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8일. '소프트맥스'는 창업 22년 만에 사실상 매각 절차를 밟았다. 22년 전, 직원들 월급을 주기 위해, 의리를 지키기 위해서 소프트맥스를 창립한 정영원 대표는 최대 주주에서 물러나야 했다.

90년대, 2000년대 게이머라면 '창세기전'으로 대표되는 소프트맥스를 모를 수 없다. 창세기전을 개발한 청년 개발자는 중년이 됐고, 용돈 모아 창세기전을 사던 소년들은 부인에게 용돈 받는 아저씨가 됐다.

한때는 국내 개발사 중 최고의 개발사로 불렸으며 한국 게임 시장을 선도했던 소프트맥스. '소맥 사관학교'라는 별칭이 붙을 정도로 내로라하는 인물들이 이 회사를 통해 성장, 배출됐다. 창세기전 시리즈로 최고의 자리에 올라보고, 주식 거래정지와 상장폐지 심사까지 당하는 부침 심한 파란만장한 역사도 경험했다.

그뿐이랴. 패키지에서 온라인으로 넘어가는 시기, IMF, 모바일로 넘어가는 시기 등등 국내 게임사(史)의 모든 소용돌이를 겪었다. 22년간 소프트맥스가 겪은 그 영욕의 역사를 정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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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갑인물산과 게임기둥이 소프트맥스가 되기까지
- "개발자 최연규, 김학규, 조영인 그리고 전문 경영인 정영원"


소프트맥스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대표 프랜차이즈인 '창세기전'의 주역, 최연규(現 소프트맥스 이사)의 이야기를 하지 않고는 설명할 수가 없다.

1993년 12월, 우루과이 라운드 협상이 타결되던 그 달 PC 통신 게임동호회 '게임기둥'에서 최연규는 조영기(現 소프트맥스 전무)와 전석환(現 유티플러스 개발실장)을 만난다. 이 청년들이 소프트맥스의 태동을 알린 개발자들이다.

어머니께 '울티마'같은 RPG를 만들겠다고 출사표까지 쓴 최연규는 게임기둥에서 만난 사람들과 함께 MSX용 게임인 '메탈기어'를 PC로 컨버전 하는 연습을 하며 꿈을 키워 나간다. 그러다 손노리의 '어스토니시아 스토리' 데모 버전을 보고 자신들도 자신들만의 게임을 만들기로 한다.

이무렵 최연규는 김학규(現 IMC 대표)를 만나게 된다. 당시 김학규는 자택 지하실에 개발자들을 위한 공간인 '학규굴'을 운영하고 있었다. 본인도 그 곳에서 강제 횡 스크롤 플랫포머 액션 게임인 '리크리스'를 개발 중이었다. 리크리스는 PC에서도 콘솔처럼 게임스크롤이 부드러운 프레임을 낼 수 있도록 하는 기술이 구현된 게임이었다. 울티마같은 게임을 만들기 위해서 개발 시험대가 필요했던 최연규는 김학규와 힘을 합쳐 팀 '아트크래프트'를 결성하고 리크리스 작업을 시작한다.

하지만, 팀 결성 후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큰 위기에 봉착한다. 김학규의 입대 영장이 나온 것. 당연히 학규굴도 폐쇄될 위기에 처했다. 그 때 등장한 것이 정영원(당시 이름 정영희, 現 소프트맥스 대표)이다.

▲ 리크니스(좌), 스카이&리카(우)

정영원은 일본 게임업체로부터 개발 용역을 받아 개발하는 용역개발 전문업체 '갑인물산'의 대리였다. 업무상 일본 출장을 자주 다니던 그녀는 일본 게임 시장에 큰 감동을 한다. 때는 93년, 일본 게임 시장의 태동과 성장을 근거리에서 지켜봤다.

그리고 93년 9월, 갑인물산은 부도를 맞는다. 당장 사장이 직원들 월급을 주지 못하게 되자 정영원은 사비를 털어 개발팀 직원들에게 월급을 대신 지급했다. 상황이 좋아지면 갚겠다던 사장은 야반도주를 했다. 결국, 정영원은 최악의 상황에서 직원들을 두고 나갈 수 없어 갑인물산을 인수한다. 하지만, 당장 회사를 꾸려가기 위해 팔 물건도, 그렇다고 준비 중인 프로젝트도 없는 상태였다.

그러다 94년 4월. 최연규, 조영기, 전석환 등이 자신들의 게임을 팔아달라고 정영원을 찾아왔다. 처음에는 직원이 아니었다. '아트크래프트'에 사무실을 임대하는 방식으로 품은 것이다. 게임을 다 만들면 나중에 임대료를 갚으라는 식으로 말이다. 그렇게 소프트맥스는 첫걸음을 내디뎠다.

94년 10월 28일 소프트맥스는 법인화됐다. 당시 국내 게임 업계는 개발과 경영이 일원화된 경우가 많았는데, 소프트맥스는 이를 이원화해 경영에 전문성을 더하려 했다. 창업주가 개발자가 아닌 독특한 사례라 가능한 구조였다. 90년대에 여성이 대표에, 그것도 게임 업체 대표에 올랐다는 사실도 사람들에게는 놀라웠다.

소프트맥스는 초창기 외국의 게임을 들여와 유통하는 소싱 및 한국어화 하는 사업을 병행했다. 그러는 한 편 자체적으로 개발한 리크니스와 비행 슈팅 게임 '스카이&리카'를 출시했다. 그러나 시장 성적이 썩 좋지 않았기에 개발사로서 시장에 각인하는 데는 미치지 못했다. 그 때 최연규가 정영원에게 떼를 썼다.

"사장님, 1년 안에는 꼭 만들어 볼 테니 RPG를 만들게 해주세요."

그렇게 탄생한 게 나도 알고 당신도 아는 '창세기전'이다.



■ 이올린과 스타이너가 몰고온 일대 혁신, '창세기전1, 2'
- "본격 남녀 치정 무협 SF 퓨전 판타지 SRPG"


정영원의 허락이 떨어지자 최연규는 어떤 RPG를 만들까 고민하기 시작했다. 당시는 '파이널판타지'와 '드래곤퀘스트'를 위시한 JRPG가 대유행이었다. 자유도에는 제약이 있지만, 리소스를 절약하고 스토리 텔링을 강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울티마' 같은 높은 자유도를 가진 게임을 좋아하는 최연규도 JRPG를 개발하게 됐다. 무엇보다 콘솔 성향인 게임기둥에서 모인 사람들의 영향이 컸다.

JRPG의 강점인 스토리 텔링을 살리고 시장 경쟁성을 확보하기 위해 SRPG장르를 선택했다. '파이어엠블렘'이나 '랑그릿사'를 제외하면 특출난 SRPG가 없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질과 양 모두에서 엄청난 리소스의 볼륨이 필요한 일반적인 RPG와는 달리 SRPG는 제한된 리소스로도 웬만한 스케일의 게임구성이 가능한 장르적 특성이 있다. 최연규 이사는 이러한 특성을 최대한 이용하기 위해 당시에 일본에서 인기가 있던 거의 모든 SRPG들을 철저히 연구하고, 미국식 SRPG라 할 수 있는 '히어로즈 오브 마이트앤매직'같은 게임도 참고했다.

▲파이어엠블렘(좌), 랑그릿사(우)

당시 국내의 개발역량은 대부분 액션이나 슈팅게임 중심이었기 때문에 SRPG를 만들만한 개발자를 찾는 것이 매우 어려웠다. 때 마침 다른 프로젝트를 위해 회사에 들어온 프로그래머가 대학다니던 시절 ‘랑그릿사’를 PC버전으로 컨버전해서 한 스테이지정도 만들었던 툴을 보여준다.

이 사람이 창세기전의 메인프로그래머였던 안정구이며 창세기전2까지 함께 작업을 하게된다. 이후 갑인물산 시절부터 도트 캐릭터에 잔뼈가 굵었던 남은영을 팀에 들이며 대략적인 진용을 짠다. 창세기전1, 2의 핵심인물인 이올린은 남은영의 하이텔 아이디였다.

한편, 최연규는 창세기전의 세계관을 만들면서 80년부터 무협작가로 활동하다 90년 중반 신무협을 창시했던 소설가 ‘용대운’에게 조언을 구한다. 뻔한 소재가 반복되면서 점점 설 자리를 잃어가던 무협계에 미국 하드보일드 소설이나 프랑스 모험소설을 차용한 작품을 선보이며 새 바람을 일으킨 인물이었다. 최연규는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당시 한국 무협계는 지금의 양판소와 크게 다를바 없어서 서로서로 베끼는, 전부 비슷한 이야기 천지였다. 그런데 이분은 엉뚱하게 하드보일드적 분위기를 모티브로 무협 소설을 썼는데 매우 독특했다. 당시 게임스토리도 비슷했다. 다들 마왕 잡는 거 였으니까. 이분이 한 말 중 특정 장르의 평범한 클리셰가 다른 장르로 건너가는 것만으로도 참신한 느낌이 들수 있다는 말이 인상적이었다. 창세기전에서 뭔가 독특한 느낌을 내보자는 목표가 생겼다."

▲ 창세기전 스크린샷

최연규는 이를 바탕으로 스토리 기획에 들어갔다. 기본은 본인이 좋아하는 영화 '스타워즈'였다. 제국에 쫓기는 왕녀 이올린(레이아 공주)이 정체불명의 남자(루크 스카이워커)를 만나서 펼쳐지는 이야기. 적의 대장은 철가면을 쓰고 있다는 점(다스베이더) 등에서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조지 루카스'가 '구로사와 아키라'의 영향을 받아 스타워즈를 탄생시킨 것처럼 최연규는 SF 판타지에 국내 무협을 접합시켰다. 창세기전1, 2에 등장하는 기술 이름, 등장 캐릭터, 스토리 전개 방식이 무협지의 그것과 비슷한 느낌을 풍기는 이유다.

특히 이야기 전개방식은 무협지의 기연식 전개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일반적인 RPG 게임 문법이라고 한다면 서서히 레벨을 높여가는 방식을 취하지만, '창세기전1, 2'는 우연에 의한 무협지식 전개가 많아 갑자기 강해진다든가 갑자기 캐릭터가 사라진다든가 하는 문법을 사용했다.

갑자기 툭 튀어나오는 라시드의 각성이나 흑태자가 배운 궁극의 그리마 등이 좋은 예다. 덕분에 밸런스적인 면에서 좋지 못한 이야기를 듣기는 했으나 이야기 전개와 캐릭터를 극대화하는 데에는 매우 효과적이었다. 또한, 창세기전 시리즈의 트레이드마크 같은 광역기들도 이때 기본 원형이 만들어졌다.

▲ 판타지물에서는 익숙지 않은 이름(좌), 광역 필살기 천지파열무(우)

창세기전1, 2에서 '사랑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다. 최연규는 국내 드라마를 바탕으로 로미오와 줄리엣 같은 분위기를 내고 싶어 했고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를 SRPG에 끼어 넣었다. 당시 RPG는 청소년물이라는 인식이 강해 사랑 이야기를 전면에 내세우지 않았는데 창세기전1, 2는 이를 게임에 녹였다. 그 과정에서 국내 드라마에서 유행했던 기억상실과 기연을 적극 활용했다. 이는 오히려 SF 판타지에서 참신한 결과를 가져왔다.

당시 국내 TV 드라마와 무협소설은 판에 박은 듯한 비슷비슷한 이야기가 많았는데 무협과 드라마에서는 흔한 이야기가 SF 판타지에서는 오히려 참신해 보일 수 있다는 역발상의 결과였다. 게임에서는 복잡한 이야기를 하려는 시도조차 없던 때여서 가능했다.

본편에서는 삭제됐지만, 샘플 시나리오에는 흑태자 스타이너와 베라딘, 아이린 왕녀와의 삼각관계, 그로 인한 배신, 흑태자의 몰락과 추락 후 기억상실, 이후에 기억을 되찾으며 복수로 이어지는 이야기도 있었다. 브라운관으로 옮기면 아침 막장 드라마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다.

▲ 크흡....

당시 PC 통신에서 손노리가 유쾌한 분위기의 RPG를 만든다면 소프트맥스는 서사의 RPG라는 평이 주를 이룰 정도로 '창세기전'은 이야기에 집중했다. ‘게이사르 제국’과 ‘팬드래건 왕국’ 두 제국 간의 격돌과 그 속에서 펼쳐지는 인물들의 갈등, 세계를 뒤흔드는 신들의 음모 그리고 몰입도를 올리는 극적인 연출까지 게임에 녹여냈다.

특히 흑태자 칼스타이너는 압도적인 카리스마를 발휘하며 국내 게임 중에서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시그니쳐 캐릭터로 자리 잡았다.

130여 개에 다다르는 수많은 마법과 필살기로 다양한 기술을 사용할 수 있는, 자신이 원하는 기술을 선택하는 재미, 그리고 캐릭터별 초필살기의 존재는 캐릭터성을 어필하기에 충분했다.

콘솔 게임에서나 볼 수 있었던 일본식 SRPG를 PC에서도 할 수 있게 한 외적 의의뿐만 아니라 부드러운 도트 그래픽과 김진의 손에서 탄생한 캐릭터들 그리고 방향 개념을 도입한 전투 시스템은 SRPG로 불리기에 손색없었다. 링커맨드 조합 마법 시스템과 거대 마장기 역시 당시에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많은 이들에 마음 속에 남아있는 아스타니아성 무도회]

1995년 12월 출시된 창세기전1은 3.5인치 플로피 디스크 10장이라는 충격적인 볼륨을 자랑했다. 플레이타임은 무려 100시간에 육박했다. 이후 오류가 굉장히, 매우, 아주 잦았던 플로피 디스크 패키지 세트의 한계를 이겨내고자 CD롬으로 재판매되기도 했다.

비록 '탄생' 한글화 작업과 '스카이&리카'를 유통하며 연을 맺었던 삼성전자가 '창세기전1'의 유통을 거부해 소규모 유통회사(게임과 멀티미디어)를 통해 유통할 수밖에 없었지만, '어스토니시아스토리'에 이은 두 번째 한국어 RPG라는 점은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데 성공한다.

소프트맥스가 한국 게임사에 독보적인 영향력을 과시하게 된 건 1년 뒤 '창세기전2'를 발매하면서부터다. 창세기전1을 품은 창세기전2는 1편에서 아쉬웠던 점을 보강하고 이미 자리잡은 시스템을 바탕으로 이야기적 완성도를 끌어올리는 데 성공한다. 이 때문에 소프트맥스 측에서도 창세기전은 1과 2를 묶어 하나의 작품으로 보고 있다.

▲ 김진 작가가 창세기전 1, 2의 원화를 담당했다.

96년 12월 발매된 창세기전2는 당시로써는 상당히 높은 완성도와 특유의 스토리로 소프트맥스를 일약 국내 정상급 개발사로 끌어올린다. 창세기전2는 창세기전1의 내용을 보다 완벽하게 가다듬었음은 물론 아직도 회자하는 아수라파천무를 비롯한 초필살기들과 해전, 공중전 등 다양한 스타일의 전투를 지원했다. 당시의 국내 게임으로서는 획기적인 스케일의 게임이었다.

창세기전1, 2는 국내 최초의 SRPG로 한국 게임 역사에 한 획을 그었다. 일본 게임에 종속했던 한국 게임 시장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켰으며 국내에 다양한 게임 장르를 개발할 수 있는 교두보 역할을 했다. 7만 카피 판매 이후에는 염가판 패키지를 출시할 정도로 시장에서도 성공했다. 이 작품으로 소프트맥스는 90년대를 대표하는 국내 개발사로 자리 잡는다.



■ 신통치 않은 외도, 구원 등판한 '창세기전: 서풍의 광시곡'
- "시리즈물로서의 본격 행보, 시그니처로 자리잡은 '恨'"


▲ ARPG '에임포인트'

소프트맥스가 창세기전 시리즈만 낸 것은 아니다. 창세기전2를 출시하기 앞서 96년 9월에는 ARPG인 '에임포인트'를 출시했다. 90년대 인기 노래 '다시 만난 너에게'를 부른 그룹 피노키오의 이은호(키보드)가 OST를 작곡하는 등 나름 무게를 실었으나 시장 반향을 불러일으키기엔 부족했다.

창세기전2의 성공 이후 소프트맥스는 차기작으로 새로운 장르에 도전한다. 당시 '커맨드 앤 퀀커'는 큰 성공을 거뒀고 '워크래프트'는 마니아들 사이에서 인기를 끌고 있었다. 소프트맥스도 이에 맞춰 들불처럼 번진 RTS 열풍에 합류했다. 단순한 아류를 벗어나기 위해 수중에서 펼쳐진다는 컨셉을 넣었고 이를 위해 화면이 일렁이는 효과를 주고, 소프트맥스답게 세계관과 스토리도 짜임새 있게 넣었다. 자원 채취하는 방법도 독특했다.

그렇게 97년 12월 출시한 '판타랏사'는 기대와 함께 시장에 나왔다. 비록 인공지능 관련 문제가 불거졌고 출시 전 잡지를 통해 공개한 프리뷰에서 삭제된 부분이 존재했지만, 사용자 및 평단의 여론은 호의적이었다. 1년에 한 작품씩 냈던 90년대 게임에서 공개한 콘텐츠 미수록과 버그는 일상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호평과는 다르게 '판타랏사'는 시장에서 실패한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90년대 게임 개발사들은 게임들의 출시 기간을 1년으로 잡았다. 소프트맥스의 경우 12월에 게임을 출시하여 차기작 개발비용을 충당하는 형식이었다. 때문에 판타랏사의 실패는 필연적으로 회사의 경영 악화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 RTS면서 RPG 처럼 세계관에 많은 신경을 썼던 '판타랏사'

결국, 소프트맥스는 위험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창세기전이라는 카드를 다시 뽑게 된다. 그러나 창세기전은 이미 이야기가 완결된 상태였기 때문에 다른 형태의, 다른 이야기를 들고나온다. 바로 외전 타이틀 '서풍의 광시곡'. 창세기전 이야기에서 50년 정도 떨어진 이야기를 다뤘다.

98년 3월 서풍의 광시곡은 시장에 등장한다. SRPG였던 전작과 달리 랜덤 인카운터 방식의 JRPG를 표방한 게임으로 알렉산더 뒤마의 소설 '몽테크리스토 백작'을 원작으로 개발했다. 이는 전작의 영향이 컸다. 소프트맥스는 창세기전에서 적극적으로 차용했던 클리셰들이 표절로 많은 오해를 받았다고 판단하고 원작소설을 차용, 실제 역사나 사건을 모티브로 삼아 이런 논란을 비켜 가려 했다.

서풍의 광시곡에는 창세기전1, 2의 주요 인물이었던 이올린이 폭풍도에 등장하는가 하면 흑태자의 필살기 '아수라파천무'를 시라노가 배우는 등 전작과의 연결고리를 구축해 장르를 뛰어넘어 기존 팬을 흡수할 수 있었다. 시리즈물로의 전환에 성공한 것이다.

당시만 해도 팔콤의 '영웅전설1, 2'나 '이스1,2' 처럼 스토리가 직·간접적으로 이어지는 국내 RPG물을 찾아보기 힘들었기에, 사람들은 연결되는 요소를 찾으며 크게 즐거워했고 이는 몰입도의 상승을 가져왔다.

▲ 회사를 위해 구원등판한 '서풍의 광시곡'

중세풍 일색이었던 당시 RPG들과 달리 르네상스시대 이탈리아를 연상케 하는 분위기를 풍긴 이 작품은 전작들보다 사건의 규모는 줄였지만, 서사의 소용돌이에서 돌고 있는 인간의 이야기를 밀도 있게 다루었다. '창세기전' 시리즈 특유의 한의 정서가 꽂힌 비극적인 아름다움이 유저들에게 각인되기 시작했다.

또한, 미소녀 연애시뮬레이션에서나 볼 수 있었던 멀티엔딩을 도입했다. 국내 게임에 있어서도, 시리즈 전체를 통틀어서도 이례적인 일이었다. 개인적으로 어떤 엔딩을 보더라도 시라노와 함께 했던 실버가 아직도 뇌리에 강하게 남아있다. 의리가 차고도 넘치는 실버. 시라노를 위해 전사하는 모습에은 감수성이 풍부했던 청소년의 가슴에 불을 질렀다.

'서풍의 광시곡'은 이야기뿐만 아니라 외형에서도 큰 발전을 이뤘다. 이 시기는 그래픽 카드 성능이 월등히 발전하며 640*480 해상도에 16비트 컬러로 표현이 가능해진 시기다. 스테인글라스를 통해 들어온 빛이 바닥에 반사되는 장면은 압권이었다. 개인적으로 '파이널판타지7'의 마황로 오버뷰 화면보다 소름이 돋을 정도였으니까.

엄청난 그래픽 리소스 덕분인지 당시로써는 매우 거대한 용량인 CD 3장이라는 볼륨을 자랑했다. CG에 부분 영상 처리를 접목한 어드벤처 게임 '미스트: 리븐'이 CD 5장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RPG로서 굉장한 크기를 가지고 있던 셈이다.

▲스테인글라스 연출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또한, 서풍의 광시곡부터는 장성운 음악감독이 본격적으로 창세기전 시리즈에 참여한다. 장성운이 작곡한 서풍의 광시곡의 메인테마인 ‘Wind of memory’는 아직도 팬들의 기억에 남아있는 명곡이다.

이 작품은 매출뿐만 아니라 ‘98년 소프트 엑스포 상품상’, ‘소프트웨어 상품대상’을 받는 등 소프트맥스에 부와 영광을 동시에 안겨 주었다. 다만 굉장히, 너무, 자주, 매우, 심하게, 짜증 날 정도로 빈번하게 일어나는 랜덤 인카운터와 고질적인 문제인 버그는 옥에 티.

참 1998년은 손노리의 '포가튼 사가' 역시 출시한 해였는데, 포가튼 사가는 가볍고 즐거운 손노리 특유의 분위기, '서풍의 광시곡'은 무게있는 분위기로 팬들을 사로잡았다.

이외에도 트리거소프트의 '퇴마전설', OSC의 '머털도사', 막고야의 '하르모니아전기', FEW의 '도쿄야화,' 패밀리프로덕션의 '은색의 용병'을 비롯하여 최초의 풀라이선스 야구 게임 '라이브스타디움98'과 월드컵 분위기를 탄 '붉은악마2', '삼국지 천명', '야만 전사록', '둘리의 대모험' 그리고 한창 주가가 높던 가수 엄정화가 광고 맡은 남일 소프트의 '나의 신부' 등 일일이 열거하기도 어려울 만큼 다양한 장르에서 다양한 국내 게임이 출시됐다. 소프트맥스는 이처럼 패키지 게임 중흥기이자 마지막 전성시대의 가장 높은 곳에 서 있는 개발사였다.



■ 한 해에 2개의 RPG를 출시하며 소프트맥스를 대중에게 각인시킨 시대
- " IMF 사태, 그럼 만들던 게임에 창세기전을 끼얹어!"


서풍의 광시곡은 시장에서 성공을 거뒀지만, 소프트맥스의 재정은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 서풍의 광시곡 배급사인 '하이콤'이 부도났기 때문이다. '코룸'시리즈를 제작하기도 한 하이콤은 중견 업체로 평가받았으나 97년 12월 찾아온 IMF 사태를 피해가지 못했다.

IMF 사태로 일컬어지는 외환 위기로 인해 수많은 기업이 도산했으며 매일 뉴스에서는 투신자살 소식이 이어졌다. 많은 회사가 경영위기를 맞았고 이 과정에서 대량해고와 경기 침체로 온 국민이 고통을 겪었다.

하이콤은 96년까지만 해도 성장 가도를 질주하던 회사였으나 98년 상반기에 단행된 금융산업 구조조정에 직격탄을 맞아 결국 부도 처리됐다. 하이콤의 부도로 개발사뿐만 아니라 포장제작, 물류, 광고 업체 등이 '도미노 부도'에 노출됐다. 당시 현금보다는 어음이나 당좌수표로 결제하는 업계 관행이 있었고 이러한 관행이 피해를 키웠다.

▲ 6개월 만에 개발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템페스트'

소프트맥스도 이 역사의 소용돌이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유통사 하이콤의 부도로 인해 서풍의 광시곡 판매 수익과 로열티를 온전히 회수하지 못하게 된다. 소프트맥스는 4억짜리 어음이 휴지로 변하는 순간을 지켜봐야 했다. 4억 원은 회사 한해 운영비와 맞먹는 거액이었다.

결국, 소프트맥스 경영진은 흥행 보증수표인 창세기전을 '또' 꺼내 들기로 한다. 회사 사정이 얼마나 어려웠는지, 이미 개발 중인 게임에 창세기전 세계관을 입힐 정도로 말이다.

서풍의 광시곡 이후 최연규는 가벼운 게임을 만들겠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미소녀 육성 시뮬레이션 게임을 만들고 있었다. 본래 '탄생' 등 일본 미소녀 게임에 대한 노하우가 회사 내부에 있었기에 시도해볼 만한 프로젝트였다.

프로젝트는 순탄하게 진행됐다. 실제 역사인 영국의 장미 전쟁을 무대로 뱀파이어를 주인공으로 하는 미소녀 육성 게임이었다. '사쿠라 대전'처럼 미소녀들이 잔뜩 등장해 변신하거나 메카닉을 타고 싸웠다. 미소녀 느낌을 좀 더 살리기 위해 해당 방면에서 꽤 유명한 타카 토니 일러스트레이터를 섭외해 작업하고 있었다

그렇게 게임을 한창 만들고 있을 98년 6월. 상기에 언급했듯 경영진은 이 게임에 창세기전을 입히기로 한다. 출시 예정일은 12월. 6개월밖에 남지 않은 시점에서 내려진 결정이었다. 이미 만들어진 게임에 억지로 창세기전을 접목하다 보니 설정에 무리수가 많이 들어갔고 완성도도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원래 기획들이 대거 삭제되거나 대체됐다. 이렇게 만든 게임이 '창세기전: 템페스트'다.

자유로운 영혼의 흡혈귀였던 주인공은 어쩌다 보니 '클라우제비츠'가 됐고 무대였던 영국왕실의 이야기는 팬드래건의 이야기로 바뀌어야만 했다. 또한, 일러스트레이터와 계약 당시에는 언급이 없었기에 엔딩부분은 별도의 작업을 해야만 했다. 이때 투입된 인물이 후속작의 원화를 맡게 되는 김형태(現 시프트업 대표)다.

▲ 채찍으로 때리지 않는다고 약속해 준다면야...

소프트맥스는 서풍의 광시곡에서 '분기' 즉 멀티 엔딩에 대한 교훈을 템페스트에 적용했다. 멀티 엔딩은 만들기 힘들지만, 유저들이 느끼는 만족도가 크지 않았고 시나리오 완성도도 떨어지는 역효과를 낳았다고 자체적으로 평가했다. 그래서 템페스트는 단순 분기가 아닌 게임 진행에서 다양한 과정이 반영되어 엔딩이 갈리는 요소를 집어넣었다.

캐릭터의 수치와 호감 등의 요소를 종합해서 독립 사건을 객체적으로 생성해 나가는 방식으로 이를 구현했다. 비록 사건들 간의 인과관계는 조금 약해졌지만, 유저가 이야기를 이끌어가고 창조한다는 느낌을 주는 데 있어 상당한 발전을 이룰 수 있었다. 장르적 강점과도 잘 맞았다.

비록 지나치게 밝고 경쾌하다는 혹평을 받기는 했으나 창세기전 시리즈 중 가장 공격적인 홍보로 인해 '템페스트'는 시리즈 팬을 끌어모으는 데 큰 역할을 한다. 또한 연애 시뮬레이션적인 스토리텔링 기법은 대중에게 크게 호평을 받게 된다. 기존 팬들과 평론가들에게는 혹평을 받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대중에게 먹힌 것이다.

한해에 두 편의 게임을, 그것도 RPG를 출시한 것은 보통의 회사에선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 난 아직도 발키리 변신시 도발적인 포즈와, 길고 긴 엔딩을 잊지 못한다.




■ 패키지 시대 마지막 불꽃, '창세기전3'
- "깔끔하게 끝낸 20세기, 코스닥 상장까지 이뤄낸 소프트맥스"


▲ 인스톨화면 부터 음성을 지원했으며, 화려한 연출과 심도있는 이야기가 특징이었다.

'창세기전3 파트1'은 1999년, '창세기전 파트2'는 2000년에 출시됐다. 당시 대한민국 게임계는 격변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패키지 게임에서 온라인 게임으로 넘어가는 전환기였고 그래픽도 2D에서 3D로 넘어가고 있었다.

스타크래프트와 온라인 게임 태동으로 촉발된 PC방 열풍에 패키지 게임은 힘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소프트맥스는 이 시절 패키지 게임사로서 정점에 서게 된다. 바로 시리즈의 방점을 찍은 '창세기전3'를 발매했기 때문이다.

창세기전3는 정식 넘버링 시리즈답게 SRPG 형식으로 회귀했다. 그러는 한편 템페스트를 급하게 만들면서 헝클어진 설정을 창세기전3에서 수습했다.

▲ 에피소드별 진행으로 새로운 스토리 텔링을 선보였다.

각각의 에피소드가 병렬적으로 연결된 창세기전3는 객체적 기법에 따라 구성, 에피소드끼리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 이 기법이 응축된 대표적인 에피소드가 플레이어 모두를 충격과 공포에 빠트린 창세기전3 파트2의 '크로스 인카운터' 챕터다.

그동안 베베 꼬아놨던 모든 의문이 한방에 풀리는 챕터의 충격. 베라모드 측에서 플레이할 때 디에네의 대사로 인해 많은 사람은 장탄식을 내쉴 수밖에 없었고 많은 이들은 창세기전 시리즈에 '최고의 스토리'라는 별칭을 부여하기에 주저하지 않았다. 더불어 ‘살라딘’, ‘세라자드’, ‘베라모드’ 등 개성있는 캐릭터를 선보여 많은 팬층을 확보하게 된다.

여기에 김형태(現 시프트업 대표)가 본격적인 원화 작업을 맡고 '서풍의 광시곡'부터 합류한 장성운과 박진배 그리고 남규민 등이 모여 음악을 만들었다. 당시 게임 개발사로서는 드물게 음악 작업실을 따로 운영했다. 덕분에 아직도 게이머들의 가슴이 설레게 하는 훌륭한 곡들이 탄생했다. 또한, 수십 명의 초호화 성우진과 50곡에 달하는 방대한 BGM까지 더해 창세기전3는 명작 반열에 오른다.

▲ 세라자드 죽을 때보다 더 슬펐다.

물론 설정상의 문제와 고질적인 버그 그리고 시리즈 전통의 광역기로 인한 밸런스로 호불호가 갈리는 작품이었지만, 회사 내부에서도 회사 외부에서도 '창세기전3'는 좋은 평가를 받았다. 시리즈를 잘 마무리했다는 평가가 주를 이었다. 화려한 연출과 매력적인 다양한 캐릭터를 선보여 팬들에게 큰 지지를 끌어내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창세기전3는 출시 2개월 만에 10만 카피를 돌파했다. 이는 주얼판이 아닌 정품 패키지로서는 처음 돌파한 기록이며 10만 카피 한계선을 세 번이나 깨트린 시리즈로 명성을 드높일 수 있었다. 창세기전 시리즈는 총 100만 장 이상 팔려나가는 등 큰 성공을 기록했다. 이에 힘입어 2000년에는 50억 원의 매출을 올린 데 이어 2001년에는 70억 원의 매출을 기록했다. 명실공히 최고의 게임사에 오른 것이다.

▲ '템페스트'를 아득히 뛰어넘는 카진스키의 복장. 특유의 섹시한 캐릭터로 김형태는 이름을 각인 시켰다.




■ 기나긴 암흑기의 시작, '버그나 깔았다?'
- "상장과 맞물린 무리한 일정... 창업 9년 만에 맞이한 적자"


훌륭하게 20세기를 마무리한 소프트맥스는 창세기전을 대신할 새로운 3D 게임 개발에 착수한다. 최연규는 새로운 IP의 필요성을 느꼈다. 그간 창세기전을 1년에 한 편씩 내면서 각 작품의 연결성이 너무 강했기에 이야기를 독립적으로 풀어놓기에 부담을 느꼈던 터였다. 그렇게 출시한 게임이 '마그나카르타', 속칭 '버그나깔았다'다.

아수라 엔진이라는 독자 엔진을 개발하면서 야심 차게 시작한 이 프로젝트. 자체 엔진을 쓰면서도 1년 안에 게임을 출시한다는 무시무시한 계획을 세웠다. 콘솔로 개발된 후속작이 디버깅에만 1년을 소모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정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더구나 소프트맥스는 창세기전2와 창세기전3를 출시하면서 2D 그래픽에 대한 노하우가 풍부한 회사였다. 그러나 3D로 기획한 마그나카르타는 노하우 없이 말 그대로 개척해야 하는 상황이었음에도 이런 무모한 계획을 세웠던 것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시장의 기대는 소프트맥스라는 이름 때문에 높아질 대로 높아져 있었다. 체험판에서 불안감이 감지됐지만, 사용자들은 소프트맥스니까라고 여전히 기대감을 내려놓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이것만 고친다면' 이라면서 기대감이 더 커졌다.

▲ 솔직히 일러 말고는 잘 기억도 안나는 '마그나카르타'

하지만, 기대와 달리 알파버전과 다를 바 없는 게임이 정식으로 유통됐고 소프트맥스는 이미지에 큰 타격을 받는다. 소프트맥스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것이다. 2001년 6월 '소프트맥스'는 코스닥 시장에 주권 등록을 하고 매매를 시작했는데 이는 회사에 주주가 생겼다는 뜻이다. 즉 소프트맥스의 기업공개 및 상장 시기가 겹쳐 최대한 빨리 게임을 출시해 성과를 내야 하는 상황. 무리하게라도 출시해 성과를 보일 필요가 있었다는 말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당시 급성장하는 온라인 게임 회사들로의 인력 유출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시기기도 하다. 결코, 소프트맥스의 행위를 옹호하려는 말이 아니다. 미완성 게임을 출시한 행동은 충분히 질타받을 만한 일이다. 다만, 그러한 일이 있었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게임 완성도는 심각하게 낮았다. 게임을 구동할 수 없을 정도의 치명적인 버그가 속출했고 결국 리콜 사태까지 맞이했다. 소프트맥스는 사과문을 동봉해 OST와 버그 패치가 들어있는 CD를 무료 배포했지만, 팬들이 마음은 돌아선 뒤였다.

마그나카르타는 스토리와 세계관 형성에서 호평받았으며, 리듬을 살려서 입력하는 전투 방식은 신선하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물론 플레이를 할 수 있었다면 말이다. 김형태 는 다시 한 번 호평을 받으며 업계에서 입지를 굳건히 다지게 된다.

▲ 체험판보다도 다운 그레이드되서 원성이 자자했다

그후 소프트맥스는 ‘마그나카르타’ 시리즈의 후속작 ‘마그나카르타 : 진홍의 성흔’을 PS2로 제작하면서 콘솔로 진출한다. 이미 PC판을 내기 전부터 일본의 반다이와 콘솔판 계약을 성사한 상황이기에 선택의 여지도 없었다. 일각에서 보는 '도망'은 아니라는 말.

소프트맥스가 언리얼 엔진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도 이즈음이다. 리크리스 개발 당시 연을 맺었던 김학규(現 IMC 대표)의 조언에 따라 아웃소싱을 도입하면서 부터다. 소프트맥스는 2000년 초반부터 언리얼 엔진 라이선스와 미들웨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현재 에픽게임즈의 잭포터 부장도 소프트맥스의 엔진 프로그래머였다.

콘솔버전 '마그나카르타'는 PC 버전과는 다르게 오랜 시간을 들여 개발했다. 디버깅 전문회사와도 일을 했다. 디버깅에만 1년. PC 버전을 개발하는 시간과 맞먹었다. 일본 회사의 까다로운 개발 프로세스와 검수 체계를 거치다보니 자연스레 게임은 완성도가 높아졌다. 판매량도 나쁘지 않아 '소프트맥스'의 부활이라는 소리까지 들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좀 더 시간이 지난 2004년 11월에나 듣는 이야기다. PS2 버전 '마그나카르타: 진홍의 성흔'은 패미통 리뷰에서 골드를 받았다.

어찌됐던 이후 국내 PC 패키지 시장은 불법복제나 온라인 게임들의 성행 등으로 돌이킬 수 없는 수준으로 몰락하면서 소프트맥스도 PC 패키지 제작을 접는다. 기업공개를 한 다음해인 2002년에는 창사 이래 처음으로 적자를 기록한다. 외부에서 거대한 자금이 들어오고 직원 규모도 늘어났지만, 창업 9년만에 첫 적자를 기록한 것이다. 소프트맥스는 다급하게 사업 다각화에 도전한다.

▲ 충분한 시간을 부여받은 '마그나카르타: 진홍의 성흔'은 괜찮은 평가를 받았다.




■ 개발만 할 수 있게 해준다고 한 약속도 못 지키게 된 소프트맥스
- "지주회사로 새롭게 태어나 사업 다각화 시도했으나 결과는 글쎄..."


소프트맥스에게 창세기전 시리즈는 예전 여자친구 같은 존재였다. 나에게 빛을 주고 좋은 추억을 남겨줬지만, 현재에는 아무런 쓸모없는. 딱 그런 존재였다. 무너진 패키지 시장과 마그나카르타 PS2 버전 개발을 위해 일본으로 최연규가 가버렸기에 1년 만에 또 창세기전을 낼 수도 없었다.

이 무렵 소프트맥스는 사업부별로 분사하여 4개의 게임 관련 자회사로 거느린 지주회사로 새롭게 태어난다. 변화한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온라인 게임, 모바일 게임, 포털 등 사업부별로 콘텐츠 개발 자회사를 만들고, 소프트맥스는 마케팅 전문 지주회사로 변신한다는 글로벌 사업전략을 마련했다. 글로벌 비즈니스를 위한 포석이었다.

회사 내 시스템과 조직체계도 대대적으로 손봤다. 사업 포트폴리오 역시 PC 패키지 게임만이 아닌 종합 게임 업체로 발돋움하기 위한 청사진으로 채웠다.

우선 소프트맥스의 게임유통전문 자회사인 '디지탈에이지'는 '훈마트'를 인수한 후 '엘피앙'이라는 게임전문쇼핑몰 운영에 뛰어든다. 그러나 마그나카르타 사태와 사후처리 미흡, 서비스 부실 등으로 악평을 듣다가 2008년 사업을 접는다.

▲ 개구쟁이를 뜻하는 Elfin과 사람을 뜻하는 접미사인 ian을 붙혀서 만든 신조어

마그나카르타를 출시하고 코스닥에 상장했던 2001년에는 4LEAF(이하 포리프) 서비스하고 있었다. 포리프는 개발 중이었던 '테일즈위버' 클라이언트로 제작한 채팅 프로그램으로 윈엠프 방송, 기사단 등의 요소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 당시 광풍이라고 불러도 무리가 없는 '채팅' 시장에서 살아남은 프로그램이었다.

소프트맥스는 이러한 '포리프'를 2003년 웹 서비스로 전환하여 게임 포털 사이트로 거듭나고자 했으나 참담히 실패한다. 당시는 채널링이라는 개념이 지금처럼 정착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보드게임 '주사위의 잔영'은 큰 인기를 끌었으나 웹 서비스로 전환되며 사라졌고 '드림체이서', '젤리삐워즈'는 지금 와서는 이름조차 생소한 게임이 되었다. 결국, 마땅한 수익모델이 없었던 '포리프'는 2009년을 마지막으로 서비스를 종료한다

2001년 넥슨과 '테일즈위버' 온라인게임 공동개발 서비스 계약을 맺고 2003년 6월부터 상용화하며 온라인 게임 사업에도 진출했다. 당시 소프트맥스는 '룬의 아이들'로 엮인 '테일즈 위버'와 '포리프'를 연계해 서비스하려는 복안을 세웠으나, '포리프'의 포탈화 실패로 '테일즈위버'는 넥슨 퍼블리싱으로 지금까지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포리프 포탈화 시도는 실패로 끝났다.

2000년을 기점으로 컬러 디스플레이가 핸드폰에도 보급되고 각 통신사 마켓이 자사의 점유율을 늘리기 위해 각종 콘텐츠를 공격적으로 제공하던 때 소프트맥스도 피처폰 게임 시장에도 적극적으로 대응했다. 그러나 큰 성공은 거두지 못했다.

창세기전 IP를 기반으로 한 '용자의 무덤1, 2', 창세기전 세계관 위에 세운 오리지널 스토리 '창세기전: 크로우 1, 2', '창세기전: 낭천편'을 비롯하여 '마그나카르타M', '루시안의 모험', 마그나카르타 진', '챔피언쉽 야구 2006' 등을 출시했다. 특히 2005년 출시한 '노리맥스 영웅전'은 90년대 한국 게임 업계의 양대 산맥인 손노리와 소프트맥스가 합작하여 출시한 게임이었으나 별 반향이 없었다. 이 후 양사의 브랜드 '노리맥스(NoriMax)'도 소리소문없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

소프트맥스는 급기야 창세기전 IP뿐만 아니라 원작을 모바일로 이식, 변조한 게임들을 선보이기 시작한다. 2007년. 전통의 12월에 '창세기전3 EP1: 슈미터'를 출시한 것을 기점으로 '창세기전3 EP2: 크림슨 크루세이드', '창세기전3 EP3:아포칼립스', '창세기전3 EP4: 울티메이트 제네시스'를 출시한다. 하지만 창세기전이란 이름에 걸맞은 성공은 거두지 못했다.

▲ 넷마블에서 할 수 있던 'SD 건담 캡슐파이터'

2007년 소프트맥스는 또다시 온라인 게임 사업에 진출한다. 일본판 '서풍의 광시곡'과 '마그나 카르타: 진홍의 성흔'으로 인연이 깊은 반다이와 제휴하고 'SD 건담 캡슐파이터 온라인'을 개발, 서비스하게 된 것이다. 건담이라는 매우 강력한 IP를 기반으로 한 이 작품은 기동전사 건담 시리즈에 등장하는 거의 모든 기체가 등장하는 TPS 게임이었다.

기존의 건담 게임들이 빔과 미사일 등의 거대병기로 전투가 이뤄졌다면 이 작품은 근접전을 바탕으로 한 액션성에 무게감을 뒀다. 덕분에 하드코어한 성장 콘텐츠에 쉽게 지치지 않고 아케이드 액션 게임을 즐기듯 플레이할 수도 있었다.

또한, 기존에 콘솔에 있던 수많은 건담 게임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많은 기체가 등장해 건담 마니아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다. 새롭게 등장하는 건프라 및 애니메니션을 비교적 빠르게 업데이트해 호평을 받기도 했다. 그 외에 반다이와 제휴로 건프라 이벤트 등을 한다든지 게임 외적으로도 많은 공을 들였다.

서비스 내내 운영 측면에서 좋은 소리를 많이 듣지는 못했지만, 'SD건담 넥스트 에볼루션'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한국어로 접할 수 있는 유일한 온라인 게임이었기에 건담 마니아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을 수 있었다. 다만, 국내 건담, 메카 유저층이 아주 적기 때문에 안정적인 사업 유지는 힘들었다. 결국, 접속 인원 감소에 따른 수입감소로 인해 2015년 5월 30일 서비스를 종료한다.

비록 서비스는 종료했지만, 국내에서 메카물이 7년째 서비스를 이어왔다는 점은 인상적인 부분이다. 2010년 서비스를 시작한 SNG '꾸며볼까요? 패션몰'을 포함해 2016년 9월 28일 현재 '창세기전4'를 제외하고는 서비스 중인 온라인 게임은 없다.

▲ 소프트맥스는 다양한 시도를 했다.

2008년에는 닌텐도 3DS용 게임을 로컬라이징하기도 한다. 정영원 대표가 창세기전1 출시 이후 직원들에게 "한국어화 작업 말고 앞으로는 개발만 한다."고 선언한 적이 있기에 이 같은 행보는 회사가 얼마나 어려웠는지 보여주는 단편이다. 실제로 3DS 로컬라이징 및 퍼블리싱 사업을 진행한 2008년은 세계금융위기와 겹쳐 주가가 810원까지 내려가기도 했다.

2009년 회사는 다시 한 번 격변을 맞이할 준비를 한다. 바로 '창세기전4' 개발 소식. 회사의 위기가 찾아올 때마다 등장한 창세기전 카드를 다시 꺼내 든 것이다. 모바일용 게임이 아닌 PC 온라인 게임이었다. 스토리 텔링으로 명성을 떨쳤던 소프트맥스가 과연 온라인 게임을 제대로 소화할 수 있겠느냐는 의심이 들기는 했지만, 이 소식을 기점으로 회복세를 나타낸다. '마그나카르타2'가 국내 시장에서 뜻밖의 선방을 펼치기도 했다.

2008년 상반기 대비 2009년 상반기 매출액은 165% 증가했고 영업이익과 순이익은 흑자 전환했다. 2008년 대비 실적 개선은 등 온라인 게임의 상반기 매출액이 2008년 7억 6천만 원에서 2009년 18억 5천만 원으로 증가했다. 콘솔 게임 매출액이 30%를 웃도는 수준이었다.

2010년 기준 매출액 비중은 모바일게임이 2.09%, 콘솔게임이 6.18%, 온라인게임이 91.73%를 차지해 PC 패키지에 몰려있던 체질을 바꿨다. 2011년에는 3년 만에 주가 1만 원 선을 수복하는 데 성공한다.



■ 회사의 위기에 다시 등판한 창세기전, 그러나...
- "소프트맥스의 시계는 영광의 순간에 멈춰있었다"


▲ 2012년 인터뷰 당시 최연규(좌), 이득규(우)

2010년, 소프트맥스는 본격적으로 창세기전4 개발진을 꾸리며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눈을 사로잡는 연출이나 스토리텔링 등 다양한 측면에서 경쟁력이 떨어진 JRPG 대신 온라인 게임으로 개발하기로 했다. 이번에도 지휘봉은 역시 최연규가 잡았다. 개발팀 모집에 국내 굴지 온라인 게임을 만들던 인재들이 대거 들어오기 시작했다.

최연규는 온라인 게임에서도 소프트맥스 특유의 스토리 텔링을 풀어낼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다. 그 동안의 온라인 게임이 선형구조 스토리 텔링을 시도했기에 실패했다고 판단한 것이다. 온라인 게임은 유저가 이미 자신을 아바타에 투영하고 있으므로 2인칭 시점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기로 했다. 그동안 쌓아온 객체 지향적 스토리 텔링 노하우도 투영했다. 게임브리오 3.2를 자체적으로 커스터마이징해 개발을 시작했다.

2012년에 들어서자 대략적인 윤곽을 공개할 수 있었다. 1명의 플레이어가 최대 5명의 유닛으로 포메이션으로 만들어 싸우는 '군진 시스템'을 차별점으로 창세기전의 이야기를 담은 평행 우주를 게임에 풀어냈다. 그러나 2013년에 공개된 영상 하나가 게임 개발의 진척도를 알 수 있는 유일한 창구였다.

▲ 2012년 공개한 창세기전4 프로모션 영상

2014년이 되서도 창세기전4의 개발 소식은 지지부진했다. 한국판 '듀크뉴캠3D'가 되는 것 아니겠느냐는 이야기도 나왔다. 그동안 소프트맥스는 '템페스트'와 같은 뿌리를 두고있는 '아이엔젤'과 카드 게임 '이너월드'를 출시하고 '와라편의점' 퍼블리싱 계약을 체결하며 사업 다각화를 꾸준히 시도했지만, 시장 반응은 밍숭맹숭했다.

2015년 4월에는 창사 20년만에 본격적인 퍼블리싱 사업 진출을 천명했다. 이를 위해 85억원 규모의 전환사채를 발행해고 개발 조직과 사업조직을 분리했다. 퍼블리싱할 게임을 찾기 위해 박정필 전무가 지휘하는 사업본부도 신설했다.

그 와중에 근근히 소프트맥스를 지탱하던 'SD 캡슐파이터' 서비스가 종료를 고하며 사단이 난다. MMORPG는 굉장히 리스크가 큰 프로젝트다. 회사의 사운을 걸고 만든다는 말이 빈말이 아니다. 더구나 소프트맥스처럼 확실한 캐시카우가 없는 회사라면 말이다.

2015년 5월 15일 소프트맥스는 주식거래 정지가 된다. 급격한 주가변동도 아니고 매출 3억 원 미달로 주식거래가 정지된 것이다. 상장 규정에 따라 상장적격성 실질심사 대상에 해당하는지 심사를 받았다. 소프트맥스의 2015년 1분기 매출은 3,995만 원에 불과했다. 동네 호프집도 이거보다는 잘 벌겠다는 조롱섞인 말들도 나왔다. 영업손실은 34억 원, 당기순손실은 24억 원.

▲ 2014년 라인업에 포함된 '트레인크래셔'는 거래 정지 이후 출시됐다

창세기전4의 출시는 차일피일 미뤄졌고, 2014년에 발표한 모바일 게임 '주사위의 잔영'도 별 소식이 없었다. 어찌보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모바일 퍼블리싱 사업 의지를 불태웠던 소프트맥스에게는 악재 중의 악재였다. 더불어 창세기전4 CBT를 진행하고 언론에 게임을 노출하던 시기라 더 타격이 컸다.

당시 소프트맥스는 사업조직을 구축하고 본격적인 퍼블리싱 사업에 참여한 만큼 사업 성과를 내겠다고 발표했지만, 이를 곧이 곧대로 받아들이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다행히 6월 15일에는 거래정지가 해제됐다.

그동안 소프트맥스는 간판 IP '창세기전4' 모바일버전 개발과 서비스 권한에 대한 계약을 조이시티와 계약금 5억 원에 체결했다. 6월에는 트래인크레셔를 국내외에 출시하고 5억 6천만 원 규모의 중화권 라이센스 계약도 맺으며 사업을 진행해갔다. 이후 '낚구낚구', '카오스배틀히어로'를 국내외에 출시하지만 성공과는 거리가 멀었다.

언제나 그랬듯 회사의 명운은 '창세기전' 시리즈에게 걸렸다. 엄청난 기대를 받은 창세기전4는 2015년 4월 CBT를 시작했다. 시장의 반응은 극단적으로 갈렸다. '내 15년 돌려내라!'는 부정적인 반응과 '뭐 나쁘지 않아'라는 호의적인 반응으로 나뉘었다.

[1차 CBT전 공개한 실제 플레이 영상]

사실 CBT 직전 공개한 동영상에서 워낙 악평을 받았기에 더 내려갈 바닥도 없었다. 시대착오적인 그래픽과 편의와 거리가 먼 인터페이스에서 가장 많은 혹평을 받았다. 그나마 두터운 팬층이 있었기에 호의적인 평가가 존재했다. 창세기전4에 대한 실망감으로 1차 CBT가 진행 중인 4월 17일에는 소프트맥스 주식은 저가가 장중 하한가인 15,850원을 기록 했다.

기존 MMORPG에서 볼 수 없었던 색다른 진행방식과 스토리 텔링은 유저들에게 호감을 샀다. 그러나 아르카나 수집은 골수 팬들은 물론이고 모바일 게임에 지친 일반 온라인 게임 유저들에게도 큰 호응을 얻지 못했다. 물론, 이 역시 호불호가 나뉘는 콘텐츠로 아르카나를 수집해 강화하는 재미에 게임을 즐기는 사람도 많다.

2차 CBT에서는 1차 CBT에서 받은 피드백을 바탕으로 성실하게 개선했다. 하지만 태생적인 문제는 개선하지 못했다. 아마 그리 좋지 못한 회사사정 때문에라도 하루빨리 서비스를 해야 했기에 더 많은 시간을 부여받지 못한 것 같다. 90년대 '창세기전1'을 개발할 때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 OBT 첫날 동접자 1만 5천 명을 기록 했다

2016년 3월 대망의 OBT가 시작됐고 평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트리오브세이비어'나 '블레스'에 대한 실망으로 반사이익을 얻지 않을까하는 견해도 있었지만 2016년 4월 기준 7천원대까지 떨어진 주가가 창세기전4에 대한 설명을 대신해준다.

개인적으로 1차 CBT를 앞두고 최연규 이사를 만났을 때 묘한 감정을 느꼈다. 내 일생의 커다란 즐거움을 만들어준 사람과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 즐거웠던 한편, 호불호가 갈릴 게 명확한 게임을 보고 있자니 조금은 씁쓸했다.

현재 서비스되고 있는 게임이기에 성공 및 실패를 예단할 수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사운을 걸고 나온 게임이 소프트맥스의 기대에 못 미쳤다는 사실이다.



■ 22년만에 바뀐 주인, 소프트맥스는 어디를 향하는가?
- "주사위의 잔영은 소프트맥스를 구원할 수 있을까?"


지난 6월 23일 소프트맥스는 운영자금 마련을 위해 약 10억 원 규모의 유상 증자와 약 80억 원 규모의 무기명식 이권부 무보증 사모 전환 사채 발행을 결정했다.

증자는 기업이 회사의 자본금을 늘리는 것을 말한다. 무상과 유상이 있는데 유상증자는 기업이 새로 주식을 발행해 기존 주주나 새로운 주주에게 돈을 받고 파는 방식이다. 유상증자에 성공하면 이자 걱정이나 원금 상환 부담 없이 사업자금을 마련할 수 있다. 이 중 소프트맥스가 진행한 제3자 배정 방식은 주주는 아니지만, 회사의 임원, 종업원, 거래처 등 회사와 관계를 맺고 있는 이들에게 신주인수권을 줘 주식을 사게 하는 방식이다.

일반적으로 유상증자는 단기적으로는 악영향을 끼친다. 증자 뒤 사업이 활발하게 진행돼 순이익이 늘어날 수 있지만, 일단 기업가치는 떨어지기 때문이다. 보통 주당순이익이 클수록 투자가치가 있는 주식으로 평가하는데 유상 증자는 주당 순이익이 낮아진다. 그래도 소프트맥스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2016년 9월 28일 소프트맥스의 정영원 대표는 운영자금 마련을 위해 다시 한 번 130억 원 규모의 제 3자 배정 유상증자를 결정했다. 또한, 250억 원 규모의 전환사채를 발행했다. 총 380억 원의 현금을 움켜쥔 것이다. 자금 조달에 대한 기대심리로 개장하자마자 주가가 급등해 정적 변동성완화장치(vi)가 발동하기도 했다.

동시에 소프트맥스의 최대주주였던 정영원 대표의 주식 194만 7,273주(29.13%) 중 117만 6,471주를 이에스에이제2호투자조합외 5인에게 양도했다. 최대주주는 정영원 사장에서 이에스에이제2호투자조합으로 바뀌었다.

▲ 본격적인 출시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주사위의 잔영'

소프트맥스는 모바일게임 '주사위의 잔영'의 신규 포스터와 주인공 캐릭터 일러스트를 공개하며 출시에 박차를 가했다. 모바일 게임을 발판으로 판을 뒤집은 넷마블의 전례를 볼 때 소프트맥스에게도 아직 기회는 남아있다. 아직도 '파이널판타지7'처럼 멋지게 리메이크된 창세기전2를 기다리는 두꺼운 팬층이 남아있다는 점은 소프트맥스만의 강점이다.

올해 상반기 영업손실 47억 원 순손실 52억 원을 내며 3년째 적자를 내고 사실상 매각 절차를 밟은 소프트맥스. 그럼에도 기대하는 것은 소프트맥스이기 때문이다. 같은 시대를 풍미했던 세균전의 '막고야', 피와기티2의 '패밀리프로덕션', '미리내소프트' 등은 현재 없지만, 이들은 살아남았다. 온갖 풍랑에 맞서 여기까지 버텨온 명실공히 베테랑이다.

많은 팬들이 기다렸던 '주사위의 잔영'이 위기의 소프트맥스를 구할 수 있을지 없을지는 나와봐야 안다. 그때까지 '과거의 영광에 취한'이란 단어는 보류해 두고 싶다.

▲ 소프트맥스 회의실에는 과거의 영광들이 보관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