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최초의 머드(Multi User Dungeon)게임 '단군의 땅'. 신시시대와 아사달시대를 바탕으로 한 이 게임은 낮은 단계의 가상 현실 사회를 구현했다. 텍스트만으로 구성된 가상 현실은 또 하나의 사회를 형성함과 동시에 상상력이라는 최고의 그래픽 카드를 자극함으로써 극한의 자유도를 선사했다.

'단군의 땅'은 당시 대학생이던 블루홀의 김지호 VR(Virtual Reality) 팀장이 주축이 되어 개발한 게임이다. PC 통신 기반의 가상현실을 창조했던 그가 이제는 VR 기기를 활용한 VR 게임을 창조하고자 한다.

VR 게임은 아직 태동기에 가깝다. 근시일내에 시장이 있다고 확언하기도 힘든 데다 깊이 있는 VR 게임이 아직은 등장하지 않아 기대감에 부푼 사용자들에게 실망감을 안겨주기도 한다. 하지만, 많은 시도와 연구가 끊임없이 이뤄지고 있어 실현 가능성 높은 분야로 평가받고 있다. 블루홀은 VR 게임 시장의 가능성을 보고 선제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VR 팀을 꾸렸다. 블루홀의 김지호 VR 팀장을 만나 현재 진행 중인 프로젝트와 가능성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다.

▲ 블루홀 김지호 VR팀장


VR 액션 RPG 프로젝트 '제로'
블루홀에an서 추진 중인 VR 프로젝트 '제로'는 가상현실에 특화된 타격감을 살린 액션 RPG다.
개발을 진두 지휘하는 김지호 팀장은 한국 최초의 온라인게임 '단군의 땅'과 웹게임 '아크메이지'를 개발했다.


VR 개발에 투신하게 된 계기나 이유가 있나?

= 새로운 미디어라서 하게 됐다. 게임 업계에서 20년 좀 넘게 있었는데 그동안 새로운 일을 찾아 즐겁게 살아왔다. 물론 결과도 나오지 않은 것도 있었지만. VR 역시 새로운 시도다.

새로운 미디어가 출현했기에 도전해보는 거다. 과거 인터넷이 등장해 대중화되는 걸 지켜봤다. 그때는 어려서 아무 생각이 없이 게임 만들 때라 기회를 잡지 못했다. 모바일 시장도 태동기부터 지금까지의 모습을 봤다. 대중화되는 걸 봤는데 소셜게임 회사를 운영하고 있어서 기회를 잡지 못했다. 모바일 시장이 생각보다 빨리 황혼기에 접어들기도 했고.

새로운 일을 구상하던 중 VR이 눈앞에서 새로운 판으로 떠오르는 게 보여 도전하게 됐다. 내가 20대였다면 라면만 먹으면서 버티며 VR 게임을 개발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40대에 가정이 있다 보니 그럴 수가 없었다.

내가 짊어질 리스크와 VR 시장의 가능성을 고민했을 때 회사에 들어가서 연구, 개발해야겠다고 판단했다. 그 와중에 블루 홀에서 VR 쪽으로 선제 움직임을 취하고 싶어 했고 이야기가 잘돼서 블루홀에 VR팀을 꾸리게 됐다.

▲ 국내 최초 머드 게임 '단군의 땅'

현재 블루홀에서 개발하고 있는 VR 게임 프로젝트 '제로’는 어떤 게임인지 설명 부탁한다.

= 아직 어떤 게임이라고 정확하게 보여줄 수 있는 단계는 아니다. 다만, 목표로 하는 바는 명확하다. 현재 VR 하드웨어에서 경험할 수 있는 최선의 VR 경험을 선사하게 하는 것. 모바일과 PC는 경험이 다른데 우리는 PC 기반의 경험을 준비하고 있다. 모션 컨트롤러로 조작하는 액션 RPG로 가닥을 잡고 있다.

VR 기능에 타격감을 살린 액션 RPG로 ‘테라’의 웅장한 분위기를 녹여낸 판타지 세계관을 배경으로 한다. ‘테라’ IP를 사용하는 것은 아니지만 아트 에셋을 사용할 계획이다.


어떤 게임을 만들고 싶은가.

= 가장 우선적인 키워드는 '내가 주인공이 된다'다. 게임에서 플레이어가 주인공이기는 하지만 모니터 안에 있는 캐릭터와 플레이어와의 유리(遊離) 감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그에 반해 VR 게임은 캐릭터와 플레이어 간에 간격이 거의 없다. 내가 캐릭터가 되어 모험을 하며 실제 세계에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일체화 경험을 제공할 수 있는 건 VR만 가능하다. 이러한 경험을 제공하는 게 목표다. 플레이어가 주인공이 됐다는 느낌을 제대로 받게 하는 것. 제약이 있는 공간에서 최선의 경험을 제공할 수 있도록 하겠다.

▲ 모션 컨트롤러를 활용한 액션 RPG를 준비 중이다.


VR 개발자에게 필요한 것? 열린 마음
작년 12월부터 VR 팀이 꾸려지기 시작했다. 인적 구성은 아직 완료되지 않은 상태.
블루홀의 VR팀은 VR 게임만의 문법을 정립할 연구, 개발을 위한 인재를 찾고 있다.


현재 인적 구성이 어떻게 되는지 궁금하다.

= 반 정도 뽑았다. 사람을 뽑을 때 2가지를 본다. 하나는 좋은 게임 개발자. 자신의 위치에 맞는 개발 능력이 있는 사람을 뜻한다. 또 하나는 열린 마음. 어차피 현재 상태에서 VR 연구 개발을 해본 사람은 별로 없다.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으면 된다. 우리는 작년 12월부터 VR 연구 개발을 위해 팀을 꾸렸기에 팀에서 관련 지식을 빨리 습득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열린 마음을 가진 좋은 개발자를 찾고 있다.


VR 게임 연구, 개발 과정은 일반적인 게임과 다른가?

= 개발 과정은 똑같다고 보면 된다. 그러나 VR 게임 개발은 '예상'이 쉽지 않다. 일반적인 게임은 개발과정에서 어떤 방식으로 만들면 사용자들이 반응하는지, 어떻게 하면 좋아하는지 일종의 문법이 있어 예상하기 쉽다. 그래서 체계적인 틀 안에서 개발할 수 있다.

반면, VR 게임은 예상이 힘들다. '좋을 것', '나쁠 것'에 관한 예상이 잘 안 선다. 해보기 전에는 알 수 없는 게 너무나 많다. 경계가 흐릿하다. 이동 방법을 예로 들면 그냥 플레이하는 사람의 컨디션에 따라 느낌이 달라질 수도 있다. 수정해서 좋아졌는지 나빠졌는지 파악하기 쉽지 않다. 이런 부분에 대해 감을 잡고 적절한 세팅 혹은 적절한 방법을 찾는 게 재미있으면서도 어려운 부분이다.

PC나 모바일 게임처럼 게임 문법의 기본이 있어야 기획이 나오고 그 위에 복잡한 시스템이 올라가는 데 VR 게임은 기본부터 쉽게 망가지다 보니 힘든 부분이 있다. 그래서 아직 깊이 있는 VR 게임이 나오지 않는 거라고 본다. 이 부분이 우리가 극복해야 할 과제다.


연구 개발 중 예상치 못한 장벽과 마주하는 것은 꽤 고역일 거 같은데.

= 그래서 열린 마음이 필요하다. 잘 모르니까. 새로운 걸 만났을 때 사람은 두 가지 반응을 보인다. 하나는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 즉 호기심으로 접근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다르므로 스트레스로 접근하는 사람도 있다. VR 게임을 개발하는 데 있어 아직은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으로 접근하는 사람이 더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우리 팀은 탐색 또는 연구의 성격이 강하다. 현재 모든 VR 팀이 그럴 수밖에 없고 그래서 정립되지 않은 미래를 같이 탐색할 수 있는 팀이기를 바란다.

VR 게임의 문법은 정립되지 않았다. 모바일 게임이나 PC 게임은 어떤 경험을 전달할지 다 정해져 있다. VR은 이제 정립해나가야 한다.


VR 게임의 문법이라... 구체적으로 어떤 방식으로 접근할 생각인가.

= 마샬 맥루한(Herbert Marshall McLuhan)이 했던 '미디어가 메시지'라는 말은 어떠한 미디어에도 통용되는 말이다. 미디어마다 고유의 접근 방식과 사고방식이 존재한다. 모바일 시장에 기존 PC 기반의 키보드, 마우스 인터페이스를 들고 들어갔다가 실패한 경우가 이를 뒷받침하는 사례다. VR 게임도 마찬가지다. 미디어 고유 언어를 알아야만 한다.

물론 회사이기 때문에 상업적으로 성공할지 하지 않을지 고민하는 부분은 있겠지만, 그 역시도 미디어를 이해해야 가능하다. 현재 상황에서 이를 알고 처음으로 주도권을 잡는 승자는 경쟁에서 유리한 포지션을 차지할 수 있으며 향후 시장을 끌고 갈 수 있다.

▲ 김지호 팀장이 재미있게 즐겼다는 바이브용 게임 '오디오 쉴드'.


몰입감 있는 VR경험을 전달하고파.
하드웨어적 발전이 좀 더 필요하지만, 빠른 시간내에 사이클이 돌 것으로 예상.
큰 기업들이 VR 게임에 관심을 가진다면 해당 기업뿐만 아니라 업계 전체에 도움이 될 것.


VR 게임 시장에 대해 어떻게 전망하고 있는가.

= 시장 전개속도가 기대했던 것보다 느리다. 장기적으로는 '뭐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 하드웨어 측면에서 접근하자면 VR 기기를 지원할 수 있는 컴퓨팅 시스템이 겨우 마련된 단계에 들어선 것 같다. 갈 길이 아직 한참 남았다.

지금의 VR 데모와 비슷한 데모는 이미 80년도에도 있었다. 차이점이 있다면 지금은 2천 달러(한화 약 230만 원) 정도로 환경을 구성할 수 있다면 당시에는 100억 원이 들었다는 점이다.

대중화된 HMD는 대략 포지션 트래킹, 디렉션 트래킹, 모션 컨트롤러 등으로 특징을 잡을 수 있는데 실제로 해보면 트래킹면도 그렇고 뭔가 많이 부족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이 점은 소프트웨어로 보완할 수 있는 부분인 것 같지는 않다. 즉 하드웨어의 발전이 더 필요하다고 본다.

앞으로 오큘러스 CV1, CV2가 될지 몇 번째 바이브 제품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하드웨어적으로 개선이 있어야 하지 않겠나 생각한다. 하드웨어 개선과 저렴한 가격이 뒷받침되어야 그때부터 진짜 VR 시장이 오지 않을까본다.

모바일 시장에서 벌어진 일을 곱씹어보면, 아이폰이 처음 나오고 현재 모바일 시장으로 오기까지 10년 남짓 걸렸다. VR은 그것보다 더 짧게 형성되지 않을까 싶다. 오큘러스 DK1이 처음으로 나오고 소비자 버전 하드웨어가 나오기까지 학습속도가 굉장히 빠르다. 이러한 사이클을 2, 3번 더 겪으면서 시장이 정착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 미래에는 이렇게 될지도... (출처: Artefact 컨셉 디자인)

VR 게임을 기존의 게임과 비교했을 때 어떤 차별점이 존재하는가.

= 몰입감이 제일 차별화되는 포인트다. 영화 인셉션과 같다. 새로운 상황에 직면하고 새로운 역할을 부여받으며 이를 현실처럼 느끼는 것처럼 말이다. 팽이를 돌리지 않으면 진짜인지 가짜인지도 모를 만큼 다가오는 현실감. 잘 만든 VR 게임의 가장 큰 매력이다.

아직 완성도 높은 경험을 주는 VR 게임이 많지 않다. 시뮬레이터에 탑승해서 즐기는 게임은 VR과 워낙 궁합이 잘 맞으니 논외로 치고, 타 플랫폼에서 VR 플랫폼으로 이식한 게임들은 경험 자체가 매우 좋지 못하다. VR 전용으로 개발된 게임들은 미니 게임 이상의 콘텐츠 볼륨을 가지지 못해 한계가 있다.


많이 해결됐다고는 하지만, 아직 국내 유저들에게는 VR 멀미가 큰 관심사다. VR 멀미를 잡을 기술은 뭐가 있을까.

= 모든 이동에는 멀미가 존재한다. 여러 가지 세팅으로 시도를 해봤는데 직접 움직이거나 시뮬레이터에 탑승하는 게 아니라면 멀미를 피하기는 힘들 것이라 본다. 기본적으로 완전히 멀미를 잡을 수는 없겠다는 생각도 한다.

그러나 줄일 방법은 있는 것 같다. 지금 목표로 하는 것은 멀미를 최소화한다기보다는 게임이 재미있어서 멀미를 어느 정도 참고할 수 있게 하는 거다. 게임을 계속할 수 있을 정도로 멀미를 최소화하겠다는 말과 상통한다. 기술적인 부분으로 멀미를 잡는 것도 있지만, 그와 더불어 멀미를 느끼지 않을 정도로 재미있게 만들면 어느 정도 멀미에서 벗어나지 않을까 한다.

▲ 지난 GDC2016의 VR 관련 강연 대기 줄. VR 세션은 어마어마한 대기열을 자랑했을 정도로 열기가 뜨거웠다.

중년에 다시 시작점에 선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느낌은 어떤가.

= '단군의 땅' 시절엔 20대 초반이라 아무 생각이 없었고, 지금은 그냥 새로운 걸 하는 게 익숙해져서 별 느낌이라고 말할만한 게 없다. 성격인 것 같다.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먼저 걸어가 보고 싶은 마음은.

회사 차원에서 VR 게임 연구, 개발은 재무적인 위험성이 없을 수는 없다. 시장이 열린 것도 아니고, 단말기가 몇 대나 보급될지 현재로써는 미지수다. 블루홀도 VR 투자하는데 부담이 적지 않을 거다.

개인적으로 전 세계에 PC랑 콘솔 기반 VR 기기들은 올해 100만 대쯤 보급되고 내년에는 천만 대쯤 보급되리라 생각한다. 잘되면 말이다.

즉 국내 시장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렇다고 해외에서 접근하기도 쉽지 않은 상황이다. 그러므로 큰 회사에서 나서서 VR 게임 개발에 대한 위험성을 짊어져야 하지 않나 생각한다. 연 매출 1,000억 원 이상을 올리고 있는 회사들이 몇 개 있는데 이런 회사들에서 치고 나가 줘야 하지 않을까? 그래야 그들 본인들도 새로운 기회를 잡을 거고... 업계 전체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한다. 현재까지 큰 회사들의 움직임이 좀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