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 드디어 나머지 탄원서들을 공개할 차례로구먼.”
 -아.

 자르반이 기다렸다는 듯 손바닥을 비비며 말하자 소나의 표정이 다시 딱딱하게 굳었다. 또다시 차가워지는 시선. 잭스는 고개를 떨구며 이를 갈았다. 후려 패도 시원찮을 왕자 놈 같으니라고. 언젠가 리그에서 적으로 만날 그날을 기다리며 그는 주먹을 꽉 쥐었다. 농담 않고 그의 주먹에선 까드득 뼈 갈리는 소리까지 들릴 지경이었다. 물론 잭스가 그러거나 말거나 자르반은 능청스럽게 다음 탄원서를 펼쳐 들 뿐이었다. 소나와 레오나라는 목줄(?)이 있는 이상 그가 이 자리에서 잭스를 무서워해야 할 이유는 아무것도 없었다.

 “자, 우선 로렌트 가문. 오호, 얼마 전에 당주직을 계승한 피오라가 보낸 거로군. 날카로운 검술 실력만큼이나 성격도 날선 걸로 유명한 아가씨지.”
 -아가씨…….
 “후후, 루암께서 이미 데마시아의 귀족 분들과 인연이 있으신 줄은 몰랐습니다.”

 징글징글하다는 소나의 목소리가 그의 머리를 울렸다. 서릿발처럼 날선 레오나의 웃음소리가 그의 귀를 간질이는 건 덤이었다.

 “다른 건 그렇다 쳐도 이건 나도 정말 놀랐소. 로렌트 가문은 문하생 외에는 엄청 폐쇄적인 걸로 유명하거든. 피오라도 사교계에 나온 적이 손에 꼽고 말이야. 듣기로는 리그의 챔피언 자리를 노린다고 하던데, 뭐 진실이야 알 수 없는 노릇이지. 거 아는 거라도 있소?”
 “이전에 대련 몇 번 해줬습니다.”

 잭스는 ‘와인 때문에 데마시아 경매에 왔다가 베사리아랑 싸우고 피오라의 반 협박에 못 이겨 저택에 초대받았다가 의도치 않게 혼구멍을 내줬다’라는 구구절절한 사연을 아주 짤막하게 간추려 얘기했다. 하지만 자르반에겐 그 정도면 충분했던 모양인지 티 테이블을 탕 치며 킬킬거렸다.

 “으하핫! 어쩌다 왔다가 잡혔던 게로군. 아하, 내가 그 느낌 알지. 잘 알아! 나도 가렌과 함께 있다가 덤터기 써서 칼 맞댄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까, 하하! 뭘 해줬는진 모르겠지만 어쨌든 아주 마음에 쏙 든 모양이군. 여기 뭐라 적혀 있는지 아나? 그대는 뒤에서 수작을 부릴 만한 성격이 못되니 헛수작 부리지 말고 당장 사면하라고 적혀 있다네. 정말 피오라다운 말투야. 꼭 종이에서 칼이라도 튀어나올 것만 같군그래!”
 “…불경죄로 처벌받을 듯한 내용인 것 같습니다만.”
 “뭘 그런 거 가지고. 피오라가 이 정도면 아주 정중하게 보낸 거라네.” 잭스가 기가 막힌다는 듯 잠시 말이 없자 그가 한쪽 눈을 찡긋하며 덧붙였다. “아까 말했잖나, 칼 맞댄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 서로 징글징글한 소꿉친구라 이 말일세. 내 장담컨대 이건 자네가 아주 맘에 든단 뜻이야.”
 “황송할 노릇이군요.”

 방금 불경죄 어쩌구 했던 입으로 잭스는 대놓고 빈정거렸다. 이미 밑바닥의 바닥까지 내려온 심정이라 그는 더 잃을 것도 없었다. 그런데 뭔가가 레오나를 건드린 모양인지 그녀의 표정이 심상찮게 굳어가고 있었다.

 “대련이라니, 데마시아에 미리암(Myriam, 제자라는 뜻의 솔라리 고어)이라도 만들어두실 생각이셨습니까?”
 “아서라. 몇 번 싸워준 걸로 무슨 제자라고. 그리고 날 스승이라 대접해주는 건 너 정도…….”
 “하지만 탄원서엔 ‘미래의 제자’라고 써 있는데?”
 “…괴짜밖에 없지.”

 그는 불길한 기분을 느끼며 말꼬리를 흐렸다.

 “잠깐 줘 보십시오.” 

 자르반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탄원서를 들어올리자 레오나가 거의 낚아채듯 탄원서를 뺏었다. 글을 읽느라 좌우로 눈알이 왔다갔다하는 모습이 흡사 반쯤 미친 사람 같았다. 잭스는 또다시 주먹을 날리고 싶은 마음을 참으며 분을 삭여야 했다. 정말 도움되는 일이 한 개도 없는 놈팡이라고 속으로 이를 갈면서 말이다.

 “제 공용어 실력이 잘못된 게 아니라면 정말 그렇게 쓰여 있습니다, 루암.” 레오나가 거의 탄원서를 으스러뜨리기라도 할 것처럼 움켜쥐며 말했다. “대체 무슨 짓을 하시고 다닌 겁니까? 설마, 설마 절 내버려두시고 다른 미리암들을 막 만들어두신 건 아니겠지요? 그렇겠죠, 루암?”
 “오해 마라, 그쪽에서 멋대로 말한 거니까. 난 그러라고 한 적도 없고 제자 받을 생각도 없다…너 빼고 말이다.”

 마지막 발언은 레오나의 표정을 보고 방향 선회에서 급하게 덧붙인 말이었다. 그리고 그게 정답이었는지 지옥에서 갓 기어 올라온 악마처럼 변해가던 레오나의 표정은 서서히 수그러들었다. 잭스는 그제야 자기가 절절 끓는 용광로에 머릴 디밀었다가 살아났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아.” 레오나는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등을 올곧게 폈다.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다행입니다. 혹시 다음에 미리암을 두실 생각이 있으시다면 반드시 제게 먼저 기별을 넣어주시기 바랍니다.”
 “그럴 일 없긴 한데, 있어도 굳이 그래야 할 이유가…….”
 “네?”
 “…그러마.”

 잭스는 또다시 음울하게 말했다. 하여간 진 빚이 있으니 입이 있어도 말도 못하는 꼴이었다.

 그는 몰랐지만, 그리고 별로 신경도 안 썼지만 레오나는 자신이 잭스의 ‘유일무이한 제자’라는 점에 어마어마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어쨌든 간에 그가 그녀를 좌절의 구렁텅이에서 문자 그대로 몸 바쳐 끌어올려준 은사임은 분명했으니 말이다. 소나처럼 자기 스승을 흠모해주는 사람이 생긴다는 건 그녀에게 별다른 타격이 없었다. 경애하는 자신의 스승이 남들에게, 그것도 아리따운 묘령의 여성에게 인정받는다는 것은 분명 기분 좋은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제자라면 얘기가 달랐다. 그것도 여자라면 더더욱 얘기가 달랐다. 

 그건 레오나의 가장 큰 자부심이자 오직 자신만의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는 자리였다. 사교성 없고 툴툴거리기 잘 하는 잭스의 성격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사람 중 하나인 만큼, 그가 밀어붙이는 여성에게 약하다는 것 또한 잘 아는 레오나였다. 그러나 그녀가 안심하고 있었던 이유는, 밀어붙이는 성격이면서 이 사교성 더럽게 없는 스승에게 다가올 정도로 무술에 관심 많은 여성은 (솔라리 여신관들 정도를 제외한다면) 없을 거라는 강한 믿음 때문이었다.

 한마디로 사교성 없기로 정평이 난 스승이라 안심하고 있었는데 다른 데서 몰래(?) 제자를 만들었다? 레오나 입장에선 그게 바람보다 더 충격적인 일이었다. 잭스가 뭐라 생각하든 말이다.

 -그래도 레오나 님 기분은 맞춰 주셔서 다행이네요, 잭스 님? 방금 제자 같은 건 필요 없다고 하셨으면 아마 레오나 님 우셨을 거예요.
 “…….”
 -저도 울릴 뻔하셨잖아요. 기억하시죠? 어제 제가 말씀드렸던 거.

 소나가 샐쭉하게 입을 내밀며 그에게 속삭였다. 어젯밤 욕실에서 울 뻔했다고 하소연했던 그걸 말하는 것이리라. 정말 멀게만 느껴지는 일이었는데 고작 하루밖에 안 됐다니 참 웃기지도 않은 일이었다.
 
“그 일은 내가 정말 잘못했소.”
 -맞아요. 다신 그러시면 안 돼요.

 물론 ‘고작 하루밖에 안 지났다니 놀랍’다거나 ‘멀게만 느껴진’다고 솔직히 말하면 또 지옥 같은 눈총을 받을 게 뻔했기에 잭스는 순순히 사과했다. 그리고 소나는 너무나 당연한 듯 그의 사과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며 우월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 잭스에겐 서글퍼질 기력도 없었다. 그는 소나와 속닥거리느라 몰랐지만 방금 전의 모습으로 테이블의 주도권은 완전히 레오나에게 넘어가 있었다.

 “왕자님, 설마 다른 탄원서에도 이 ‘제자’ 같은 당돌한 발언이 적혀 있진 않으리라 믿습니다. 어서 공개하시죠.”
 “실례지만 그게 뭐 문제가 될 거리요?”
 “아주 많이 됩니다.”

 자르반은 그 ‘제자’가 레오나의 역린이라는 걸 모를 정도로 멍청하지 않았다. 그는 눈에 띄게 허둥거렸고 그걸 보는 티아나나 가렌의 눈엔 감탄이 어리고 있었다. 그들 입장에선 자르반을 이렇게 쥐락펴락하는 레오나가 감탄을 넘어 부럽기까지 할 정도였다.

 “험, 그럼 그 다음 건 베인 가문에서 보낸 거요. 집사인 루테스가 썼나 보군. 별 건 없고……. 크라운가드 거야 뭐 아까 써먹으려다가 만 거니까 역시 별 거 없소. 놀라운 건 아이오니아 쪽에서도 왔다는 거요. 자, 여기. 낯익은 이름들이 좀 보이더군. 카르마와 이렐리아, 그리고 마스터 이, 리 신까지. 아이오니아 챔피언들과도 꽤 아는 사이였군그래?”

 자르반이 건낸 편지엔 또아리를 튼 용 문양이 큼지막하게 찍혀 있었다. 잭스는 대답 대신 가만히 한숨을 쉬었다.

 “청문회 소식이 멀리도 퍼진 모양이군요.”
 “뭐 전쟁학회의 챔피언이 청문회 자리에 섰다는데 화젯거리가 안 될 건 없었지, 하하…….” 자르반이 뒷머리를 긁적이며 멋쩍게 웃었다. “미안하게 됐네. 나도 설마 일이 이렇게까지 커질 줄은 몰랐어. 이거 괜히 여럿 걱정하게 만든 꼴이로군.”
 “괘념치 마십시오.”

 잭스는 떨떠름하게 말하며 고개를 숙였다. 아이오니아까지 소식이 알려질 정도면 그냥 발로란 대륙 구석구석까지 소문이 쫙 퍼졌단 뜻이었다. 아마 자르반의 의도로 봐선 그냥 청문회는 장식이고 재빠르게 일을 끝낼 심산이었겠지만, 소나의 철저한 도움과 레오나의 원조가 일을 크게 불린 데에 한몫한 셈이었다.

 “그래, 다 좋게 끝났으니 좋게좋게 넘어가자고. 참, 이건 선물일세. 빌지워터 쪽에서 온 건데 도통 정체를 알 수 없어서 말이야. 자네에게 보내는 것 같긴 하더군. 음, 가렌?”
 “예, 전하.”

 자르반의 명령에 가렌이 기다렸다는 듯 작은 나무 상자 하나를 테이블에 올렸다. 크기에 비해 묵직한 느낌이 나는 걸로 봐서 안에 든 게 무겁긴 한 모양이었다. 짠내가 가시질 않은 걸로 보아 적어도 바닷가에서 가져왔다는 것만큼은 분명해 보였다.

 “이게 뭡니까?”
 “열어보게.”

 아리송한 느낌으로 상자를 연 순간, 잭스와 자르반 그리고 가렌만 제외하고 나머지의 셋의 감탄이 정원을 울렸다.

 -어머나.
 “놀랍군요.”
 “대단한…귀금속들이군요.”

 작은 나무 상자 안에는 금과 은을 비롯해 보석이 물샐 틈도 없이 가득 차 있었다. 가치를 따지기 이전에 그 빛깔이 오후의 햇빛을 받아 꽤 황홀한 터라 감탄이 나올 수밖에 없는 광경이었다. 물론 자르반은 이미 봤고, 가렌이나 잭스는 이런 보석류에 무덤덤했으므로 그냥 그런가보다 할 뿐이었지만 말이다. 문제는 이게 잭스의 앞으로 온 것이라는 점이었다.

 “이게 제 앞으로 말입니까? 빌지워터 쪽에서 이런 걸 보낼 사람은 없습니다만.”
 “정확히는 빌지워터 소환사 지부 쪽에서 보낸 건데 워낙 얘기가 허무맹랑해서 말이야. 커다란 물방울에 감싸인 인어가 뭐라뭐라 떠들어대며 이걸 나한테 보내라고 했다더군. 자네 얘길 하면서 말이야. 이름이 아마…나미라고 했던 거 같은데. 그런데 아무리 자네가 발이 넓다 해도 설마 인어한테까지 인연이 있을 것 같진 않아서 말이지. 이거 제대로 온 거 맞나?”
 “…….”
 “말 없는 거 보니 제대로 온 거 같군. 대체 인어랑은 뭔 수로 만났던 건가? 뱃사람들도 보기 힘들다던데.”

 나미. 그리고 인어. 몇 년 전 빌지워터에 갔을 때의 그 험난했던 기억이 잭스의 마음속에서 연기 피어오르듯 스멀스멀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가 침묵을 지킬수록 자르반의 호기심 어린 시선과 소나와 레오나의 질렸다는 시선의 강도가 기하급수적으로 강해지는 건 두말할 필요도 없는 사실이었고 말이다.

 “이전에 빌지워터에 갔다가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그 ‘어쩌다 보니’에 정말 많은 사연이 있었지만 그는 이번에도 말을 아꼈다. 변명이랍시고 늘어놔봤자 받는 눈총만 따가워질 뿐이었다. 자르반만 좋은 구경 시켜주는 꼴이라 입맛이 엄청 쓴 잭스였다.

 “내 살다살다 청문회 때 잘 봐달라고 뇌물 받는 건 처음일세. 그것도 인어한테서 말이야. 으하핫! 이거 두고두고 얘기할 거리가 오늘 왜 이리 많이 쌓이나 모르겠어.”

 “이제 인어입니까?”
 -어쩜 잭스 님은 항상 제게 새로운 놀라움을 주시는 걸까요?

 레오나와 소나가 기가 막히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잭스는 무시하고 한숨 푹 쉬며 자르반에게 말했다.

 “…그냥 가지십시오.”
 “내가 왜? 자네 봐달라고 온 건데. 가지고 가서 돌려주든 은행에 예금을 하든 마음대로 하게나.”
 -어머나, 사양 말고 가지셔도 돼요. 설마 저희들 눈치 보시는 건 아닐 테고, 후후. 좋으시겠어요, 잭스 님. 이렇게 ‘어쩌다 보니’ 만난 인어 아가씨에게 보물을 한 상자나 받으셔서요.
 “미리암만 더 두지 않으시면 전 아무래도 상관없습니다. 봄날이시군요, 루암.”
 [어머, 레오나 님! 지금 자기 일 아니라고 막 그렇게 말씀하시는 거죠?]
 “후후, 자기 영역을 지키는 것도 능력이랍니다.”
 [흥, 두고 보세요!]

 소나가 입을 삐죽 내밀며 손을 휙휙 움직였다. 레오나를 제외하고 다들 소나의 수화를 몰랐지만 레오나의 말만으로도 내용은 대충 알 수 있었다. 그들은 번갈아가며 흥미 섞인 눈초리로 그녀들의 말싸움을 지켜봤고, 측은하고 어이없는 눈초리로 잭스를 바라봤다. 참고로 자르반은 당장이라도 팝콘을 입에 넣고 싶기라도 한 모양인지 연신 흥미진진한 표정만 지을 뿐이었다. 모든 기력을 소진한 잭스는 분쟁의 씨앗이 된 보물 상자를 앞에 두고 해변에 밀려 나온 해파리처럼 축 늘어져 있었다.

 “잭스 경, 제가 이런 말 드리긴 좀 그렇지만…힘내십시오.”
 “…고맙소.”

 그런 잭스를 보며, 그저 가렌만이 측은한 듯 조용히 위로해줄 뿐이었다.

 평온한(?) 오후의 한때가 지나가고 있었다. 아리따운 두 아가씨는 공방을 거듭하듯 말싸움을 거듭했고, 자르반은 그 둘을 재밌다는 듯 바라보고 있었으며, 가렌과 티아나는 묵묵히 차만 들이킬 뿐이었다. 잭스는? 모든 걸 새하얗게 불태운 자세로 의자에 늘어져 있었고 말이다. 청문회는 이겼지만, 전혀 이겼다는 느낌조차 들지 않는 그였다.

 “후우…….”

 장담컨대, 그의 인생 통틀어서 가장 고달픈 일주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