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브와 소라카는 봇 라인 최강이었다."


마법저항력과 방어력을 높여주는 진정한 용기, 이 패시브는 라인전에서 특히 사기적이었고 이는 봇 패왕 그레이브즈를 만들어냈다. 그의 패시브를 더욱 단단하게 해주는 소라카의 은하의 축복까지 더해져 그레이브즈, 소라카 듀오는 한 시대를 풍미했고, 그 안에서 소라카는 오로지 원딜을 믿고 그만을 위해 헌신하는 전형적인 서포터였다.



[▲ 갱킹 온 정글러 따위는 가뿐이 쏴죽여주시던 그 시절 그브형님]


그 후에는 조금 다른 형태로 원딜에 의존하는 누누와 베인 혹은 누누와 케이틀린 조합이 잠깐 유행하기도 했다. 하지만 메타의 변화와 그브의 10연속 너프를 비롯한 누누, 소라카 등의 너프는 이런 식의 서포터를 점차 사라지게 하였고 그 뒤를 이어 블리츠크랭크와 레오나 등의 공격형 서포터의 시대가 온다.




라인에서 킬 타이밍을 확실하게 만들어낼 수 있고, 소규모 교전에서 원거리 딜러 못지않은 딜을 낼 수 있는 공격형 서포터는 확실히 기존의 서포터들을 라인에서 잡아먹으며 손쉽게 성장하였고, 이를 기반으로 한타에서도 충분한 존재감을 과시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공격형 서포터의 시대도 잠시, 서포터의 대세는 라인 스왑에 이은 타워철거메타가 유행함에 따라서 자연스럽게 소나나 룰루 등의 견제형 서포터로 넘어가게 된다.



[▲ 적 정글러의 라인 커버를 강요하기 위한 견제형 서포터의 시대]


지난 금요일 챔피언스 스프링 준결승전, 어느새 확고히 굳어진 이 메타에 신선한 충격을 주는 챔피언이 등장했다. 그것도 결승전 티켓의 행방보다 경기 자체에 많은 눈이 몰려있던 CJ엔투스의 내전에서 "Lustboy" 함장식 선수가 대세를 이루던 서포터 챔피언들과 완벽하게 동떨어진 잔나라는 카드를 꺼내 든 것.

이번 시즌 다소 부진했던 모습의 Captain Jack과 Lustboy듀오를 걱정하던 많은 팬들의 우려를 말끔히 씻어내며 거둔 결과는 3:0 압승이었다. 블레이즈의 봇 듀오는 라인전에서 상대를 잡아내는 육식의 모습이 아닌 철저하게 운영과 수비에 맞춰진 활약을 하였고 한타 페이즈에 진입해서는 교전 자체의 구도를 뒤집는 플레이까지 보여줬다.

이것은 이번 시즌 CJ엔투스 전형적인 블레이즈의 승리 패턴인 "Ambition" 강찬용 선수와 "Flame" 이호종 선수의 라인 압살에 이은 게임 지배가 아닌, 잔나의 서포팅을 받은 잭선장의 하드 캐리였기 때문에 더욱 인상 깊었다.



▷ 챔피언스 스프링 준결승 CJ Entus Blaze vs CJ Entus Frost 3경기 스코어보드 - 모바일용





"뭐야 잔나 좋은데, 지금까지 왜 안 쓴 거야?" 그동안 잔나가 쓰이지 않았던 이유



[▲ 인기 서포터와 비주류 서포터는 일반 유저들의 게임에서도 극명하게 갈린다. (출처: op.gg 5월 랭크 통계)]


잔나가 사용되지 못했던 가장 큰 이유는 '라인전이 힘들다'였다. 견제에 특화된 소나와 룰루, 쓰레쉬 등이 집권하던 봇 라인에서 그들과 같은 딜을 내려면 챠징이 필요한 스킬인 울부짖는 돌풍(Q스킬)부터가 문제였다.



[▲ 아군 보호에는 최고지만 라인전에는 애매한 울부짖는 돌풍]


부쉬 안에서도 챠징되는 모습이 보이는데다가 탄속까지 느린 편이라 실제로 적중시키기가 어렵고, 사용하면 자신의 이동속도가 느려지는 서풍(W스킬)과 AD 추가효과를 이용한 견제를 위해서 자신에게 사용하면 원거리 딜러가 무방비로 노출되는 폭풍의 눈(E스킬)은 말 그대로 양날의 검이었다.

또 한 가지 문제점은 최근 유행하는 메타였다. 빠르게 타워를 철거하는 것이 급선무인 요즘의 봇라인, 타워를 공격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상대 라이너를 타워 안쪽까지 몰아붙여야 한다. 게다가 라인 스왑이 빈번한 현 상황에서 모든 봇 듀오는 "아군의 타워가 부서지기 전에 상대 타워를 밀어야 한다"는 '타임어택' 미션을 가지고 시작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 메타와 맞물려 대세가 되어버린 견제형 서포터]


잔나가 원거리 공격을 이용한 견제가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소나와 룰루, 쓰레쉬 등의 견제력에 턱없이 부족한 것이 사실이며, 이는 지금의 메타에서 상당한 약점으로 작용한다.

라인전 단계를 넘어 한타로 들어가서도 잔나의 애매한 존재감이 항상 아쉬웠다. 제대로 들어가면 한 번에 경기를 가져올 수 있는 소나의 크레센도, 어떤 상황에서든 변수를 만들어낼 수 있는 블리츠크랭크의 로켓 손, 아군 보호는 기본에 서포터의 수준을 뛰어넘는 대미지와 각종 메즈까지 보유한 쓰레쉬를 상대로 잔나가 뭔가 할 수 있는 상황은 상상하기 어려웠다.




단점을 극복해낸 Lustboy의 잔나, 어떻게?


결론부터 놓고 보면 Lustboy의 잔나는 완벽한(이번 경기에서 만큼은) 서포터였고, 가장 힘들다는 '서폿 캐리 게임'을 만들어냈다. 지금의 추세와 부합되지 않는 잔나의 많은 약점을 극복하며 그것도 세계 최고의 서포터라 추앙받는 "MadLife" 홍민기 선수의 쓰레쉬를 상대로 게임에 승리한 것이다.


■ Lustboy는 불리한 라인전을 어떻게 풀었나?

라인전 단계를 살펴보자. 블레이즈와 프로스트의 준결승 3경기, 양 팀의 봇 듀오는 탑 라인에서 맞붙는다. "MadLife" 홍민기 선수는 자신 있어 하던 쓰레쉬를 기용했고, 실제로 라인전에서 미니언들 사이의 약간의 틈을 포착하여 잔나에게 사형선고를 적중시킨다.



[▲ 모든 것을 퍼부은 상대에게 살아남는 것 자체가 기회를 만드는 것]


쓰레쉬의 사형선고는 말 그대로 클린 히트였고, 이어지는 사슬 채찍과 영혼감옥의 연계까지 완벽하게 들어갔다. 요즘 최고의 주가를 올리고 있는 챔피언인 쓰레쉬의 위력을 보여줄 만한 장면이었다.

모두가 잔나가 선취점을 내어줄거라 생각한 타이밍에 Lustboy는 망설임없이 계절풍과 점멸을 연계, 탈진까지 걸렸음에도 불구하고 쉴드와 울부짖는 돌풍을 활용하여 빠져나왔다.

이런 장면은 두 경기에서 수차례 반복되었고, 지원을 위해 도착한 아군과 함께 모든 것을 쏟아부은 적군에게 역공을 가해 이득을 취하는 장면도 연출되었다. 자신이 먼저 기회를 만드는 블리츠크랭크나 쓰레쉬와는 다르게 상대가 만들어낸 기회를 역이용하는 플레이였다.


■ 밥상 뒤엎기의 진수, 상대의 한타 구도를 뒤집는 계절풍

1경기에서 프로스트가 먼저 드래곤 사냥을 끝낸 뒤 도착한 블레이즈, 쓰레쉬가 사형선고를 정확하게 잔나에게 맞추고 다가가지만 잔나가 사슬채찍 도중에 계절풍을 사용하여 쓰레쉬를 본진에서 완벽하게 고립시키며 블레이즈를 승리로 이끈다.



[▲ 완벽한 사형선고였지만 계절풍 한 번으로 쓰레쉬는 적진에 고립된다.]


쓰레쉬의 사형선고가 들어간 순간 '쓰레쉬의 사형선고 → 세주아니의 빙하 감옥 → 세주아니의 혹한의 맹습에 연계되는 오리아나의 충격파 → 케넨의 날카로운 소용돌이 + 트위치의 광역 딜링'의 한타 구도는 프로스트 선수들 전원이 생각했을 것이고, 교전의 손쉬운 승리를 예상했을 것이다.

하지만 쓰레쉬의 사형선고와 세주아니의 빙하감옥 사이에 잔나의 계절풍이 들어가며 상황은 완벽하게 뒤집어졌다. 쓰레쉬의 사슬채찍으로 인해 잔나가 쓰레쉬의 후방으로 넘겨진 순간 사용된 계절풍은 마치 블리츠크랭크의 그랩처럼 쓰래쉬를 적진 한가운데로 밀어 넣었고, 나머지 프로스트의 팀원들의 한타 진영도 무너지게 되었다.

한타 계획이 무너진 상태에서 케넨은 적진 한가운데로 진입하는 것을 포기하고 동떨어진 아리 한 명에게 궁극기를 사용하였고, 그 순간 철저히 짜여진 한타 조합을 들고왔던 프로스트는 조합 자체의 의미를 잃게 되었다. 역전의 발판이 될 수 있던 드래곤 한타에서 패배한 프로스트는 이후 계속 블레이즈에게 끌려다니다 1세트를 내어주고 말았다.



[▲ 이날 완벽하게 차단된 쓰레쉬, 자르반, 케넨의 활약]


자신감이 붙은 잔나의 활약은 3경기에서도 계속된다. 비등비등한 한타에서 케넨의 궁극기가 아군에게 닿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드래곤 뒷벽을 점멸로 뛰어넘어 계절풍을 사용한 모습은 오랜만에 보는 진정한 서포터, 어머니의 모습이었다.

힘든 라인전을 거쳐 팀원과 합류한 잔나의 존재감은 무시할 수 없었다. 과감한 점멸에 이은 계절풍은 그라가스의 진형파괴 궁극기를 보는 느낌이었고, 다른 서포터보다 딜링 능력이 뒤떨어지는 잔나는 '딜을 못하는 대신 상대 딜러를 완벽하게 차단하는 플레이'를 보여줬다.

라인전과 한타에서 "Lustboy" 함장식 선수의 잔나는 '서폿 캐리'의 형태 자체를 바꿔놓았다. 대박을 터뜨리는 블리츠의 로켓 손이나 쓰레쉬의 사형선고, 혹은 '매라센도'라고 불리는 소나의 대박 궁극기가 상대방에게 선공을 날리는 형태였다면, 이번에 "Lustboy"의 잔나가 보여준 캐리 양상은 선공이 아닌 완벽한 방어, 이를 통해 적의 장점을 없애버리는 형태였다.


■ 봇 라인은 혼자 서는 것이 아니다, 단점을 보완해준 최고의 파트너 케이틀린

그렇다고 잔나가 가지고 있던 기존의 단점을 "Lustboy" 혼자서 극복한 것은 절대 아니다. 챔피언 자체의 단점을 극복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Captain Jack" 강형우 선수의 케이틀린이 있었다. 밴픽을 봤을 때 블레이즈의 봇 듀오는 처음부터 '케이틀린 + 잔나'를 묶어서 들고 나올 생각이었다. 실제로 케이틀린을 뺏긴 2경기에선 바루스와 소나를 기용하며 대세에 따르는 플레이를 보여줬다.



[▲ 상대가 케이틀린을 먼저 가져가자 소나와 바루스를 선택한 블레이즈]


케이틀린의 1레벨부터 긴 사거리와 패시브를 이용한 견제력은 패시브 추가 대미지가 발동되는 타이밍에 잔나의 실드와 함께 최고의 시너지를 발휘했고, 이는 라인력과 라인 철거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는 결과를 낳았다.

유행이나 메타와 상관없이 모든 챔피언들은 각자의 장점을 가지고 있다. 이는 챔피언의 컨셉과 관련된 문제이며, 시대가 변한다고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단지 게임의 흐름이나 추세가 챔피언의 장점을 살리기 좋으면 OP 챔피언이 되고, 어려우면 사장되는 것이다.

챔피언 자체의 단점을 보완해주는 케이틀린과 함께 가장 큰 고비인 라인전을 넘긴 잔나는 자신의 점을 살릴 수 있는 상황까지 만들어 냈고, 이 상황에서 리그오브레전드의 모든 챔피언들 중 아군 보호(특히 원딜 보호)에 가장 뛰어난 챔피언인 잔나의 위력은 유감없이 발휘됐다.

잔나는 90구경 투망과 점멸, 보호막을 지닌 케이틀린에게 계절풍과 추가 보호막, 울부짖는 돌풍까지 동원하여 케이틀린을 네 개의 생존기를 지닌 원거리 딜러로 만들었고, 상대편은 케이틀린을 먼저 잡아낼 생각조차 못하게 된다.



[▲ 교전 중 케이틀린이 쉬지 않고 딜할 수 있게 만들어준 잔나]




이날의 잔나는 말 그대로 진짜 서포터였고, 그 은혜를 받은 원딜은 승리로 보답했다





처음 EU스타일에서 중심이 되었던 서포팅 주력의 서포터에서 공격형 서포터로, 그 후에 견제형 서포터까지 이어지는 지금까지의 변화는 확실했다. 물론 이번 경기만을 가지고 '사전적 의미대로의 서포터'가 다시 떠오른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자존심을 건 집안싸움이었던 챔피언스 준결승전에서 "Lustboy" 함장식 선수는 최근 유행하는 쓰레쉬나 소나가 아닌 잔나를 꺼내 들었고, 이는 세계 최고의 쓰레쉬인 "MadLife" 홍민기 선수를 상대로 팀의 대승을 이끌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 그런데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이날의 모든 경기에서 잔나를 상대했던 챔피언은 쓰레쉬라는 점에서도 의의를 찾아볼 수 있다. 밴 리스트에까지 자주 올라가며 화려한 플레이가 가능한 요즘의 메타에 가장 잘 어울리는 최신형 챔피언 쓰레쉬, 이와 반대로 잔나는 메타에도 부합하지 않는 다소 낡은 느낌의 서포팅 중심의 챔피언으로 평가받고 있었다. 하지만 메타의 변화에 따라 많이 변화된 서포터의 플레이 스타일 속에서도 '진정한 서포터는 죽지 않는다'라고 외치는듯했던 "Lustboy" 함장식 선수의 잔나였다는 점이다.

상대를 당겨오는 정확한 그랩이나 딜러 못지않은 딜링을 통해 상대편을 제압하는 플레이만이 캐리형 서포터가 아니다. 어쩌면 Lustboy의 잔나가 말해주는 것은 잔나에 한정되지 않은 "본분에 충실한 서포터는 메타와 유행에 상관없이 언제든지 강력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닐까.



Inven Grann
(Grann@inve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