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짜오 단편 소설 - 자유로이 바다를 가르던 비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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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로는 꼿꼿하게 서 있었다. 발목의 족쇄는 나무 기둥에 연결되어 있었고, 손목은 굵은 밧줄로 묶여 있었다. 뺨을 타고 흘러내린 피는 검은색 녹서스식 튜닉을 적시다 못해 맨살이 드러난 발 옆에 고일 정도였다. 위로는 잿빛 조각구름이 드문드문 찍힌 하늘이 보였다. 푸르다고도, 아니면 흐리다고도 할 수 있는 색이었다.

들쭉날쭉하게 박힌 기다란 말뚝들이 포로 주위를 둘러싸고 있었고, 근처 막사에서는 병사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바쁘게 움직이는 발 주위로 먼지가 피어올라 군화에 얼룩을 남겼다. 병사들은 지휘관의 사열을 받기 전에 군화를 깨끗하게 닦아내야 할 터였다. 지난 며칠간 병사들의 군기 잡힌 모습을 봐 왔기 때문에 포로는 잘 알 수 있었다. 그에겐 낯선 광경이었다.

주둔지 곳곳에 밝은 감청색 깃발이 바람에 나부꼈다. 깃발에는 활짝 펼쳐진 날개 사이를 가로지르는 칼 한 자루가 그려져 있었다. 데마시아의 문장이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곳에는 검은색과 붉은색이 섞인 녹서스의 깃발이 걸려 있었다. 포로는 자신에게 주어졌던 임무를 기억했다. '제국의 영광을 위해 칼스테드를 탈환하라.'

하지만 그는 임무를 완수하지 못했다.

자신이 어떤 처분을 받을지 그는 알고 있었다. 전쟁에서 실패는 용납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그 사실을 받아들인 채 최후의 순간을 기다렸다. 그가 처음 포로로 잡혔을 때는 고향을 떠나야 했지만, 이번에는 그걸로 끝나지 않을 터였다.

그는 눈을 감았다. 머릿속으로 밀려드는 옛 기억 속에서 두 남자를 떠올렸다. 그의 주인이었던 한 남자는 고향을 떠나온 한 소년을 투기장의 검투사로 만들었다. 다른 한 남자는 제국을 위해서 일한다고 말하던 낯선 사람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 악수를 하더니 그를 서쪽 아르젠트 산맥 너머의 칼스테드로 보냈다.

작별 인사나 덕담 따위는 없었다. 칼스테드로 향하는 사람은 그 외에도 더 있었다. 녹서스에서는 이들을 두고 '불운한 용병들'이라고 불렀다. 정예 부대를 대신해 별 볼 일 없는 임무를 수행할 오합지졸 전사들이었다. 그들의 의사는 중요하지 않았다. 녹서스군이 검투사들에 후한 값을 쳐주자 주인들은 기꺼이 그들을 넘겼다.

그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그의 회상을 방해했다. "너는 녹서스인 같지 않군."

포로는 눈을 뜨고 울타리 밖에 서 있는 데마시아인을 보았다. 그는 감청색과 갈색이 섞인 옷 위에 사슬 갑옷을 두르고 있었으며, 허리춤에는 단검을 차고 있었다. 포로는 그가 하급 지휘관일 것으로 짐작했다.

"이름이 뭐지?" 남자가 말했다.

포로는 생각했다. '대답에 따라 내 운명이 결정될 것인가?'

그는 갈라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신 짜오."

"뭐라고?"

"신. 짜오."

"녹서스 이름 같지가 않은데?" 남자는 의아해하며 물었다. 그리고 몸서리치며 덧붙였다. "녹서스식 이름은 거칠잖아. 예를 들면... '보람 다크윌'처럼 말이야."

신 짜오는 대답하지 않았다. 처형을 목전에 둔 상황에서, 그런 대화는 별 의미가 없어 보였다.

"가지, 수호하사관." 다른 데마시아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수호하사관은 엄숙한 얼굴의 젊은 장교를 돌아봤다. 그녀는 견갑이 금으로 장식된 은빛 갑옷을 입은 채 선명한 푸른색 망토를 두르고 있었다.

"녹서스 놈들은 대화할 가치도 없어. 우리와 가치관이 다르거든." 여자가 말했다.

수호하사관은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크라운가드 검대장님. 그런데 하나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검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녀석은 왜 따로 가둬둔 겁니까?"

검대장은 경멸이 가득한 푸른 눈으로 포로를 바라봤다.

"아군을 가장 많이 죽였으니까."





신 짜오는 나팔 소리를 듣고 잠에서 깼다. 그는 감각이 사라진 발로 진흙탕을 딛고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나무 말뚝에 몸을 의지하며 꿈틀꿈틀 자리에서 일어섰다. 전날 봤던 수호하사관이 비슷한 복장의 병사 네 명과 함께 걸어와 울타리 문을 열었다.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수호하사관이었다. 그의 손에는 따뜻한 수프가 담긴 접시가 들려 있었다.

"잘 잤나? 난 올베르다. 이 친구들과 함께 너를 감시할 거야. '젠 짜우', 이게 네 아침 식사다."

신 짜오는 바닥에 접시를 내려놓는 그를 보며 생각했다. '세 글자밖에 안 되는 이름을 어떻게 저렇게 엉터리로 발음할 수 있지?'

한 병사가 능숙한 솜씨로 신 짜오의 손목을 감고 있던 밧줄을 잘라냈다. 수호하사관과 다른 병사들은 칼자루에 손을 올린 채 그 모습을 지켜봤다.

"어서 먹어." 올베르가 말했다.

신 짜오는 접시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다섯 명이나 왔군."

"우린 검대장님 명령에 따를 뿐이다." 올베르가 대답했다. "그분은 국왕 폐하를 수호하는 크라운가드 가문 출신이거든."

병사들은 서로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 명이 말했다. "그래. 검대장님의 부친이 폭풍 이빨 전투에서 선대 자르반의 목숨을 구했다지."

그러자 다른 한 명이 물었다. "그게 자르반 몇 세였지?"

"2세. 지금이 3세잖아."

"자르반 3세 '국왕 폐하'라고 해야지." 올베르가 끼어들었다. "우리가 섬기는 왕이시다. 게다가 이곳까지 함께 오셨잖나. 경의를 표해라."

그들은 국왕에 대해 좋은 인식을 가진 것처럼 보였다. 신 짜오는 수프를 먹으며 병사들의 대화에 귀 기울였다. 그들은 이렇게 먼 서쪽 지방까지 공격을 감행한 녹서스군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지원 병력이 칼스테드에 얼마나 빨리 올 수 있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정의의 이름으로 승리를 쟁취할 수 있었는지 이야기했다.

'우리를 사지로 내몰았구나'라고 신 짜오는 생각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손에 힘을 주었다. 쥐고 있던 나무 접시가 소리를 내며 쪼개졌다.

데마시아 병사들은 신 짜오 쪽을 바라봤다. 올베르가 그를 보며 말했다. "손 뻗어."

신 짜오는 손바닥을 위로 하며 팔을 앞으로 뻗었다.

"몸 상태가 말이 아니군." 올베르가 새 밧줄로 신 짜오의 손목을 묶으며 말했다. 주위에 있던 병사들도 신 짜오의 몸을 살펴봤다. 수많은 흉터가 마치 강줄기처럼 그의 몸을 덮고 있었다. 신 짜오 역시 병사들의 시선을 따라 자신의 몸을 살폈다. 이제는 각각의 흉터가 어떤 투기장 경기에서 생긴 것이었는지 떠올릴 수 없었다. 수없이 많은 경기를 치른 만큼 일일이 기억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최근에 생긴 흉터가 아닌 것 같은데." 병사 중 한 명이 말했다.

"그래." 신 짜오의 강하고 또렷한 목소리는 병사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비록 잠깐이었지만, 그들에게 신 짜오는 더 이상 평범한 전쟁 포로가 아니었다.

"녹서스에서 무슨 일을 했지?" 올베르가 물었다.

"난 투기장의 전사였다."

"그럼 검투사로군!" 병사 중 한 명이 소리쳤다. "들어 본 적 있어. 수천 명의 관중 앞에서 죽을 때까지 싸우는 야만인들이라고 하던데?"

"그런데 '젠 짜우'라는 검투사는 들어 본 적이 없어." 다른 병사가 중얼거렸다.

"실력이 별로였나 본데? 그래서 죽사발이 된 채로 여기 묶여 있는 거겠지."

올베르가 끼어들었다. "잠깐만, 검투사들은 투기장에서 예명을 쓰지 않나?"

'이 데마시아인은 보기보다 똑똑하군.' 신 짜오는 하마터면 웃을 뻔했다. 검투사들이 독특한 예명을 사용한다는 것은 녹서스 제국 밖에서도 잘 알려진 사실이었다. 어떤 이들은 화려한 예명을 쓰는 반면, 주목받지 않는 이름을 쓰는 자들도 있었다. 신 짜오의 예명은 그로 하여금 빼앗겨버린 예전 삶을 잊지 않도록 해 주었다.

"비세로." 양피지를 펼쳐 보던 한 병사가 말했다. "녹서스 놈들이 이 자를 부를 때 쓴 이름입니다."

올베르는 양피지를 낚아채 천천히 살펴봤다. 그리고 다시 신 짜오를 쳐다보며 말했다. "네가 바로 검투사 '비세로'였군."

순간 정적이 감돌았다. 잿빛 하늘 사이로 가는 빛줄기가 쏟아졌다.

"비세로..." 올베르의 목소리에는 놀라움이 묻어났다. "백전불패의 전사."

병사들은 서로를 쳐다보다가 다시 신 짜오를 바라봤다. 뭔가 떠올랐는지 그들의 눈에서 빛이 났다.

"들어본 적 있어!" 병사 한 명이 말했다.

"미노타우로스와 싸워서 이긴 적이 있다지?" 다른 병사가 덧붙였다.

올베르는 조용히 하라는 듯이 병사들을 향해 손을 들어 보였다. 그리고 신 짜오에게 물었다. "그런데 왜 어제는 이름이 '젠 짜우'라고 했지?"

신 짜오는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검투사가 된 뒤로는 '신 짜오'라는 존재는 사라지고 오직 '비세로'만 남게 됐지." 그의 시선은 밧줄에 묶인 손, 족쇄가 달린 발목으로 옮겨갔다가 다시 병사들을 향했다. "이제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내 본명으로 불리고 싶군."

"너처럼 유명한 검투사가 왜 녹서스의 국경 전쟁에 참전했지?" 올베르가 다시 물었다.

"난 녹서스군에 팔렸다." 대답을 하면서 신 짜오는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는 오래전부터 투기장에서 창이나 칼에 찔린 채 순식간에 숨이 끊어지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했다. 지금처럼 따뜻한 수프와 함께 과거 이야기를 하며 최후의 순간을 맞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운명이 마지막으로 나를 동정하고 있는 것일까?'

올베르가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달리 방법이 없었겠군."

신 짜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녹서스에 가족이 있나?"

신 짜오는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녹서스가 아닌 다른 어떤 곳이라고 해도 그의 가족이 남아있을지 의문이었다.

"그럼 이제 새 인생을 시작하면 되겠네." 올베르가 고갯짓을 하자 병사 하나가 열쇠를 꺼내 말뚝에 묶여 있던 신 짜오의 족쇄를 풀었다.

신 짜오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다. "무슨 뜻이지?"

그러자 올베르가 웃으면서 대답했다. "일단 옷부터 갈아입자고."





새 옷을 입은 신 짜오는 허리를 꼿꼿이 펴고 앉아 있었다. 데마시아산 원단의 부드러운 감촉이 피부에 느껴졌다. 막사 안에는 짚으로 만든 잠자리와 빈 그릇이 여럿 있었다. 그때 고마움을 표하는 사람들의 거친 목소리가 들려왔다. 신 짜오는 그 목소리의 주인이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몇 시간 전만 해도 자신과 같이 포로 신세였던 자들이었다.

그들은 하나둘씩 자리에서 일어나며 자신을 치료해준 치료사들에게 감사를 표했다. 그러자 무장한 데마시아군 병사들이 들어와 포로들을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신 짜오는 그들을 잘 알고 있었다. 자신과 함께 칼스테드로 왔던 이들이었다. 칼스테드로 향하는 수송선에서 그들은 서로 힘겨루기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승자들은 자신의 힘을 자랑하며 우쭐대고 패자들은 치욕스러움에 고개를 숙였다. 개중에는 자신이 데마시아 병사들을 몇 명이나 죽일 것인지 떠벌리는 자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진짜 군대와 맞서본 적이 없는 자들이었다.

그들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패배했다. 녹서스 정규군의 병력과 공성 무기가 있었다면 결과가 달랐을지도 모르지만, 그들은 군인이 아니었다. 정식 훈련도 받지 못한 채 징집되어 데마시아 왕국의 정예 부대와 맞서야 했다. 그리고 전투가 시작된 지 몇 시간 만에 데마시아를 연호하는 함성이 칼스테드에 울려 퍼졌다.

'우리를 사지로 내몰았구나.' 신 짜오는 머릿속으로 되뇌었다. 운명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들은 살아남았다. 하지만 그것은 녹서스가 아니라 데마시아의 뜻이었다.

신 짜오는 어른들이 하시던 말씀을 떠올렸다. '운명은 사방팔방으로 흐르는 법이다. 하지만 그 목적지는 도착하기 전까지 아무도 알 수 없지.'

나이가 지긋한 치료사가 신 짜오 옆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다른 치료사들과 같은 색의 예복을 입고 있었다. "몸은 좀 어떠시오?"

"괜찮습니다. 감사합니다."

"내가 아니라 국왕 폐하께 감사하게. 포로들도 예외 없이 치료하라고 직접 명령을 내리셨으니까."

"3대 자르반 말입니까?" 신 짜오는 속으로 생각했다. '고작 국왕 한 사람의 영향력이 이렇게 크단 말인가?'

"그래, 우리의 위대한 자르반 '3세' 국왕 폐하께서." 치료사는 신 짜오의 실수를 바로잡았다. "자네에게 새 출발 할 기회를 내리셨지. 평온을 찾을 수 있도록 말일세."

신 짜오는 두 손을 모으고 바닥을 내려다봤다. 비세로는 투기장에서 언제나 환영받았다. 그의 창술 실력이면 발로란 대륙 어딜 가더라도 환영받을 터였다. 하지만 바다 저편에 있는 자신의 고향이자 수십 년간 떠나와 있던 최초의 땅은 그에게 요원한 환상처럼 낯설게 느껴졌다.

어디서 평온을 찾으란 말인가? 그가 원하는 것이 진정 평온인가?

아니, 평온을 찾을 기회는 오래전에 사라졌다.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려고 처음으로 남의 목숨을 빼앗았던 그때.

신 짜오는 치료사를 돌아보며 말했다. "한 가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그래, 뭔가?"

"데마시아의 국왕은 어떤 사람입니까?"

치료사가 웃으며 말했다. "직접 가서 보지 그러나?"





신 짜오는 올베르를 따라 걸어갔다. 네 명의 병사가 그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었다. 주둔지 안을 걸으며 신 짜오는 막사 내부를 들여다봤다. 군장을 싸는 병사들과 다음 작전을 세우는 지휘관들의 모습이 보였다. 여기서 멀지 않은 곳에서 녹서스군과의 또 다른 전투가 곧 벌어질 거라는 소문이 돌았다. 이 병사들도 그곳으로 향할 것인가? 부정을 바로잡기 위해 혼란의 흔적을 쫓아 행군할 것인가? 신 짜오는 궁금했다. 그의 눈에 데마시아인들은 '힘'보다 더 고귀하고 숭고한 목적을 위해 싸우는 것처럼 보였다.

신 짜오는 뚜렷한 신념을 갖고 목숨을 바치는 삶은 과연 어떨지 상상해봤다. 투기장에서 그의 목숨은 아무런 가치도 없었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국왕을 알현할 자격까지 얻었다.

"자네가 마지막인 것 같군." 올베르가 멈춰 서더니 앞을 가리키며 말했다.

올베르의 손이 가리키는 곳에는 일반적인 막사보다 더 큰 막사가 있었다. 밝은 감청색 깃발이 지붕을 장식하고 있었으며, 막사 입구 앞에는 번쩍이는 갑옷으로 무장한 병사들이 두 줄로 나란히 줄지어 서 있었다. 그때 목덜미와 얼굴에 녹서스를 상징하는 문신을 새긴 한 남자가 작은 주머니를 들고 막사에서 나왔다. 남자는 병사 한 명의 안내를 받고 자리를 뜰 때까지 쉴 새 없이 고개를 조아렸다. 그리고 다른 병사가 순식간에 그 빈자리를 채웠다.

"국왕 폐하의 막사라네." 올베르가 말했다. "우리는 여기서 기다릴 테니 들어가자마자 무릎을 꿇고 폐하께서 하사하시는 선물을 받게. 그런 다음 우리가 자네를 데리고 나오겠네."

올베르는 미소지으며 덧붙였다. "폐하께서 말씀하셨지. 누구든 자신과 마주하는 순간 자유의 몸이 될 것이라고. 그래도 혼자 나갈 수는 없어. 이 주둔지는 크라운가드 대장님 지휘하에 있거든. 적군 전투병이 혼자 돌아다닐 수 없다는 뜻이지. 칼스테드를 완전히 뜰 때까지 말이야."

신 짜오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막사로 들어갔다.

"국왕 폐하께서 비세로를 환영하신다!"

낮고 엄숙한 목소리가 막사 안에 울렸다. 신 짜오는 앞으로 걸어가 오른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바닥에 깔린 천에는 날개 달린 기사들과 투구를 쓴 전사들이 수놓아져 있었다.

"고개를 들게." 조금 전과는 다른 목소리였다. 신 짜오는 고개를 들어 목소리의 주인을 바라봤다. 높이 솟구친 떡갈나무 의자에 신 짜오보다 그리 나이가 많아 보이지 않는 한 남자가 앉아 있었다. 까만 징이 박힌 번쩍이는 황금 갑옷을 입고 있는 남자의 머리 위로 보석이 장식된 왕관이 보였다. 그의 오른쪽에는 맹수의 이빨만큼이나 날카로운 거대한 강철 창이 세워져 있었다.

'이자가 데마시아의 국왕이군.' 국왕을 마주한 신 짜오는 곧 그가 내뿜는 위풍당당한 패기를 느꼈다. 그는 신 짜오의 예상과 달리 늠름한 풍채를 자랑했다.

국왕의 왼쪽에 크라운가드 검대장이 처음 봤을 때와 같이 엄숙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오른쪽에는 왕가의 의복을 차려입은 어린 소년이 보였다. 떡갈나무 의자 앞으로 가죽 장화를 신은 소년의 자그마한 발이 삐져나와 있었다. 소년의 곧게 뻗은 콧날과 각진 턱선은 국왕의 얼굴을 쏙 빼닮은 듯했다. 이들의 양쪽 끝에는 창을 든 친위대 병사 두 명이 서 있었다.

"비세로라, 참 특이한 이름이군." 자르반 3세가 말했다. "어디서 딴 이름인가?"

신 짜오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고개를 숙였다.

"폐하의 질문에 대답해라." 검대장이 말했다.

"괜찮네, 티아나." 국왕이 손을 저으며 말했다. "근래에 일어난 일 때문에 충격이 컸을걸세. 마음을 추스를 시간을 줘야 하지 않겠나?"

검대장은 말을 하려다 말고 못마땅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제 고향을 잊지 않기 위한 이름입니다." 신 짜오가 대답했다.

"그런가?" 국왕이 흥미로운 듯 말했다. "나는 녹서스에 관해 많이 연구했지만, 비세로라는 지명은 들어 보지 못했는데."

"지명이라기보다 기억입니다. 비록 녹서스에서 그 의미가 바뀌긴 했지만 말이죠."

"그렇군." 국왕은 왕자를 힐끗 바라보며 덧붙였다. "어릴 적 추억이란 참—"

"비세로는 제 본명이 아닙니다."

"감히 폐하의 말씀을 끊다니!" 검대장이 칼자루에 손을 올리며 소리쳤다.

신 짜오는 고개를 숙였다. 순간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야말로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소리였다. 그리고 다시 자르반 3세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오늘 티아나를 이렇게 화나게 만든 건 자네가 처음이군. 이번 전투는 티아나가 불굴의 선봉대 지휘관으로서 처음으로 치른 전투였다네. 전투라고 하기도 민망한 수준이었지만... 그렇지 않나?"

국왕은 왕자의 어깨를 토닥였다. 왕자는 아무 말도 없이 자신의 아버지를 주의 깊게 바라봤다. "아직 본명이 밝혀지지 않은 비세로여, 자네의 이야기가 듣고 싶군."

신 짜오는 시선을 내린 채 호흡을 가다듬었다. "제 본래 이름은 신 짜오입니다. 부모님께서 지어 주신 이름이죠. 부모님은 어릴 때 이후로 뵙지 못했습니다. 아직 살아계실 수도 있고, 아니면 이미 돌아가셨을 수도 있겠죠."

신 짜오는 침을 삼키고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 "제가 태어난 곳은 최초의 땅에 있는 라이콘이라는 해안 마을입니다. 이곳에서는 최초의 땅을 아이오니아라고 부르더군요. 저는 '비세로'라는 낚싯배에서 어른들의 심부름을 하며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그때의 제 삶은 소박하고 평화로웠습니다... 녹서스 사략선에 나포되기 전까지는 말이죠."

신 짜오가 잠시 눈을 감는 동안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우리는 상대가 안 됐습니다. 결국 저는 놈들의 포로가 되어 수개월에 걸친 항해 끝에 녹서스에 도착했습니다. 녹서스는... 거대했고 억압적이었으며 거칠었습니다. 고향 땅을 수놓았던 아름다운 자연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 말에 다른 사람들이 낮게 동조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저는 살아남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누가 제 상황이 됐더라도 그랬겠지요. 부끄러운 일도 많이 했습니다. 그 때문에 힘 있는 자들의 눈에 들게 되었습니다. 제 힘을 알아본 그들은 저를 검투사로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검투사 비세로가 탄생하게 된 것이죠."

신 짜오는 한숨을 쉬고 이야기를 계속 이어 나갔다. 그의 목소리는 한층 부드러워져 있었다. "저는 많은 사람을 죽였습니다. 그들의 본명도 모른 채 말이죠. 죽이면 죽일수록 관중들은 더 크게 제 이름을 연호했고, 제 주인들의 주머니는 점점 두둑해졌습니다. 저는 그렇게 관중들을 열광시키며 죽을 때까지 투기장에서 싸우게 되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녹서스가 주인들에게 투기장과는 비교도 안 되는 금화를 제안하면서 그 생활도 끝이 났습니다."

신 짜오의 어깨가 축 처졌다. "그렇게 저는 이곳에 오게 됐습니다. 그 뒷이야기는 다 아실 겁니다."

자르반 3세는 말이 없었다. 모두가 국왕이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마침내 국왕이 입을 열었다. "힘겨운 삶을 살았군." 그는 왕자를 힐끗 바라봤다가 다시 신 짜오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얘기해 줘서 고맙네. 자네를 녹서스의 속박으로부터 풀어준 것은 나를 비롯한 모든 데마시아인들의 기쁨이라네."

국왕이 고개를 끄덕이자 친위대 병사 한 명이 금화가 든 주머니를 신 짜오 앞에 내려놓았다.

"자르반 3세 국왕 폐하께서 하사하시는 선물이다." 티아나가 말했다. "그 주머니에는 일주일간 여행하기에 충분한 금화가 들어있다. 너희는 데마시아 왕국의 영토를 침범하는 우를 범했지만, 그럼에도 국왕 폐하께서는 너희에게 두 번째 기회를 내리셨다. 잘 활용하도록."

신 짜오는 주머니를 슬쩍 바라봤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렇게 간단하게 끝날 일인가? 돈을 들고 나가서 '평온'을 찾으라는 말인가? 그는 방금 태어나서 처음으로 솔직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그것도 손짓 하나로 자신의 목숨을 끝장낼 수 있는 낯선 남자 앞에서.

하지만 이 낯선 남자는 신 짜오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신 짜오에게 그는 더 이상 낯선 남자가 아니었다.

'내 삶에 더 이상 평온은 없겠지만, 삶의 이유를 찾을 수는 있지 않을까?'

"이제 일어나지." 티아나가 출구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신 짜오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부탁 하나 드려도 되겠습니까?"

"말하게." 국왕이 대답했다.

"저를 폐하의 친위대로 받아주십시오."

"어림없는 소리!" 티아나가 소리쳤다. 양쪽에 서 있던 친위대원들은 그 말에 동조라도 하듯 창 자루로 땅을 내리쳤다.

국왕은 가볍게 웃더니 티아나를 보면서 말했다. "재미있는 제안이로군."

"폐하, 설마 저자를—" 티아나가 입을 열자 국왕은 또다시 손을 들어 그녀의 말을 가로막았다.

"이야기라도 들어보세." 자르반 3세가 웃으며 말했다. "이유가 궁금하군."

신 짜오는 고개를 들어 국왕을 마주 봤다. "저는 오늘 태어나서 처음으로 폐하를 통해 자비와 명예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녹서스에서 다른 사람들을 위해 싸우면서 '승리하는 자는 살아남고, 패배하는 자는 죽는다'라는 두 가지 진리만 믿고 살아왔습니다. 투기장에서 쓰러지는 전사들이나, 연이은 패배 이후에 자취를 감추는 이들을 보며 배운 진리였습니다. 하지만 데마시아인들이 싸우는 이유는 달랐습니다. 그들에겐 더 중요한 뭔가가 있었습니다."

막사가 바람에 흔들렸다. 왕자의 작은 가죽 장화가 이리저리 움직였다. 신 짜오는 목을 가다듬었다.

"뜻하지 않게 저지른 실수를 후회하며 남은 생을 살 바에야 명예를 위해 싸우다 죽고 싶습니다."

자르반 3세는 몸을 앞으로 숙였다. 다른 사람들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자네는 달변이로군. 내 참모들보다도 뛰어나겠어. 그렇지만 내 친위대가 되려면 몇 년, 어쩌면 수십 년 동안 훈련을 받아야 하네. 자네의 능력을 어떻게 증명할 텐가?"

신 짜오는 국왕과 왕자, 그리고 크라운가드 검대장을 차례로 훑어봤다. 그리고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아니면 어떤 행동을 보여야 할지 고민했다. 그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가?

그는 선택할 필요가 없었다.

선택은 운명의 몫이기 때문에.

신 짜오는 금화가 든 주머니를 집어서 티아나의 얼굴을 향해 던졌다. 기습 공격에 당황한 티아나가 자세를 다잡는 동안, 신 짜오는 왼쪽에 서 있던 친위대원의 다리를 걸어 넘어뜨렸다. 그리고 창을 집어 들고 다른 친위대원의 다리를 향해 휘둘렀다. 마치 투기장으로 돌아온 것처럼, 신 짜오의 몸은 본능에 따라 물 흐르듯이 움직였다. 그는 창을 빙그르르 돌리고는 창 자루 끝을 자르반 3세의 목덜미에 갖다 댔다.

왕자는 기겁하며 거친 호흡을 내뱉었고, 몸을 추스른 친위대원들은 검을 뽑아 든 티아나와 함께 신 짜오 쪽으로 달려들었다.

신 짜오는 무릎을 꿇으며 창을 바닥에 사뿐히 내려놓았다. 그리고 티아나를 향해 목덜미를 들어 보였다. 날카로운 강철 칼날이 살갗에 닿는 느낌이 들었다.

막사 안은 긴장감으로 가득했고, 모두의 시선이 신 짜오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신 짜오는 평온하게 눈을 감고 그들의 처분을 기다렸다.

국왕은 옷매무새를 바로잡았다. "다들 물러서게. 전에 아버님께서 많은 인재가 녹서스의 투기장에서 낭비되고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그게 사실이었군."

"폐하!" 티아나가 소리쳤다. "저놈은 폐하를 해치려고 했습니다!"

"티아나, 아니지." 국왕이 대답했다. "내가 어떻게 '당할 수 있는지' 보여준 거라네. 내가 신임하는 친위대가 옆에 있었는데도 말이야."

"용서하십시오." 신 짜오는 마치 잔잔한 물결처럼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폐하께 제 실력을 증명하려면 이 방법밖에 없었습니다."

"증명? 내가 보기엔 오히려 이들이 자네에게 배워야 할 것 같은데?"

"전쟁 포로 따위가 국왕 친위대의 이름을 더럽히게 둘 수 없습니다!" 티아나가 소리쳤다.

"내 앞에 온 순간부터 이 사람은 포로가 아니었네." 국왕은 의자에서 일어섰다. "데마시아는 오래전 세상의 악으로부터 도망친 선한 사람들이 세운 왕국이네. 이 남자의 인생 역정은 위대한 오를론과 그 추종자들의 이야기를 떠오르게 하는군. 아버님께서 내게 해주셨던 그 이야기 말일세."

국왕은 놀란 표정으로 돌아보는 왕자를 바라봤다. "아들아, 너는 내 인생의 행복이다. 너와 이 순간을 함께할 수 있어서 얼마나 기쁜지 너는 모를 것이다. 이제 알겠느냐? 우리가 먼저 왕국의 가치와 미덕을 믿고 받들면, 다른 이들도 우리와 뜻을 함께하게 된다는 것을."

"알겠습니다, 아버지." 왕자는 작지만 확신에 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국왕은 신 짜오의 앞으로 다가갔다. "신 짜오, 자네가 보여준 용기는 내 마음을 움직였고, 자네의 인생 이야기는 내게 감동을 줬네. 이런 기분은 정말 오랜만에 느껴보는군." 그러더니 몸을 숙여 신 짜오를 일으켜 세웠다. "비록 자네는 데마시아인으로 태어나진 않았지만, 나와 함께 왕국으로 돌아가 내 친위대로서 충성을 다할 기회를 주겠네."

신 짜오는 자신의 어깨를 잡는 국왕의 억센 손길을 느꼈다.

"이 기회를 가벼이 여기지 말게."

신 짜오는 자르반 3세와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 아주 오랜만에 물밀듯 밀려오는 기쁨을 느꼈다. 그 기쁨은 마치 낚싯배 '비세로'를 실어나르던 파도처럼 그의 몸을 적셨다.





칼스테드에서 북쪽으로 한참 떨어진 이곳에선 밤공기가 차가웠다. 위대한 도시 데마시아의 성벽을 보기까지는 약 일주일의 시간이 남아 있었다. 신 짜오는 생각에 잠긴 채 자신의 막사에서 걸어 나왔다. 입구 옆에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아직 안 자나?" 올베르가 말했다.

"산책 좀 다녀오겠네. 오래 걸리지 않을 거야."

혼자서 야영지를 걸으며 신 짜오는 새 동료들의 모습을 지켜봤다. 병사들을 돌보며 그들의 안전을 책임지는 당번병들이었다. 잘 훈련된 그들의 모습에 신 짜오는 미소를 지었다. 그는 모퉁이를 돌면서 초승달을 올려다봤다. 그 순간, 누군가 갑자기 그를 몸을 잡아당겼다.

신 짜오는 쓰러지면서 바닥에 강하게 부딪혔다.

눈을 껌뻑이며 정신을 차린 신 짜오는 자신이 어두컴컴한 막사 안으로 끌려들어 왔음을 깨달았다. 위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검대장과 두꺼운 판금 갑옷을 입은 병사들이 보였다.

"폐하의 마음을 얻었을지는 모르지만, 나는 네놈이 데마시아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티아나가 말했다.

신 짜오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티아나는 칼을 뽑아 들었다. 그러자 나머지 병사들도 마치 우두머리 암사자를 따르는 사자 무리처럼 똑같이 칼을 뽑았다.

"지켜보겠어." 티아나가 경고했다. "네놈이 있는 동안 폐하께 '무슨 일'이라도 생기는 날엔—"

신 짜오는 두 손으로 티아나의 칼을 꽉 쥐더니 말했다. "이걸 내 맹세로 여기시오."

티아나가 놀란 표정으로 지켜보는 동안, 신 짜오는 칼끝을 자신의 목에 갖다 댔다.

"폐하께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그땐 날 죽여도 좋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