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전의 순간이 왔다.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려왔던가. 노멀 게임 경험 3천판에 이르는 기자의 랭크는 실버. 롤 게이머 대다수를 차지하는 실론즈의 당당한 일원이다. 슬프다. 날 때부터 실버는 아니었거늘, 왜 난 실버의 늪에서 헤어나오질 못하는가.
알고 있다. '바쁘다 보니 게임을 못해서 강등되네요.', '사실 제가 실버 실력은 아닌데 팀 운이 이상하다보니...' 다 핑계에 불과한 말이다. 회사에서 핍박받고, 학교에서 구박받는 실버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내뱉어보았을 이 말을 하고 있는 내 자신을 보면서 좌절한 적도 있다.
정말 가끔 플레티넘이나 다이아에 머무는 다른 기자를 1:1로 처치해 본 적이 있다. 그럴 때 상대가 하는 말은 보통 이렇다. '실론즈의 무빙은 도대체 이해가 안되네요. 도저히 상상을 할 수 없다 보니 대처가 안되네 ㅎㅎㅎ..'
분노가 타오른다. 내가 트린다미어였다면 이미 35% 크리티컬을 확보한 상태고, 레넥톤이었다면 분노의 삼연발 무자비한 포식자에 이은 강력 양떼도륙을 날릴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액면가로 그들은 백금에 금강석이요. 난 무르디 무른 실버일 뿐이다.
수 없이 많은 프로 경기를 보고, 입롤 천하무쌍을 해내면 뭐하는가. 굳어버린 손가락은 풍걸린 환자마냥 펴지지도 않고, 딸피로 도망가는 적을 보면 세상천지가 어두워진 채 폭주기관차가 되어버리는 기자에게도 드디어 기회가 왔다. 이 모든 굴욕을 해소할 수 있는 순간! 최후의 결전 모드가 드디어 우리 앞에 드러났다.
CS 100, 퍼스트 블러드, 그리고 첫 타워 파괴. 이 세 가지 조건 중 하나를 만족시킬 경우 그대로 게임이 끝나 버리는 '최후의 결전' 모드는 말 그대로 5:5가 아닌 1:1과 2:2에 특화된 모드다. 무작위 총력전에 쓰이는 '칼바람 나락' 전장에서 진행되는 짧은 전투. '계삭빵의 올바른 수단' 혹은 '나에게 심한 욕설을 한 자를 응징할 정당한 방법' 등으로 생각하는 경우도 없지 않다. 그러나 '최후의 결전' 자체의 가장 큰 의의는 남들에게 방해받지 않고, 나와 상대의 실력만으로 승부를 가리는 그 쫄깃함 아닐까?
목 한번 꺾어주며 상대를 찍어누를 기세로 자리에 앉은 기자 4인. 기세라면 타이탄트론을 틀어놓고 불꽃을 팡팡 터뜨리며 등장하는 WWE 프로레슬러에 못지 않다. 지금 이자리에서! 짬이고 뭐고 다 집어치운 채 자존심을 걸고 분노를 무기삼아 등장한 네 명의 키보드워리어를 공개한다.
제 1경기. 라파(트리스타나) VS 코어(베인)
[2013 연말기획 ⑦] 랭크 티어로 말하지 마라! 우리는 '최후의 결전'으로 간다… e스포츠 기자 4인의 체험기
정재훈 기자 (desk@inven.co.kr)
1:1에 강력한 챔피언은 무엇인가. 수 없이 가졌던 의문이다. 맷돼지같은 생명력과 남자의 돌진, 그리고 강력한 근접전의 브루저인가? 멀리서 툭툭 치다가 제발로 집에 가게끔 만드는 원거리 딜러인가? 아니면 상대를 순식간에 녹여버릴 수 있는 누커인가.
기자는 비장의 무기를 꺼내들었다. 이 순간을 위해 준비한 나만의 무기! AP 트리스타나로 사무실을 평정하리라. 게다가 스펠은 과거 모 원딜러가 애용하던 흉악한 힐+이그나이트. 코어 기자는 어차피 밟고 올라서야 할 중간과정에 불과하다. 악몽의 똥데미지를 보여주리라.
게임 초반은 루즈했다. 그냥그냥 서로 파밍하고, 가끔가다 베인이 촤핫! 하면서 구른 뒤 한대 쏜 후 도망가고, 난 그 등짝에 미트볼(폭발 탄환)을 쏴주는 정도였다.
그러나 괜히 AP 트리스타나가 아니다. 틈 날때마다 날아가는 미트볼에 너덜너덜해진 베인은 결국 집으로 돌아가 하나의 도란검을 더 사온 채 이도류를 펼치기 시작했다.
매서웠다. 양손에 도란검을 든 베인은 칼바람 나락을 쉴새없이 구르며 은화살을 쏘아댔다. 아직 귀환을 하지 않아 도란 반지 하나에 물약만을 들고있던 기자로서는 베인의 매서운 화살질을 견디다 못해 탈출을 감행했다. 전천후 기술 로켓 점프! 점멸까지 쓰면서 쫓아온 베인은 비장한 포즈로 선고를 날렸지만 이미 로켓을 타고 하늘위로 날고있는 나를 집에 가기 쉬우라고 도와주는 격이었다.
기지로 복귀한 기자는 새로운 아이템을 꺼내들었다. 폭력과 야만의 상징, 수 많은 이들을 울부짖게 만든 별몽둥이. 방출의 마법봉을 한 손에 든 트리스타나는 기세당당하게 전장으로 나섰다.
그리고 마침내. 6레벨이 되었다. 베인은 아무 것도 모른 채 타워 뒤에서 도란검 두자루로 미니언을 썰어대며 석궁무쌍을 하고 있었고, 라인은 딱 좋게 밀려있다. 퇴로는 없다. 여기서 승부수를 던진다.
고통은 짧았을 것이다. 로켓 점프부터, 폭발 탄환, 대구경 탄환, 그리고 화룡점정을 찍는 점화의 콤비네이션. 나약한 미니언들을 상대로 무쌍을 하다가 핵폭격을 맞은 코어 기자의 표정에 만감이 교차한다. 가볍게 1승! 기자는 결승으로 나아갔다.
제 2경기. 루빅(우르곳) VS 시아(애니)
다소 폼이 죽었지만, 아직도 1:1에서는 상대에게 악몽을 보여줄 수 있는 우르곳과 강력한 누커인 애니의 대결.
경기는 초반부터 격렬했다. 다리가 네 개나 달린 전투굇수 우르곳은 초반부터 강력한 로켓을 날렸고, 고스로리(...) 애니는 주 스킬인 붕괴가 아닌 사거리 625의 위엄넘치는 평타(?)로 우르곳을 견제했다.
결국 우르곳은 예상치 못한 애니의 평타 찜질에 적잖은 데미지를 입었고, 훌라후프를 휘휘 돌리는 애니에게 접근조차 하지 못한 채 멀리서 로켓을 찍찍 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대로 무너질 수 없는 우르곳. 루빅 기자는 혼신의 힘을 다해 불꼬맹이와의 일기토를 시도, 온 마나를 쏟아부으며 영혼의 공격을 가했다.
그러나 간발의 차이로 생존한 애니는 반격의 깃발을 올렸다. 훌라후프를 빙글빙글 돌리며 생성된 치료킷을 독식한 애니는 강력한 삼각근에서 뿜어져 나오는 괴랄한 사거리의 평타로 우르곳을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아까의 공격으로 마나마저 다 소모한 우르곳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치료킷을 모두 내주며 궁지에 몰렸다.
귀환을 하자니 타워가 파괴될 위기요, 그렇다고 꼬맹이를 때리자니 마나가 없고, 근접전을 시도하면 붕괴, 소각 콤보에 그대로 통구이가 될 위기에 놓인 우르곳은 어쩔 수 없이 적은 체력으로 타워를 지키기 위해 사력을 다했다.
그러나 이미 숨이 턱에 찬 상황, 기회를 놓치지 않은 애니는 점멸과 동시에 우르곳의 포동한 배에 불 같은 걸 끼얹었고, 정통으로 당해버린 불쌍한 우르곳은 그대로 요단강을 건너고 말았다. 국대의 클라스를 보여주러 왔으나, 결국 보여주지 못한 루빅 기자는 쓸쓸히 패자의 한마디 '봐줬다.'를 소근거리며 벤치로 퇴장하고 말았다.
그렇게 눈물을 흘리는 루빅 기자를 뒤로하고, 시아 기자는 여유롭게 결승전으로 진출했다.
결승전. 라파(트리스타나) VS 시아(자이라)
긴장이 흐른다. 몇몇 기자들이 놀리기는 하지만 사실상 이번 대회 참가자 넷 중 최강자 포스를 뿜는 사람은 유일한 여성 기자인 시아 기자다. 이전에도 몇 번 자존심을 걸고 1:1 듀얼을 신청했으나 보라색 꼬맹이와 픽스의 2:1 어택에 두들겨 맞고 실론즈 인증을 한 것만 여러번. 이번에도 지면 영영 난 실론즈 나락에서 헤어나오지 못할 것 같다는 압박감에 식은땀이 흐른다.
그 때였다.
시아 : "라파님?"
라파 : "네?"
시아 : "우리 이번 경기로 커피내기 어때요? 사무실 전체?"
라파 : "네..?!"
시아 : "에이 예전에도 사람들 1:1 하고나면 진사람이 커피 쏘고 했어요. 이번에도 해야지(웃음)"
머릿속에서 단순한 산수 계산이 이어졌다. 주변에 저가형 커피가게가 다 망해버려서 가장 가까운 커피점은 그 유명한 스타뿎스밖에 남지 않은 상황. 한잔 5천원 잡고 20명이면 100,000....?!
자존심과 지갑의 선에서 갈등하던 기자는 결국 우는 표정으로 내기를 수락하고 말았다. 주변에서 '열심히 해요 하하하', '라파님이 이길 수 있어요. 허허허' 를 말하며 방글방글 웃는 다른 기자들을 보니 조금 힘이 되긴.. 어휴.. 커피가 이길 수 있겠지..
하여튼 부들부들 떨며 자리에 앉은 기자. 최악의 위기는 곧 최고의 기회가 될 수 있음이라. 어떻게든 이기면 되는 것 아닌가?! 근데 어떻게 이기냐가 문제지만...
전 판에 마산 우르곳이 불꼬맹이한테 깨박살나는걸 두눈 똑똑히 뜨고 지켜보았기에 일단 애니는 배제, 그리고 치사하게 2:1로 덤비는 룰루까지 봉인시키자 시아 기자가 꺼내든 카드는 바로 자이라. 이전부터 자이라로는 인상적인 플레이를 많이 보여주었기에 긴장이 두배가 된다. 그에 맞춰 기자는 1경기와 동일하게 트리스타나를 꺼내들었다. 왜냐고 묻는다면 경기 전 잠깐 했던 연습경기에서 그라가스로 탈탈탈 털렸기 때문이겠지.
초반은 생각보다 루즈했다. 아니 루즈할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어차피 내가 할 수 있는건 나약한 평타 중간중간 폭발 탄환이나 쏴주는 정도고, 자이라는 그나마 할 게 많지만, 어차피 나의 실론즈급 무빙을 읽는 것은 플래티넘 이상에겐 불가능하다. 결국 춥디 추운 칼바람 나락에 꽃꽂이 하는 거 외엔 딱히 자이라도 할 게 없었다. 근데 의외로 꽃들이 나를 자꾸 때린다. 충직한 녀석들 같으니
그러나 평화도 잠깐, 짧은 시간만에 나의 실론즈 무빙을 파악한 자이라의 매서운 공격이 날아들었다. 로켓 점프를 시도했으나 날기 직전 가시덩굴에 묶여버리며 찾아온 위기! 그러나 내가 누군가.. 승리를 위한 졸렬함은 곧 미덕이라 생각하는 자 아니던가? 점화+보호막의 괴랄한 스펠을 들고 온 만큼 간발의 차이로 식물 여인을 쫓아내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안심은 또 위기로 이어졌다. 살았다는 생각에 으헤헤 깨방정을 떨며 앞에서 깝죽거리던(이게 10만원이 걸린 판이란 사실은 이미 잊어버렸었나보다...) 내 밑으로 악몽같은 씨앗들이 깔렸고, 죽기 직전에 구명절초 로켓점프를 사용해 가까스로 생존할 수 있었다.
힘을 다 소진한 둘.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귀환을 선택했다. 쌓인 돈은 700원 가량, 자이라 역시 비슷할 거다. 그렇다면 분명 도란 반지를 하나 더 가져올 거다. 나역시 도란 반지는 사야겠고, 남는 돈은... 그래 좋다. 어차피 한방인데 영약이다.
그래! 이 약만 먹으면 나도 이번 경기의 승자가 될 수 있다. 이제 6레벨도 됐겠다. 승부수를 띄울 때다. 풍향은 남서풍, 손가락 컨디션은 완벽하다. 이제 조만간 승리의 기쁨을 누릴 수 있으리라. 마음 속으로 이미 승리한 듯 기뻐하며 로켓 점프를 대차게 눌렀다. 이어서 폭발 탄환과 대구경 탄환, 그리고 점화까지 빛의 속도로 타다닥 쏟아부은 기자. 이제 자이라는 제초의 고통 속에 시들겠지...가 아니네..?!
이상하다. 분명 죽어서 꽃이 되어야 하는데 피가 반이나 남았다. 뭐가 잘못된 것인가? 응? 아... 약을 안먹었다. 이래서 우리는 안되는거다. 존야를 사면 뭐하는가 안켜고 죽는데, 수은 장식띠를 사면 또 뭐하는가 나에게 수은 장식띠는 '너가 CC 걸어도 나 풀 수 있으니까 쓰지마' 정도지 실제로 쓰는 아이템이 아닌 치장용이란 사실을 깜빡했다. 약이라고 먹을리가 없었다. 아이구 날 너무 과대평가했구나 ㅠㅠ (알고보니 점화도 그냥 막 누른 것 뿐 쿨이더라)
그래도 제법 충격이 컸는지 자이라는 기지로 복귀를 선택했다. 나 역시 쫓아가다가 자이라의 콤보에 얻어터져 기지로 복귀할 수 밖에 없었다.
결국 다시 집에 갔다 온 두 기자. 약은 미리 먹어두었다. 어차피 두었다가 결전의 순간에 쓰기엔 내 손을 믿지 못하겠다. 덤으로 책도 한권 사왔다. 요즘 독서를 소홀히 했으니 여기서라도 책을 사야지. 자이라 역시 책을 사왔다. 가방에 베스트셀러 한권쯤은 넣어갖고 다니는 요즘 신여성다운 행보다.
이제 다시 결전의 순간이 왔다. 대구경 탄환 준비 완료. 미리 폭발 탄환 두어발을 박아두었더니 자이라는 이미 시들시들 하다. 덤으로 예측불능 실론즈급 무빙을 통해 피해를 극소화한 상황. 내 트리스타나가 날아갔다. 자이라를 향해 폭탄을 한가득 가지고.
전장에 꽃이 피었다. 귀염귀염 포로들과 꽃이 함께 있는 광경은 아름다웠다. 마음에도 꽃이 핀다. 실론즈 무빙이 승리에 큰 도움이 된 것 같긴 하지만 대수인가. 나는 무르디 무른 실버지만 승자가 되었다. 기쁨을 한 10초간 만끽했을까? 생각이 났다. 받을 것은 받아야지. 추심의 무서움은 당해본 자만이 안다.
라파 : "시아님. 하하 제가 운이 좋았네요"
시아 : "수고하셨어요. 근데 그거 알죠? 자이라로 트리스타나를 어떻게 이겨요. 일부러 님 트리스타나 할 것 알았는데, 이번에도 지면 울 것 같아서 일부러 밴도 안하고 조금 살살 했어요."
라파 : "아... 네. 근데 우리 커피"
시아 : "그러고 보니 지난번에 최우수 사이트 선정되서 받은 상금 분배하고 남은 거 있는데? 그거로 커피 사면 괜찮을 것 같죠? 다 같이 노력해서 받은거니까? 어때요?"
라파 : "그게 만약 제가 졌으면.."
시아 : "그래서요?"
라파 : "옳은 방법인 것 같습니다."
시아 : "네 수고하셨어요. 아 졸린데 게임 했더니 힘드네"
뭔가 당한 것 같은 기분이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에이 뭐 이겼으면 된거지.
이렇게 한정적으로 풀린 최후의 결전 모드는 실론즈의 승리로 마감되었다. 확실히 달랐다. 기사 작성을 위해 새로운 실험을 해보겠답시고 소환사의 협곡에서 1:1 미드빵을 치를 때와는 느낌이 달랐다. 지난 번 공개되었던 단일 챔피언 모드와도 또 다른 재미가 있다고 해야 할까?
지금 뭐 하고 있는 것인가? 이제 반의 롤짱을 가릴 때가 왔다. 사무실 롤 패왕을 선출할 유일한 기회도 지금이다. 기간 한정으로 공개되는 컨텐츠이기에,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다. 고통받는 실론즈들이여, 최후의 결전으로 가자.
물론 더 큰 고통이 기다릴 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린 누누히 말하지 않는가? '난 잘했는데...' 진짜 내가 잘했는지, 아니면 나 역시 지금까지 봐 온 수많은 인간 군상 중 하나일 뿐인지를 알 수 있는 절호의 찬스다.
언젠가는 다듬어서 다시 공개될 수도 있지만, 짧게나마 맛본 '최후의 결전' 모드. 비록 모두에게 추천할 수는 없는 모드이지만, 본인의 실력에 자부심을 가진 유저라면 한 번쯤 도전해볼만 하지 않을까 싶다. 2013년도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상황, 이 글을 보는 유저 모두가 내년에는 지금보다 최소 한 티어 더 올라가길 바라며! 글은 이만 마치도록 하겠다.
그럼 모두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길!
본 기사는 살짝 각색이 들어갔기에, 현실과 다소 차이가 날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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