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라인게임은 '리니지'로 통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 시절 나는 +7검을 지르지 못하고 군대에 갔다. 훈련소 첫날, 점호가 끝나자 "사회서 리니지 한 놈들은 전부 복도로 튀어나와"라는 교관의 날 선 목소리가 방송으로 흘러나왔다. 잘못 들었나? 바지를 벗다가 엉거주춤한 자세로 그렇게 한참을 서 있었다. 사태가 파악된 건 나보다 두어 살 많은 동기가 거의 알몸으로 뛰어 나가는 모습을 본 뒤였다. 그렇게 쭈뼛쭈뼛 일렬로 정렬해 한 명씩 심문을 받았다.

교관의 첫 질문에 긴장 풀렸다. "넌 몇 검이냐?", "네?", "네! 35번 훈련병 홍.길.동 +6검입니다", "들어가 자라", "네?", "자라고", "네..." 좀 질러본 애들은 자리에 남았다. 전역을 앞둔 말년 교관이 '잘' 지르는 비법을 듣기 위해 훈련병들을 소집한 것이었다. +7검을 지른 훈련병은 맛스타를 받았다. +8검을 지른 훈련병은 담배 한 개비를 받았다. 난 쓸쓸히 발길을 돌려야 했다. 그깟 게임이 뭐라고. 국방부 시계는 바깥 세상보다 느리다던데 어쩐지 나한테는 더 느리게 흐를 것 같았다.

그렇게 2년 후, 영원할 것 같았던 군대를 전역하자 게임시장의 판도가 바뀌어 있었다.'리니지'는 어느새 게임시장 인프라의 중심이 되어 있었다. 시골이었던 우리 동네도 리니지의 위력을 느낄 수 있었다. "어느 동네 PC방 사장님이 '변신반지'가 있다더라" 소문만 퍼지면 PC방 사장님과 호형호제하던 단골도 자리를 박차고 그 PC방으로 달려갔다.

당시 광렙의 LTE로 통했던 '장로' 변신 앞에 라면 서비스로 이어진 '정' 따윈 아무것도 아니었다. 한 달 후 그 집 PC방에 공터에 주차장이 생겼다. 또 한 달이 지나자 사장님 차가 바뀌었다. 1년이 지나자 PC방이 2층 건물로 올라가고 맞은편에 체인점이 생겼다. 대한민국을 강타했던 IMF도 PC방 창업 열풍을 억누르진 못했다. 불행하고 어렵던 시기에 '리니지'는 그렇게 누군가에게 희망이 되기도 했다.

리니지는 엔씨소프트에도 구세주였다. 집 팔고 빚내서 게임 개발에 투자했던 김택진 대표는 우여곡절 끝에 리니지를 완성하고 1998년 9월 정식 유료서비스를 시작했다. 대박이 났다. 리니지의 흥행으로 당시 무명에 가까웠던 엔씨소프트는 단숨에 온라인게임업체 원톱으로 떠올랐다.

베타테스트 동시접속자 수백에 불과했던 리니지는 출시와 동시에 1,000명 이상으로 증가했다. 불특정 다수와 함께 모여 싸움도 하고 몬스터도 잡는 재미는 패키지게임에서 얻을 수 있는 게임 본연의 매력 그 이상이었다. 입소문은 빠르게 퍼졌고 동시접속자수도 수천 명에서 수만 명으로 증가했다.

사람이 모이자 시스템에 없는 다양한 직업이 생겨났고 리니지는 하나의 거대한 가상세계를 구축했다. 힐과 헤이스트를 파는 장사꾼이 등장했고 슬라임 경기만 하는 전문 도박사도 생겼다. 세상 물정 모르는 사람들 주머니를 터는 사기꾼도 있었다. 특히 사기꾼과 낚시꾼 정말 많았다.

선수들의 설계에 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정보가 필요했다. 게임 내에서는 혈맹이라는 커뮤니티를 통해 정보가 공유되었고 밖에서는 고급 정보를 얻고자 수많은 커뮤니티 사이트가 형성되었다. 인벤(INVEN)의 전신이었던 '플레이포럼'도 리니지 커뮤니티로 큰 인기를 얻었다. 정보 교류는 더욱 빨라졌고 이를통해 구문룡, 포세이든과 같은 스타도 배출했다.

엔씨소프트 김택진 대표도 커뮤니티의 위력을 뒤늦게 알고 적극적으로 대처했는데 당시 리니지의 대모라 불렸던 플레이포럼 편집장 씨즈 기자와의 선상 인터뷰가 대표적인 예다. 인터뷰라고 하면 당연히 대면이나 서면 인터뷰가 일반적이었던 그 시절, 게임 내 배에서 진행된 선상 인터뷰는 게이머들 사이에서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씨즈 기자와 김택진 대표의 선상 인터뷰]

이렇게 유저들에 의해 만들어진 가상세계는 현실보다 더 현실처럼 변해갔다. 먼저 점령할 성이 많아지자 조직적인 군대가 생겼다. 군주라는 지휘관 아래 수많은 기사와 전략가가 등용되었다. 인구가 늘자 시스템에 없는 계급 체계도 자연스럽게 만들어졌다.

극적인 부분은 이 가상세계에 시스템으로 짜인 정치가 아니라 현실과 같은 진짜 '정치'가 시작되었다는 점이다. 강력한 힘과 단결력을 앞세운 세력들이 성을 점령하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 그러자 무자비한 세금에 견디지 못한 시민들이 봉기해 '성혈'에 도전하는 일도 벌어졌다. 서로 다른 방향을 걷던 세력이 힘을 합쳐 연합을 결성하다 암투와 모략, 배신으로 무너지기도 했다.

인생의 희로애락을 리니지에서도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한 개인으로서 리니지는 어쩌면 두 번째 '인생'이었고 큰 틀에서 보자면 뺏고 빼앗겼던 인류 역사의 축소판 같았다. 그 역사는 게임 커뮤니티가 기록했다.

이후에도 리니지의 승승장구는 계속되었다. 2000년 초 리니지는 국내 온라인게임 최초로 동시접속자 10만 명을 돌파했다. 한국 온라인게임 역사에 한 획을 긋는 영광의 기록이었다. 하지만, 어두운 단면도 있었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성적이었기에 '현금거래'나 '현피', '계정 유출', '작업장' 등 리니지로 벌어진 사회적 파장도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는 언제나 길을 만들었던 '리니지'가 짊어져야 할 짐과 동시에 해결해야 할 숙제이기도 했다.

재밌는 점은 리니지는 그 어떤 게임보다 그 빛과 어둠이 매우 절묘하게 공존했다는 점이다. 사기나 현피 같은 씁쓸한 이슈도 있었지만 리니지 유저들의 가슴을 따뜻하게 만들었던 훈훈한 미담 소식도 곧잘 들려왔다.

그 대표적인 예가 2001년 8월 31일 있었던 '생명의 검' 사건이다. 리니지 유저 중 한명이 불의의 사고를 당해 생명이 위태로운 처지에 놓였다. 수혈이 필요했지만 희귀 혈액형인 RH-O형이라 급박한 순간이었다. 이런 사연이 커뮤니티를 통해 알려지자 곧 전서버 모든 채팅창에 RH-O형 혈액형을 구한다는 소식이 전해졌고 당시 조우 서버 한 유저의 수혈로 귀중한 생명을 구하게 되었다. 엔씨소프트는 그 유저에게 감사의 의미로 '생명의 검'을 선물했고 이 사건을 계기로 서버간 사건사고가 활발하게 공유되었다.

2002년 4월 6일에는 데포로쥬 서버에서 리니지 최초의 결혼식이 열리기도 했다. 당시 GM을 비롯한 많은 유저들이 참가해 멋진 이벤트로 결혼식을 치뤘고 해당 유저는 2002년 4월 21일 대구에서 실제로 결혼식을 올렸다. 게임에 지나치게 빠져 현실을 망각한 유저들도 있었지만, 이처럼 게임을 통해 현실 이상의 인간관계를 형성한 유저도 많았다.

27일 엔씨소프트 판교 R&D 센터에서 진행된 '리니지 15주년 행사'는 그간 리니지가 걸어왔던 길을 되짚어보는 의미있는 자리였다. 학창시절 순수한 게이머로 리니지를 접하다 성인이되고 기자 신분으로 이런 행사를 취재하게 되니 복잡 미묘한 감정이 들었다.

리니지 이후 수많은 MMORPG가 등장했고 그 속에 리니지 이상의 인기를 얻은 게임도 더러 있었다. 하지만, 그 인기를 지금까지 꾸준히 유지하고 있는 게임은 많지 않다. 이제는 '구식'이라 젊은 게이머들에게 손가락질 받기도 하지만 그 어떤 게임도 이처럼 화려한 역사를 품었던 게임은 없었을 것이다. 15년의 역사를 품은 '리니지'는 이제 앞으로의 15년을 위해 오늘 그 첫 발을 내딛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