있다보니 부담이나 스트레스도 별로 안 느끼고 가볍게 즐길 수 있기도 합니다.

그게 장점이기도 하지만, 뒤집어서 말하면 단점이기도 합니다. 소재를 녹여낸 방식이나 그려내는 방식이 원체 서브컬쳐쪽에 치우치다보니, 서브컬쳐에 익숙한 유저와 그렇지 않은 유저 사이의 온도 차이가 큰 타이틀이기도 하죠. 일본 서버가 먼저 출시되면서 미리 알려져 있었다고 해도, 3D SD 그래픽 스타일은 호불호가 갈리기도 합니다. 이를 완화할 국산 밈이나, 폭넓은 유저층에게 어필할 수 있는 BGM이 있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완충제지, 기반 자체가 서브컬쳐임은 빼도박도 못할 팩트니까요.

▲ 그래도 이 귀여움, 심장에 정말 해롭습니다. 이 캐릭터들이 나오려면 좀 더 기다려야 하지만요

아울러 빨리빨리 숙제를 끝내고 진도를 뺄 수 있다는 건 또 반대로 이야기하자면 엔드 콘텐츠까지 금방 간다는 뜻이니, 그 뒤에 왜 해야 하고 무엇을 해야 할까? 하는 과제가 남습니다. 특히 빠른 공략법이 미리 알려진 상태다보니, 콘텐츠가 고갈되는 속도가 훨씬 빠를 수밖에 없죠. 물론 미래시가 있는 게임이라 그걸 보면서 기다리면 되고, 업데이트도 앞당길 예정이라서 더 밀도가 높아지긴 합니다. 다만 업데이트를 당기다보면 픽업 일정도 빨라질 텐데, 캐릭터를 뽑는 게 상당히 중요한 게임이니 이를 어떻게 조율해나갈지도 관건일 겁니다.

아직도 갈 길이 남아있긴 하지만, 지금 이 단계에서도 블루 아카이브는 훌륭한 덕겜의 표본이라고 하기엔 충분했습니다. 덕심을 자극하는 포인트를 너무도 잘 알고 있고, 그 디테일을 잘 살린 데다가 이미 예고된 미래의 캐릭터들이나 이벤트도 '덕심'이라는 포인트에선 거를 게 하나도 없거든요. 거기다가 게임플레이도 나름 준수하고, 이벤트도 깨알 같이 여러 시도를 하는 미래시도 있으니 덕심이 충만하다면 앞으로도 쭉 플레이하기엔 충분한 작품이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