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전 완전히 실패한 개발자입니다.


이럴수가. 원래 계획이 완전히 틀어져 버렸다. 보통 인터뷰를 하게 되면 나만의 시나리오를 미리 짜둔다. 그렇게 해야 실제 인터뷰 대상을 만났을 때 우왕자왕하지 않고 본래의 목표를 잘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게 없으면 기자나 인터뷰 대상이나 시간 낭비하기 딱 좋다.


해서, 작년 초부터 소셜게임 파티를 자체적으로 개최해 업계의 많은 관심과 호응을 이끌어낸 김윤상와의 인터뷰를 준비하면서도 기본적인 전개 방향에 대한 계획을 미리 세워뒀었다.


근데, 그게 기자의 질문에 김윤상씨가 처음 답변한 말 한마디를 시작으로 완전히 뒤틀려버린 것이다. “어떻게 해서 게임 개발자의 꿈을 키우게 되셨어요?” 일반적인 인터뷰에서 첫 번째 질문, 그리고 몇 마디 답변이면 족한 것이 2시간 넘게 이어질 줄은 전혀 예측하지 못했다.


더 황당한 사실은 김윤상씨가 쏟아내는 스토리가 너무 흥미진진하고 비장해서 도무지 중간에 끊을 타이밍 조차 찾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인터뷰 당시 공유했던 내용들에 대한 편집을 배제하고 최대한 기자의 기억을 짜내어 현장에서 나왔던 이야기 그대로를 복원하고자 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과연 내가 타인의 인생을 이토록 깊게 들여다 본 적이 있었는가.



[ ▲ 화제의 소셜게임 파티의 주인공, 개발자 김윤상씨 ]





2.

"아마 초등학교였던 것 같은데...그 당시 게임챔프라는 잡지에 "당신도 게임기획자가 될 수 있어!"와 비슷한 코너가 있었어요. 그걸 보고 처음으로 나도 게임 개발자를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당시 '메가 드라이브'도 구입해 집에서 즐기고, 좀 커서는 컴퓨터 학원에 들어가서 간단한 프로그램도 배웠었어요"


그땐 컴퓨터 학원이 유행이지 않았나요? 저도 3M 플로피디스크 케이스를 한쪽 팔에 끼고 잘난 척하면서 베이직, 파스칼 등등을 대충 배웠던 것 같은데.(웃음)


"네, 근데 저는 그게 공부를 열심히 하기 싫다는 핑계로 작용했던 것 같아요. 일종의 도피처였죠. 중,고등학교 때도 컴퓨터 게임 동아리게 가입하긴 했는데 다른 친구들은 프로그래밍을 배우면서 정신이 없었는데 전 '나는 기획자 할꺼니 이런거 배울 필요 없어.'라며 오직 게임만 했던 것 같아요. 좀 어리석었죠."


그러면 대학은 '컴퓨터'나 '게임' 관련 쪽으로 전공을 하셨겠네요?


"그것도 아니었어요. 전공이 경영정보 시스템(MIS)이었는데, 계속 있자니 '이건 내 길이 아니다' 싶어서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랑 창업을 하게 됐습니다."


대학생때 창업이라...쉬운 길은 아니었을 것 같은데.


"그때가 루리웹이 막 생겼을 땐데, 국내 최초로 지인들과 '게임대시'라는 비디오게임 전문잡지를 창간했어요. 저는 편집장을 했고요. 나름 자체 생산한 기사와 특집성 기사로 승부를 보려고 했는데 3년이 지나도 수익모델이 보이지 않는 거예요. 재정은 점점 더 어려워지고. 그래서 회사를 인수해줄 회사를 찾아다녔는데 그것도 잘 안되고 해서 어쩔 수 없이 각자 제 살길을 찾아서 떠나고 저는 공중에 붕 뜨게 됐죠."


학교를 휴학한 상황이셨나요?


"네, 그렇다고 다시 학교로 돌아갈 수도 없고, 정처없이 방황만 했어요. 일단 먹고는 살아야 하니 GM 계약직도 하고, 성인 컨텐츠 업체에서 게시판 아르바이트도 했어요. 그때만 해도 하이텔, 나우누리같은 PC통신이 있었죠. 막말로 닥치는대로 일을 하면서 살았어요. 후회도 정말 많이 했습니다. 집에는 학교 때려치고 게임 만들겠다고 말해뒀는데 상황이 이렇게 됐으니.. 고향이 대구인데 거의 가출하다시피해서 나왔었 거든요."


그때 나이가?


"20살, 21살이었죠. 그당시 저는 정말 사회화가 덜 된 인간이었어요. 사장님들하고 막 다투고, 게임회사에서 일하는 것 자체를 아르바이트처럼 쉽게 생각했었어요. 그러던 중에 엠드림이라고 그 당시 모바일게임 1위 업체에 취직하게 되었어요. 모바일 뿐 아니라 온라인게임도 하고, 패키지 유통도 하는 '게임종합상사'라고 해야하나? 그때는 정말 대단한 회사였어요."


방황하다가 갑자기 어떻게 그런 좋은 회사에 취직을.


"지나서 생각해보면 그때 사장님이 저의 가능성을 잘 봐주신 것 같아요. 그런데, 원래는 게임 기획으로 알고 들어간 거였는데 실제 가보니 마케팅팀 소속의 QA 선임 자리인거예요. '속아서 들어간건 아닌가' 하면서 실망과 함게 고민도 엄청했습니다.


하지만, 그 당시 워낙 가난했었고, 가출 때문에 집에서도 연락이 끊겼던 상태라 더 이상 돌아갈 곳이 없었죠. 지금까지 제가 이룬 것도 하나도 없었고요. '일단 열심히 일을 해보자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주변 모두가 인정할 수 있을만큼요."


"그때 업무가 통신사와 조율하면서 모바일게임 수십 개 테스트를 리드하면서 마케팅도 도와주면서, 게임개발도 아니고 기획도 아니고 마케팅도 아닌 다양한 업무를 종합적으로 했었는데요. 그러면서 정말 많이 배웠습니다. '시장에서 이런 경쟁작들이 있으니 우리는 이런 게임을 만들어야겠구나' 아니면 '이런 게임들이 시장성이 있구나.'


어떻게 보면 그제서야 게임 공부를 제대로 시작한거네요. (웃음)


"네, 맞습니다. 서점에 가서 책도 쭉 봤는데 '게임 기획'과 관련된 책은 하나도 없는 거예요. 그래서 상품 기획, 전략 기획 책을 사서 읽었고, 그러면서 다른 사람들하고는 조금 다른 방향에서 게임기획에 접근하게 되었어요. 아마 그때 경험들이 쌓여서 개발자지만 사업적인 부분을 동시에 고려하는 지금 저의 모습이 나온 것 같습니다. 그렇게 모바일 회사에 다니고 있었는데 어느 샌가 슬슬 피쳐폰 게임 개발에 한계를 느끼게 되었어요."



그 당시 게임을 좋아했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은 꿈꿨을 게임 개발자의 길이기에, 김윤상씨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집중할 수 밖에 없었고,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1시간이 훌쩍 지났다는 것을 발견했다. 문제는 이제서야 본격적인 온라인 게임개발 이야기로 들어섰다는 것. 한숨을 크게 쉬고 다시 키보드를 잡았다. 진짜 미칠듯이 타자를 쳤던 날이었다.








3.

"24살 정도가 됐을 거예요. 온라인 게임 기획을 해야겠다는 생각에 이직을 결심하고, 엠게임에 입사했습니다. 2D 온라인 기획팀에 배속되었는데 너무 행복했어요. 드디어, 꿈을 이뤘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때 또 나쁜 버릇이 도졌던 것 같아요."


나쁜 버릇요?


"그러니까 '나 혼자 열심히해서 우리 게임을 살려야겠다' 이런 거죠. 부족한 점도 많았고, 사실 인간적인 결점도 많았지만 기획 쪽으로는 '일 잘한다'는 소리를 들었거든요. 그래서, 현재 서비스되고 있는 게임의 시스템과 밸런스를 완전히 뜯어고치는 일을 저지르게 된 거죠.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무서운 짓이었습니다.

순간적인 동접은 1.8배 정도 올랐는데, 사실 곧 다시 예전으로 떨어졌습니다. 그당시 기획팀장 직책을 가진 분이 없었고, 선임은 퇴사한 상태에서 혼자 남아서 수습을 하려니 앞이 까막득했죠. 생존하려고 발버둥을 쳤습니다. 아는 형에게 연락해 시나리오 보조로 일하게 해서 거의 팀장 스타일로 일했어요. 그러면서 온라인 게임 기획에 대한 감도 서서히 익혀나갔습니다."




"그래서 든 생각이 "더 큰 회사로 가야겠다"였어요. 지금이었다면 리뉴얼 후에 게임 동접과 매출을 보면서 그 게임을 더 성장시켜야겠다고 생각했을텐데, 그땐 너무 어렸고 정신적으로도 성숙하지 못했었요. 나중에 후회도 정말 많이 했습니다."


"이직 후에 CJ 인터넷에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아무래도 대기업이다 보니 가출 후에 연락이 끊겼던 집에서도 드디어 인정해주는 분위기였어요. 근데, 그때 친한 지인한테 연락이 왔습니다. '겅호가 한국에 법인을 설립하는데 북두의 권과 그란디아를 한글화해서 서비스한다. 한국판 기획을 니가 해봐라'라는 제안이었죠. 아무래도 정식으로는 처음 팀장 직책을 제안받은 거라 거절하기가 힘들었습니다. 그렇게 알고 신나서 준비하고 있었는데 일주일 후에 겅호가 그라비티를 인수했다는 소식이 들렸습니다. 그러면서 겅호코리아 플랜이 공중에 떠버렸죠."


...그러면 다시 실업자가 되신 거예요?


"네...그렇게 패닉상태에 빠져 있다가 어떻게 어떻게 겨우 액토즈소프트에 입사했어요. 그때가 지금 위메이드의 서수길 대표님이 오시면서 회사에 활력을 불어 넣을려고 다양한 제도를 마련하던 시기였어요. 사내 게임 기획공모전도 그렇게 나온 겁니다. 생각을 했죠. '디렉터나 프로듀서가 아닌 이상 성공할 수 있는 게임을 만드는 건 한계가 있다. 내가 직접 디렉터나 프로듀서가 되어야 겠다.' 그래서 최단루트를 찾은 것이 게임기획공모전이었고 결국 대상을 타게 되었습니다."


드디어 꿈을 실현할 수 있는 기회를 잡으셨군요.


"제가 기획한 게임이 '로맨싱 블레이드'란 이름의 종스크롤 슈팅 RPG였는데 그때 회사에서는 '니가 개발팀 멤버를 데려올 수 있으면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를 시켜주겠다.'라고 했어요. '데려오면 단체로 면접을 본 후에 연봉협상을 하겠다.'는 약속도 했죠. 근데, 갑자기 액토즈가 중국회사인 샨다에게 매각되어 버린 거예요. 그 과정에서 대표님도 바꼈고요. 또 그렇게 공중에 붕 뜨게 된 겁니다. 사실 그 팀을 준비하면서 저 때문에 회사를 그만두신 분도 있었거든요, 진짜 충격적이었어요."


사실 인생을 살면서 누구나 실수를 하고 잘못된 결정을 내리기도 하지만, 김윤상씨만큼 꼬이기도 힘들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자가 지금까지 했던 인터뷰 중에 '후회'와 '반성'이라는 단어가 가장 많이 나왔던 케이스가 아니었을까.




[ ▲ 김윤상씨가 기획했던 '로맨싱 블레이드' 기획서의 일부 ]





4.

"그렇다고 주저않아 포기할 수는 없었습니다. 내가 만든 기획이 있었고 기획부터 프로그래밍, 아트까지 세팅된 팀이 있는데 기회를 살리지 않는 건 바보 같은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때부터 한국에 있는 유명한 게임 회사는 모조리 찾아가 무작정 돌격해서 받아달라고 빌었죠. 직접 돌아다니면서 PT도 많이 했습니다."


어디 어디에 가셨었나요?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회사들은 거의 다 다녔어요. 한 회사에서만 면접을 10번 이상 보기도 했고요. 그때 평가가 '게임이 재밌는 건 알겠는데 실제 괜찮은지는 모르겠다.'였어요. 팀 전체는 안되고 유능해 보이는 사람 두 명만 입사시켜주겠다는 제의가 왔었습니다. 사실 팀원들의 앞 날이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두 명이라도 매력적인 직장에서 일하게 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죠. 그 당시 생계다 다들 어려웠으니까. 저는 '다른 기회를 찾자'는 생각을 했습니다. 근데 그 회사의 대표이사가 저를 예쁘게 보셨던 것 같아요."


예쁘게 봤다.... 그게 어떤 의미죠?


"임원진, 팀장 면접을 10번 이상 보고 계속 떨어지니까 특이한 캐릭터로 생각하셨나봐요. 사실 그 대표님 때문에 10번의 면접도 볼 수 있었던 거죠. 너무 특이한 캐릭터라서 입사를 못하는 것 같다며 면접비로 300만원을 줬어요. 해외 여행이 갔다오라면서요. 갔다와서 구경한 이야기를 자기에게 해달라고 하더라고요. 평범한 분은 아니셨어요."


그래서 해외 여행을 가셨나요? (웃음)


"아뇨, 생활비가 없었기 때문에 대부분을 생활비로 쓰고, 필요한 책을 50만 원치 사서 읽었어요." 그 대표님이 나중에 연락을 주신다고 기다리라고 했는데, 연락이 오더니 역시나 "입사는 안되겠다"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러면서 차라리 "내 수행비서가 되어서 같이 다니자"라고 제안하셨어요.


갑자기 수행비서 제안은 좀 의외라는 생각이 드네요.


"저도 그 대표님과 함께 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확고해서 단번에 하겠다는 말씀을 드렸는데 한번은 새벽에 전화가 와서 생년월일을 가르쳐 달라시는 거예요. 이전부터 그런 소문은 대충 들었었습니다. 유명한 점장이한테 저에 대해 물어본다는 거였어요. 몇일 뒤에 전화가 다시 오더니 제가 30세가 되기 전까지는 인연이 좋지 않다고 나중에 보자고 하셨어요. '이게 농담이야, 진담이야'라며 좀 당황했는데, 여전히 그 대표님을 존경하고 있었기에 인연이 정말 아닌가 보다 하고 헤어졌습니다."


"그 후에 계속 고생을 했었습니다. 폐인, 백수, 히키코모리 뭘 갖다 붙여도 될만한 상황이었죠. 친구나 선배, 업계 동료들은 정직하게 학교 졸업하고 착실히 한 회사에서 경력을 쌓아서 인정받는데, '나는 그동안 뭘했나.'라는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를 않았어요. '너무 무모하게 살았나.'라는 후회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위메이드 대표로 막 들어간 서수길 대표님한테 연락이 왔어요."


액토즈에서 퇴사한 서수길 대표님이 위메이드 공동 대표로 취임하셨죠.


"네, 갑자기 저한테 연락이 와서 '너를 기억하고 있다. 너의 팀도 기억한다"라시며 위메이드에 들어 오라는 제안을 하셨습니다. '헉? 이게 내 인생의 마지막 찬스인가.'라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이미 원래 팀원 중에는 다른 회사에 입사해서 잘 다니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최고의 팀을 꾸릴 수는 없지만 차선의 팀은 세팅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있었습니다. 그당시 위메이드도 서수길 대표님이 오셔서 크게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을 만들려는 시기였기에 적극적이었어요. '기획서 가져와봐라.' 'PT 해봐라.' 그랬죠."



결과는 어땠나요?


"그당시 제가 바라보는 게임 쪽에서의 문제의식 중의 하나가 '너무 어렵다'라는 거였어요. '여자친구 내지는 부모님이 할 수 있는 게임이 필요하지는 않을까.' '새로운 장르로 접근해야만 성공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웹 2.0 시대에 맞춰서 커뮤니티랑 인간관계 네트워크를 강력히 어필하면 가능성이 있다.' '마이스페이스와 같은 관계지향적인 구조가 중요하다.' 등등 어떻게 보면 지금의 소셜게임과 유사한 형태로 PT를 했고 결과적으로 반응이 좋았어요"


"위메이드 사내에서도 외부에서 온 사람들이 PT를 해서 팀이 생기는 건 기적이라고 말했을 정도니까요. 다시 1달 반, 2달 반 후에 구체적으로 너희 팀이 뭘 만들고 싶은지 보여달라는 요청을 하셔서 신나게 달려 프로토타입을 완성했습니다. '커뮤니티'라는 시대의 흐름을 게임 기획에 반영하지 않는 건 잘못된 일이라고 생각해서, 결국 나왔던 게 '생활형 자식 육성 RPG'였습니다. 4명이서 두 달만에 어엿한 프로토타입을 발표하니 회사에서도 깜짝 놀랐고, 프로젝트가 완전히 승인됐던 거죠. 그 당시가 2007년 10월경이었는데 그때 이미 지금의 소셜게임과 유사한 컨셉을 잡았던 겁니다."


그러면 그렇게 간절히 원하시는 디렉터 자리도 차지하셨고, 이제는 진짜 장미빛 미래만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은데...


"그렇지가 않더라고요. 제가 생각해도 기획은 좋았었습니다. 하지만, 팀장 내지는 디렉터로서의 경륜이 부족하다보니 보통 '나댄다'고 하죠. 자만하고, 다른 사람을 비방하고, 팀원들에게 감정적으로 대하고. 그때도 웃겼던 게 제 자신이 '난 기획과 개발만 잘하면 된다.'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어요. 팀원들과의 관계를 설정하고, 사기를 북돋고, 회사를 설득하면서 프로젝트의 전체 일정도 봐야하는 디렉터의 역할을 제대로 못했던 거죠."


"게임 자체가 그 당시 이해하기가 힘든 게임이었기 때문에 종종 위쪽으로부터 압박도 있었는데, 그러면서 더욱 조바심을 내다보니 개발 일정도 꼬이고, 기획도 애초에 기획했던 것에서 벗어나 컴팩트한 MMORPG로 선회하면서 결국 프로젝트가 산으로 가는 상황에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팀원들에까지 욕을 먹었습니다. 결국, 여러가지 압박으로 인해 회사를 그만두게 되었고 다시 한번 절망에 빠졌죠"


아...이 무슨...


"같은 팀에 있던 분들께는 지금도 너무 죄송스러웠어요. 사실 그분들이 도와주셔서 제가 그 위치에 있을 수 있었던 건데. '내 인생의 마지막 기회를 놓쳤구나' '능력도 능력이지만 사회성이 부족해서, 인간적인 결함 때문에..' 자꾸 이런 생각이 들어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집에서 강제로 제주도에 저를 보냈죠. 월세 15만원 짜리 민박집에서 책이랑 노트북만 들고 가서 폐인이 되어 박혀 있었습니다. 회사에 대한 실망, 팀원들에게 미안함, 그리고 제 자신에 대한 실망, 보통 '자기 혐오'라고 그러죠. 거의 8개월 간을 그렇게 지냈던 것 같아요."



인터뷰를 커피전문점 2층에서 진행했었는데 어느덧 오후가 늘어져 하늘에 살짝 노을이 번지기 시작했다. 가공할만한 솔직함으로 기자의 마음을 완전히 무장해제 시켜버려 계속해서 놀랐는데, 특히, 팀원들에게 미안하다는 표현을 할 때와 제주도에서의 폐인 생활을 하나씩 기억해낼 때의 표정은 너무 비장해서 인터뷰를 잠시 중단할까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었다.




[ ▲ 그당시 김윤상씨의 기획서, 2007년이 이미 소셜게임과 유사한 게임성을...]





5.

"제가 그당시 폐인 생활을 하고 있었지만 세상을 보는 창까지 완전히 닫고 있었던 건 아니었습니다."


"소셜게임이 막 이슈가 되기 시작했던 때였죠. 트위터와 페이스북이 한국에 알려지고, 소셜게임 회사인 징가가 대박이 났다는 소식이 한국을 뒤엎었습니다. 소셜게임들을 하나씩 분석하면서 '내가 쓸데 없이 너무 빨리 시도했구나."라는 생각과 동시에 내가 기획한 것과 실제 소셜게임과의 차이도 발견해 제것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면서, '내가 완전히 헛된 길을 걷지는 않았구나'라는 생각을 했었죠. 그때 '소셜게임 파티'를 한번 열어봐야 겠다는 결심을 하게 됩니다."



폐인처럼 있다가 갑자기 '소셜파티'를 개최하기로 결심하셨다는 게 좀처럼 믿기지가 않네요.


"어떻게 보면 트라우마였던 것 같아요. 어릴 때부터 가출해서 정직한 코스를 밟지 못하면서 사회성까지 부족하게 되었고요. 동창, 친구들과 같은 일반적인 지인들과의 관계 설정을 제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파티'라는 컨셉은 제가 그동안 못했던 부분에 대한 반작용이었던 것 같아요. '더 이상 도피해서는 안되겠구나'라는 깨달음을 얻었던 거죠."

"소셜게임에 대한 나의 판단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에 대한 확신이 생겼고, 그것을 세상에 꼭 어필하고 싶었어요.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외치고 싶었죠."


그렇다고 해도, 한 개인이 소셜파티를 개최한다고 했을 때 반응이 좋을 거라고는 예상하기 힘들잖아요.


"그때 '소셜게임이 뭐냐?'라고 물으면 그 누구도 제대로 대답을 못하던 상황이었어요. 때문에, '소셜게임에 대한 정의를 한께 모여서 이야기 해보자'. '그러면 자연스럽게 업계의 반응이 모일거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게다가 지금은 세상이 좋아져서 트위터나 모꼬지, 페이스북, 구글독스 같은 '툴'도 다양해졌기에 기획적인 '솜씨'만 잘 부린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생각했었죠."


"그리고, 저 말고도 소셜게임 비슷한 걸 만들다가 좌절된 프로젝트의 개발자분들이 몇몇 있다고 들었어요. 지금의 소셜게임과 100%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소셜과 커뮤니티에 집중해서 게임을 개발하고 싶었던 분들이죠. 사실 대한민국 온라인 게임 회사에서 이런 게임들을 만들기가 쉽지가 않잖아요. '왜 레이드가 없어?' '왜 전투가 없어?' 이런 질문이 흔하죠. 저처럼 이런 환경에서 좌절해 본 사람만 모여도 최소한 망하지는 않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기획'을 하신거네요.


"네, 그랬던 것 같아요. '소셜게임이 막 뜨기 시작했던 시기였기 때문에 개발자, 창업자, 투자자, 학생들이 모이면 얼마든지 재미있는 걸 할 수 있겠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할까?'를 무지 고민했죠. 행사 결과는 아시겠지만 정말 성공적이었습니다. "나의 기획자로서의 능력은 아직 죽지 않았구나."라며 그동안의 패배 의식도 해소할 수 있었죠."


"내가 이쪽 분야에서 할 수 있는 게 있겠다. 나의 과거를 돌아봤을 때 게임 개발자, 기획자, 디렉터로서는 완전히 실패했다. 하지만 내가 가진 기획 쪽에서의 장점도 있다. 게임 개발에 파묻혀 나의 외골수적인 단점을 부각시키기 보다는 기획과 사업을 동시에 할 수 있는 일을 찾는게 낫겠다. 소셜파티의 성공으로 인해 제 인생의 터닝포인트를 발견하게 된 거죠."


"사실, 처음에는 반응이 없었습니다. 그러다 갑자기 폭발적으로 모이신 거예요. 제가 일부러 공개툴을 사용해서 어떤 분이 신청했는지 참석자 리스트를 과감하게 공개했거든요. 그것 자체가 컨텐츠라고 생각했습니다. 유명한 분들이 하나 둘식 모이니까 나비효과가 나면서 '어? 빨리 신청하지 않으면 안되겠는데.'라는 분위기가 퍼지기 시작했죠. 철저하게 이벤트 기획으로 접근했던 게 먹혔던 것 같아요."



작년 12월에는 소셜파티보다 더 크게 '소셜게임 쇼케이스'도 진행하셨어요.


"소셜파티 때는 SK컴즈에서 정말 적극적으로 도와주셔서 성공적인 개최가 가능했었는데, 일단 성공사례가 있으니 쇼케이스 때는 MS, 골프존, 엔씨소프트, NHN 등 다른 곳에서도 서로 도와주겠다고 먼저 연락이 오셨어요. 제 입장에서는 재밌겠다는 생각에 또 열심히 기획했는데 당일 행사장인 엔씨소프트 대강당에 직접 와서 보니 '내가 정말 거대한 일을 벌렸구나'라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학연, 지연 등의 인맥을 떠나, 얼굴 한번 보지 않고 오직 '소셜게임'이라는 키워드로 이 많은 사람들을 모았다는 생각에 정말 보람찼습니다."


쇼케이스 뒤에 이어진 '네트워킹 파티'도 인상적이었다고 들었습니다.


"NHN에서 후원해주셔서 부페에서 네트워킹 파티를 열었는데 초대장을 60장 뿌렸는데 90명이 오셨어요. 대부분 대표이사나 이사급 임원 내지는 파트너들이셨죠. 시장 바닥같은 곳에서 사장, 이사들이 바글바글 모여, 그것도 선 채로 토론을 했던 케이스가 이전에는 없었을 겁니다. 때문에, 참가자들로부터 '재미있었다.' '기획을 잘했다'라는 칭찬도 많이 들었습니다. (웃음)"


현재 김윤상씨는 지인의 소개로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1인 기업 창업 준비 중에 있다. 왜 김윤상씨는 새로운 사업을 결심했을까? 그의 행보는 정말 예측이 불가능하다.




[ ▲ 작년 12월 엔씨소프트 대강당에서 열렸던 소셜게임 쇼케이스의 포스터]





6.

"세상에 너무 너무 재미있는 일들이 펼쳐지고 있는데 제가 주도적으로 뭔가를 하지 않으면 안될 것 같았습니다. 아마, 게임 개발쪽이었다면 절대로 창업을 하지 않았을 거예요. 소셜게임 파티와 쇼케이스를 개최하면서 나만이 할 수 있는 종류의 창업을 생각하게 되었고 그때 준비하기 시작한 겁니다. 회사의 정식명칭은 '와일드카드 컨설팅'이고요, 일단은 '주식회사 김윤상'으로 보시면 됩니다. 당장은 1인 회사죠. 나중에 경리나 보조 마케팅 직원이 필요할 지는 모르겠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하는 회사죠?


"지금 보면 SK컴즈나 NHN은 회사 차원에서 소셜게임에 많은 투자를 하고 있습니다. 다양한 개발사 투자 후원 프로그램이 있는데요, 스타트업 개발사들이 잘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단순히 이 둘을 잇는 중계를 말하는 건 아닙니다. 대부분의 소셜게임 회사들이 개발자들로만 이루어져있는데, 이런 회사들의 전략, 마케팅, 홍보 파트너로써, 혹은 회사 외부의 멤버로써 함께 업무를 진행하는 것입니다."


"소셜게임 파트너들간의 동맹이라고 하면 될까요? 크로스 프로모션의 개념과도 유사합니다. 소셜게임의 경우 소셜게임끼리 서로 광고를 해주는 게 이익이 됩니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이런 부분이 전혀 안되고 있죠. 한국의 유망한 소셜게임 업체 몇개가 힘을 모아서 서로의 게임을 광고해주는 느슨한 연합을 만들면 어떨까요? 예를 들어 게임 내 토큰이나 퀘스트를 공유하게 만들어도 되고요."


"해외 바이어와 우리나라 소셜게임 업체와의 만남도 준비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소셜게임 파티와 쇼케이스등 중립적인 이벤트를 해왔기 때문에 서로간의 신뢰가 가능한 것 같아요. 최우선 목표는 대한민국 소셜게임계를 명실공히 하나의 산업으로 세팅하는 거예요. 거만하게 보일 수도 있지만 저는 이런 얘기를 합니다. '여러분은 게임을 만드시고, 저는 산업을 만들겠습니다.'"


수익모델은 어떻게 되나요? 월급 때문에 제가 걱정이 됩니다. (웃음)


"컨설팅의 과정에서 보통 연봉 정도의 수익은 낼 것 같아요. (웃음) 지금도 이미 한국에서 탑 5위 안에 드는 소셜게임 업체들과 계약을 한 상태입니다. 4월이면 해당 업체를 통한 보도자료로 구체적인 이야기를 드릴 수 있을 것 같아요. 사실 당장 돈 보다 소셜게임 업체가 성장하는데 동반자 역할을 하는 것이 우선이니까요."



[ ▲ 그가 선택한 새로운 길, 와일드카드 컨설팅]





7.

3시간을 훌쩍 넘긴, 한숨도 쉴틈이 없었던 인터뷰가 드디어 끝이나자 갑자기 극심한 피로가 몰려왔다.


기자가 원래 원했던 것은 소셜게임과 관련된 마지막 파트 뿐이었다. 하지만 인터뷰를 끝낸 결과, 김윤상씨가 걸어온 인생 역정을 그의 입을 빌어 직접 설명하지 않고서 지금의 소셜게임 파티와 그의 1인 기업인 '와일드카드 컨설팅'을 다루는 것은 뭔가 '반칙'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터뷰를 끝낸 김윤상씨의 얼굴에는 미소가 끊이지 않았다. 의욕이 넘치고, 일할 것도 많고, 공부할 것도 많고.. 하루 24시간이 부족할 정도라고 했다. 예전에 있었던 미래에 대한 불안감과 패배의식, 압박감이 모조리 사라졌다고 했다. 지금이 새로운 출발선같다며 마치 인생이 리부트(Reboot)된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고 했다. 기자가 행복하냐고 묻자 그 어느 때보다 가장 행복하다고 했다.


앞으로 김윤상씨에게 어떤 미래가 펼쳐질지 기자는 알 수 없다.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그가 지금까지 내린 판단과 사고에 무조건적인 동의를 할 수도 없었다. 그러면서도, 그에게 응원의 박수를 보내는 것은 자기 반성 속에서 결국 희망을 찾은 그의 모습이 기자의 마음을 무척이나 흔들어놨기 때문이다.


'실패한 개발자'가 아닌 '인간' 김윤상과의 만남은 그토록 인상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