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전, 한 커플이 결혼했다. 나는 아닌데 주변에 꼭 하나씩 있는 게임에서 만나 결혼하는 커플. 남들에겐 랜선이 그들에겐 선자리였고, 나그란드의 석양을 등진 프로포즈는 멋지게 성공했다. 그렇게 공대장은 가장이 되었고, 우여곡절 끝에 둘 사이 사랑의 결실이 태어나면서 둘의 마지막 접속 일자는 일에서 달, 년으로 바뀌었다.

▲ 다른 커플의 청첩장이지만 대충 이런 케이스

5 년쯤 후, 그 커플을 다시 만났다. 어느덧 세 아이의 아버지가 된 왕년의 공대장의 얼굴엔 표정이 없었고 길드의 아이돌로 여겨지던 누님은 삶의 최전선에서 분투하는 역전의 용사가 되어 있었다. 몇 순배의 술잔이 오간 후, 공대장은 담배 한 대 태우자며 나를 끌고 나갔다. 나는 물었다.

"형 요즘은 게임 못하시죠?"

공대장은 대답 없이 녹색 우레탄 바닥에 슬리퍼를 찍찍 끌며 건물 주민들의 암묵적 합의하에 재떨이가 되어버린 낡은 화분에 꽁초를 튕겼다. 그리곤 푹 숙여져 있던 고개를 슬쩍 들며 말했다.

"어. 아마 평생 못하지 않을까?"

나보다 먼저 6개월 군대를 간 친구가 첫 휴가를 나와 빡빡머리를 부끄러워하던 모습을 볼 때의 스산함이 스쳤다. 언젠가 다가올 미래를 엿본 느낌이라 해야 할까. 공대장의 표정은 그 집 TV에 번인(Burn-in)되어 있던 뽀로로와 친구들처럼 내 기억 속에 새겨졌다. 아주 찐하게.



게임이 유일한 취미요, 일이자 관심거리였던 당시의 나는 극심한 공포를 느끼며 왜 종말론에 빠져드는 사람이 있는지를 깨달았다. 유부가 이승과 저승 사이 그 유부를 뜻하는 단어였을까? 게이브 뉴웰이 휴거를 약속한다면 바로 짐싸들고 밸브 앞에 천막을 칠 각오였다. 심지어 당시엔 결혼은 커녕 여자친구도 없는 그냥 흔한 게임 많이 하는 동네 총각이었는데도 그랬다. 그리고 이 막연한 미래에 대한 걱정은 잠복기의 바이러스마냥 내 심리 속에 웅크리고 있다가 결혼이 판타지가 아닌 리얼로 다가오는 시점에 다시 고개를 쳐들었다.

웨딩플래너의 사무적 미소를 대하고, 준비 과정에서 몇 번 큰돈을 쓸 때쯤 주변의 기혼자 모두에게 물었다. 어차피 내가 아는 사람들이라 해 봐야 게임업계 사람들, 게임하던 사람들 뿐이니 레퍼런스 체크가 어렵진 않았다.


"결혼하고 게임 하세요?"

라는 질문에 예상대로 과반수의 인원들은 인계철선을 건드린 부비트랩마냥 격렬한 반응을 보였다. '놀리냐?', '하겠냐?', '요즘 최신 게임이라던 디아블로3 재밌냐?' 등 끓는 기름에 물바가지 쏟아부은듯한 반응을 보며 트라우마가 도지는 줄 알았건만, 의외의 반전이 있었다. 절반보단 적었지만, 의외로 꽤 많은 기혼자들이 결혼 전만큼은 아니었지만 배우자와의 원만한 합의 하에 문제 없이 게임을 즐기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만 3년을 다 채워가는 내 결혼 생활도 별 문제 없이 게임 라이프는 유지되고 있다. 결혼 전부터 애원과 설득을 섞은 땅다지기를 해온 덕도 있겠지만, 이 빛나는 성공의 이유는 위기 속에서도 게이머로서의 자아를 유지한 뭇 선배 기혼자들의 사고 사례를 반면교사 삼아 케이스 스터디를 멈추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나만의 행복으로 끝나도 상관 없다. 하지만, 지난 달 결혼한 후 접속률이 현저히 낮아진 아는 동생이 진지한 목소리로 "형, 저도 게임이 하고 싶어요"라고 한탄하던 것이 생각나 끝내 결심했다. 수백만 유부 게이머 시대. 어떻게 하면 배우자를 배려하면서 게임 라이프를 이어갈 수 있는지 여러 유부 게이머들의 조언과 사고 사례를 기반으로 정리해 보았다.




◆ 유부 게이머 역전용사들의 취미 사수 노하우

'결혼'이라는 행위에 대한 정의는 너무나 많지만, 이번 시간에 집중해야 할 결혼의 속성은 이것이다. '완전히 다른 라이프 스타일 간의 융합'. 그렇다. 수많은 부부들이 결혼 생활 간 불가피한 전투를 치르며, 이는 전국구 잉꼬부부라도 피할 수 없는 숙명과 같다. '우린 한 번도 싸운 적 없어요'라는 말은 하얀 거짓말이다.

게임 또한 마찬가지. 게임에 대한 사회적 시선이 아무리 유화된 지금이라 해도, 컴퓨터 앞에서 게임을 하는 행위를 시간 낭비, 비생산적 활동, 저급한 취미 정도로 생각하는 이들은 여전히 존재한다. 그리고, 절대 이들의 생각이 틀렸음을 말하며, 이를 교정하려 해서는 안된다. 어디까지나 게임에 대한 견해가 다를 뿐이며, 결혼 생활은 다름을 이해하는 과정이니까.

결국, 부부가 모두 게임을 사랑하는 축복받은 커플이 아닌 한, 유부 게이머로서 자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상대의 불만을 완전히 잠재울 수 있는 반대급부를 제공하는 한편, 게임이라는 행위에서 발생될 수 있는 리스크의 차단이 필요하다. '그렇게까지 하면서 게임해야 하나?' 싶겠지만, 맞다. 그게 결혼 생활이다.

※ 본 기사는 총 14인의 유부남, 유부녀 게이머들의 노하우와 사고 사례에 기반해 작성되었습니다.


1. 해야 할 것 빼먹지 마라

부모님이 숱하게 말씀하신 '할 건 하고 놀아'는 만고의 진리다. 게임 플레이의 권리 주장 이전에 본인의 의무를 다 했는지 기억해야 한다. 가령 "나 오늘 저녁에 늦으니까 빨래 좀 돌려 줘"라는 말을 잊고 게임을 했다면, 게임에 대한 배우자의 인식은 곧바로 저점을 찍게 된다. 집안일, 공부, 심부름, 뭐가 되었든 하기로 한 건 무조건 제대로 끝내야 한다.

- 사고 사례: 34세 유부남 A씨는 평소 집안일도 잘 나눠 하고 착실한 남편으로 살고 있지만, 승급전 때문에 아내가 다음날 입어야 할 옷을 세탁소에서 찾아오는걸 깜빡했다. 그리곤 눈치없게 플래티넘 승급했다고 자랑하다가 '나 내일 입을 옷 있는데 찾아왔지?'라는 말에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A씨는 키보드 2주 압수형을 당했다.


2. 면죄부를 마련하라.

나에게 잘하는 배우자는 소중한 사람이다. 그리고 내 가족에게도 잘하는 배우자는 자랑거리다. 결혼은 기본적으로 개인이 아닌 가족 간의 결합이며, '상대의 가족을 내 가족처럼'이라는 의무를 짊어지는 과정이기도 하다.

주기적으로 안부 전화를 하고, 떨어지지 않게 건강 식품을 보내고, 시댁이나 처가를 방문할 때 뭐 하나라도 사들고 가는 행위들은 분명 귀찮을 수도 있고, 안 해도 굳이 크게 문제가 되지 않을 행동들이지만, 차곡 차곡 쌓이면 거대한 면죄부가 된다. 실제로 배우자의 주변을 잘 챙기는 이들은 집에서 원하는 대로 하고 살아도 웬만큼 선을 넘지 않는 이상 그냥 넘어간다. 좀 칠칠맞으면 어떤가. 밖에서는 누구보다 자랑스러운 남편이나 아내인데.


3. 너만 놀지 마라

의외로 많은 이들이 뚜렷한 취미가 없다. 관성적으로 TV를 틀고, 예능을 보지만, 남들과 대비되는 뚜렷한 취미가 없는 이들은 배우자가 혼자 취미를 가지고 있을 경우 굉장한 소외감을 느낀다. 그리고 '나는 아무것도 할 게 없는데 너는 게임이라도 하지'라는 말이 육성으로 나왔다면 데프콘2, 파스트 페이스가 발령된 상황이다.

그렇다고 배우자와 전투를 할 수는 없으니 방법은 하나. 무슨 수를 써서라도 취미를 만들어 주어야 한다.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 해?'라고 묻는다면, 결혼 생활이란게 원래 그런 거다. 간단한 3매치 퍼즐을 소개해주든, 드라마를 구해 주든, 카페 투어나 맛집 탐방 같은 정기적 나들이를 약속하든 뭐든 해야 한다. 부부가 함께 즐기는 취미를 만드는 것도 좋고. 그런 의미에서 넷플릭스를 비롯한 OTT는 유부 게이머들의 구세주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 이상적인 형태이지만, 뭐가 되었든 배우자가 즐길 거리를 마련해 주어야 한다.


4. 할 것 끝났다고 쪼르르 가면 안 된다.

라이프 스타일에 대한 합의가 끝나 '각자의 취미 시간'이 명백히 정해지지 않은 이상, 내 할 것 다 했다고 컴퓨터로 슬금슬금 걸어가는 건 경고 사항이다. 케이스 바이 케이스긴 하지만, 하루 일정 시간 부부끼리의 시간을 보내는 건 굉장히 중요하다. 할 것 다 끝내고 나면 같이 TV를 보든, 누워서 꽁냥대든, 미래 설계를 하든 부부가 함께 무언가를 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아니 애초에 이 단계도 '할 것'의 범주에 넣는 것이 이롭다.


5. 함부로 마이크 켜지 마라

음성 채팅이 보편화된 지금이지만, 유부 게이머들의 마이크는 상시 켜놓는 물건이 아니다. 마이크와 헤드셋은 두 가지 리스크를 안고 있는데, 하나는 내가 아닌 다른 그룹과 어울리는 배우자를 보며 소외감을 느낄 수 있다는 것, 그리고 다른 하나는 상대가 날 찾을 때 반응성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게임 중이니까 이따 말해'가 전투의 빌미가 된다는 건 결혼 유무를 떠나 연인 간이라면 당연한 상식이다. 미리 팀원들에게 부득이한 사고로 AFK가 될 수 있음을 고지하고, 배우자가 잠들거나 부재중이 아닌 이상 마이크는 섣불리 켜지 않는 것이 좋다.

- 사고 사례: 38세 유부남 K씨는 남편이 게임을 해도 별로 신경쓰지 않는 아내와 함께 살고 있으며, 이 생활에 익숙해 평소 아내가 있건 없건 친구들과 음성 채팅을 켜놓은 채 게임을 하고 있었다. 그 날도 K씨는 그냥 평소대로 헤드셋으로 수다를 떨면서 게임을 하던 중이었는데, 하필 거실에서 TV를 보던 아내의 눈에 TV 테이블 위를 질주하는 한 쌍의 바퀴벌레가 들어왔다. 아내는 고함을 치며 "여보 저것들 좀 잡아줘!"라고 소리쳤으나, 한창 한타 싸움에 열중하고 있던 K씨는 자기도 모르게 "어! 일단 쟤들부터 잡고!"라고 대답했고, 바퀴벌레들은 빛의 속도로 부부의 안방으로 진입해 자취를 감췄다.

K씨 부부는 두 마리 바퀴벌레를 다 잡게 되는 10일 후까지 컴퓨터가 있는 방에서 자게 되었으며, 당연히 K씨의 게임 생활은 10일 간 정지. 잘 때마다 혼나는 건 덤이었다.


▲ 실전 팁: 마지막 보험으로 귀 한 쪽은 열어두자.


6. 자리 비움 어려운 게임은 타이밍을 잡아라

언제나 문제는 승급전 중, 레이드 중 갑작스럽게 연락이 오면서 생긴다. 대답을 안 하면 확실한 파멸이요, 대답을 하기 시작하면 그건 그것대로의 어두운 결과가 다가오는 지옥의 이지선다다. 애초에 배우자가 활발히 활동하는 시간에 이런 게임은 그냥 거들떠도 안 보는게 이롭다. 집중해야 하는 게임은 집중할 수 있을 때 해야 한다.

- 사고 사례: 공대장으로 활동하던 P씨는 결혼과 함께 공대를 해산하고 라이트 게이머가 되었지만, 아내의 야근 소식을 듣고 머릿속에서 열심히 계산기를 돌린 끝에 오기 전에 끝낼 수 있다는 확신을 갖고 막공에 합류했다. 문제는 힐러 2자리가 더럽게 안 구해져서 출발 시간이 예상보다 30분 늦어졌으며, 아내는 미안한 마음에 평소보다 더 열심히 일을 해 예상 퇴근 시간을 30분 당겼다는 것.

퇴근 후 피로를 애써 지우며 "나 왔다!"라며 집으로 들어서던 아내는 헤드셋을 낀 채 자신이 왔다는 걸 인지하지도 못한 P씨를 발견해버렸다. 이후 사건 전개는 너무 끔찍했기 때문에 따로 서술하지 않는다.



7. 비밀을 만들지 마라

만약 당신이 파티 플레이를 즐겨 하는 게이머라면, 100% 같이 게임하는 사람들이 누구냐는 질문이 들어온다. 내가 속해있지 않은 배우자의 인간 관계 그룹은 누구에게나 스트레스 요인이며, 의심의 물꼬가 된다. 웬만하면 미리 동의를 구하고 같이 게임하는 인원들의 인적 사항 정도는 숨기지 말고 밝히는게 좋다. 얼굴까지 볼 수 있으면 더 좋지만, 그게 아니라면 카톡 프로필이나 목소리 정도는 들려주어야 한다. 그래야 배우자도 안심하고 컴퓨터 앞을 허락할 수 있을 테니까.

- 사고 사례: 유부녀 C씨는 결혼 전 리그오브레전드를 즐겨 했고, 남편보다 티어가 높은 실력자였다. 결혼 후 남편은 조금씩 게임을 하는 라이트 게이머가 되었고, C씨는 친구들과도 게임 라이프를 이어오고 있었는데, 요즘은 누구랑 게임을 하냐는 남편의 질문에 당황해 엉겁결에 대학 시절 같이 게임을 하던 여자 친구들 그룹이라고 대답했다.

C씨가 함께 게임을 하는 그룹에는 남자 게이머가 분명 섞여 있었고, 얼굴도 못 본 채 그냥 게임만 하는 사이였지만, C씨 입장에서는 불필요한 오해가 일어날 수도 있으리라 생각하고 거짓말을 해버린 것. 며칠 후, 소리 출력 장치가 변경되어 있던 것을 모르고 게임을 켠 C씨는 스피커를 타고 나가는 굵직한 목소리를 듣고 말았고, 하필 옆에서 핸드폰을 보던 그녀의 남편도 함께 들어 버렸다.



8. 나가서 술 마시는 것 보단 낫지.

유부 게이머들에게 성전이 있다면, 이는 첫 장의 첫 문장에 해당하는 무적의 논리다. 궤변이 아니라 실제로 나가서 술 마시는 것 보단 집에서 게임 하는게 낫기 때문에 설득력도 무척이나 강하다. 이 문장은 단순 부부 사이 뿐만 아니라 배우자의 부모에게도 통하는 문장이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유부 게이머들은 이를 최후의 논리 보루로서 간직하는 편이다. 다만, 이 문장을 사용할 상황이면 애초에 좋은 상황은 아니니 웬만하면 그렇게 되지 않도록 하는 편이 낫다.

- 사고 사례: 이번 기사에 실린 최악의 사고 사례. 나가서 술 먹고 깽판 치는 것 보다 게임이 낫다는 논리에 깊이 빠져든 유부남 O씨는 솔직히 너무 게임을 많이 했고, 보다 못한 아내는 "이럴 거면 나가서 술 먹는 거랑 뭐가 다른데?"라며 쏘아붙였다.

O씨는 본인의 잘못은 생각 안하고 그럼 뭐가 다른지 보여주겠다는 생각에 나가서 술을 먹기 시작했고, 처음에는 억지로 가진 술자리였던 것이 관성이 생겨 습관이 되어 버렸다. 자연스럽게 둘의 갈등은 더 커졌고, O씨 부부는 파국 직전까지 가서야 아내의 임신 2개월 소식에 휴전 협약을 맺었다. O씨는 현재 게임을 완전히 접은 상태다.


▲ 술마시고 깽판치는 것 '보다 나을' 뿐, 모범적인 것은 아니다. 그냥 봐줄 만 한 거다.


8. 그대가 잠든 이후에

유부 게이머가 게임을 하기 가장 좋은 시간은 배우자가 잠이 든 이후이다. 현재 내가 속한 유부 게이머 파티 또한 배우자가 잠든 이후 게임을 하는 것을 철칙으로 삼기에 보통 10~11시부터 새벽 2시 경까지 파티가 유지되며, 대부분이 배우자를 재운 후 게임을 시작한다. 이 '재우는 과정'은 매우 중요하다. 당연히 배우자도 성인인 만큼 혼자 자는 건 할 수 있는 나이이지만, 잠들기 직전까지 함께 있다는 건 상대를 소홀히 여기지 않는다는 최소한의 검증이 되기 때문. 그러다 보니 가끔 파티에 이탈자가 한 둘 생기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대부분 재우다가 같이 잠들어버린 경우다.

- 사고 사례: 34세 유부남 J씨는 평소 아내가 잠든 것을 확인하고 슬쩍 일어나 게임을 하는 식으로 게임 라이프를 즐기곤 했는데, 어느 날 아내가 새벽 2시가 되도록 잠이 들지 않자 그러지 말았어야 했음에도 아내를 조금 더 빨리 재울 수 있는 방법을 고민했다.

딱히 방법이 생각나지 않아 고민하던 차, 아내와 함께 장을 보던 J씨는 집 앞 상가 건물에서 힌트를 얻고 "여보, 태권도 한 번 배워보지 않을래?"라고 넌지시 물었다. 당연히 질문의 의도와 속내까지 한 번에 들통났다.



9. 게임은 내일 해도 된다.

가끔 하루 정도는 하지 말고 넘겨야 한다. 하루라도 안 하면 손가락에 가시가 돋히는 느낌이라면, 진지하게 스스로를 다잡아야 한다. 게임은 평생 존재한다. 심지어 내가 죽고 나서도 게임 산업은 돌아간다. 이번 주 레이드를 못 가도 다음 주가 있고, 오늘 승급전을 못 뛰어도 내일 뛰면 그만이다. 하지만 배우자와의 시간은 한정되어 있다.

배우자와 원만한 합의를 거치지 못한 유부 게이머의 특징 중 하나는 우선 순위 설정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언제나 '게임은 소중하지만, 가족은 더 소중하다'라는 걸 잊지 말고 강형욱이 개들 서열정리하듯 뚜렷하게 구분해야 한다. 대부분의 배우자들은 '저 사람은 게임을 좋아하지만 그래도 내가 우선이구나'라는 확신을 가지면 게임을 하는 걸 크게 개의치 않아한다. 그리고 상대에게 확신을 주는 건 단발적인 말이 아닌 꾸준한 행동과 태도다.


10. 나는 당신하고 게임만 있으면 돼

상식적인 인식 선에서, 겜돌이는 보통 용서와 이해가 통한다. 하지만 하릴없이 놀 것 다 노는 놈팡이는 아니다. 달리 말하면, 게임만으로 만족할 줄 알아야 한다는 뜻이다. 성공한 유부 게이머의 공통점 중 하나는 게임을 제외한 모든 것을 부부가 함께 한다는 것이다. 나에 대한 배우자의 인식이 '게임을 좋아하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착실한 남편 or 아내'라면 성공이다.

반면 '저 XX는 맨날 쳐놀기만 하고 대체 왜 나랑 결혼한 거지?'라는 인식이 쌓이기 시작하면 적색 경보다. 게임을 포기할 수는 없다. 우리의 최후 보루니까. 하지만 나머진 미련을 갖지 말자. 괜히 '줄건 줘'가 전술인 것이 아니다. 이것도, 저것도 포기하지 못하겠다면 결혼을 할 준비가 되지 않은 거다.

- 사고 사례: 32세 유부남 K씨는 속칭 '인싸'였다. 주말이면 친구들과 반코트 농구를 즐기고, 이는 자연스럽게 술자리로 이어지곤 했으며, 평일에도 여러 그룹의 친구들과 만나 어울리거나 누군가를 만나지 못할 때는 온라인으로 게임을 즐기기까지 했다. K씨의 아내는 이와 같은 남편을 꽤 좋게 바라보았지만, 결혼을 하고도 K씨가 이 생활을 똑같이 이어가자 조금씩 불만이 쌓였다.

결국, K씨의 아내는 본인의 생일이었던 주말 하루를 점심, 저녁으로 잘라 약속을 잡은 남편에게 대폭발해버렸고, 3개월 간의 분쟁 조정 기간을 거쳐 게임 정도는 즐기되, 다른 개인 활동은 자제하는 합의안을 도출했다. K씨는 억울해했지만, 대다수의 유부 게이머들은 '다 가져 놓고 뭐가 불만이냐?'라며 의아해했다.



◆ 두려워하지 말라, 이 또한 삶의 모습이다.

"그냥 하지 마 이 XX야" - 인터넷 밈 中

누구나 한 번쯤은 봤을 거다. '니들은 결혼하지 마라'에서 이어지는 짧은 문답. 나 또한 피식하고 넘기긴 했지만, 아마 혼인 적령기의 미혼자들에겐 저게 결혼에 대한 전반적 인식일지도 모르겠다. 이전에야 어른이 되면 자연스럽게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그렇게 삶의 사이클을 이어가는게 자연스러운 풍토였지만, 오늘날 결혼은 뭔가 손해보고 포기하는 과정이라는 인식이 강하다.

기혼자 입장에서, 완전히 아니라고 단언하긴 어렵다. 어려서부터 생활 전선에 뛰어드는 사람이 있는 반면 누구는 금수저를 물고 태어나듯, 인생은 모두에게 제각각의 모습을 띄고 있으며, 이는 배우자를 만나는 과정도 마찬가지다. 사랑이라는 윤활유를 아무리 들이부어도, 애초에 아귀가 맞지 않는 톱니바퀴가 제대로 굴러갈리가 없다. 어떻게든 맞아들어가기만 하면 굴러가겠지만, 뭔 수를 써도 안 맞는 경우는 분명 있으며, 이와 같은 사례들은 주로 인터넷에 퍼져 비혼주의의 횃불이 된다. 잘 사는 사람들이 굳이 인터넷에 썰을 풀 일이 뭐가 있을까.

하지만, 결혼이 손해보고 포기하는 과정이라는 말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어디까지나 그런 사람들도 있을 뿐,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부부들은 원만한 삶을 이어가고 있으며, 상대의 기분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게임이든 인적 교류든 다 즐기며 살아간다. 양보와 관용이라는 좋은 표현이 있는데 굳이 손해와 포기라는 부정적 단어를 쓸 필요가 있을까.

▲ 저게 틀린 건 아니지만 두려워 할 필요는 없다.

결론을 말하자면, 결혼 생활 또한 자연스러운 삶의 모습 중 하나이며, 하나도 두려워 할 필요 없다. 애초에 우리 같은 게이머들이 두려워할 게 게임 못하는 것 말고 뭐가 있을까? 그런데 게임 다 하고 산다. 심지어 아이가 생긴 후에도, 별 탈 없이 게임 잘 하고 사는 사람들도 주변에 번듯이 존재한다. 그만큼 다른 부분에서 착실한 생활을 하고 있겠지만, 무턱대고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는 거다.

현실적인 이유도 있을 것이다. 가진 건 없는데 집은 너무 비싸고, 내 소득으로 결혼해도 되나 싶은 그런 고민들. 이 부분에 대해서는 해줄 말이 없다. 어떻게든 되긴 된다. 도대체 어떻게 하지 싶은 난제들이 진짜 어떻게든 풀려가는 과정은 많은 기혼자들이 겪는 마법과도 같은 과정이지만, 이를 말로 표현하기는 너무 어려운데다 제각각의 케이스가 다르기에 적절한 조언을 해줄 수 없을 뿐, 정말 어떻게든 다 풀리긴 한다.

다만, 게이머들이 게임 못 할까봐 결혼을 회피하거나, 결혼한 게이머들이 합의의 과정에 이르지 못해 게임을 포기하고 스스로를 불행하게 여기는 케이스를 줄이고 싶을 뿐이다. 여러분이 결혼하고, 게임해야 모두가 행복하다. 유부 게이머들이 늘어나고, 특이한 케이스가 아닌 일반적인 모습이 되어야 나도 어디 가서 "그냥 남들처럼 게임 좀 하고 그러지"라고 말할 수 있을 것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