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에게 짖거나 으르렁대지 않고 꼬리를 흔들며 좋아하는 개를 보고 '착하다'고 한다. 이것은 사람 중심적인 언어다. 사람과의 관계를 떼어놓고 말하면 그 개는 '순한' 것이다. 순한 개를 착하다고 표현하는 곳에서, 성깔 있고 까칠한 개는 착하지 않은, 못된 개가 된다. 인류는 오랫동안 순하고 사람을 잘 따르는 개를 '착하다'고 말하며, 늑대라는 늠름하고 야성적인 종의 자손을 사람이 주는 먹이에 의존하도록 진화시켜 왔다.


요즘 사람들은 가격이 싸면 '착한 가격'이라고 표현한다. 이것은 소비자의 시각에서만 그렇다. 생산자가 착한 가격을 맞추기 위해 제 살 깎아먹기 경쟁을 하든, '후려치기'로 하청업체를 울궈 먹든, 노동자의 비용을 제대로 안 쳐주든 말이다. 싼 가격이 착한 가격인 곳에서, 제대로 친 '제값'은 착하지 않은 가격이 된다. 마찬가지로 날씬하면서도 육감적인 몸매를 '착한 몸매'라 하는 곳에서, 평범한 몸매는 착하지 않은 몸매가 된다.


얼마 전 광화문을 지나다 한 무리의 노인들을 보았다. "놀러가다 죽은자 의사자 지정은 개가 웃을 일"이라고 적힌 피켓을 들고 있었다. 피가 거꾸로 솟았다. 물론 세월호 유족들은 의사자 지정을 요구한 적도 없으니 그 피켓의 내용은 처음부터 거짓된 정보에 바탕한 것이다. 어찌되었건, 어디서 후원을 받고 나왔건, 300여명의 아이들이 국가의 방조에 의해 목숨을 잃은 참혹한 사건이 있었고 그 슬픈 부모들이 있는 곳에서 그런 피켓을 들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 늙은 자들을 혐오하기에 충분했다. 나는 그 순간 저런 자들의 말을 잘 들으라고, 저런 자들에게 자리를 양보하라고 가르쳐온 이 나라의 성인 중 하나로서 무척 부끄러웠다. 그렇게 했던 아이들은 '착하다'는 말을 들었을 것이다. 저런 악한 자들의 말을 잘 듣는 아이는 과연 착한 것일까?


언어는 사고를 프레이밍framing한다. 우리가 쓰는 언어는 우리 내부의 프레임을 반영하기도 하지만, 언어로 인해 프레임이 무의식적으로 들어서기도 하는 것이다. 정치권에서는 프레이밍을 교묘하게 이용한다. 보수파는 '세금폭탄'이라는 자극적인 말을 퍼뜨려 공포감을 조성하고 본질을 왜곡한다. '귀족노조'라는 말을 만들어 그들의 요구를 배부른 소리로 몰아가기도 한다. 지난 서울시장 선거에선 '농약급식'이란 말을 퍼뜨렸다. 아이들 먹는 급식 앞에 농약을 갖다 붙이다니, 고약하다. 그렇게 정치적 목적에 의해 나온 말을, 진보 언론이든 보수 언론이든 그대로 받아 쓴다. 그 논란에 걸맞은 이름은 '급식 네거티브' 정도가 될 것이었다. 보수측은 언제나 한발 앞서 기민하게 언어를 프레이밍해 내어놓고, 반대세력은 그것을 규탄하느라 힘을 빼앗긴다. 같은 언어를 써서 규탄하는 것 또한 프레임에 휘말리는 짓이다.


언어를 쉽게 여기면 안 된다. 대선 결과처럼 51대 49로 팽팽하게 나뉜 이 나라 국민들은 서로 상대편을 '종북좌파', '수구꼴통'이란 프레임으로 바라보기 때문에 이 나라엔 제대로 된 보수도 제대로 된 진보도 눈에 보이지 않게 된다. 언어와 프레임에 대한 고민은 중요하다.


privatization이라는 단어는 '민영화'가 맞을까, '사영화'가 맞을까? 의료 민영화인가, 의료 사영화인가?


'과거사 청산'을 말할 때, 그것은 정말로 '과거사'일까? "모든 역사는 현대사다"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거기서 비롯된 현재의 수많은 병폐가 상존하는데 그것이 정말로 '과거사'일까? '과거사'라는 말을 쓰는 순간 '과거에 연연한다', '과거에 발목 잡힌다'라는, 진보가 아닌 퇴보의 언어적 프레임 안으로 걸어 들어가게 된다. '과거사' 문제는 '친일매국재산 환수', '왜곡·은폐 역사 바로잡기' 등 더 정확하고 구체적인 표현을 쓰는 것이 오해를 없앤다고 본다.


이 나라의 대통령은 지난 3월 '규제는 암덩어리'라는 표현을 써가며 '규제는 속히 척결해야 할 무언가'라는 프레임을 내세웠다. 며칠 전에도 '규제, 눈 딱 감고 화끈하게 풀어라'라고 주문했다. 규제는 암덩어리가 아니다. 몇몇 공룡기업이 산업을 좌지우지하고 중소기업과 구멍가게들까지 무너뜨리는 이 나라에서, 기업에 대한 규제는 '고삐'이자 '보루'이며 '안전망'이다. 안전망이 제대로 작동하는 나라라면 300명 넘는 아이들이 물에 잠겨 죽어가는 걸 눈앞에서 보게 되지 않았을 것이다.


프레임은 지금 든 몇몇 예보다 훨씬 깊은 층위의 문제이고 쉽게 짚어내고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한쪽 진영이 내어놓는 프레임에 다른 진영은 무기력하기 짝이 없게도 매번 휘말려 버리는 걸 지켜만 보자니 또 피가 거꾸로 솟아서 얄팍하게나마 써보았다. (이 나라엔 야당이란 게 있기는 한 건가?!)


마지막으로 프레이밍과 관련한 짧은 에피소드 하나:
올 초에 변모라는 사람이 보수대연합 대회 후 뒤풀이 장소였던 고깃집에서 제대로 계산을 하지 않은 채 가버린 사건이 있었다. 이것을 두고 '고깃집 계산 실랑이'라고 이름 붙일 수도 있었다. 그런데 어느 기사에선가 이런 표현을 썼다. "변XX와 600인의 고기도둑". 너무나 강렬해서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그렇지. 고깃값을 떼어먹고도 뻔뻔했던 그 양반의 태도를 생각해 보았을 때 그것은 도둑질의 프레임으로 바라보는 게 맞았다. 방금 포털에서 변모씨의 이름을 쳐봤더니 여전히 저 표현이 자동완성 되는구나. 프레이밍의 힘은 강력하다. 적어도 변모 씨의 이름으로 식당 단체 예약은 평생 힘들 것이다.




프레이밍, 일명 와꾸짜기라고 합니다.
대다수가 동그라미를 생각하고 있는 데, 숙련된 조교가 사각형 냉장고를 하나 가져옵니다.
그리고는 냉장고에 코끼리 집어 넣는 법을 가지고 몇날 몇일 떠들어 댑니다.
얼마 후 냉장고는 사라지고 우리는 코끼리 똥을 치우게 됩니다.