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자료 수집하는 새에 벌써 3월이 끝나버렸네요. ㄷㄷ;;
사실 오늘 바르바로사 작전을 소개해드릴려했는데, 많은 분들이 왜 독일이 개전을 결심했는지 가 지난 글에 없었어서 잘 모르시겠다는 의견이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개전이유를 소개하는 이 글을 작성한 뒤(너무 길어서 같이 올리면.. 스압이;;) 이어서 바로 바르바로사 작전을 연재할테니 읽으시면서 기다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다!!!
자 그럼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보죠

이것이 1940~41년도 독소전 개전 전의 전황도입니다.
폴란드 침공을 성공시킨 뒤 만슈타인의 천재적인 낫질 작전과 프랑스군 수뇌부의 삽질, 1차대전의 인명피해로 전쟁에 대해 학을 떼버린 프랑스 지도부의 항전의지 결여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되어 프랑스까지 점령하여 영국을 제외하곤 유럽을 석권한 독일은 강한 자만심에 도취 되 있었습니다.
뒤 이어 영국을 점령하려 했으나 그 당시 전례없던 공중전(이것이 배틀 오브 브리튼, 즉 영국 본토 항공전)에서 독일은 작전 취소일인 10월 31일까지 무려 2천 대에 가까운 항공기를 잃고 영국 침략을 단념해야 했습니다. 
육-해군의 입체적인 작전이라 할 만했던 베저뤼붕 작전(Operation Weserübung, 덴마크와 노르웨이 점령작전) 과정에서 해군이 엄청난 타격을 입는 바람에 영국 본토로 쳐들어갈 심산이었던 바다사자 작전까지 취소되고 말았죠. 영국도 1,663대의 항공기를 잃는 등 피해가 막심했습니다만.
체스로 치면 룩이니 나이트니 하는 상대의 핵심 기물을 잘 잡아놓고 체크메이트를 두는 게 아닌 스테일메이트(비김수를 말합니다)를 당하게 생겼으니, 히틀러 본인의 심기도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겠죠. 그리고 이 영국의 기를 죽이기 위해 선택된 것이 엉뚱하게도 소련이라는 겁니다. 황당한 소리죠.
 왜 예전에 굽시니스트가 연재했던 〈본격 제2차 세계대전 만화〉에서의 그 장면 기억하시죠? 도조 히데키가 작전 입안하는 장면 말입니다. 그 작전의 골자가 이렇습니다. 표현을 그대로 가져오자면, "내가 귀싸대기를 존나 맛깔나게 후리면 감동먹어서 나랑 협상하겠지." 거의 이것과 다름없는 개소리로 들릴 지경이죠. 근데 그게 사실이었다는 겁니다.... 
제 뇌피셜이 아니라, <히틀러 최고사령부 1933~1945년>(p. 223)에서 제프리 메가기가 영국을 단념시키기 위한 목표로 독일군이 선택한 것이 소련이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심지어 소련 자신도 겨울전쟁에서의 연이은 삽질로 독일이 자신들을 만만하게 보는데 아주 혁혁한(?)공을 세우게 됩니다.

1940년 6월에, 소련은 순서대로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를 점령합니다. 발트 3국이 소련의 손아귀에 넘어간 것은 이 때의 일입니다. 물론 점령지 주민들의 의사 따위는 깡그리 무시한 짓이었고, 이 때문에 훗날 독소전이 벌어질 때 독일군을 해방자로 환영하게 되는 한 원인이 됩니다. 전쟁이 끝나고 한참이 지나서야 공개되었던 카틴 학살(폴란드의 지식층 및 장교 등을 체포하여 카틴 숲에서 살인한 것으로, NKVD의 짓입니다)과 마찬가지로 수많은 사람들이 NKVD에 의해 처형 또는 체포, 시베리아 강제 수용소 수감 등을 당하게 되었죠. 
강제 수용소로 이송된 인원만 그 작은 나라에서 무려 12만 7천 명으로 추산된다 하니(<스탈린과 히틀러의 전쟁>, 리처드 오버리, p. 91) 알 만하죠.

여하간 소련은 이렇게 대놓고 영토 확장 및 발트 해로 진출할 의사를 보였습니다. 게다가 독일은 심정적으로는 핀란드와 상당히 가까운 축이었고(유감스럽지만 제가 수집한 자료에선 속시원하게 설명해준 자료는 없더군요. 당시 시대상이라는 것 정도로 대신하도록하죠.), 따라서 이래저래 독일은 소련의 확장이 찜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뭐 주저리주저리 말이 많았는데 1줄요약하자면 히틀러의 심기를 소련의 대외팽착정책이 심각하게 건드렸다고 할 수 있죠.( 당시 소련 정부의 정책은 전 세계의 공산화였습니다. 그것이 무력을 통한 강제던 자발적 움직임이건 말이죠.)

게다가 당시 독일군 수뇌부의 하늘을 찌르다 못해 태양까지 닿아버린 자신감도 한 몫 단단히 했는데,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당시 지역강국이던 폴란드와 전 세계 최강이라 불릴 프랑스 육군을 털어버린 뒤라(우리나라로 치면 일본을 이긴 뒤 중국을 털어 영토 일부를 취득했달까요?) '우리가 군사적으로 뭘 하려고 하면 막을 자 따윈 없다'는 자신감과 낙관주의가 수뇌부 전체에 팽배해 있었습니다.
 더군다나 겨울전쟁에서의 소련의 삽질을 보았으니, 소련군이 툭 치면 넘어갈 거라고 믿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죠. 서부 전선에 비하면 거의 '도상연습'이나 진배없는 수준의 전쟁이 될 것이라고 다들 예상하고 있었습니다(<히틀러 최고사령부 1933~1945년>, 제프리 메가기, p. 226). 아주 간단하게 한 줄로 줄이면, 간땡이가 제대로 부은 거죠.

아이러니컬하게도, 독일군에게 있어 대선배나 다름없는 클라우제비츠(전쟁론의 저자)는 일찍이 이렇게 경고한 바 있었습니다.

"막연한 느낌이나 불확실한 상상만으로 공격과 기동만이 전쟁의 모든 것이며, 머리 위로 긴 칼을 휘두르며 전방으로 돌진하는 기병의 모습을 전쟁 양상의 전부라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중대한 오류가 아닐 수 없다." -<전격전의 전설>, 칼 하인츠 프리저, p. 552

게다가 여태까지의 자료들이 간과 한 사실은 독일 수뇌부가 자신들의 역량을 초과한 전략적 목표를 고작(?) 일개 집단군에게 지시하는 경우 자주, 아니 항상 있어왔습니다. 이게 뭔 소리냐구요?

서부 전선에서 독일은 군대를 세 개의 집단군(A, B, C)로 나눴습니다. A집단군은 스당을 돌파하여 적의 후방을 점령, 포위하는 "망치"의 역할을 맡았고, B집단군은 적을 벨기에로 유인하는 "모루"의 역할을 맡았으며(더 많은 적을 끌어들이기 위해 공수사단까지 동원될 정도였습니다), C집단군은 마지노 전선의 적군에게 허세를 부림으로써 적의 발을 묶어 취약한 A집단군의 측면을 간접적으로 보호하는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이게 성공적으로 돌아간 게 그 유명한 지헬슈니트, 폰 만슈타인의 천재적인 역작이죠.

그런데, 보시면 아시겠지만 A, B, C집단군의 목표는 작전술적인 차원이고, 전략적인 차원, 다시 말해서 경제와 정치가 관여하는 레벨의, 국가와 국가간의 큰 그림의 범주에 넣기에는 분명히(아주 많이!) 무리가 있습니다. 헌데, 바르바로사 작전을 입안하면서 각 집단군의 목표는 다음과 같이 정해졌습니다. 엄청 간략하게 줄이면.

북부 집단군 - 레닌그라드를 점령한다.
중부 집단군 - 모스크바를 점령한다.
남부 집단군 - 하리코프(Kharkov, 소련 제2의 공업도시, 現 우크라이나의 하르키우)를 점령한다.
(이놈들 세계지도도 안보고 작전을 수립하는 걸까요?)

이건 전략적 목표입니다. 전술적이나 작전술적인 차원의 문제가 아닌, 명백한 전략적인 문제죠. 기껏 도시라고 치부해 버릴 수도 있는 거 아냐? 하실 분들도 계지겠지만, 이들 도시가 단순한 도시가 아니라는 게 문제입니다. 
레닌그라드는 소련 해군이 발트 해로 나갈 수 있는 기지이자 구 러시아 제국의 수도라는 상징성을 가지고 있었고, 모스크바야 말할 필요가 없으며, 하리코프를 위시한 우크라이나는 엄청난 곡창 지대로써 독일이 사용할 식량자원의 근원이 됩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한 번에 다 가질 수 있으리라고 독일 수뇌부는 믿었습니다. 대체 왜 이들은 전략적인 목표를 집단군에게 하달한 것이었을까요?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독일군의 소련에 대한 방심과, 적의 주력을 섬멸하면 전략적인 목표는 쉽게 달성된다고 보는 독일군의 교리 때문이었습니다. 전략적인 목표로 보이는 것들은, 실은 적의 주력을 섬멸해버린 후 그에 따라 예상되는 전과 쪽에 가깝습니다. 쉽게 말해서, 적의 주력을 섬멸하고 얻을 수 있으리라 예상되는 게 터무니없이 컸기 때문에 전략적인 목표가 하달된 것으로 보이는 착시효과를 가져온 것이죠. 그리고 그 모든 것을 한 방에 가질 수 있는 역량이 있다고 스스로를 판단했기 때문에 별 반대 없이 전쟁에 돌입한 것이구요.(이건 프로이센 때 부터 독일군에 내려온 전통이였습니다. 쉽게 말해 "우리가 니네 주력을 없앴는데 우리 군대랑 싸울 수 있어? 이제 니네는 우리가 탈탈탈 털기만 하면되!"라고나 할까요.)

동원된 규모가 압도적이었기에 집단군 하나가 전략적 레벨의 목표를 설정할 수 있었다  생각하실 수도 있겠습니다만, 이런 해석은 실제 프랑스 전역과 바르바로사 작전에 동원된 독일군의 전력(각각 335만 명, 380만 명)을 비교해 볼 때 명백히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다시 말해서, 독일군은 분명히 서부 전선에서는 기껏해야 작전술적 차원의 목표를 집단군에 하달했지만, 동부 전선 개전시에는 명백히 전략적 차원으로 여겨질 정도의 목표를 각 집단군에 하달했고, 또한 달성이 가능하리라고 믿었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명령 자체는, 적 부대의 섬멸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습니다.(<독소전쟁사>, 데이비드 글랜츠, p. 59) 
히틀러 본인이 소련군의 기갑 전력을 섬멸하는 것과 모스크바의 점령을 놓고 비교했을 때 "모스크바는 별다른 가치가 없다"고 일축해버릴 정도였죠. 독일군은 최전방의 소련군을 다 섬멸해 버리면 알아서 적이 무너져내릴 것이라고 과신하고 있었고, 그 때문에 초장에 적을 일거에 섬멸해 버리면 전략적인 목표를 달성하는 데에는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라고 오판한 것입니다.(물론 아주 단단히 착각한 거였지만)

방금 앞에서 간략하게 설명했지만, 독일군의 교리는 철저하게 적 병력의 물리적 섬멸에 맞추어져 있었습니다. 
적의 부대를 섬멸하면 동원 능력이 부족하고 전선에 구멍이 뚫린 적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고, 설령 그 구멍을 적이 메꿀 능력이 있더라도 거기까지는 한참 시간이 걸릴 테니 그 전에 충분히 전과를 크게 올릴 수 있다는 것이 독일군 교리의 기본입니다. 독일군은 거의 병적이라 여겨질 정도(정말 이것 때문에 놓치거나 잃어버린게 1~2개가 아니죠)로 적 전투력의 물리적 섬멸을 강조하고 강조하고 또 강조해 왔습니다. 슐리펜 작전이 그랬고, 황색 작전과 지헬슈니트 계획이 그랬으며, 바르바로사 작전 역시 마찬가지였죠.

근데 여기에는 전제조건이 따릅니다. 일단 섬멸되는 것이 적의 주력이어야 하고, 적이 군대를 재건하는 것이 불가능하거나 설령 가능하더라도 다시 동등한 위치로 일어서기는 힘든 정도의 엄청난 타격을 입어야 합니다. 독일군이 제대로 오판한 것은 후자의 내용이었던 것이죠. 적의 병력이 손쉽게 섬멸 가능하고(여기까지는 작전 초기에는 어느 정도 옳기는 했습니다), 최전방의 적군을 섬멸해 버리면 더 이상 자신들을 방해할 수 있는 것은 없으리라 믿은 것이 바로 오산이었던 것입니다.

군사학이라던가 전략이라던가 그런 거 모르겠는 사람도 정신머리가 제대로 박혀있으면 작전이 뭔가 이상한데?란 낌새가 느껴지고 그게 피부로 와닿기 시작하면 그 즉시, 작전의 수정이나 중지를 건의하는 게 정상입니다. 
그러나 작전 수립 단계에서 이러한 작전계획의 수정, 다시 말해 레닌그라드, 모스크바, 하르키우로 대표되는 목표 중 어느 하나나 둘로 가용 병력을 집중하기를 수뇌진에서 줄기차게 주장했다는 이야기는 전혀 들은 바가 없습니다. 즉, 명백히 독일의 수뇌진은 소련을 얕보고 있었습니다.

<히틀러 최고사령부 1933~1945년>의 p. 237-238에 있는 내용이 이를 잘 설명해 주는 데, 이를 한 줄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놈이고 저놈이고 다 같이 소련을 얕보고 있었으니 다른 결론이 나올 수가 없지."

이 말이 갖는 의미는 생각보다 상당히 큽니다. 애초에 러시아 어를 알지도 못하고 소련에 대해 깜깜이 수준이라고 해야 할 판인 사람인데다가 정보 특기도 아니었던 장교에게 소련에 대한 정보 수집을 맡겼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독일군의 수뇌진이 소련을 얕보고 있었는가에 대한 증거라고 저자인 제프리 메가기는 지적합니다.

게다가 독일군은 소련군의 잠재력을 전혀 올바르게 평가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 탐욕의 끝, 사상 최대의 전쟁>에서 폴 콜리어를 위시한 9명의 저자들은 독일군의 국경 지대에 대한 적의 규모 예측은 비교적 정확했다고 이야기하고 있으나(예측 사단 147개 + 여단 33개, 실제 사단 170개, p. 577),
폴 콜리어와 제프리 메가기 공히 후방의 동원력에 대한 예측은 형편없는 수준이었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일례로 제프리 메가기가 지적한 바에 의하면, 독일 첩보부는 1941년 1월에 동원 가능한 병력을 200만 명으로 보고 있었지만, 실제로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은 그 때 이미 425만 명이었으며, 그나마도 전쟁이 발발한 6월 22일에는 이미 500만 명을 돌파하고 있었습니다(<히틀러 최고사령부 1933~1945년>, p. 244)

그렇다면 이 모든 책임, 다시 말해서 초반에 바르바로사 작전이 세운 지나치게 큰 계획을, 히틀러의 과도한 욕심(적어도 히틀러는 모스크바 방면으로의 진군과 우크라이나 점령이라는 두 가지 목표를 한꺼번에 모두 이루기를 바라고 있었습니다), 혹은 정보부의 잘못된 정보에 모든 것을 맡기고 그들을 비난해야 할까요? 회고록을 쓴 수많은 독일군 장성처럼? 안타깝지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물론 히틀러나 정보사령부의 책임이 없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몇 번이고 말씀드립니다만, 독일은 전체적으로 소련을 깔보고 있었고, 바로 이 점에서 어느 독일군 장성이라도 책임을 면할 수는 없습니다.

아, 각종 사료에서는(주로 독일군 장성들의 회고록)을 대강 둘러보면 독일군 장성들이 작전에 회의적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그건 <히틀러 최고사령부 1933~1945>의 제프리 메가기가 p. 225에서 신랄하게 디스를 퍼붓듯이, 
진실과 절반의 진실, 그리고 새빨간 거짓말이 뒤섞인 잡탕에 불과합니다. 
장성들이 가진 불만은 "영국과 전쟁 중인 마당에 굳이 우리를 건드리지는 않을 것으로 생각되는 소련을 상대로 불필요한 전쟁을 벌여서 군을 소모시킬 필요는 없다"는 쪽에 가까웠지, 그 누구도 실제로 전쟁이 개시되면 소련이 길게 버티리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나마도 볼셰비키를 없애야 할 것으로 생각하는 군 인사들은 굳이 소련을 친다는 작전계획에 반대할 어떠한 이유도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바르바로사 작전 수립자 프란츠 힐더 총참모장)

사실 소련군, 시대를 약간 거슬러 올라가면 제정 러시아군은 삽질(이라기 보단 지랄....)을 분명히 거듭하고 있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탄넨베르크 전투로 대표되는 어마어마한 참사가 벌어졌고, 그렇게 러시아가 깨지고 잠시 관심 밖에 있다가 러시아가 안방에서 일어난 혁명으로 망했기 때문에, (독일의 항복으로 휴지 조각이 되었습니다만) 혁명 정부를 수립한 레닌은 어마어마한 불평등 조약인(대충 폴란드, 벨라루스, 핀란드, 우크라이나 및 캅카스 일대를 포함한 어마어마한 영토에 상당 금액의 배상금까지 모조리 독일에게 넘겨준다는 내용의)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맺어야 했죠. 적백내전도 그렇고 폴란드-소련 전쟁도 그렇고 스페인 내전에서의 소련군도 그렇고 겨울전쟁에서(사실 이 경우는 독소전이랑 달리 대숙청이 이유의 전부라고 해도 좋습니다)의 대삽질도 그렇고 하여간 이래저래 소련군의 전투력에 의문이 많이 가는 것은 사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면모가 소련군의 전부는 아니었다는 게 문제였죠.

대표적으로 할힌골 전투가 있었습니다. 바로 이 전투에서 게오르기 주코프가 등판하여 멋지게 승리함으로써 숙청 대상자의 명단에서 제외된 바 있다는 이야기는 앞 글에서 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독일군은 이런 정보는, 즉 다시 말해서 자신들의 작전 진행에 차질이 될 만한 정보는, 모조리 의도적으로 무시해 버렸습니다. 예컨대 "극동의 병력들이 차출되어 동원되면 어쩌지?"에 대한 답은, "그럴 일 따위는 없음"(병ㅅㅣ....) 식이었죠.

더구나 독일의 소련 침공으로 인해 미국이 독일을 상대로 선전포고할 가능성이 있다는 (미국이 독일과 직접적으로 전쟁하게 된 것은 진주만 이후 독일군이 먼저 미국을 상대로 선전포고한 이후의 일입니다)경고를 당시 참모총장이었던 프란츠 할더 상급대장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 버렸습니다(<히틀러 최고사령부 1933~1945년>, p. 246 - 247). 그래서 그런 왜곡적인, 장밋빛 환상에 젖은 작전계획이 수립될 수 있었던 것이죠. 시간이 날 때마다 수학 문제를 푸는 것으로 스트레스를 해소하여 "수학 교수"라는 별명이 있었던 할더조차 이럴 정도였으니, 다른 사람들은 무슨 말이 필요하겠습니까?


하여간 이런 과정을 거쳐서, 독일군, 특히 히틀러와 히틀러의 최고사령부는 전쟁이 개시되면 이렇게 나누어서 몰아치면 마치 죽은 나무가 힘없이 쓰러지듯이 소련군이 패퇴할 것으로 오판(그 결과 죽은 나무에 깔려 죽게됩니다)했고
따라서 과도한 목표를 각 집단군에 하달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목표가 달성되지 못할 경우를 대비한 플랜 B조차 독일군에게는 없었습니다. 다들 그 정도 목표를 달성하는 것이 가능의 수준을 넘어, 당연하다고 본 거죠. 그러니 줄기차게 독일군 수뇌진들이 방심했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구요.

결론을 내자면, 작전 계획을 수립함에 있어서 독일군 참모부는 의도적으로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정보만 골라서 수집했고, 그 정보라는 것의 실체도 시원찮았으며, 결정적으로 소련군을 툭 치면 넘어갈 정도의 연약한 군대로 얕잡아보고 있었기에 이 모든 것이 복합되어서 바르바로사 작전의 (지금 시점에서 보면) 말도 안 되는 작전목표라는 결과물이 탄생한 것입니다.

아무튼 이렇게 작전은 수립되었고, 작전 개시일은 5월 15일로 예정되어 있었습니다만, 앞선 글에서 이야기했듯이 무솔리니가 발칸 반도에서 지랄을 쳐하는 바람에 작전 개시가 한 달 가량 뒤로 미루어졌고(이 때의 4주는 정말 소련에겐 신의 기회였습니다. 오죽하면 히틀러가 프리드리히 대왕 그림 앞에서 나에게 그 때의 4주를 돌려달라했을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뇌진은 충분히 겨울이 오기 전에 12주 가량의 시간만 투자하면 우랄 산맥 서쪽의 소련을 전부 집어삼킬 수 있으리라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운명의 날, 1941년 6월 22일이 밝자, 인류 역사상 가장 참혹했던 전쟁인 독소전쟁이 개시됩니다.

후아... 이 정도면 대강 설명이 됬겠죠?

전 바르바로사 작전을 열심히 작성하고 있을 터이니 즐감하시면서 기다려주시길! 잠시 후에 돌아오죠
언제나 그렇듯 질문&지적 대 환영입니다(질문은 댓글이나 쪽지로 해주시면 성심성의껏 저의 얄량한 지식 한도내에서 알려드리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