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어~! 오랜만이네."


어느날 붉은 베레모를 쓴 금발의 소녀가 나강이 있는 숙소에 찾아왔다. 이곳에 들어왔는데도 총을 들고 있는것을 보니

 인형인것 같았고 총은 어지간한 사람들이라면 다 안다는 인지도 높은 ak-47이었다. 1947년부터 2020년대 초반까지 러

시아에서 생산된 오래되고 많이 팔린 총인데다가 소총종류로는 지구상에서 제일 흔하다는데 이 총을 든 인형은 오늘에

서야 처음보게 되었다. 게다가 ak-47의 총기숫자에 비해 나름 드물게 보이는 총을 든 인형이라고도 한다.


"잘 지냈나? ak47군."


나강할매는 ak47과 구면인지 친근하게 굴었다. 그녀는 나강과 인사하고 나서야 지휘관인 날 바라보곤 인사비스므레한

 것을 했다. 먼저 내 어깨를 팍 치면서,


"니가 지휘관이구나. 남을 괴롭힐것 같은 얼굴은 아닌데?"


라고 말하며 지휘관 특유의 모자인 베레모를 안쓴 내 머리를 쓰담기 시작했다. 마치 친누나같은 행동이었다.


"지휘관이 베레모를 쓰고 있지않은 것은 처음 봤어. 게다가 복장도 낡은 코트고, 내 베레모라도 쓰지 않을래?"


ak47은 자신이 쓰던 붉은 베레모를 내 머리에 씌워준다며 정수리에 베레모를 패대기쳤다. 그래도 정확히 쳤는지 한

번에 베레모가 들어갔다. 난생 처음 베레모를 써 보지만 이내 ak47은 다시 베레모를 가져갔다.


"베레모가 어울리지 않은 얼굴은 처음이야. 지휘관."


ak47은 베레모보다 초면에 그것도 인형신분으로 인간지휘관에게 여러 무례한 행동을 해도 전혀 개의치않은 나에 대

해 더 놀란것 같았다.


"근데 무슨 일로 여기에 왔는지?"


내가 묻자 ak47은 인형답지않은 쾌활한 표정과 목소리로 대답했다.


"자원부임했어. 이곳에,"


ak47은 그리폰과 비슷한 분위기에다 비슷한 일을 하는 용병회사에 잠시 소속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리폰처럼 철

혈과 전면전을 펼친적은 거의 없었지만 간접적인 피해를 막기 위해 싸우거나 수송의 보호및 경호업무를 하다가

그리폰에 왔다고 한다.


"대부분의 인형들은 민간에서 일하다가 전투임무를 맡게 되지만 난 처음부터 전투를 위해 살아왔어. 마치 AR부대

처럼."


ak47은 더이상의 내력은 얘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쾌활한 미소에 비해 눈빛도 약간 어두웠지만 전투를 좋아하는

성격이어서 그런지 수라의 세계속에서 살아가는것에 개의치 않은듯 보였다. ak47은 극히 흔치않게 자발적으로 이

곳에 왔기때문에 지휘관을 선택할수 있었고 나강과 친분이 있어서 그런지 바로 날 택한것 같았다.


"지휘관, 여기 방침은 어때? 아, 참고로 말하자면 난 지휘관의 침대에 누우려고 들어온건 아냐."


나도 내 침대에 나말고 다른 사람을 눕힐 생각은 없었다.


"규율은 별다른게 없어. 다만 다른곳과 다른게 있다면 애들을 부르는 호칭을 달리한다고 할까나?"


난 ak47이 로마의 여성 검투사인 아킬리아와 비슷한 분위기라는 것이 떠올라서 즉석에서 이름을 지어주었다.


"넌 여기서 ak47이 아니라 '아킬리나'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될거야."


철자로는 ac지만 발음상 ak와 비슷해서 지어준 이름이었다.


"나쁘지 않은 이름인데? 다들 인간과 같은 이름을 갖고 있나봐?"


난 ak, 아니 아킬리나에게 삭막한 기호같은 이름대신 애들의 인간성을 위해 지었다는 오글거리고 남사스러운

이유대신 아킬리나에게 납득이 될만한 변명을 말했다.


"전투중에 긴 기호같은 이름부르다간 총맞을것 같아서, 사람이름이 더 간략한것 같거든."


아킬리나는 바로 납득을 한것 같았다. 그리곤 환영식을 열어주지는 못할 망정, 술은 어딨냐며 냉장고를 뒤지기

 시작했다.


"여긴 술이 없어. 애들만 잔뜩 있는데 술은 무슨."


"넌 술을 안마셔? 아님 못 마시는건가?"


못마시는 것은 아니지만 차를 마신다고 말하자 아킬리나는 역겨운 표정을 지었다.


"나강이랑 죽이 잘 맞을것 같네. 노인네취향이군."


아킬리나는 자기돈으로 술을 사오겠다며 기지내 편의점으로 갔다. 아킬리나는 가기 전에..


"난 애 취급하지 말라고! 이래뵈도 나올덴 나왔으니까!"


라면서 탱크탑이 아슬아슬하게 걸쳐진 부푼 가슴을 양손으로 쥐어서 보여주곤 나가버렸다.


"...."


그때 나강이 내 손을 잡았다.


"저 친구는 술을 워낙 좋아하는데다 잘 마시지. 대비하는게 좋을거야. 그래도 잘 취하진 않아서 행패부리는

 것은 별로 못 봤다네."


난 술운운하는 것보다 아침부터 남사스러운 모습을 봐서 굳어 있었다..


-점심후-


아킬리나는 자신만의 숙소가 없었지만 오히려 혼자서 술을 마실수 있다며 자기방에 들어갔다. 그리고 다른

 아이들은 자신의 총기를 수리하거나 살펴보고 있었다.


"전투중이 아닌데도 항상 총을 달고 다니네.."


그러자 나강이 설명을 해주었다.


"우린 전술인형으로 태어나거나 활동하게 되면서 우리의 이름과 똑같이 해당되는 총에 인연이 묶이게 되었

지. 마치 자석처럼 총기와 멀어질수가 없게 된 것이라네."


나강은 인형을 개발하는 곳에서 총과 인형이 결합되는 현상을 발견하고 실용화시켰다고 한다. 그 기술로 인

해 민수용인 인형들이 어느정도 전투감각을 익히게 되었지만 더 정밀하게 움직이고 여러인형들이 질서정연

하게 활동하려면 지휘관의 존재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자네는 제대로 된 지휘대신 혼자서 싸우거나 나에게 지휘를 맡기게 되었지. 난 그래도 오랜 연륜(!)

으로 인해 전술지휘가 가능하지만 사실 지휘관이 있어야 더욱 정밀하게 우리들을 움직일수 있게 하는 것이

라네."


난 지휘관이 그냥 안전한 곳에 앉아서 애들을 전투시키는 것으로만 알았다. 만일 나강이라는 특별한 인형이

 없었고 적들이 약하지 않았다면 큰 실수를 했을 것이다..


"그래도 자네처럼 직접 움직이면서 싸우는 지휘관도 싫지는 않아. 지휘능력이 미숙한것도 아니고. 다만 아직

 '룰'을 잘 모를뿐이라네."


나는 나름 고충을 안고 있었을 지휘관들을 은둔형 외톨이로 여긴 것을 사과해야 할것 같다..


"자네는 잘 헤쳐나갈거야."


나강은 그렇게 얘기하며 숙소로 돌아갔고 나도 지휘관에 대해서 모르는게 있는지 알아보려고 카리나를 찾아

가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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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강은 숙소로 돌아가긴 했다. 그리곤 지휘관이 어디론가 향하는것을 알고는 몰래 아킬리나가 있는 방에 찾아

갔다. 숙소가 없는 인형들의 방은 최소한의 시설만 갖춰져 있어서 꾸미기전의 숙소보다도 삭막했지만 프로그

램때문인지 외롭거나 불편하다고 느끼진 않았다. 아킬리나의 방은 다양한 색상의 술병들이 들어서 있어서 나

름 인테리어효과를 냈다.


"한잔하러 왔나? 나강, 여기서도 나강이라고 불리지? 난 기호명이라서 계속 ak47로 불리다가 오늘 지휘관이

아킬리나라는 이름을 지어주더라."


나강은 분위기상 술을 마시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나강의 술냄새를 맡고 "어린애가 무슨 술을?!"이라며 지휘관

이 화낼것이다. 평소엔 할매라고 불러도 이럴땐 어리다고 보는것 같았다.


"동지. 우리들의 원래 목표는 여기서 접는게 좋겠어. 아니 수정한다고 보는게 나을것 같네."


아킬리나는 아무말 없이 보드카한병을 들이켰다. 얼마나 술이 센지 '크으~'라는 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확실히 그 '지휘관'처럼 좋은 사람은 드물지. 게다가 그는 우리들을 인간과 대등하게 보는것 같더라고. 내 미

모(?)에 혹한것은 아닌것 같고. 그래서 계획은?"


나강은 그리폰의 어느 지휘관도 하지못한 일을 했다며 아킬리나에게 말해주었다.


"지휘관은 처음으로 인형인 나에게 지휘권한을 넘겨주었다네. AR소대도 아닌 내가 그 애들처럼 애들을 지휘하

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믿고 맡겼단 말이지. 게다가 이곳 그리폰의 사장님도 지금 시대에선 보

기 드물게 인형들을 챙겨주시는 분이야."


아킬리나는 나강이 인간들을 대상으로 제대로 칭찬하는것을 듣지 못했기 때문에 음주를 멈추고 경청했다.


"그래서 난 이곳에 우리 소비에트출신으로 된 파벌을 만들것이라네. 철혈처럼 무턱대고 반란을 일으키기보단

 믿을수있는 인간들밑에서 일하다가 자연스레 우리들의 세력을 만드는 것이지. 그리고 기회가 되면 지휘관에

게 우리들이 이룰수 없었던 새로운 세력의 대표를 맡기게 하는 것이라네."


아킬리나는 잠시 고민하는듯 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와, 아니 지휘관과 함께 몇번 싸워보고나서 생각해 봐야겠어."


나강은 공적인 일은 접어두기로 하고 이제 사적인 마음으로 아킬리나에게 안겼다.


"지금까지 무사해서 다행일세. 동지. 아직 '모신나강'동지는 찾지 못했지만 차츰 모든 동지들이 돌아오고 있어

서 기쁘다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