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생활에서 늘 함께하는 물건들 중, '자동차'는 유독 단순한 교통 수단 이상의 의미를 갖는 경우가 많습니다. 가족, 친구, 연인과 함께 다닌 장소들이 쌓이고 쌓이며 바라만 봐도 추억을 떠오르게 만들기도 하고,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차', '처음 산 차' 처럼 함께 하기 시작한 순간 자체가 추억에 남기도 하죠.

미국 시애틀에 위치한 신생 개발사, 아이언우드 스튜디오의 데뷔작인 '퍼시픽 드라이브'는 이 자동차와 사람이 갖는 '유대감'에 집중했습니다. 서바이벌 게임의 문법은 같지만, 그것들이 모두 '차량'을 중심으로 한 데 엮이며 독특한 경험을 전달합니다. 그것이 조금 괴팍하고, 어두침침한 방향이긴 하지만요.

게임명: 퍼시픽 드라이브
장르명: 액션, 로그라이크
출시일: 2024.2.22
리뷰판: 1.1.2
개발사: Ironwood Studio
서비스: Kepler Interactive
플랫폼: PC, PS5
플레이: PC(Steam)


'올림픽 통제 구역'에 어서오세요
▲ 거대 장벽으로 분리된 미지의 공간을 배경으로 하는 '퍼시픽 드라이브'

퍼시픽 드라이브는 1998년, '올림픽 통제 구역'이라는 가상의 장소를 무대로 합니다. 수십 년 전부터 이상한 현상이 발생해 온 이곳은 300미터 높이의 거대한 장벽으로 둘러싸인 미지의 공간입니다. 픽업 트럭을 타고 근방을 운전하던 배달부인 주인공은 미지의 현상에 의해 '빨려 들어가듯' 통제 구역 안에 들어오게 되고, 그곳에서 삶을 살아오던 이들의 도움을 받아 구역을 탈출하기 위한 여정을 떠나게 됩니다.

이 세계관에서 '자동차'는 매우 특수한 존재로 묘사됩니다. 게임 속 NPC들은 그저 무전기 저편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로 주인공과 상호작용하는데, 이들은 구역 안에서 '굴러다니는 내연 기관 차량'을 마지막으로 본 것도 수십 년이 흐른 뒤라고 이야기하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들은 주인공이 차고에서 발견한 스테이션 웨건 차량은 일종의 '렘넌트'로, 소유자와 정신적, 육체적으로도 연결되는 이상 물질이라는 점까지 친절히 알려줍니다.

이처럼 반 강제로 유대감을 쌓아야만 하는 차량이 주어진 상황에서, 플레이어는 올림픽 통제 구역을 벗어나기 위해 NPC들의 도움을 받고, 차량을 정비할 재료를 찾으며 하루하루를 살아남게 됩니다. 처음 생각했던 고즈넉한 미국의 삼림을 따라 주행하는 로드 트립과는 전혀 다른 전개가 눈앞에 펼쳐지게 되죠.

▲ SF소설 '서던 리치' 3부작을 생각나게 하는 기묘한 콘셉트

'퍼시픽 드라이브'의 특징 중 하나는 자동차를 중심으로 하는 서바이벌 콘셉트를 꽤나 그럴싸한 배경 세계관을 통해 설명한다는 점입니다. 주인과 연결된 자동차 '렘넌트'라는 설정은 몇 번이고 죽은 뒤에도 차고로 돌아오는 자신과 자동차를 설명하고 있으며, 매번 같은 나들목을 나가도 지형과 위치가 달라지는 것은 통제 구역 전역에서 발생하는 '불안정성'이 이를 뒷받침합니다. 거기에 안그래도 어려운 1인칭 운전의 난도를 배가시키는 각종 '이상 현상'들도 각자의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고요.

앞서 이야기했듯, 서바이벌 게임 특유의 문법은 여느 게임들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거점을 나가 필요한 자원을 획득하고, 모은 자원을 토대로 거점을 강화하는 식이죠. 하지만, 모든 게임플레이를 아우르는 '자동차'라는 존재가 다른 게임에서는 경험할 수 없었던 신선함을 선사합니다.

자원을 채취하기 위해선 차량 밖으로 나가 도보로 이동하는 경우도 많긴 하지만, 이 게임에서 차량은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혼자 도맡다시피 하고 있습니다. 이상 현상과 방사능으로부터 주인공을 보호해 주고, 트렁크에는 재료를 보관하거나 제작할 수 있는 툴이 적재돼 있고, 조수석에 장착한 태블릿을 통해서는 구역의 지도를 확인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역시나 본래 목적인 '이동 수단'으로서 역할도 빼놓을 수 없죠.

이처럼 자동차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보니, 플레이어 입장으로서는 이 기묘한(스토리 상 주인을 미치게 만들 수도 있다는) 자동차와 유대감을 갖지 않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입니다. 거기에 더해, 게임에서 제공하는 상당히 자세한 차량 정비 과정도 이를 돕는 데 적지 않은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 폐품 수집하고, 수집한 재료로 물건 만들고

▲ 기본 토대는 '서바이벌' 공식을 따르고 있습니다


'자동차'에 유대감을 더하는 로그라이크 플레이스타일

▲ 처음에는 내 차 조립하는 소소한 재미를

'퍼시픽 드라이브'는 자신의 자동차를 관리하는 방법을 튜토리얼 부분부터 아주 자세하게 설명합니다. 게임을 구매하지 않고도, 데모 버전을 플레이하는 것만으로도 꽤 상세하게 익힐 수 있는 정도죠. 우리가 실생활에서 겪는 자동차 관련 문제와 비슷하게, 게임 속 유일한 이 자동차도 상당히 손이 많이 가는 녀석입니다.

외부로부터 운전자를 보호하는 차체 부품도 꽤 여러 군데로 나뉘어 있고, 재료에 따라 방어와 내구도는 물론, 차량의 외관까지 달라지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처음 차를 발견했을 때는 여기 저기 녹슬고, 청테이프로 대충 기워둔 모습이지만, 여러 차례 운전을 하다 보면 상당히 그럴싸한 모습을 만들 수도 있죠.

트렁크까지 합해 총 다섯 개의 문짝, 그 양 옆으로 붙이는 각종 패널에 범퍼, 트렁크 공간까지. 상당히 자세한 부분을 교체하고, 정비할 수 있기 때문에 필요로 하는 재료도 많이 드는 편입니다. 거기에 이상 현상과 맞서 가며 운전을 하다 보면 각 부위에 손상이 일어나기 때문에, 이를 고치는 물건을 만들 재료도 필요하죠. 문제는, 차에 발생한 문제마다 필요로 하는 물건도 다르다는 점일 것입니다.

▲ ??? : 조립 다했으면 이제 고쳐야지?

예를 들어, 창문에 금이 간 것을 수리하는 데는 특정 재료가 필요한데, 그 재료로는 자동차에 난 펑크를 고칠 수는 없습니다. 금 간 유리, 펑크 등은 부위의 내구도와 다르게 적용되는 디버프 같은 것으로, 이를 방치한 채 운전을 하다가는 더 좋지 않은 결과를 초래할 수 있죠. 틀어진 바퀴 축, 부식된 패널 등등... 한 번 거점 밖을 나설 때마다 자동차를 아끼지 않고는 못 배길 문제들이 도로 곳곳에 도사리고 있습니다.

이렇게 손이 많이 가는 차량과 함께 하다 보니, 개인적으로는 개발사가 의도한 대로 차량과 '유대감'을 느끼는 것이 무척 자연스럽게 느껴졌습니다. 게임의 주요 스토리 전개가 바로 이 강제로 연결된 '유대'를 끊어내기 위한 것임을 감안하면, 꽤나 모순적인 구조라고도 볼 수 있죠. 이것 저것 수리해 가며 앞으로 나가는 과정이 힐링이라고는 할 수 없겠지만, '로드 트립'의 로망을 어느 정도 충족시킨다는 점에서는 공감할 수밖에 없을 듯 합니다.


이렇게 다채로운 차고, 차량 업그레이드 시스템과 함께, '퍼시픽 드라이브'를 로그라이크 장르로서 완성시키는 요소는 바로 '올림픽 통제 구역'을 배경으로 하는 필드입니다. 이 게임의 맵은 오픈 월드처럼 구성되지는 않았습니다. 막 필드는 '나들목'이라는 스테이지로 존재하며, 각 나들목은 이름 그대로 지나쳐가는 지역으로, 때로는 최종 목적지로도 기능합니다.

통제 구역 전반에 걸쳐 나타나는 '불안정성'은 앞으로 플레이어가 도로를 나설 때마다 마주하는 온갖 이상 현상을 일으키는 원흉입니다. 스테이지(나들목)마다 무작위로 달라지는 지형과 등장하는 이상 현상들을 극복하고, 필요한 재료를 모아 차고로 돌아오는 것이 '퍼시픽 드라이브'의 핵심 게임플레이라고 할 수 있죠.

▲ 야간 운전은 특히 무섭습니다

이상 현상 대부분은 처음 마주했을 때 도대체 어떤 특징을 가졌는지 알기가 쉽지 않습니다. 튜토리얼 과정에서도 알려주는 부분이지만, 플레이어는 각 이상 현상을 스캔하고, 저널에 기록된 내용을 읽어 해당 현상이 실제로 어떤 효과를 나타내는지 유추하는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간, 차량이 붕 떴다가 반파되는 끔찍한 경험을 할 수도 있으니까요. 물론, 모든 이상 현상들이 플레이어나 자동차에게 적대적인 것만은 아닙니다. 개중에는 차량의 속도를 높이는 부스터 역할을 하는 현상도 있고, 드물게 차체를 회복시켜주는 고마운 것들도 있습니다.

또 하나, 올림픽 통제 구역에서는 '불안정성' 때문에 이미 지나온 길을 통해 차고로 돌아갈 수가 없다는 설정도 가지고 있습니다. 차고로 되돌아가기 위해서는 해당 스테이지에서 '앵커'라 불리는 물건을 회수하고, 이를 이용해 포탈을 생성해야 하죠. 하지만, 앵커를 회수하면 그 지역이 빠르게 불안정해지기 때문에 서둘러야 합니다.

이 앵커를 회수한 직후부터 포탈을 생성하고, 뛰어들기까지 시간은 게임에서 가장 손에 땀을 쥐는 순간들 중 하나입니다. 온 세상이 나와 내 차를 위협하는 와중에, 포탈을 향해 외롭고도 급박한 운전을 하는 경험을 느낄 수 있습니다.

▲ 죽으러 가는 것 같지만, 저게 살 길입니다


힐링 로드 트립을 기대한 자, 희망을 버려라(?)
▲ 가끔 이렇게 경치를 감상할 수는 있긴 합니다

포스트 아포칼립스 분위기에서 내 차와 함께 여정을 하고, 가다가 기름이 떨어지면 옆에 서 있는 폐차에서 뽑아오고 하는 로드 트립을 생각했다면, 다시 한 번 구매를 고민하는 게 좋습니다. 트레일러 초반에 보여주는 태평양 북서부의 울창한 삼림보다는, 후반부에 보이는 정신없는 불안정성이 이 게임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초반부에 게임의 메커니즘을 상세하게 설명해주는 덕분에, '퍼시픽 드라이브'의 핵심 게임플레이를 적응하는 데 큰 어려움이 있지는 않습니다. 탐험 중 발견하게 되는 이상 현상이나, 사물들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 저널을 펼쳐보는 과정 또한 '내가 모험을 하고 있다'는 느낌을 전달하는 면에서는 어느 정도 만족스럽기도 했고요.

그러나, 게임의 진정한 허들은 '1인칭 시점으로 자동차를 운전하는 것'에 있습니다. 차에서 내려 물건을 찾고, 정비를 하는 과정도 물론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 차량을 운전해야 하기 때문에 레이싱 장르에 익숙하지 않다면 적응에 어려움을 겪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특히, 이 운전 미숙에서 오는 난도 문제는 온갖 이상 현상들이 발생할 때 더욱 두드러집니다. 갑자기 차를 잡아다 절벽으로 던져버린다든지, 방향을 뒤바꾸거나 고장을 내는 등 주행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들도 많기 때문이죠. 게다가 지형 자체도 무작위로 전개되는 만큼, 도로보다 절벽을 거꾸로 오르는 일도 부지기수였습니다.

▲ 나중엔 이정도는 이상 현상도 아니게 됩니다

▲ 만날 때마다 섬뜩한 마네킹도 그렇고요

1인칭 운전(그것도 비포장 도로를!)과 언제 어디서 튀어나올지 모르는 이상 현상, 허구한 날 내구도가 줄어드는 내 자동차, 잠깐 화창했다가 태풍이 몰아치는 날씨, 물자를 다 잃어버릴 위험을 무릅써야 하는 불안정성 등은 예상보다도 더 플레이어에게 피로감을 선사하는 편입니다. 게임의 핵심 콘셉트가 취향에 맞는 것과는 크게 관련 없이, 게임을 하면서 '지친다'는 느낌을 여러 차례 받았던 것은 오랜만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런 피로감은 주로 자동차의 상태와 관련한 것이 큰 것 같습니다. 어쩌면, 이 게임에서 차량의 파손은 죽음보다도 치명적일 수 있습니다. 잠깐 길에서 벗어났다가 걸레짝이 된 차체, 수중에 수리 퍼티 하나 만들 재료도 없을 때의 그 참담한 심정이란... 그나마 차고에 있는 '친절한' 쓰레기통이 대충 쓸만한 부품들을 지원해 주기는 하지만, '또 나갔다가 남아 있는 문짝도 떨어지면 어떡하지?' 하는 걱정만 하다가 게임을 종료한 적도 있었죠.




생각해보면, 세상에는 마치 고통을 받기 위해 게임을 하는 것처럼 보이는 게이머들이 참 많습니다. 무한한 죽음을 극복하고, 그 속에서 성취감을 느낀다는 소울라이크 팬들도 그 중 하나겠죠. 로그라이크 장르 또한 무수히 반복되는 과정에서 느끼는 절망을 극복하고, 한 순간에 찾아오는 쾌감을 즐긴다는 것에서 닮은 점을 찾을 수 있겠습니다.

'퍼시픽 드라이브'는 바로 이런 분들을 위한 게임입니다. 자동차에게 애정을 쏟아 본 경험이 있거나, 그런 경험을 하는 이들을 공감했던 적이 있다면 게임 속 스테이션 웨건을 여행의 동반자로 바라보는 것도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모든 게 불안정하고, 불규칙한 세상 속에서, 짐칸이자, 이동수단이자, 방사능 차폐막이기도 한 자동차를 어찌 아끼지 않을 수 있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