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병합은 일본에게 사활을 건 문제다."

- 러일전쟁 종전 협상인 포츠머스 회담에서 일본 전권대표 고무라 주타로의 발언"


흔히 한반도의 식민지화를 두고

각종 여러 외세의 침략에 시달려서 그리된거로 아는데


사실 엄청난 착각임.

진짜 진실은

19세기 한반도의 개항 이래

완전 식민지화를 위해 진짜로 침략한 국가는



오직 일본이 유일했고

실제 일본에 의해 한반도는 망하게 되었음.

청나라의 경우

오랜 조공국인 베트남을 프랑스에게 상실하자

청나라 자체도 이미 망조가 든 가운데

국제적 고립을 피하고자 부랴 부랴

과거 조공국을 방어하고자 하였고

청나라와 조선의 관계를 근대적의 의미의 속국이라 주장하며  

내정간섭을 시도한 바 있으나

일본 및 영국의 항의에 결국 철수 했음

청나라 자체는 이미 망하는 중이었으며

본국 자체가 세계의 식민지로 전락해  

영국 미국 독일 프랑스 러시아에 침략 당하는 중이라

물리적으로 한반도를 식민지화 시킬 여력도 없었고

애초 그런 의지도 없었음.

그럼에도 청나라는 역사적, 전통적으로

한반도에 큰 영향을 끼치는

일본에게 있어 식민지화에 방해물이었고

이를 제거하고자 일본의 오랜 준비 끝에

일본의 선제 공격 기습으로 발발한게


청일전쟁.


러시아의 경우


유럽 중앙아시아의 식민지 쟁탈 패배 이후

아시아로 눈을 돌려 중국 시장에 주력을 하였고

만주를 기반으로 중국으로 진출한다는

국가적 목표를 정책으로 운용하였음

때문에 중국 시장 교두보인 만주 방어를 위해

한반도의 중립화가 필요하였고

요동반도 여순항의 확보 이후부터는  

한반도 부동항도 필요 없어짐

러시아의 입장에서 블라디보스톡의  

안전항로를 보장 받는게 최우선 과제였을 뿐임

러시아가 요동의 여순항을 실제 확보한 시점 부터는

우리가 아는 한반도 부동항이라는건

특정 영토가 아니라 사실 부산과 대마도 사이

'대한해협'의 안전을 의미하는 것임

심지어 한반도는 삼면이 바다라

태평양 해군력이 절대열세인

러시아의 방어가 불가능한 지역이라

식민지 의지가 있던 없던 뭘 하던 유지가 애초 불가능한 지역


때문에 아관파천으로 고종황제가

아예 러시아 공사관에서 생활하는

러시아가 한반도를 완전한 통제 상황에서 조차

러시아가 주장한 것은 한반도의 중립화였고

일본, 러시아의 한반도 철수 였던 것

러시아의 요청에 의해 사실상 러시아가 강제해

일본과 이뤄진 니시-로젠 협정으로


한반도는 개항 이래 최초로

한반도에서 외세가 사라진

정확히 말하면 일본이 한반도에서 사라지게 된

 

소중한 7년의 시간을 얻을 수 있었음








그 기간 대한제국 선포를 비롯해

발전소 건설, 전차 개통, 한국인 회사와 은행 건립 ,

초등 중등 근대교육 실시. 근대식 군대 창설,

해외 첩보 수집을 위한 정보기관 '제국익문사' 창설 등


급속한 근대화와 국가정비를 이룸

이에 위기를 느낀 일본은

더이상 기다릴 시간이 없음을 느끼고

'영일동맹'을 체결하여 군사적 우위를 확보한 뒤

러시아를 선제 기습 공격하여 발발한 것이


러일전쟁.


외부적으로 드러난

정치, 외교의 흐름이 이러하다면


사실 더 무서운 것은

일본이 공개적으로 행동하지 않고

비공식적으로 진행한 일본의 식민지화 노력임.

그 스타트는 무려 조선이 처음 개항을 한

강화도 조약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감

( 19세기에 이르면 제국주의가 절정에 달하여

전 세계는 모든 지역이유럽의 식민지가 되었고

오직 청나라, 일본, 조선만 남겨짐.

그 중에 중국은 지구상 마지막 거대 식민지로

열강들의 쟁탈 대상이 됨)


1860년에 이르면 전 세계는 전부  

유럽열강 의 식민지가 된 상황이었고

지구상에 유일하게 식민지가 안된 지역은

동아시아 중국, 한국, 일본 뿐인 상황에서 


일본을 개항한 미국조차

정작 일본을 식민지 대상으로 삼는게 아니라

중국 시장 진출을 위한 교두로 정도로 여기며

스킵했을 정도로 진짜 중요한 식민지는 중국이었고

전 세계 열강이 중국에 집중을 함


당시 이런 정세를 깨달은 일본은

자신들도 식민지를 가지는게 중요함을 알았고

 현실적으로 식민지로

을 수 있는 나라는 한반도가 유일했음


일본의 근대화와 열강 편입을 위해

일본 근대화의 정신적 스승 요시다 쇼인은

정한론을 주장하였음

일본 개항과 근대화의 시작은

"정한론 즉 한반도 식민지화 정책"에서 시작함

일본이 메이지 유신을 진행하며


헌법이나 의회 민주주의 보다

우선적으로 도입한게 바로 군대 징병제였고

상공업 발전이나 은행 보다

우선적으로 도입한게 군수 산업이었던 것은 

 

바로 일본 메이지 유신과 근대화의 이유가

전쟁을 통한 군사국가 근대화

한반도 침략이 목표였기 때문


후발 산업국가로 이런식으로 성장한 사례가

똑같이 유럽에 있었음


"프로이센"


군국주의 국가체제를 통해

타국에 대한 침략과 전쟁으로 국가통합을 이루고

집중된 산업화 발전을 달성한다.


일본이 메이지 유신에서 배운

가장 중요한 국가 모델임.


그리고

그 요시다 쇼인의

대표적인 제자가 이토 히로부미와 도호야마 미쓰루임

안중근에게 처단 당한

이토 히로부미는 워낙 유명함


이토 히로부미가 메이지 유신을 이끈 총리 대신으로

일본의 공개적인 한반도 식민지화의 첨병이었다면


도호야마 미쓰루는

비공식적인 식민지화의 첨병이었음

그가 만든게

무려 강화도 조약 이후 부산에서 바로 창설 된

천우협 (天佑侠)이란 단체임

그 역할은 조선의 개항 이후 조선에 침투하여

상인 단체로 위장한 후

조선의 각종 정보 수집 및 주요 요인의 포섭

그리고 한반도의 혼란을 조장하는 것

그들의 활동과 정보력이

어느 정도인가 하면

이들은 동학 운동까지 개입하였음


동학에 대한 재정 지원을 하고

동학의 농민 봉기를 부추겨서

한반도의 혼란 상황을 만드는것을

실제 목표로 활동하였고

동학운동의 지도층과 접촉도 하였을 정도  


물론 당시 동학 지도부는

당연히 이들의 개입을 거부하였음

동학 자체가 일본을 몰아내자는 반외세 운동인데

애초 용납할 사안도 아니었음.  


그러나

 그런 의지와 사정과는 별개로

조선의 부패와 부조리가 심화되어

동학 농민운동이 대규모로 발발하자

이를 일본에 보고하여

청일전쟁 개전의 빌미로

적시 타이밍에 활용한 것은  

바로 이들 단체의 가장 큰 성과임

 

진짜 무서운 일은 이들이 한번 타켓으로 잡은 사안은

단기적인 활동도 아니라는 것...

동학운동은 결국 실패하였고

이어진 대한제국은 동학운동에 참여한

과거의 동학교도를 역적으로 규정하여

대규모로 탄압했음.


국가에 버림을 받았다고 좌절한 이들을

다시 포섭하여 단체를 만들었으니

구한말 대한제국 멸망에 앞장 선

 

친일 단체 '일진회'

일진회에 과거 동학교도가 다수 참여했단 것은

한반도의 어두운 흑역사인 동시에

 이들의 일본의 무서운 성과이기도 함.



(동학군 장군에서 일진회의 수장인 매국노 친일파로

변신한 이용구, 한일병탄 이후 일본에게

이용 가치를 다해 토사구팽 당하며

비참하게 버려졌고 울화병으로 사망함)


또 다른 놀라운 부분이 요인 포섭으로


이미 진행 중인 한반도 식민지화 이후


그 사업의 최종 목적지인

장기적으로 중국 및 만주 진출을 위해


일본에 망명 온 중국 혁명가들을 지원했고 

심지어 청나라의 멸망을 앞당기고자 

 

중국 혁명을 위한 지원도 진행하였음

"신해혁명' 에도 일본은 개입했음,

중국의 국부인 손문 선생과 장개석과 인연을 만들었을 정도


 두산만의 이런 활동은 2차대전이 끝난 후에도

영향을 크게 끼쳐 일본을 살리는데 작용함


"전 후에는 장제스와의 인연을 이용해

중국이 일본에 배상을 요구하지 않도록 정전협상에도 작용했다."

다시 한반도로 와서

이런식의 막후 활동으로


손문과 장제스와 연줄을 만들었듯

한반도 정치인 김옥균, 박영효 등을

포섭하여 지원하는 치밀함을 보여줌



실제 김옥균의 '갑신정변'을 지원했으며


총리 대신 박영효를 통해

한반도의 정치적 근대화를 위한 개혁을 빌미로

조선의 국왕이 내각에 권력을 일임하는

내정개혁을 꾸준히 요구함은 물론

내각 대신들을 포섭하여 이른바 친일내각을 구성하여

일본에 우호적으로 활동하게 하는 역할도 진행함


이게 말이 안되는게

당시 일본은 자신들 조차

정치근대화는 커녕 아직 헌법 제정도 안했고

내정개혁은 커녕 덴노에게 모든 권력을 준다는

권력집중을 통해 근대화를 추진하던 중임


그런 반면 조선에는 내정개혁을 빌미로

국왕에게 권력을 분산해

친일내각에 나눠주라 요구한 것


심지어 지금 일부 근대사 연구자 중에는

이런 권력분산을 외견상 근대적인

정치시스템 도입처럼 보여지니

그걸 두고 정치 근대화라 평가하는 경우가 있을 정도

물론 연구자 마다 의견차이는 있겠지만

사실 통탄할 노릇.


상인단체로 위장한 천우협은 정보 수집과

한반도 중요 요인 포섭 부분에서 오랫동안 활동했고


나아가 일본의 퇴역한 사무라이들을 모집하여

낭인집단으로 깡패 조직을 운영하기에 이름

현 일본 야쿠자 조직의 원조라 불리워지는

현양사 玄洋社 겐요샤를 1881년 창설함

낭인집단으로 일본의 한반도 병탄에 방해 되는 집단에

테러와 폭력을 진행하는 일을 담당했고

야쿠자 조직으로 일하며 한 그 대표적인 활동이

명성황후 시해 사건임

- 후쿠오카 인근 신사에 있는

120cm의 시퍼런 일본도 칼집에는

'단숨에 전광과 같이 늙은 여우를 찔렀다.'라는

글이 적혀있다.

'늙은 여우'는 명성황후이고,

이 칼로 국모를 시해한 '도 가

쓰아키'라는 낭인 역시 '현양사'소속이다. -


인터넷에서 김구 선생이 일본 상인을

죽인 사건을 두고 

다양한 비아냥과 비판이 오르는데 

사실 이 당시 일본의 상인단을 통한

첩보 활동이 활발했던 건 사실이고 

일본군으로 착각해 증오하는 것도 

이 당시 일어날 법한 사건이기도 함.   

물론 이에 대한 구체적인 증거는 현재 존재하지 않고

남겨진 1차 사료에는 스치다의 특별함을

증명할 어떤 근거도 없으니

 그 심증과 살해의 당위성을 입증할 길은 없음.


이후 상인 집단으로 조선의 내각과 정계 요인

포섭 및 암살 시해를 진행하며

한반도의 혼란을 부추겼고 식민지화가 진행 되자

한반도를 발판으로 곧 진행 될 만주 병탄을 위해

새로 창설 된 단체가 바로 흑룡회임  

천우협 소속으로

현양사가 국내 담당이라면 흑룡회는 해외 담당


(우치다 료헤이 흑룡회 창립자)

 

1901년 대 아시아주의와 천황주의를 표방하고,

흑룡회를 설립하였고, 천우협을 통해 이용구와 결탁하여

일진회를 움직여 한일합방청원운동을 일으켰다.

또한, 중국혁명동맹회를 후원하여

중국 혁명의 배후에서 지대한 역할을 하였다.   

한국에서 1894년 동학혁명이 일어나자

그는 한국으로 건너가서 동학당을 도왔다.

1901년 일본으로 돌아와서 흑룡회를 창립하였는데,

흑룡회는 극우주의단체로서

러시아, 한국, 그리고 만주로 진출할 것을 주장하는 단체였다.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한 후

한국병합에 그의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일진회의 후원자이기도 하였다.


흑룡회라는 이름은 만주 흑룡강까지 정복하자는 뜻에서

흑룡강에서 그 이름을 따왔으며

한반도 내부에서 일진회를 창설하여 친일파를 통해

한반도 병탄에 주력하게 하고

나아가 만주의 병탄을 위한 사전 작업을 담당하였음



최근 드라마 '미스터 썬샤인'에서

바로 이 흑룡회에서 활동한 인물을 표현했다가 

일본 극우단체 미화? 라는 역사논란을 일으켜 

다급하게 그 명칭을 변경하는 헤프닝이 있었음   


이들 단체들은

일본 내부에서 외국 침략에 반대하는

온전적인 일본 정치인을 테러하고 암살하는 동시에

한반도에서 일본의 침략에 방해가 되는

정치인 요인 숙청에 앞장섰으며

일본 군부역시 이들 단체를 이용하여

청일전쟁 러일전쟁 기간

첩보와 공작에 큰 도움을 받으며 지원하고 활용하였음


다시 본문의 첫 문장으로 돌아

(포츠머츠 조약에서 일본 전권 대사 고무라 외상)


일본 외무상이자 전권 대사 고무라 주타로가

러시아와의 협상에서 한반도 문제를 언급하며

"한반도는 일본에게 사활을 건 문제다" 라고 발언한게

무슨 과장법이나 비유로 한게 결코 아님

일본은 1874년 조선의 개항에서 부터

1910년 한반도 병탄에 이르기끼지


장장 40년에 걸쳐

일본의 메이지 유신과 근대화의

사활이 바로 한반도에 걸려있다는


이념적인 신념으로 말그대로 헌신적으로

올인하며 달려들었고

집요하고 치밀하게 식민지화 하기에 노력했었음

 

​실제로 일본의 메이지 유신과정을 보면 

한반도의 존재는 매우 소중했음  


일본은 개항 이후 근대화의 자본금을

한반도의 개항을 통해 해결했는데

영국에서 수입한 면포를 일본을 통해 가공해

다시 조선에 수출하고 조선에서 쌀을 사와

일본 근대화 공장 노동자의 임금을 낮추는 

저가 식료품 공급 수단으로 씀으로써


이른반 영국-일본-한반도 삼각무역 체제로

일본 근대화의 자본과 노동력을 확보해  

일본 메이지 유신과 근대화 성공 기반을 이뤘음 



같은 시기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유출되는

쌀 때문에 방곡령 사건이 벌어지고

농가가 기아에 시달리며 국가적 혼란이 벌어진 것과

전혀 상반되는 현상이기도 함


일본이 프로이센을 모델로 삼아

한반도 식민화에 국가적 총력전을 하며


전쟁 준비와 전쟁 확장을 반복하며

국가 예산의 2/3이상을 수입품의 절반이상을

군수물자 구입과 군비에 투자하는

다소 기형적인 근대화를 이룬것도

모두 이런 이유 때문


일본이 한반도를 병탄하고

다시 만주로 확장하고

다시 중국으로 다시 동남아로

다시 태평양으로 확대하며



이른바 '일본제국 10년 주기 전쟁설' 처럼

국가 전체가 전쟁을 지속하며 멈출 수 없고

또 다른 전쟁을 찾아 계속 지속할 수 밖에 없던 이유도


일본의 근대화 과정에서 성립한 

일본 제국이란 국가의 성격과 본질이

 국가조직자체가 한반도 병탄계획에서 시작하였고

이를 위한 군국주의 체제를 기저에 깔며 시작했기에

사실 일본의 군부파쇼화는 이미 필연적인 수순이었음

 

생각해 보면

영국, 미국, 프랑스. 스페인, 러시아 등등


동시대 전 세계에 제국주의가 유행하며

각지에서 식민사업을 진행한

수 많은 열강과 국가들이 있지만

특정 한 국가를 정복하기 위해

국가의 총력량을 기울이고


민간단체를 비롯한 야쿠자까지 동원하여

첩보와 정보 수집 요인암살 혼란조장 등을 통해

수십년에 걸쳐 집요하고 치밀하게 계획을 실행한 경우는

사실상 일본이 유일함.

참고로 흑룡회를 비롯한 일본 우익 단체들은

일본의 패망 이후 미군정청이

공식적으로 강제해산 시켰으나

그 구성원들은 고스라니

일본 정계, 일본 야쿠자 조직으로 흡수되어

지금도 진행 중인 일본 우경화와

우익단체의 뿌리로 자리잡았음

한반도 식민지화의 이유는

근대화 과정에서 진짜 무서운 적이

누군지 파악도 못하고

똥인지 된장인지 구분 못 하고


일본이 주는 돈과 지원에 놀아나며

그게 근대화의 모델이고 지원인 줄 착각하며

일본에 멍청하게 속아 넘어 간

한국의 지도층, 정치 관료들의 무능함 때문이었고

이 모든 것을 수십년간 집요하고 치밀하게 진행한


일본의 오랜 계획이

그들의 열망과 소망, 노력으로


결국 성공했기 때문임.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