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넥슨코리아 이봄 기획자

  • 주제: 제한된 선택지로 유저가 주인공이 되는 시나리오 만들기
  • 강연자 : 이봄 - 넥슨코리아 / NEXON KOREA
  • 발표 분야 : 게임기획
  • 권장 대상 : 시나리오 라이터 , 게임 기획자 , 개발자 지망생 , TRPG 유저
  • 난이도 : 사전지식 불필요 : 관련 전공이나 경력이 전혀 없더라도 이해할 수 있는 내용


  • [강연 주제] 영화나 애니메이션과는 다른 게임 시나리오만의 장점이 무엇일까요? 게임 시나리오의 장점은 유저가 이야기를 직접 체험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독자나 시청자와 달리 유저는 직접 주인공이 되어 이야기에 참여합니다. 유저의 선택에 따라서 이야기가 달라지는 경험을 할 수 있는 것이죠. 그러나 유저의 자유도와 시나리오의 완성도를 모두 잡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입니다. 결국 시나리오 중심의 작품은 유저의 자유도를 포기하는 경우가 많은데요. 이 두 가지를 모두 잡을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던 차에 <더블 크로스>라는 TRPG 게임에서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이것을 활용해 직접 게임을 만들고 테스트까지 해보았는데요. 과연 제한된 선택지로 유저가 주인공이 되는 시나리오를 만들 수 있었을까요? 조금 긴 여정이 되겠지만 유의미한 시간이 되실 겁니다.

    다른 미디어와 달리 게임은 유저가 직접 시나리오 속에 참전해 이야기를 끌어갈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게이머는 게임에서 제공하는 스토리를 통해 때론 마왕으로부터 세계를 구할 용사가 되기도 하고 때론 시골의 농부가 되어 작물을 키우는 등 다양한 역할을 맡을 수 있다.

    따라서 매력적인 게임 스토리는 게임을 즐기는 목적 그 자체가 될 수 있으며, 플레이어에게 끊임없이 동기 부여를 제공하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다만, 이러한 스토리 게임은 결국 처음부터 끝까지 짜인 플롯대로 플레이어가 움직여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물론 자유도를 보장하는 스토리 게임이 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자유도와 스토리 모두를 챙기는 것이 어려우므로 보통은 플롯대로 주인공을 움직이는 방식을 사용하게 된다.

    자유도와 스토리, 두 마리의 토끼를 손쉽게 잡을 수는 없는 걸까? 스토리와 자유도를 모두 챙긴 TRPG 장르에서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었다는 넥슨코리아 이봄 기획자의 강연을 통해 알아볼 수 있었다.




    ■ 유저가 주인공이 되는 시나리오란?


    게임 시나리오를 플레이어가 직접 조작하고 그 결과를 확인하는 매체라는 관점에 봤을 때 게임 시나리오란, 유저의 선택을 통해 생성되는 스토리의 집합으로 볼 수 있다. 이렇듯 타 매체와 다른 게임 시나리오만의 강점을 살리기 위해선 유저의 선택이 반영되는 시나리오를 만들 필요가 있다.

    따라서 유저가 주인공이 되는 시나리오란, 유저의 선택을 반영하되 그것이 '의미있게' 반영되는 시나리오를 의미한다. 여기서 의미있게는 게임을 즐긴 후에도 감정의 여운이 계속 남는 것을 뜻하며, 게임에 몰입하여 나를 게임 속에 대입할 때 이러한 감정의 여운이 깊어지게 된다.

    유저가 시나리오에 쉽게 몰입하게 만들려면 게임 속에서 선택한 결과물이 풍부한 피드백과 함께 돌아오게 만들면 된다. 다만, 막상 몰입할 수 있는 시나리오가 어떤 방식인지 알고 있어도 이를 게임 속에 녹여내기란 쉽지 않다.





    ■ 기존 게임 시나리오는 어땠을까?


    본격적인 이야기에 앞서 기존 게임 시나리오를 유형별로 분석하고 전반적으로 게임 시나리오가 어떤 과제를 안고 있는지를 설명하고자 한다.

    게임 시나리오의 유형은 크게 4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 기준은 시나리오의 방향성이다. 완성도와 자유도 중 어느쪽을 추구했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으며, 두 번째로 플레이어의 입장에서 볼 때 내가 이야기의 주역인지 혹은 관전인지에 따라 나뉜다.

    두가지의 기준으로 시나리오의 유형을 나누면 탐험형, 책임형, 감상형, 창조형으로 구분된다.


    탐험형은 유저가 캐릭터의 입장에서 게임을 진행한다. 전체적인 스토리는 이미 정해져 있기 때문에 유저의 선택에 따라 스토리가 달라지진 않지만, 준비된 스토리 중에서 보고 싶은 스토리의 순서 정도는 정할 수 있다. 예시로 '오브라 딘 호의 귀환'이 있다. 시나리오의 완성을 위해 유저의 자유도를 어느 정도 제한했다고 볼 수 있다.


    책임형도 마찬가지로 유저가 캐릭터의 입장에서 게임을 진행하지만, 유저의 선택에 따라서 스토리가 달라진다. 흔히 미연시 장르가 여기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가장 게임적인 스토리텔링이 가능한 유형이지만, 하나의 스토리에 다양한 분기를 넣어야 하기 때문에 개발 비용이 많이 든다.


    감상형은 유저가 캐릭터가 될 필요없이 그저 관객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즐기기만 하면 된다. 스토리의 순서를 선택하거나 분기를 선택하는 일조차 없다. '투 더 문'과 같은 일자형 스토리 게임이 이에 속한다. 덕분에 유저들은 완성도 있는 스토리를 감상할 수 있지만 그만큼 자유도가 떨어지는 편이다.


    창조형은 유저가 관찰자의 입장에서 캐릭터는 물론, 스토리까지 직접 만들 수 있다. 게임 시나리오 영역에서 보자면 다소 모호할 수 있겠으나 유저만의 스토리를 써내려간다는 의미가 있다. 대표적으로 '더 심즈'와 같은 시뮬레이션 게임이 있다. 창조형은 유저의 자유도를 최대한으로 발휘할 수 있지만, 스토리텔링 측면에서 개발자가 간섭할 요소가 많이 없으며, 높은 자유도 덕분에 사람에 따라 호불호가 갈릴 수 있다.

    기존 게임 시나리오를 네 가지의 유형별로 분석해본 결과 유저의 자유도, 개발 비용, 시나리오의 완성도라는 과제를 안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렇듯 유저가 주인공인 시나리오를 만들기 어려운 이유의 첫 번째는 개발 비용의 문제다.


    이론적으로 개발 비용만 충분하다면 유저의 선택에 대응하는 다양한 분기를 가진 게임을 만들 수 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개발 비용이 제한된 경우가 많으므로 생각을 실천으로 옮기기가 쉽지 않을 뿐이다.

    여러 개의 시나리오를 만드는 것과 다양한 분기로 나뉜 시나리오 한 개를 만드는 비용은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따라서 비용적인 측면에서 한 개의 시나리오를 만들 바엔 여러개의 시나리오를 만들어서 제공하는 것을 선호할 수 밖에 없다.

    특히, 콘텐츠의 볼륨이 중요한 모바일 시장은 긴 주기를 두고 여러 번 업데이트를 해야하기 때문에 시나리오의 양을 늘리는 것을 선호한다. 다섯 개의 신규 시나리오와 여러 분기로 나뉘는 한 개의 시나리오 중 퀄리티의 차이가 크지 않다면 유저들은 보통 더 많은 양을 제공했을 때 만족도가 높아진다.


    두 번째로 유저의 자유도와 시나리오의 완성도는 서로 양립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시나리오에서 유저에게 자유도를 주기 위해선 플롯에 구애받지 않아야 한다. 반면, 완성도 있는 스토리는 기승전결이 중요하다. 결과적으로 둘 중 하나를 집중해서 선택할 수 밖에 없는 셈이다.

    그렇다면 정말로 개발 비용은 적게 들면서 유저의 자유도와 시나리오의 완성도가 조화를 이루는 게임을 만들기란 불가능에 가까운 걸까.



    ■ TRPG 시나리오는 뭐가 다를까?


    유저의 자유도와 시나리오의 완성도가 조화를 이룬 게임을 TRPG인 '더블 크로스'로 알아보고자 한다. 많은 TRPG 롤 중 '더블 크로스'를 선택한 이유는 해당 게임이 완성된 시나리오를 제공하면서 그걸 가지고 유저들이 자유로운 플레이를 펼칠 수 있기 때문이다.

    먼저 TRPG란, 테이블 탑 롤플레잉 게임으로 PC가 아닌 테이블에서 사람과 사람 간의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진행되는 게임으로 이해하면 된다. 특정 몬스터와 싸운다고 가정했을 때 CRPG는 미리 정해진 커맨드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 액션을 진행하는 반면, TRPG는 이 과정을 커뮤니케이션으로 대체하니 무궁무진한 자유도를 보장한다.


    '더블 크로스'는 캐릭터를 역할과 표현으로 나누고 시나리오를 줄기와 가지로 나누며, 마지막으로 줄기와 가지를 서로 연계시키는 절차를 통해 유저의 자유도와 시나리오의 완성도에서 나름의 조화를 이루고 있다.

    TRPG에서 유저는 본인의 캐릭터를 직접 만들어서 세계관에 참여하게 된다. 이때 롤 북에서 제공하는 캐릭터 제작 가이드 라인인 핸드아웃이 존재하며, 이를 통해 캐릭터의 역할과 표현을 나눌 수 있다. 이렇듯 유저의 자유도와 시나리오의 완성도 사이에 시나리오 핸드아웃이라는 개념을 넣어 두 요소를 결합한 것이다.



    캐릭터 시나리오도 마찬가지다. TRPG의 시나리오는 줄기와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줄기는 캐릭터의 역할을 중심으로 한 메인 플롯이고 가지는 캐릭터의 표현을 중심으로 한 서브 플롯이다. 다만, TPRG는 줄기와 가지의 시나리오 연계를 커뮤니케이션으로 해결할 수 있는 반면, CRPG는 컴퓨터가 연계해야 하므로 수많은 분기와 데이터가 필요하며, 결과적으로 개발 비용 문제로 되돌아가게 된다.

    앞서 이번 강연의 목표로 유저가 주인공이 되는 시나리오를 언급했고 이에 선택에 따른 피드백이 풍부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유저에게 많은 피드백을 제공하기 위해선 수많은 분기와 데이터가 필요하고 이는 개발 비용의 상승으로 돌아오게 되니 얼핏 보면 해결할 수 없는 문제처럼 보인다.

    하지만, 생각을 전환한다면 무조건 피드백이 많아야 유저들이 만족할 수 있을까에 대해 생각을 해볼 필요가 있다. 가령, 바나나를 먹는다고 말했을 때 유저들은 부정적인 대답보단 긍정적인 대답을 들었을 때 만족감을 느낄 것이다.

    즉, 피드백의 양보다 질의 향상에 접근한다면 비용 문제도 상당 부분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고민했고 간단한 게임을 만들어 이를 테스트한 뒤 나온 결과를 통해 의미있는 성과를 얻을 수 있었다고 전했다.





    ■ 그 아이디어를 적용하려면?


    테스트는 크게 두 가지 타입으로 나눠서 진행됐다. 첫 번째는 캐릭터 버전으로 캐릭터를 역할과 표현으로 구분한 뒤, 표현 요소를 어떤 기준으로 구성했을 때 유저가 만족스럽게 선택할 수 있는지를 알아봤다.

    두 번째는 선택지 버전으로 시나리오를 줄기와 가지로 구분하고 선택지의 내용을 어떤 방식으로 구성했을 때 유저의 만족도가 높은지를 알아봤다.

    테스트는 용사가 공주를 구하기 위해 마왕과 싸운다는 내용을 담은 아주 간단한 게임으로 진행됐으며, 해당 스토리를 베이스로 삼아 캐릭터 버전과 선택지 버전을 따로 만든 뒤 비교가 이뤄졌다.


    캐릭터 버전은 테스트 목표를 알아보기 위해 용사라는 표현과 공주를 구한다는 역할에서 표현을 제한된 범위 내에서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게 설정했다. 캐릭터 표현은 판타지 세계관 설정에 맞춰 성별과 종족, 계급으로 범위를 제한했으며, 총 세 가지의 질문을 통해 테스트의 평가를 요청했다.

    선택지 버전은 시나리오를 줄기와 가지로 나눴을 때 줄기는 고정한 채 가지에서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게 설정했다. 가지는 여러 개의 선택지 중에 어떤 것을 고를지 묻는 즉답형과 이미 벌어진 일에 대해 왜 그 일이 일어났는지를 묻는 의견형으로 나눴으며, 두 버전을 플레이 한 뒤의 소감을 물어봤다.






    ■ 과연 결과는 어땠을까?

    테스트에 참여한 인원은 총 12명으로 남성 4명, 여성 8명으로 구성됐다. 나이는 20대 후반에서 30대 후반으로 이뤄져 있으며, 설문 기간은 5일 동안 진행됐다.

    캐릭터 버전 테스트 결과를 먼저 살펴보면, 세 가지 버전의 스토리가 서로 다른 스토리처럼 느껴졌는가에 대해서 83%가 그렇다고 대답했으며, 베이스 스토리와 가장 큰 차이를 느낀 스토리로 마족이 용사가 된 것을 꼽았다. 반대로 가장 재미있는 스토리는 성별이 여성으로 달라진 스토리가 선택됐다.


    결과적으로 캐릭터의 표현이 바뀌는 것만으로도 스토리의 변화를 충분히 느낄 수 있었으며, 베이스 스토리와의 반전보다는 유저가 스토리에 얼마나 친근감을 느끼고 공감할 수 있는지에 따라 만족도가 달라진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캐릭터의 외형을 바꿔서 변화를 주기보단 해당 캐릭터의 트라우마나 못다 이룬 꿈, 좋아하는 것 등 다양한 서사적인 요소를 넣어 이를 통해 캐릭터를 만들게 한다면 더욱 쉽게 본인의 캐릭터에 몰입할 수 있을 것이다.


    선택지 버전 테스트 결과는 즉답형과 의견형 중 어느쪽이 더 재미있었냐는 질문에서 즉답형이 7명으로 앞선 모습을 보였지만, 거의 비등한 결과를 보여줬다. 두 버전의 이야기에서 각각 좋았던 점을 물었을 때 즉답형은 피드백이 즉각적으로 나오는 것에 만족스러워 했으며, 의견형은 스토리에 대해 생각해볼 여지가 있어 이야기에 몰입할 수 있어 좋았다는 평가가 많았다.

    마지막으로 별로였던 점에 대한 질문에서 즉답형은 바로 피드백이 나오는 구조상 전체적인 스토리와의 연결성을 찾기 어려웠고 선택에 따른 불안감을 느끼는 경우가 많았다. 의견형은 이미 결말이 나온 상황에서 이유를 묻는 방식이기 때문에 선택의 결과가 크게 와 닿지 않았다고 답했다.



    두 버전의 테스트 결과, 서로의 장점과 단점을 상호보완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답변에 도달한다. 게임 내에서 생각해볼 여지가 있는 선택지를 고른 뒤 이에 대한 피드백을 즉각적으로 보내준다면 유저 중심의 피드백을 구축할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을 해볼 수 있다.

    어쩌면 좋은 게임 시나리오란, 게임 속에서 유저가 하고 싶은 말을 하고 유저가 듣고 싶은 말을 들을 수 있는 대리 창구가 될 준비가 갖춘 시나리오가 아닐까 하면서 강연은 마무리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