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오하자드는 참 묘한 게임이다. 음산한 기운이 느껴지는 지역과 깜짝깜짝 튀어나오는 좀비들. 그리고 최근에는 그래픽 연출 수준마저 높아지며 기괴함이 한층 강조되어 심장을 조막만 하게 만드는 데 일가견이 있다. 물론 액션 강조한 몇몇 시리즈는 그 느낌이 덜하긴 하지만 말이다.


그런데 첫 플레이에서의 이런 공포 감정은 2번째부터 점점 수그러든다. 살점 뜯긴 좀비 친구들은 보면 볼수록 귀여워지고 어디서 뭐가 나오고, 어떻게 피하면 되는지 알게 되니 무서워할 타이밍이 없다. 그래서 겁먹을 시간, 길 찾는 시간이 줄고 클리어까지 가는 플레이타임도 점점 짧아진다. 개발진도 이를 알고 있어 강제로 타임 어택을 유도하고 1시간, 2시간 등 매우 짧은 시간 안에 클리어해야 특전을 주는 등 공포 없는 게임 플레이를 유도한다.

VR로 제목을 잡더니 시작부터 뭔 바이오하자드 타령이냐고 할 수 있겠지만, 바로 이 바이오하자드의 VR버전 유저 모드가 최근 업데이트됐다. 이번 업데이트로 RE2, RE3는 1인칭 시점에서 모션 컨트롤이 가능해지며 시점만이 아니라 직접 손전등으로 불을 비추고 총을 조준, 격발하는 플레이가 온전히 이루어지게 됐다. 여기에 제삼자가 아니라 주인공 레온, 클레어의 시점을 따라가다 보니 제한된 시야가 주는 공포감은 배가됐다.

이러한 VR의 특성 덕분에 이미 수차례 클리어하며 다 익혔던 패턴이지만, 3인칭으로 겪었던 이야기는 내 시야에서 이루어지며 전혀 다른 공포 분위기를 냈다.


하지만 다시금 느끼는 공포보다 VR 모드가 더 만족스러운 점은 그저 바이오하자드를 흉내 낸 게임이 아니라 온전한 게임플레이를 유지한 채 VR로 구현해냈다는 점이다. 그저 바하시리즈의 몬스터를 제자리에 서서 뿅뿅 쏘기만 하는 것도 아니고 화면 속의 손을 대신하는 컨트롤러 이 버튼 저 버튼 누르며 휘적거리기만 하는 퍼즐 게임이 아니라는 뜻이다. ‘VR’ 게임이 아니라 VR ‘게임’을 즐긴 셈이다.

지금 보면 화면 자글자글하고 선도 여러 개 꽂아야 했던 PS VR. 그리고 해외 직구로 출시 시점에 구매한 오큘러스 퀘스트로 넘어오며 이런저런 VR게임을 참 많이 해봤지만, 대개는 오래 즐기지 못했다. 고작해야 리듬 썰기 비트세이버에 새 음악 나오면 쌓인 먼지를 털고 칼질 몇 번 하는 수준.

반쯤 애물단지가 된 VR 라이프에 변화를 가져온 게임은 ‘하프라이프: 알릭스’였다. 정말 오랫동안 멈춰진 하프라이프 시리즈에 생동감을 줄 차기작. 그 중간 다리 역할을 한 ‘하프라이프: 알릭스’는 VR이 줄 수 있는 경험 요소를 전에 없던 높은 수준으로 담아냈다.

주인 없이 바닥에 놓인 펜을 손으로 집어 아무 유리에 대고 글을 쓸 수 있는 상호작용은 한계 수준을 뛰어넘으며 VR 게임이 보여줄 수 있는 새 시대의 플레이를 보여줬다. 그에 따라 내가 직접 게임 속 주인공이 된다는 느낌마저 전했다. 이런 몰입도 덕에 VR 게임은 어지러움에 오랜 시간 즐기지 못하는 게임인 줄 알았건만, 서너 시간도 거뜬히 플레이할 수 있었다.


그리고 ‘하프라이프: 알릭스’를 완성하는 건 VR 요소가 게임의 핵심이 아니라, 온전한 게임의 한 부분으로 작용한다는 데 있다. 한껏 몰입한 게임 플레이를 중단하지 않아도 될 만큼의 충분한 콘텐츠의 질과 양이 게임에 마련되어 있다. 반대로 말하면 VR 요소를 뺀다고 아무것도 아닌 게임은 아니라는 뜻이다.

기본 게임 플레이가 온전히 유지된 채 VR로 모습을 바꾼 바이오하자드를 플레이하며 문득 VR로 즐긴 여러 게임의 방향성이 떠올랐다. 어지럼증과 피로도 등을 이유로 장시간 게임 플레이가 어렵다는 인식이 자연스럽게 깔리며 VR 게임들은 '보다 가볍게'를 목표로 성장해나가고 있다. 특히 오큘러스 퀘스트2가 시장 점유율을 높이며 퀘스트 기반 게임들은 데스크톱이 아니라 휴대용 기기를 염두한 채 개발되고 있다.

일반 플레이와 VR 플레이가 함께 가능한 게임은 VR 모드를 그저 보너스 게임 수준으로 그려넣기도 한다. 풀프라이스 게임이 아니라 그보다 분량도, 플레이 시간도 적은 게임이 VR 게임 시장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셈이다. 그래서 정말 색다른 무언가가 아닌 이상에는 눈에 보이는 배경과 보이지 않는 얼굴을 대신할 주인공 손만 다른, 비슷한 게임을 플레이하는 느낌을 지우기 어렵다.

물론 실제로 장시간 VR 기기를 착용하는데 불편함을 느끼는 플레이어도 많고 간단히 즐길 게임을 선호하는 유저들도 있다. 라이트하면서도 훌륭한 VR 콘텐츠도 손에 꼽기 어려울 만큼 많다. 하지만 아무리 가격이 낮아졌다 한들 VR 기기의 가격은 여전히 만만치 않은 만큼 무게감 있는 콘텐츠가 있어야 구매 의지가 생길 수 있다. 그게 아니라면 VR 게임은 얼리어댑터의 장난감이 될 뿐이다. 그리고 색다를 게 없는 장난감은 곧 책장 한구석에서 먼지만 쌓을 뿐이고.


이른바 시장의 대세 키워드가 메타버스, NFT, P2E로 넘어간 지 오래. 그만큼 메타버스와 비즈니스 외의 영역에서는 VR에 대한 관심이 시들해졌다. 하지만 기본 게임 플레이의 경험이 VR의 그것으로 옮겨낼 만한 거라면 바이오하자드의 예처럼 AAA 게임을 VR화해 충분히 관심을 환기할 수 있으리라 보인다.

이 게임을 위해서라면 플스를, 엑스박스를, 새로운 그래픽 카드를 구입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설명하는 기존의 게임들처럼, 그저 쉽게 만들어지고 소모되는 VR 포르노가 아니라 게임 때문에 VR을 살만하다고 당당히 말할 수 있는 작품이 2022년엔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