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같은 장르의 게임이라도 프로게이머가 종목을 바꾸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특히 한 종목에서 전무후무한 기록을 남긴 선수라면 더욱 그렇죠. 그러나 히어로즈 오브 더 스톰(이하 히오스)의 일인자로 군림했던 '리치' 이재원은 이제 리그 오브 레전드(이하 LoL)에서 새 역사를 쓰려 합니다.

부득이한 전향이었지만, '리치'의 도전 정신은 확고합니다. 주전으로서 LCK 무대에 서기 위해 젠지라는 안정적인 그늘에서 벗어난 그는 챌린저스 팀이었던 다이나믹스에 합류해 단번에 승격에 성공했죠. 앞으로도 '리치'는 목표를 한 단계씩 올려 롤드컵 우승이라는 최종 목표를 향해 나아갈 것입니다.

LCK 승격 후 만난 '리치'는 마음이 한결 가벼워 보였습니다. 특유의 솔직함을 가득 담은 인터뷰는 끝날 때까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진행됐는데요. LoL이라는 새로운 무대에서 또다시 최정상을 꿈꾸는 '리치'의 이야기를 지금 바로 만나보시죠!



먼저 다이나믹스와 '리치' 선수의 LCK 승격을 축하합니다! 승강전 종료 후 어떻게 지냈나요?

감사합니다. 승강전 이후 휴가를 받아서 집에 돌아와 편하게 쉬고 있어요. 종종 개인 방송도 하고 있구요.


젠지를 떠나 다이나믹스에 합류하자마자 LCK 승격에 성공했어요. 승강전에 임할 당시의 각오와 소감이 궁금한데요.

정말 마지막 기회라는 생각으로 절박하게 준비했어요. 이번이 LCK의 마지막 승강전이었잖아요. 만약 승격하지 못한다면 앞으로 채워갈 LoL 프로게이머 커리어에 답이 없어질 것만 같아서요. 그래서 승격이 확정됐을 때 진심으로 기뻤어요.


왜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했나요? 내년에 프랜차이즈가 도입된 후 기존 LCK 팀에서 '리치' 선수를 찾을 수도 있잖아요.

물론 승격하지 못했더라도, 꾸준히 좋은 모습을 보인다면 언젠간 LCK에서 뛸 수 있었겠죠. 그런데 지금으로선 다른 팀에 들어간다면 제가 원하는 게임을 하지 못할 것 같아요. 전 직접 오더를 하면서 주도적으로 게임을 풀어가는 걸 좋아하는데요. 다이나믹스가 아닌 곳에선 그게 어려울 듯하니까요. 그리고 다이나믹스 팀원들과 한 시즌 동안 맞춰온 호흡이 LCK에서도 통한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어요.


중계 화면에 다이나믹스의 인게임 보이스가 나올 때면 '리치' 선수의 오더가 돋보이는데요. 본인의 오더 능력에 자신이 있나요?

네. 제가 하자는 대로 모두 따라와 주고, 계획대로 게임이 흘러가면 쉽게 이길 수 있을 거라고 늘 생각해요. 승강전 때도 실수만 안 하면 이기니 할 것만 하자고 계속 이야기했어요. 서라벌 게이밍전에선 특별히 더 신경 쓰면서 오더를 했어요. 챌린저스 정규 시즌에서 만났을 때 허무하게 졌던 기록이 있어서요.


승강전에서 샌드박스 게이밍과 서라벌 게이밍을 모두 2:0으로 꺾었죠. 다이나믹스의 고점 경기력이었다는 평가가 있었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사실 저희도 이렇게까지 승강전 경기가 잘 풀릴 줄은 몰랐어요. 챌린저스 플레이오프부터 폼이 좋긴 했는데, 실질적인 승리 요인은 메타 적응을 충분히 한 거였다고 봐요. 10.7 패치 버전으로 경기가 꽤 길게 진행됐잖아요? 실력에서 밀리는 라인이 없기도 했고요.


그리핀의 강등은 예상했나요?

전혀 예상 못 했어요. 그리핀은 대부분의 선수가 근본이 있고, 정규 시즌 마지막에 폼도 제대로 올라와서 승강전에선 충분히 생존할 줄 알았어요. 그런데 가장 먼저 강등당한 건 의외였네요. 개인적으로 '타잔' 선수를 굉장히 좋아해서 향후 행보가 궁금해요.


젠지에서의 데뷔전 때도 아트록스를 사용했고, 챌린저스 정규 시즌은 물론 승강전에서도 아트록스로 맹활약했어요. 아트록스를 유난히 선호하는 이유가 있나요?

한창 히오스를 할 때 아트록스가 리메이크 됐어요. 그때부터 아트록스가 멋있다고 생각해서 한 번 플레이해보고 싶었죠. LoL로 전향한 시기에 마침 미드 아트록스가 OP여서 자주 사용했는데,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플레이에 자신감이 붙은 것 같아요.


다이나믹스의 분위기나 생활 환경은 어때요?

가장 먼저 말씀드릴 수 있는 건 정말 수평적이라는 거예요. 감독 자리가 공석이기도 하고, '스브스' 배지훈 코치님도 나이가 많은 편이 아니라서 선수들과 친근하게 서로 할 말을 다 하며 지내요. 생활 환경은 엄청 좋다고는 할 수 없지만, 딱히 불편한 점도 없어요. 솔직히 챌린저스 팀이라서 큰 대우를 바라지 않았는데요. 기대치에 비하면 환경이 꽤 좋은 편이었어요. 이제 LCK 승격까지 했으니 더 좋아지지 않을까요?


예전에 동고동락했던 젠지 히오스 팀 선수들과 연락은 종종 하나요?

물론이죠. 다들 자기 할 일 하면서 잘 지내고 있어요. 승강전을 치르기 전에는 응원을 많이 해주더라고요. 한화생명e스포츠 코치가 된 '사케' 형은 샌드박스 게이밍전에 앞서 실용적인 조언을 해줬어요. 히오스 때도 팀 분석을 많이 했었는데, 그렇게 LCK 팀들도 다 분석해뒀던 거죠. 실제로 2:0 승리에 도움이 많이 됐네요.


이제 몇 가지 예민한 이야기를 해볼까 해요. 독보적인 일인자였던 히오스 프로게이머 시절이 그립진 않나요?

히오스는 제게 큰 명예를 준 게임이잖아요. 그래서 게임에 대한 애정은 남아 있지만, 그 시절이 딱히 그립진 않아요. 만약 히오스 공식 대회가 다시 개최된다 해도 절대 돌아가지 않을 거예요.

이 이야기를 하니 히오스 프로게이머 때부터 지금까지 절 응원해 주는 팬분들께 감사 인사를 전하고 싶어요. LoL 전향 당시 저에 대한 의견이 갈렸는데요. 많은 사람들이 "히오스 선수가 LoL에서 뭘 할 수 있겠냐"라고 이야기할 때, "'리치'니까 할 수 있을 거다"라고 믿어준 여러분들 덕분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어요. 다시 한번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히오스에선 일인자였지만, LoL에선 아직 뚜렷한 두각을 나타내지 못한 상황이에요. '리치' 선수 본인은 스스로의 성장 가능성을 어느 정도로 보나요?

성장 가능성은 충분히 많다고 봐요. LoL을 제대로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나이가 특별히 많은 편도 아니니까요. 지금 당장의 목표는 높지 않지만, 궁극적으로는 훨씬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갈 자신이 있어요.


히오스 선수 시절엔 출전한 대부분의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잖아요. LoL에서도 우승 욕심이 클 것 같아요.

물론이죠. 당시엔 국제 대회 우승도 많이 해봐서... 우승이 간절하긴 해요(웃음). 하지만 앞서 말씀드렸듯이 당장의 목표가 우승은 아니에요. 지금까지의 목표는 LCK 주전으로 뛸 수 있을만한 실력을 쌓자는 거였고, 이제 그 목표를 이뤘으니 다음을 바라봐야겠죠. 언젠가는 LCK 우승, 롤드컵 진출, 롤드컵 우승까지 달성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거예요.


'이세계 페이커'라는 별명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세요?

히오스 선수 때도 종종 들었던 이야기인데요. LoL에서 최고의 업적을 가진 선수와 연관되는 건 감사하지만... 아무래도 다른 게임에서 다른 커리어를 쌓아 온 두 사람이기에 직접적인 비교는 지양해 주셨으면 해요. LoL의 '리치'는 그냥 '리치'로 봐 주시면 더 감사하겠습니다.


다시 가볍게 돌아와 볼까요. LCK에서 특별히 좋아하는 선수가 있나요?

단연 '쵸비' 형이죠. (형이요?) 프로게이머는 게임만 잘 하면 다 형이니까요(웃음). 실제로 '쵸비' 선수한테 도움받은 게 많아요. 프로게이머끼리도 귓속말로 이것저것 물어보면 대답을 잘 안 해주잖아요. 그런데 '쵸비' 선수는 데뷔도 하기 전인 제 물음에 항상 친절하게 대답해 줬어요. 또 젠지에서 치른 LCK 데뷔전 상대가 '쵸비' 선수였는데, 대회 무대에서 만나니 압박감이 장난이 아니더라고요. 정말 잘 하는 든든한 선수라 생각해서 언젠간 한 팀에서 뛰어보고 싶어요.


탑 라이너 중 닮고 싶은 선수가 있나요?

'너구리' 선수예요. 원래 탑은 한두 번 죽으면 차이를 좁히기 정말 어려운데, '너구리' 선수는 몇 번을 죽어도 존재감이 지워지지 않잖아요. 그렇다고 탑 갱킹을 안 하고 가만히 내버려 두면 어느새 성장해서 게임을 캐리하고요. 저도 탑 라이너의 존재감을 중요하게 여겨서 그런 부분을 닮고 싶어요.


'너구리' 선수는 형이 아니네요?

가끔 형이 아닐 때가 있어서...(웃음)


LCK 승격 선배인 APK 프린스의 경기를 보며 느낀 점이 많을 것 같아요.

대단하다고 생각했어요. LCK 팀들을 상대로는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 시도조차 하지 않게 되는데, APK 프린스는 본인들의 색깔을 잃지 않고 화끈한 경기를 하잖아요. 그리고 '구거' 형이 우리도 APK 프린스처럼 할 수 있으니 제발 승격하자고 이야기해 줘서 더 열심히 노력할 수 있었어요.


그렇다면 다이나믹스는 LCK에서 어떤 경기 양상을 보일까요?

저희는 APK 프린스처럼 쉼 없이 싸우기보다 우리 할 거만 하자는 스타일이에요. 그래도 오브젝트는 웬만하면 먼저 치는 걸 좋아하고 싸움을 피하진 않아요. 불리할 때 오브젝트를 내주면 답이 없고, 유리할 때 오브젝트를 챙기면 더 유리해지니까요. 아마 승강전에서 보여드렸던 경기와 비슷하게 흘러가지 않을까요?


2020 LCK 섬머 스플릿은 '리치' 선수가 주전으로서 LCK에 도전하는 첫 시즌이죠. 본인이 생각하는 다이나믹스의 최종 성적이 궁금합니다.

욕심은 당연히 포스트시즌 진출이죠. 만약 다전제를 치르게 되면 더 좋은 성적을 낼 수 있을 듯해요.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최대 6등이라고 생각해요. 아직 팀 호흡이 완성되지 않았고 서로 맞춰가는 단계니까요. 기존 LCK 팀들을 상대하는 게 쉽진 않겠지만, 그래도 서로 틀어지는 일 없이 지금 분위기를 이어간다면 최선의 결과가 나오지 않을까요.


이제 인터뷰를 마칠 시간입니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을 해 주세요!

이제 갓 LCK에 입성했는데,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제 궁극적인 목표는 훨씬 높은 곳에 있어요. 원하는 목표까지 한 단계씩 올라갈 수 있도록 늘 노력하고 도전하겠습니다. 또 완전히 검증되지 않은 절 믿고 영입해 준 다이나믹스 오지환 대표님, 차민규 단장님, 배지훈 코치님과 함께 LCK 승격을 이룩한 팀원들에게 감사 인사를 전합니다. 마지막으로 좋은 팀에서 좋은 기회를 잡은 만큼 최선을 다할 테니, 앞으로 LoL 프로게이머 '리치'에게 많은 관심과 응원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