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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용


머릿속에 경고음이 울려 퍼진다. 깨질 듯 아프다. 세상이 흔들린다. 위험한 상황을 알리는 소리에도 움직일 수 없다. 몸이 내 마음처럼 움직이지 않는다.

전장의 함성, 기계의 마찰음.

잘려나간 팔이 스파크를 튀기며 나뒹군다. 팔은 표피가 벗겨져그 속을 가득 채운 전선과 쇠붙이들이 밖으로 드러났다. 거무죽죽한 액체가 바닥을 흥건히 적신다. 기름 냄새가 희미하게 느껴진다. 낯선 장면. 위화감이 느껴졌지만, 어디선가 본 듯한 기분이 든다.

 

2년전 하나무라 천수각.

 

정갈하게 깔린 다다미. 나는 어렸을 때부터 다다미를 밟는 느낌이좋았다. 푹신한 느낌, 시원한 향, 정돈된 모습. 나는 다다미 위에서 태어나 다다미 위에서 자랐다.

천수각의 바닥은 다다미로 가득 차 있다. 천수각의 도코노마에는시마다 일족의 가훈인 비룡재천이 떡하니 걸려있었다.

용과 같은 지위에 서다.’

일본에 있어 시마다 일족의 지위가 높은 것은 사실이다. 그 누구도건드릴 수 없다. 하지만 그 지위는 무기와 마약으로 얻은 것일 뿐이다.그렇게 얻은 지위가 용과 같을 리가 없다. 용과 같은 힘이 있지만, 용과 같은 마음은 없으니. 시마다 일족에게 있어 이 가훈은 허울일뿐이다.

단검을 꺼내 가훈이 적힌 두루마리의 끈을 잘라냈다. ‘비룡재천은 힘없이 도코노마 위에 떨어졌다.

꼴 좋네.”

미리 준비해둔 두루마리를 가훈으로 걸어놓았다.

겐지.”

한조의 목소리다. 뒤를 돌아보자 한조가 긴 머리를 흩날리며 서있었다.

내가 가훈을 좀 바꿔봤어. 어때? 어울리지 않아?”

너는 항상 우리 일족에게 방해만 되는 말과 행동을 해왔지.”

한조가 내 말을 무시하며 말했다.

우리라니. 나를같은 일족으로 묶지 말아 줄래?”

아버지가 너를 지켜줬지만, 이젠널 지켜줄 사람은 아무도 없어.”

한조가 조용히 말했다. 머리가 뜨거워지는 게 느껴졌다.

무슨 뜻이야.”

너는 이제 혼자야.”

설마. 네 녀석이아버지를나 때문에 죽였다는 거야?”

멍청하기 짝이 없구나. 아직도모르겠나?” 한조의 눈이 차갑게 빛났다. “아버지는 너 때문에죽었어.”

관자놀이가 불타는 듯 뜨겁다. 어금니가 깨질 듯 아프다. 심장이 터질 듯 뛴다.

저 녀석이 아버지를 죽였다.

단검을 들고 한조에게 달려들었다. 한조는 그저 가만히 서서 나를바라보기만 했다. 사정거리에 들어오는 순간 그의 목을 향해 힘껏 휘둘렀다.

 

어렸을 때부터 한 번도 한조에게 진 적이 없다. 대련을 해도, 경주를 해도, 시험을 치러도 항상 나의 승리였다. 나는 그보다 항상 앞섰다. 내가 질 리가 없다. 그렇게 생각했다.

 

한조는 그의 단검으로 손쉽게 막아섰다.

자만하지마라. 겐지.”

그의 눈에 생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내가 아닌 아주 멀고깊은 곳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그의 눈에 비친 세상은 증오와 경멸로 가득했다.

내가 알던 한조와 다르다.

어금니를 물고 단검을 미친 듯이 휘둘렀지만, 그는 모든 공격을손쉽게 막았다.

순간적으로 한조의 왼손바닥이 내 가슴을 밀쳐냈다. 뒤로 나뒹굴었다. 바로 일어나는 순간 눈앞에 한조가 단검을 휘둘렀다. 내 단검으로그의 공격을 막아냈다.

단검을 통해 한조의 힘이 느껴졌다.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무게감이었다. 발을 딛고 있는 다다미의 짚풀이 뜯어지며 뒤로 밀려났다. 검을 쥐고있는 오른팔에 힘줄이 미친 듯이 튀어 올랐다. 한조는 재빠르게 자세를 바꿔 내 복부로 공격했다. 뒤로 크게 물러나며 공격을 피하자 한조는 곧바로 내 어깨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피할 수 없었다. 단검으로 그의 공격을 쳐내려 했지만 그의 힘을견딜 수 없었다. 내 검이 손 밖으로 미끄러져 나갔다. 한조는기회를 놓치지 않고 단검을 휘둘렀다.

날카로운 쇠붙이가 얼굴을 사선으로 그었다.

표창을 꺼내 한조에게 던지며 뒤로 크게 물러났다. 얼굴의 통증이서서히 느껴졌다. 피가 흘러내며 내 오른쪽 눈을 가두었다. 피가바닥에 떨어지며 다다미를 적셨다. 다다미의 짚은 내가 흘린 피를 빠르게 흡수했다.

왼쪽 눈만 뜬 채 한조를 향해 표창을 던졌다. 한조는 단검으로표창을 쳐내더니 오른편 통로를 통해 천수각의 무대로 빠져나갔다. 오른쪽 발목에 묵직한 통증이 느껴졌다. 한조의 공격을 막을 때 무리가 된듯하다. 고통에 울부짖는 발이 한스러웠다. 나는 고통을 없애기 위해 아픈 발을 바닥에 힘껏 굴렀다.

 

이곳은 아버지가 기요미즈데라의 무대를 보고 감명을 받아 만들어졌다. 우리는시마다의 무대라고 불렀다. 구름 곁에 후지산이 보인다. 후지산아래, 대도시와 도시철도가 보인다. 따스한 바람이 불어온다. 아버지가 계셨으면 이 바람을 가만히 앉아 만끽했을텐데... 한조는나와 거리를 둔 곳에서 후지산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긴 머리가 흩날렸다. 그의 손에 쥔 단검이 검붉은 피를 머금고 있었다.

끝이구나.”

한조가 조용히 말했다.

나도 같은 생각이야.”

등의 용검을 오른손으로 살짝 움켜쥐었다.

우리는 생각이 같았던 적이 없어. 처음부터, 끝까지.”

한조가 나를 돌아보았다. 그의 눈은 여전히 내가 아닌 아주 멀고깊은 곳을 보고 있었다. 그곳에는 아까와는 다르게 증오와 경멸이 아닌 뭔가 다른 것이 느껴졌다.

단 한 번이라도 같았으면한조가그의 용검을 움켜쥐며 말했다. “좋았을지도.”

나는 용검을 힘껏 뽑아 들었다. 힘이 가슴속부터 끓어오르는 게느껴졌다. 나의 오른팔에 용이 머리부터 모습을 드러내며 검을 타고 올랐다. 녹색의 용이 검을 둘러 감았고 용검은 녹색 빛으로 밝게 빛났다.

한조 역시 용검을 천천히 빼 들었다. 그리고 그의 용이 모습을드러냈다.

 

무언가 잘못됐다.

 

한조의 용은 푸른빛이다. 푸른 용이 그에게 힘을 주고 그의 용검을푸른빛으로 빛나게 해야한다.

지금 그의 용은, 붉은색이다.

푸른빛이 아닌, 붉은빛도 아닌,붉은색이다.

마치 분노에 이글거리는 듯 붉은 용이 나를 집어삼킬 듯 노려보았다. 공포가물밀 듯 밀려왔다. 얼굴과 발목, 오른팔이 도망치라고 호소하듯통증이 밀려왔다. 손이 떨린다. 무섭다.

나는 애써 정신을 차리며 용검을 세게 움켜쥐었다.

나와 한조는 서로를 향해 달려들었다.

용검이 맞부딪쳤다. 나의 용과 붉은 용이 굉음을 내지르며 서로휘감았다. 몸통을 조르고 이빨을 드러내며 노려보았다.

힘겨루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뒤로 조금씩 밀려났다. 양팔이 가슴으로 조금씩 움츠러드렀고 그런만큼 한조의 용검이 나에게 점점 다가왔다. 붉은 용이 나의 용을 더더욱 짓이겨냈다. 온몸에 짓눌리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검으로 전해지는 힘 때문에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이미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한조를 이기지 못한다는 사실을.

 

한조가 힘을 더 가하자 내 용검이 나의 허리춤까지 기울었다. 한조는검을 들어 올려 내 검을 강하게 쳐냈다. 손가락에 힘이 풀렸다. 내용검이 사마다의 무대 바닥 위에 힘없이 떨어졌다. 붉은 용이 나의 용을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등으로 통증이 몰려왔다.

 

한조의 눈에 아주 멀고 깊은 곳이 보였다. 그곳은 증오와 경멸의세계가 아니었다. 그곳은...

 

한조의 용검이 내 오른팔과 몸통을 크게 베었다. 오른팔 살 속으로따스한 바람이 불어 들어왔다. 시마다의 무대 바닥에 힘없이 고꾸라졌다.

 

잘려나간 오른팔이 바깥으로 꺾인 채 내 눈앞에 나뒹군다. 내팔을 채우던 뼈와 근육이 밖으로 드러났다. 거무죽죽한 피가 바닥을 흥건히 적신다. 피비린내가 희미하게 느껴진다. 그래이 장면이다.

붉은 용이 내 용의 몸통을 송곳니로 무는 모습이 어렴풋이...

 

나는 새로운 생명을 얻었다. 심장은 피가 아닌 기름을 옮기고, 뼈 대신 쇠붙이가 움직이며, 근육 대신 전선으로 가득 차 있다. 치료가 아닌 수리를 받는다. 나는 그날 다시 태어났지만, 그날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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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전 군대를 가기 전에 오버워치가 출시되었었는데 그 때 정말 재밌게 했던 기억이 있었습니다.

게임을 할 때 게임의 배경이나 스토리에 관심이 많았는데 하나무라에 적혀있는 시마다 일족의 가훈 '용두사미'가 적혀있었는데 

워낙 좋아하던 게임이라 게임에 조그하만 흠집처럼 보이더라구요.

그래서 '이야기를 통해 자연스럽게 만들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되었고

전역을 하고 난 후 글을 적게 되네요.


(칠전팔기 라는 가훈이 있는것 같네요... 용과 관련된 사자성어로 비룡재천이 어울린다고 생각했는데...)


다들 팬아트로 그림을 그리거나 편집을 하던데 팬소설을 올려도 되는지 잘 모르겠네요.

문제가 되면 자삭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